1. 개요
東方植民運動 | Ostsiedlung중세에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어권 민족들이 당시 인구 희박지였던 동유럽으로 이주해가던 물결을 말한다. 그 영향권은 엘베강 동쪽, 즉 구 동독 지역을 비롯해 폴란드 서부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주, 멀리는 트란실바니아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까지 미쳤다.[1] 그래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 초기와 후기를 비교할 때 서남부 일대의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이나 네덜란드, 스위스는 아예 따로 놀게 되었고 알자스-로렌과 부르군트는 프랑스 왕국에 귀속되었지만 이러한 영토 손실을 동방식민운동으로 메꾸면서 점차적으로 동쪽으로 이동한 모양새가 되었다. 참고
2. 과정
원래 엘베 강 이동의 중부유럽 및 동유럽 지역은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게르만족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며 슬라브족은 지금의 러시아나 캅카스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4세기 경부터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게르만족이 더 살기 좋은 옛 로마 제국의 영토로 이주했고 여기에 훈족이 동쪽에서 쳐들어오면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본격적으로 발생하여 동유럽의 게르만족이 대거 서쪽으로 이동했다.이에 게르만족 동쪽에 살던 슬라브족 또한 훈족의 위협을 피할 겸 더 살기 좋은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떠나 비어 있는 땅으로 대규모로 이주했다. 이에 따라 6세기 이후 엘베강을 경계로 서쪽의 서유럽은 게르만족, 동쪽의 중부유럽 및 동유럽은 슬라브족이 주로 거주하게 되었다. 이런 민족 분포는 중세 전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2.1. 엘베강 유역
동방식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성 로마 제국 이전 프랑크 왕국 시기부터 엘베강 근처에는 '벤드족'이라는 명칭을 가진 슬라브족이 거주했다. 이들 벤드족은 국가와 같은 거대한 단위의 정치적 결성체를 만드는 데는 실패한 채로 부족 단위의 생활을 영위했는데 12세기 중반에 이르자 이들 사이에서도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이를 이용하여 근방에 자리잡던 '포메른 공국'이 세력을 확장했다.이어서 12세기 후반 '북방 십자군'이라는 이름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이들을 정복했다.[2] 마침내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브란덴부르크, 메클렌부르크, 포메른으로 나뉘어 신성 로마 제국에 최종적으로 편입되었다. 메클렌부르크의 슬라브인 족장이었던 오보드리텐 가문은 20세기 초까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를 다스렸다.
2.2. 보헤미아 지역
한편 13세기 보헤미아 공국을 다스리던 프르셰미슬 왕조는 왕국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왕국에 독일인 이주민을 대거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보헤미아 왕국으로 이주한 독일인은 슐레지엔 독일인 및 주데텐란트 독일인의 기원이 되었다.2.3. 트란실바니아 지역
자세한 내용은 독일계 루마니아인 문서 참고하십시오.비슷한 시기(13세기)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언드라시 2세는 왕국 남동부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개발을 위해 독일인 이주민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트란실바니아 독일인이란 이름으로 트란실바니아 지역(주로 왈라키아와 인접한 지역 일대)의 독일화를 진행했다.
2.4. 발트해 동남부 연안
비슷한 시기에 북방 십자군의 또 다른 갈래였던 튜튼 기사단이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의 요청으로 오늘날 폴란드 동북부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 일대인 프로이센 지방에 진출해 그 곳의 발트계 원주민들을 정복하였으며 1237년에는 발트3국 일대의 정복에 나선 또 다른 십자군인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의 합병을 통하여 오늘날의 그단스크부터 에스토니아 일대까지 이어지는 독일 기사단국을 형성했다.3. 이후
동부 유럽을 점령한 게르만족 지배자들은 자신의 영지에 적극적으로 독일인을 이주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이주한 독일인들에게는 당연히 기존 원주민과 비교해서 몇 가지 특권이 주어졌다. 오늘날로 따지면 '마을의 유지'와 같은 지위가 이주해 온 독일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기본이었고 법도 기존의 게르만 법만을 주로 인정해 주었으며 세금도 후하게 매겨주었다. 결과적으로 기존 원주민이었던 슬라브계 종족들과 발트계 종족들은 빠르게 게르만족에 동화되었다.14세기에 이르면 전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흑사병 덕분에 잠시 이주 현상이 주춤했지만 전반적으로는 꾸준히 독일인들의 이주가 진행되었다. 이렇게 거의 400년~500년 가까이 진행된 동방식민운동은 17세기~18세기 무렵 30년 전쟁을 비롯해 흉년, 전염병과 같은 각종 재해가 독일 본토를 덮치면서 이로 인해 독일 본토의 인구가 급감함에 따라 막을 내렸다.
다만 동방식민운동이 종료된 후에도 당국이 독일계 주민들의 이주를 장려하는 일은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와 대튀르크 전쟁으로 초토화된 헝가리 왕국을 복구하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에 반항적인 헝가리인을 견제하기 위해 옛 헝가리 왕국 영토 일대[3]에 독일인의 이주를 장려했다.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나 부코비나 공국 등 합스부르크 왕조가 새로 얻은 동북부 영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제국도 로마노프 왕조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유로 독일인의 이주를 장려하여 독일인들은 우크라이나와 볼가 강 유역, 멀리는 도나우 강 하류와 캅카스까지 이주하기에 이른다. 이쪽에 대해서는 독일계 러시아인 항목에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러시아로 이주한 독일인들의 후손들은 소련 치하에서 자치를 누렸지만 독소전쟁 발발 이후 자치권을 빼앗기고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일대로 강제로 이주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3.1. 현대의 몰락
이 때 동유럽에 정착한 독일인 이주민은 1940년대까지 700년 넘게 중동부 유럽 각국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독일인에 동화되어 독일화된 슬라브인이나 발트인의 숫자도 많아서 2차 대전 전 오버슐레지엔이나 동프로이센 등 독일어권 동부 출신자 가운데는 이름(First name)이 독일식이고 모국어도 독일어인데 성씨는 폴란드 - 슬라브계인 경우도 종종 보였다. 그 예로 발터 노보트니,[4]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5] 등이 있다.훗날 아돌프 히틀러가 동방식민운동에서 힌트를 얻어 19세기 이후 독일 내 국수주의자들의 기조를 밀고 나가 대독일주의와 레벤스라움이라는 개념을 창설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6] 그렇지만 독일은 패망했고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의 동유럽 각국 정부는 자국 내 독일계 국민들이 침략의 명분이 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너나할 것 없이 독일인들을 추방했다. 특히 다른 곳은 모를까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주데텐란트에 살던 독일인들이 독일과의 합병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기에 타지에서는 그냥 쫓겨나고 말았지만 여기서는 독일인에 대한 학살 및 린치도 벌어졌다. 예외적으로 루마니아의 경우는 딱히 독일에 대한 증오가 없고 영토분쟁의 소지도 없어서인지 추방령을 내리지 않았다. 때문에 공산 정권 치하에서도 꽤 많은 독일계가 트란실바니아에 남아서 거주했지만, 민주화 이후 대부분의 독일계 인구가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 부유한 독일로 재이주해 독일계 인구가 급감했다.
결국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에 거주하던 천만이 넘는 독일계 주민들이 추방되어 중세 이래 천년 가까이 진행된 동방 식민 운동으로 넓힌 영토가 현재는 반도 안 남았다.[7] 현재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과 슈체친에는 극소수의 독일인만이 잔존한다. 다만 동방식민운동 이전의 독일 영토는 엘베 강 서쪽 뿐이었고 슈체친을 제외한 오데르-나이세 선 서쪽의 영토는 보존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동방식민운동 이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4. 여담
- 현대 독일 동부와 폴란드 서부의 주요 도시들은 전부 동방식민 과정에서 개발되었는데 대표적으로 베를린, 슈체친, 드레스덴, 브로츠와프, 그라이프스발트, 뤼베크 등이 그 사례이다. 이들 지역에는 원래 슬라브인이 살았지만 게르만인이 이주하면서 도시로 급성장했다.
- 독일과 폴란드 사이 영토 분쟁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동독은 1950년대에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했지만 서독은 통일 직전까지[8] 전쟁으로 상실한 지역들을 미수복지구로 취급했는데 그 근거 중 하나가 이 지역은 근대 팽창 과정에서 점령한 지역이 아니라 이미 700년도 더 전인 12세기~13세기부터 독일인들이 동방식민운동으로 개척한 역사적인 본토라는 이유였다.
- 이 시기 동유럽으로 이주한 독일인들은 정말 독일 전역에서 이주했다. 심지어 오늘날의 네덜란드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도 있는데 당시 네덜란드와 독일(신성로마제국)은 분화되지 않았다. 이 당시에 네덜란드는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고 독일 본토와는 언어가 다르기는 했다지만[9] 네덜란드인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희미했던 시절이었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거의 대부분이 거의 비슷한 위도선상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즉, 쉽게 말해 작센[10]과 같이 기존 독일 북부에 거주하던 사람은 동프로이센, 포메른, 메클렌부르크와 같은 개척지 내 북부 지역으로 이주했고 반대로 바이에른, 슈바벤과 같이 기존 독일 내 남부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은 슐레지엔과 같은 개척지 내 남부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이 영향은 독일 동부 지역 방언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11]
- 독일인의 이주를 장려한 합스부르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사례, 그리고 '민족'이라는 관념이 희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근거로 몇몇 연구자들은 19세기~20세기까지도 동방식민운동이 사실상 지속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어쨌든 현대적 관점으로 따진 '게르만족(=독일인)'의 동방식민운동은 17세기~18세기 무렵까지로 여겨진다.
[1] 참고로 러시아 볼가강 유역으로 이주한 건 한참 후인 예카테리나 2세 때였다.[2] 상술했듯 벤드족이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을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대목으로 기독교 포교가 영토 확장의 핑계였음을 알 수 있다.[3] 주로 남부의 보이보디나 지역.[4] 체코식 성씨다. 오스트리아 출신이지만 그의 고향 마을은 체코와의 국경이다.[5] 혈통 문제가 좀 복잡한 인물이다.[6]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도 이 동방식민운동의 연장선상에 포함되어 있다.[7] 그래도 수도인 베를린은 살아남았다.[8] 다만 실질적으로는 1970년대 동방정책 당시 상실한 구 프로이센 영토를 포기했다.[9] 사실 독일 본토도 같은 독일어라지만 실상 지역에 따라 의사소통이 원활치 않은 경우가 많았고 현재에도 알레만어나 오스트로바이에른어와 펜실베이니아 독일어처럼 독일어의 방언으로 분류되도 따로 교육받지 않았을 경우에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방언들이 다수 남아 있다.[10] 오늘날의 니더작센 주 일대. 현재 독일의 작센 주는 오버작센으로 원래 슬라브족 거주지였다가 동방식민운동으로 독일화한 지역이다.[11] 비슷한 사례로 훗날 구한말 시기 간도를 개척한 조선인들도 대다수가 평안도에서 랴오닝성으로 이주하고 함경도에서 연변이나 지린성으로 이주하는 등 같은 경도선상의 북쪽으로 이주해나갔다. 랴오닝성 출신 조선족이 서북 방언으로 말하고 연변 출신 조선족이 동북 방언 혹은 육진 방언으로 말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