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테오도어 모렐 Theodor Morell | |
본명 | 테오도어 길베르트 모렐 Theodor Gilbert Morell |
출생 | 1886년 7월 22일 |
독일 제국 헤센 대공국 뮌젠버그 | |
사망 | 1948년 5월 26일(향년 61세) |
연합군 점령하 독일 바이에른 주 테게른제 | |
국적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조제프 푸리에 대학교 (약학 / 학사) 파리 대학교 (약학 / 학사) 뮌헨 대학교 (의학 / 박사) |
직업 | 의사 |
배우자 | 한느로레 모렐(1920년 결혼) |
서훈 내역 | 나치당 금배지 전공십자장 |
1. 개요
처음에 든 생각은… 한 사람에게 그렇게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위험한 약들을 복용하게 했다는 게 매우 큰 충격이었어요. 거기서 또 한 가지 놀라웠던 건 너무 이상하고 수상한 약들이 있다는 거예요. 요즘 사람들한테 그런 주사를 놓겠다고 하면 절대 안 맞죠!
바스 대학교 생화학, 약학박사. 세라 베일리 교수와 롤랜드 교수
아돌프 히틀러의 주치의. 그리고 제대로 된 의학박사 학위와 의사 면허가 있는데도 히틀러를 마약 중독자로 만든 이상한 의사로 유명하다. 정치적인 욕심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다른 나치 간부들에게 경원시당하면서도 히틀러에게서는 크게 신임받았고, 이 때문에 히틀러가 자살하기 고작 며칠 전까지 그를 돌봤을 정도의 최측근이었다. 하지만 행실은 나치와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물론 히틀러와의 관계를 이용해 권력을 누리고 뇌물을 받는 비리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거야 수단이 히틀러라는 것만 빼면 어느 집단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고, 홀로코스트나 인체실험 같은 '나치스러운' 막장 전쟁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다.바스 대학교 생화학, 약학박사. 세라 베일리 교수와 롤랜드 교수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모렐은 초등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르노블과 파리의 산부인과에서 공부해서 1913년에 박사 학위를 땄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독일 제국군에 육군 군의관으로 종군했으며, 종전 후 베를린에서 '구식 치료법에 얽매이지 않는 의사'로 명성을 얻었고, 페르시아의 샤 레자 샤 팔라비나 루마니아의 페르디난드 1세 국왕이 그를 주치의로 두길 바랐지만 거절했다. 모렐은 후일의 노벨상 수상자 일리야 메치니코프에게 배움을 받기도 하고, 여러 대학의 교수로 활동했으며, 규모가 큰 제약회사의 대주주였고, 1936년에는 베를린의 번화가 쿠담 거리에서 잘 나가는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요약하면 평범한 의사의 출세 이야기이겠지만, 어느 날 그에게 아주 특별한 인생의 전환점이 생겼다.2.2. 나치당 활동
모렐은 1933년에 나치당에 입당했다. 입당 계기도 딱히 나치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그가 운영하던 병원이 테러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오인당해 험악한 페인트 낙서가 병원 벽을 뒤덮었고, 이 때문에 모렐은 보신책으로 나치당에 입당했다.[1] 그 후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을 치료해주면서 인맥을 쌓기 시작, 호프만과 에바 브라운에게 히틀러의 주치의 자리를 소개받는다. 당시 히틀러는 피부 발진과 위장 가스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모렐은 인체에 유익한 치료용 대장균인 뮤타플로(Mutaflor)를 사용하여 히틀러를 치료하는 데에 성공했다. 모렐은 이때 얻은 신임을 바탕으로 해, 1936년 12월 31일 히틀러의 공식적인 주치의로 임명되었다.대다수의 나치 지도자들은 그를 높게 평가했으나, 헤르만 괴링과 하인리히 힘러는 그가 돌팔이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괴링이 당시 이미 모르핀에 찌든 약물중독자가 되어서 한창 정신나간 짓거리들을 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파했다. 어찌 보면 자신이 마약을 하고 있으니 역설적으로 모렐의 처방이 사짜라는걸 간파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때문인지 모렐이 계급을 희망했음에도 히틀러는 끝끝내 그에게 군 계급을 수여하지 않았다.[2] 궁여지책으로 녹색으로 제복 비슷한 걸 만들어 입고 다녔지만 비웃음만 샀다고.
한편 후술할 비정상적인 처방전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처방을 내린 적도 있다. 그 예로 나치당 치하 체코슬로바키아의 실권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체코에서 영국의 지원을 받은 체코 현지 공작원에게 피습당해 심한 패혈증으로 중태에 빠지자, 모렐은 당시 독일에서 개발한 항생제인 술폰아미드의 처방을 권했다. 당시 독일에선 페니실린을 구할 수 없어서 대체제로 술폰아미드를 택한 것이다. 전쟁중이라 수입도 불가능한 데다 당시에는 기술의 미비로 페니실린의 개발지인 영국 본토에서도 페니실린은 구하기 힘들었다. 현재에도 패혈증이 확실한 중환자에게 각종 항생제를 때려부어 수술을 진행하고 경과를 지켜보는 만큼, 이 처방 자체는 의외겠지만 흠잡을 데가 없는 합리적인 처방이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의 치료를 맡았던 카를 게프하르트는 이 처방을 무시했고, 결국 하이드리히는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하이드리히를 껄끄럽게 여긴 힘러가 의사들을 매수해서 하이드리히를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다.[3]
모렐은 이후 친위대 출신의 다른 주치의인 카를 브란트와 경쟁했는데, 히틀러는 모렐의 편을 자주 들어주었다. 얼마나 심했냐면 1944년 10월 5일에 카를 브란트가 모렐의 약 처방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내자 히틀러는 이 의견서를 보고 역으로 카를 브란트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을 정도였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은 아예 총통부 의사직에서 해임당하게 되었고, 전후 나치의 장애인 절멸 계획에 동참하며 온갖 비인도적인 인체실험을 한 혐의로 처형된다.
이렇게 모렐은 히틀러 옆에서 치료 활동을 했고, 1944년에 7월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에도 모렐은 각종 약을 써서 히틀러의 기운을 차리게 했다. 암살 사건 이후 히틀러는 여동생 파울라 같은 일부를 제외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의심[4]했는데, 모렐도 의심받지 않은 예외 중 한 명이었다. 최측근인 괴링이나 힘러같은 인물도 이미 히틀러에게 반역에 가까운 행동을 한 상황에서, 정치적 욕심을 일절 보이지 않고 자기 건강만을 충실히 책임지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히틀러가 최후를 맞이하기 전까지 벙커에 있던 모렐이지만 언제까지 있었는지는 서술이 엇갈린다.
이언 커쇼의 책에서는 모렐이 결국 히틀러의 분노를 사 도망쳤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945년 4월 21일 모렐은 서재에 있던 히틀러가 기운 없이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모렐은 인체에 무해한 포도당 주사를 히틀러에게 놓으려 했지만, 히틀러는 갑자기 화를 내면서 자신을 모르핀으로 중독시킬 셈이냐며 펄펄 뛰었다. 그러면서 장군들이 자기한테 약을 먹여서 베르히테스가덴[5]으로 실어 가고 싶어하는지 자기도 안다고 했다. "자네는 나를 미치광이 취급하는 건가?" 하고 고함을 질렀다. 모렐이 히틀러에게 처방한 약이 객관적인 효과는 몰라도 심적으로는 큰 의지가 되었던 모양인데, 히틀러는 결국 그렇게 의지했던 모렐을 이제는 쏴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모렐은 벌벌 떨면서 도망갔다고 한다.[6]
전쟁 후반부에 모렐의 역할은 사실상 오이코달, 메스암페타민, 모르핀 등을 주사하여 패전 직전 궁지의 몰린 히틀러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이었으나 연합국의 폭격으로 이러한 약물들의 공급이 끊기고 모렐이 노환으로 주사조차 제대로 놓지 못하는 신세가 되자 필요가 없어져 내쳤다는 해석도 있다. 화를 내며 총으로 위협해 쫓아냈다는 내용은 위와 동일하다.[7]
반면 요아힘 C. 페스트가 쓴 히틀러 평전에 의하면 1945년 4월 20일 히틀러는 이제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며 모렐을 총통 방공호에서 내보냈다고 하며, 여러 기록을 종합해 봤을 때 모렐이 히틀러의 허락을 받아 베를린을 떠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히틀러의 경호원이었던 하인츠 링게의 회고에 따르면, 베를린 전투가 한창일 때 모렐이 울면서 히틀러를 찾아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하자 히틀러가 모렐을 위로하며 베를린을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2.3. 종전 이후
나치가 몰락하면서 독일에서 마지막 비행기를 타려던 모렐은 미합중국 육군에게 체포되었으나, 처벌은 커녕 석방되어 집으로 돌려보내졌다.왜냐하면, 우선 모렐은 반인륜적인 범죄에 관여한 적이 없었다. 나치에는 충성했지만 한 일이라고는 히틀러의 건강을
사실 연합군 입장에선, 모렐을 억지로 법정에 세워 봤자 이득 볼 부분이 없었을 것이다. 정치적·군사적 권력이 전혀 없는 일개 주치의인 모렐이 증언할 만한 것이라곤 히틀러의 사생활같이 연합군에겐 영양가 제로인 정보들 뿐이다. 게다가 히틀러는 항목에서도 나와 있듯이, 사석에서는 말단 병사의 이름 하나하나를 다 외우고 있고, 주변인들이 자신의 직함인 총통으로 자신을 부르는 건 너무 딱딱하다며 편하게 '히틀러 씨'라고 불러줄 것을 요구한 데다가, 동물을 좋아해서 근대 국가들 중 최초로 동물보호법을 제정할 정도로 '인심 좋은 동네 삼촌'이었다. 히틀러와 나치당의 이미지를 최대한 나쁘게 조성해 놓아야 전쟁 범죄를 물을 명분이 제대로 서는 연합군 입장에서는 이런 정보밖에 모르는 모렐은 법정 증인으로서는 쓸모없었다.
그리고 모렐은 3년 뒤에 고향 테게른제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세상 그 누구보다 히틀러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음에도 제대로 천수를 누리고 갔다. 트라우들 융에처럼 히틀러의 주변인이되 정치나 군사엔 일절 관여하지 않은 인물[8]들은 이렇게 평온한 최후를 맞을 수 있었다.
연합군의 처벌을 피하고자 도피하려 했지만 체포당한 덕에 역설적으로 무고함을 입증받아 자유로운 말년을 보내게 된 아이러니의 산 증인인 셈. 사실 위에 나왔듯이 건강 문제 때문에 풀어준 거라서 만약 건강 문제가 없었다면 루돌프 헤스처럼 무죄 여부를 떠나서 통제 받는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전범으로 판정되어 징역을 살던 다른 나치당 인사들도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가석방해 줬고 이들 또한 모렐과 마찬가지로 얼마 안 가 지병으로 숨졌다.
3. 그가 히틀러에게 처방했던 약
모렐은 히틀러에게 전쟁 기간 동안 모두 90가지의 약을 처방했고 하루에 28가지 씩의 알약과 물약, 주사약을 처방했다. 하도 주사를 찔러대다 보니 모렐의 진료 기록에는 주사바늘이 휘었다는 기록[9]도 간간히 나온다.아래에 나오는 약물의 리스트는 그가 히틀러에게 처방한 약들이다. 처방의 특징과 효과를 간단히 살펴보면 한 마디로 이독제독이라고 할 수 있다. 업 계열의 마약과 다운 계열의 마약을 같이, 그것도 장기투여한 점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이 경우 진통 효과와 각성 효과가 동시에 나타나며, 환각 같은 즉각적인 부작용은 드물었을 것이다.[10] 아울러 필로폰 때문에 일시적으로 머리가 맑아지고 활기가 넘쳤을 것이다. 또한 캐모마일과 술폰아미드, 효소 등 일부를 빼면 하나같이 일시적으로 괜찮아 보일 뿐인, 잠깐의 효과만 내는 땜빵에 불과한 것들이며 그 대가로 장기적으로는 더 안 좋은 효과를 가져다주는 사실상 독약들이었다. 심지어 일부는 양을 조금만 더 늘렸다면 바로 죽어도 할 말 없을 정도로 지독한 약들이었다.
즉, 테오도어 모렐의 의사로써 강점은 단기간에 확실한 효과가 나타나는 처방이었는데, 단기적으로 굉장히 효과가 좋을지는 몰라도 단점이 큰데, 장기복용시 부작용도 그만큼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부작용이 어마어마한 약인데, 히틀러는 타고난 귀차니즘과 충동적 기질 때문에 이 약이 어떤 약들이고 어떤 효과가 있는지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았고, 들으려고도 안 했다. 결과적으로 히틀러는 부작용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약에 가까운 것을 장기투여했으니, 서서히 몸이 망가져갔던 것이다.
- 브롬화칼륨: 1800년대부터 경련 억제제와 진정제로 쓰였다. 허나 지금은 동물병원의 개와 고양이를 위한 약품으로 쓴다. 테오도어 모렐이 의대 공부 시에 썼을 약품이다. 현재 동물에겐 전신 강직성 발작이 불응성일 때 페노바비탈과 병용하는 식으로 쓰인다. 약의 유행이나 안정적인 신물질 개발로 인해 쓰이지 않는 것이지 처방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여기긴 힘들며, 1940년대인 당시에는 나름 합리적인 처방이었다.
- 호미카(마전자): 학명 Strychnos nux-vomica. 인도산 교목으로 종자에 맹독성 알칼로이드인 스트리크닌(strychnine)을 대량 함유하고 있다. 스트리크닌은 아래에 소개된 아트로핀(벨라돈나)과 마찬가지로 아세틸콜린의 신호 전달을 막기 때문에 강한 신경 흥분의 효과를 가지고 있으나 비장과 위장이 상하는 부작용이 있으며, 용량 계산을 조금만 잘못 해도 그 무서운 파상풍보다도 몇 배는 심한 근육경련을 포함한 극심한 발작을 겪다 고통스럽게 사망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는 더 이상 약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아트로핀은 그나마 독가스를 흡입했을 때 응급치료용으로 쓰이기라도 하지만, 스트리크닌은 의료용으로의 가치가 전혀 없으며 약전에서 삭제된 지 오래이다.
- 바르비탈나트륨: 진정제 및 수면제이다. 단, 의존성과 내성이 있는 향정신성의약품이고, 호흡 곤란 또는 쇼크 시에 투입하면 위험하며 과량 복용 시 사망할 수 있다. 영화나 소설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죽었다'고 할 때의 수면제가 바로 이 약이고, 미국에서 약물주사형을 집행할 때 쓰는 약도 이것이다[11]. 그러나 당시엔 바르비탈을 대체할 수면제는 존재하지 않았고, 현대에 주로 쓰이는 벤조디아제핀 계열은 히틀러가 죽은 지 한참 지나 탄생했기 때문에 위험성이 있긴 했지만 합리적인 처방이기는 했다.
- 시네프린: 광귤나무 열매에서 추출되는 물질이다. 한국에선 식욕 억제 효과 때문에 인기가 높지만, 신경계에 작용하는 약물이므로 부작용이 심하고 과다 복용 시 사망할 수도 있다. 그 탓에 일각에서는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 캐모마일: 쉽게 말하면 국화차로 한국에서도 규모가 제법 있는 카페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 사람이 히틀러에게 처방한 약물 중 몇 안 되는 멀쩡하고 안전한 성분이다.
- 테스토스테론: 남성 호르몬의 일종. 가장 흔히 알려진 남성호르몬이기도 하다. 현대에도 도핑을 위해 사용되는 물질인데, 부작용만큼 효과도 쩔어주기 때문에 맞는 것뿐, 일반적으로는 투여해서 좋을 거 하나 없는 약품이다. 이유없이 남성 호르몬을 맞거나 복용할 때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부작용이 고환 축소이다. 고환의 역할이 줄어드니 굳이 클 필요가 없기 때문. 음모론에서 종종 나오는 "히틀러는 남성 호르몬 맞은 여자다"라는 헛소문이 이 처방 때문일지도 모른다.[12]
- 페르페나진: 조현병 치료제, 구토 치료제. 과다 복용 시 부작용으로 파킨슨병이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히틀러가 말년에 파킨슨병 징후를 보인 것이 이것 때문이다.
- 카페인: 정신을 각성시키고 피로를 가시게 해준다. 현대에 흔히 마시는 커피와 에너지 드링크에 들어 있다. 즉 그나마 정상적인 약품 중 하나. 그러나 너무 많이 섭취하면 카페인 의존증에 걸려 건강에 영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피로 정도를 착각하게 만들어 몸에 무리를 줄 수도 있다. 상기한 대로 재사용한 주삿바늘로 다량 주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 벨라돈나: 학명은 Atropa belladonna, 그리고 조금 더 대중적인 이름으로는 Deadly Nightshade(죽음의 가지과)로 알려져 있다. 해당 식물의 상위 분류가 가지과(Solanaceae)인데, 가지과를 부르는 다른 용어가 Nightshades이다.
관목의 일종으로 열매를 3알 이상 먹으면 죽을 수 있다. 심박 급속증, 환각, 조급함, 균형 상실, 변비, 굵은 목소리, 목의 건조를 일으킬 수 있다. 요즘에는 경련 완화제인 아트로핀의 원료로 경작하나, 종종 마약으로도 쓰인다. 상기한대로 과복용시 죽음에 이를수 있는데 이 식물과 열매가 겉보기에는 블루베리와 흡사해서 잘못 먹었다 돌아올수 없는길을 가는 초보 모험가나 등반가들이 있는데 미국에서 유복한 가정에 명문대생임에도 야생의 생활을 선택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1992년 사망해 유명세를 탔던 크리스 맥캔들리스의 유력 사인도 벨라돈나를 블루베리로 착각해서 먹은걸로 추정하고 있다. - 아트로핀: 벨라돈나의 주된 유효성분. 유독성 알칼로이드로 경련 완화 효과가 있다. 유독하지만 오늘날은 독가스 해독제로 쓰인다. 한국군이 쓰는 신경작용제 해독제인 KMARK-1은 이것과 옥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애초에 유독성이 있기 때문에[13] 다량을 사용할 경우 위험하다.[14]
- 대장균: 뮤타플로(Mutaflor)라는 치료용 대장균으로, 히틀러의 위장장애와 복부팽만을 치료하기 위해 처방했다. E.coli Nissle 1917 참고. 대장균이라는 말에 뜨악할 수 있지만 장내 세균총의 균형이 깨진 환자들에게 자주 처방될 만큼 안전성과 효과가 입증된 유익한 균이다. 이것도 모렐의 얼마 안 되는 정상적인 처방 중 하나다. 히틀러가 모렐에게 처음 받은 치료가 이 대장균 요법인데, 그때까지 히틀러가 거쳐간 다른 의사들이 그의 만성 장질환을 단순 진통제 등으로 치료하려고 해 당장 복통만 잠깐 가라앉을 뿐 실질적인 효과가 없었던 반면, 모렐이 처방해 준 대장균은 실제로 장내 미생물 균형을 맞춰주어 제대로 된 치료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이후부터 모렐을 신임하게 되었다.
- 디히드로코데인: 현재도 임상이나 외래에서 자주 쓰이는 진해제이나 오피오이드 수용체에 작용하는 마약이기 때문에 장기간 투여시 중독될 수 있다. 그래도 옥시코돈이나 모르핀 같은 약물보다 마약성 효과가 훨씬 약하기 때문에 현재도 흔히 쓰이며, 한외마약으로 분류되는 기침약에도 소량(5mg) 들어간다.
- 술폰아미드: 종합 항생제의 일종으로 현대에는 다른 항생제로 대체되기는 했지만, 가루 형태라 쓰기 불편해서 그렇지 지금 기준으로 봐도 틀린 처방은 아니며 당대에 세균 감염을 치료할 땐 술폰아미드 외의 항생제는 쓰기 힘들었다. 당시 페니실린은 여러 사유로 구하기 힘들었고[15] 항생제의 종류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제프 멩겔레, 카를 게프하르트, 카를 브란트 등이 인체실험할 때 쓴 술폰아미드와는 다른 물질이며, 그쪽은 멀쩡한 술폰아미드 항생제가 아니라 술폰산의 다른 화합물이다.
- 코카인 & 아드레날린: 둘을 섞어서 안약으로 처방했다. 코카인의 경우, 1903년 이전의 코카콜라에는 마신 사람들이 중독자로 바뀌기 충분할 만큼의 코카인이 들어 있었다. 독일에서 마약류 관련법이 제정된 것은 1929년이다. 일상생활에서 코카인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인지하기 힘들었고, 대공황을 끼고 있던 패전 후 독일에서 코카인이 일상에서 얼마나 많이 쓰였을지는 짐작조차 힘들다. 하지만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코카인과 아드레날린이 위험할 수 있다는 주장은 당시에도 있었으며, 두 물질이 히틀러의 건강에 악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코카인은 강한 국소마취제이기 때문에 눈이 뻑뻑하거나 아픈 경우 일시적으로 통증을 가라앉혀주는 효과는 있었을 것이며, 혈관 수축 작용을 하기 때문에 눈의 충혈이 일시적으로 가라앉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뇌에 들어가면 도파민 분비를 뻥뻥 터뜨려 각성제이자 마약으로 작용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극소량만 써서 일반 국소마취제처럼 이용할 수도 있다.
- 효소
- 비타민: 그나마 멀쩡한 성분 중에 하나이나 특정 비타민은 많이 먹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 수용성 비타민은 많이 먹어도 소변으로 빠져나가지만, 지용성 비타민은 빠져나가는 게 어렵다. 특히 비타민A는 과량 복용 시 치명적일 수도 있다.[16]
- 암페타민: 향정신성의약품. 각성제의 일종으로, 과다복용 시 쇼크, 심정지 등의 위험이 있으며 망상, 환각 등 조현병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현대에도 심한 ADHD나 기면증 치료에 쓰는 국가들이 있긴 하지만 한국은 금지되었고 그보다는 법으로 지정된 마약으로 더 유명하다. 그래도 아래의 메스암페타민보다는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훨씬 적어서[17] 의료용으로 쓸 수는 있다.
- 메스암페타민: 향정신성의약품. 현대 한국에서는 이 물질을 필로폰, 일명 히로뽕이라고 부른다. '아이스(ice)'혹은 빙두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사실 필로폰은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연합국, 추축국을 가리지 않고 진통제나 각성제로 무분별하게 쓰였다.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자서전에도 각성 약물을 지급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낫질 작전 당시 3일에 걸친 진격을 수행하기 위해 부대 내에서 필로폰을 사단 간부가 직접 관리했고, 일본군 비행사들은 일상적으로 필로폰을 빨았다. 마치 오늘날 커피나 레드불 정도의 인식으로 무분별하게 쓰였다. 필로폰은 1960년대가 되어서야 마약류로 지정되었다. 장기전을 수행하느라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병사들을 움직이는 데 이만 한 것도 없었다. 부작용을 모르는 이상 안 쓰는 것이 이상할 지경. 다만 부작용을 모르던 건 아니었다. 작전중에 심심찮게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이들이 나왔지만, 일단 전쟁이 우선이니 모른체한게 크다. 한국에서도 공부용 약물로 사용된 적이 있다.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 극소량을 의사 관찰 하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극심한 ADHD나 기면증 치료에 쓰는 정도고, 한국에서는 모든 의료 목적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 단백질
- 지질: 지질은 단백질, 당질, 핵산의 결합체이나 그보다 더 많은 종류를 화합했으며, 생체 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한다.
- 옥시코돈: 합성 오피오이드(opioid) 계열 마약성 진통제. 당시에는 '오이코달(Eukodal)'이라는 이름으로 모르핀보다 '비교적 무해'하다고 하여 쓰였지만, 막상 약효가 떨어지면 금단 현상, 특히 두려움에 사로잡히며 질식하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며, 치료하지 않을 경우 중독에 빠지게 된다. 이 약물은 알약 또는 주사로 투입할 수 있는데, 모렐이 항상 히틀러의 주위에 '알약'과 '비타민을 섞은 주사'를 놓아두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선 이 약도 매일 같이 투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암환자에게 진통제로 처방된다.
현대 기준으로 위의 투여한 약물 목록을 쭉 훑어보면, 이 정도의 약을 때려박았는데도 히틀러가 1945년에 권총 자살을 하기 전까지 살아있었다는 것과, 이걸 투여한 사람이 누굴 죽이려고 악감정을 품고 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해왔다는 사실에 신기하다 못해 어이없을 지경이다.
모렐의 처방 당대에 알려진 의료 지식 수준에서는 맞는 처방이었다. 예를 들어 모르핀을 비롯한 마약들은 의학적 목적으로 사용 시 의약품으로 분류된다. 다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런 극약은 물론이고 비타민같은 약품들까지도 지나치게 장기간 동안, 다량을 투여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확실히 문제가 있는 처방이었으므로, 이 처방은 히틀러가 서서히 몸과 정신이 망가지고 1944~45년에는 파킨슨병 징후를 보인 원인 중 하나로 추정된다. 미국의 정신과 전문의 나시르 가에미는 저서 『광기의 리더십』에서 모렐의 처방이 히틀러의 조울증 증세를 악화시켰다고 단언하며, 난폭하지만 부하들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도 알았던 지도자에서 난폭하고 부하들의 말도 듣지 않는 지도자로 바뀌는 데엔 모렐의 처방이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히틀러 전기를 서술한 이언 커쇼는 좀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 모렐이 처방한 약 때문에 히틀러의 몸이 망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1944년부터 히틀러의 몸에 생긴 수많은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히틀러의 생활 습관 때문이라는 것이다. 히틀러는 선천적으로도 건강이 좋다고 할 수 없었는데, 생활 습관조차도 매우 나빴다. 극단적인 채식주의자였고, 단 음식을 매우 좋아하여 한 끼에 케이크 한 통을 넣거나 차를 마실 때 찻잔에 붓는 차보다 각설탕을 더 많이 집어넣었다. 그렇잖아도 영양소 섭취가 불균형한 상태인데 당분이 몸 안에 마구 들어왔으니 당연히 건강상태는 바닥을 쳤을 것이다. 단 음식을 매일 먹었으니 치아 건강이 나빠 치통도 심했을 것이라고 하고, 새벽 4~5시쯤에 잠을 자고 아침 11시쯤에 일어나 하루 종일 회의하거나 부하 붙들고 넋두리만 늘어놓았으니 당연히 운동도 안 했다. 가끔 바람이나 쐬는 게 야외 활동의 전부였다고. 또한 자리가 자리이다보니 관절염이나 만성 피로로 인한 통증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원래부터 뭔가에 집착하는 불안한 정서가 있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색이 짙어지고 격무에 시달리는 극단적인 환경에서 큰 부담감을 느껴, 더욱 극단적인 성격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오히려 커쇼의 주장에 따르면 히틀러 본인은 오히려 모렐의 처방에 의지하면서 심리적 불안감을 가라앉힐 수 있었을 것이다.
4. 모렐의 처방에 대하여
일단 모렐이 쓰던 약부터 따진다면 모렐이 의학 박사 학위를 따던 1910년대도 아니고 히틀러의 주치의 노릇을 하던 1930년대쯤 되면 해당 약물들의 위험성은 '덜' 알려진 것이었지, 해악성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이미 알려진지 오래였다. 우선 코카인은 이미 수십년전인 1890년대에도 의학박사였던 코난 도일이 자신의 소설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위험성을 경고할 만큼 이미 몸 골로가게 할수 있는 약이라는건 알려져 있었다. 모르핀 또한 "전시에" "군대에서" "1일 3회 까지만"이라는 제약이 걸려있을 정도로 위험성 있는 진통제로 취급되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너무 낮지만 어쨌든 위험하다는 사실 자체는 잘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거기다, 아무리 당대 의사라도 심각한 질병이 있는것도 아닌 사람에게 저런 약물들을 "섞어서" "지속해서" 투여하는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당장 당시 의사였던 카를 브란트만 해도 테오도어 모렐의 처방이 정상이 아니라는 비판하는 의견서를 내기도 했고,[18] 헤르만 괴링은 테오도어 모렐을 보고 '제국 주사부 장관'이라고 비꼬듯이 부르며 모렐이 쓸데없이 주사를 많이 놓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19]
그러나 흔히 알려진 인식과 다르게, 모렐은 돌팔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기준으로 매우 뛰어난 의사에 속했다. 그의 처방은 현대 기준에서야 치명적인 독극물이지만, 당시는 현대적 의학이 막 발전하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당대의 의학 수준은 에벤 바이어스처럼 라듐같은 방사능 물질을 몸에 좋다고 먹고, 안전한 어린이용 기침약으로 헤로인을 먹이던 시대[20]를 갓 벗어난 시대였다. 모렐이 유독 해괴한 처방을 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의사 대부분은 모렐과 비슷하거나 더 위험할수도 있는 돌팔이 처방을 일삼았다.[21]
현대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환자가 의사 멱살을 잡아도, 혹은 당장 의료법 위반으로 잡혀들어가도 할 말 없을 만한 막장 처방도, 당시에는 단기적인 효과가 좋다면 버젓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현대인들이 안전한 처방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과학의 발전도 있지만 의사들의 이런 처방들을 통한 생체실험 자료(…)와 그만큼 많은 희생이 축적되어 그 중 안전한 치료법이 정립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반대로 현대에 흔히 쓰이는 치료법이 훗날에는 잘못으로 여겨질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즉, 모렐은 단순한 돌팔이가 아니라, 의학 발전의 여명기에 사용되던 위험천만한 처방으로도 눈에 띄는 부작용 없이 환자를 살려 둔 약물 조합의 마술사로 칭찬받을 만한, 당대 기준으로는 뛰어난 의술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시점에서 보더라도 50은 거뜬히 넘는 약물들을 사람 안 잡게 조합했단 건 인체 및 의약에 깊은 지식은 있었다는 말이니 돌팔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5. 여담
흑발에 검은색 눈, 뭉툭한 코 등 이목구비가 '아리아인'스럽지 않아 유대인으로 오해를 많이 받았다.[22] 나치당에 입당하게 된 계기부터가 자신의 병원이 유대인 병원이라며 테러를 당해서 보신책으로 입당한 것이고, 히틀러의 주치의를 하던 시절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유대인 같은 놈이란 소리를 들었다. 게다가 살찐 체형에, 음식을 소리 내서 먹고, 몸에서 암내가 심했다는 증언이 있는 등[23] 외양이 비호감스러웠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헤르만 괴링은 비꼬는 투로 그를 '제국 주사부 장관'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드 소프트웨어의 전설적인 고전게임 울펜슈타인 3D에 등장하는 대머리 안경 돼지 매드 사이언티스트 샵스 박사의 모델로 추정된다. 다른 나치 의사들은 샵스 박사와는 거리가 있는 외모이기 때문. 하지만 앞서 나왔듯이 정작 모렐은 인체실험을 극렬히 거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모렐의 외모와 게프하르트 등의 인체실험 등 안 좋은 점만 모아다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 사실 '유대인처럼 생겼다'라는 것이 당시에나 지금이나 코에 걸면 코걸이 수준의 말이긴 하지만 여하간 모렐의 외모는 당시 기준으로 '유대인'스러운 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2] 다만 이는 모렐에게 명예욕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치의 자리를 놓고 카를 브란트와 경쟁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계급을 받아 공식적으로 지위를 인정받고 싶어했으나 군을 불신하고 있던 히틀러는 그를 특정 조직에 소속되게 두지 않고 자신의 직속으로 삼는 편을 택했다.[3] 마침 카를 게프하르트는 힘러의 주치의이며 이후로도 각종 범죄 행각으로 악명이 높았다.[4] 나치 초기부터 동고동락한 괴링·힘러 등의 측근들이 아니라 권력 서열의 저 아래에 있었던 해군 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정했을 정도다. 힘러와 괴링 둘 다 이미 히틀러의 눈 밖에 났고, 괴벨스·보어만·카이텔 등의 측근은 히틀러와 함께 베를린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후계자로 삼아봐야 며칠 내로 소련군에 잡히거나 죽어 지휘를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5] Berchtesgaden.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 있는 도시. 히틀러의 별장인 "켈슈타인하우스"(Kehlsteinhaus, 독수리 둥지)가 위치해 있었다.[6] 이언 커쇼 히틀러 2권 17장 불타는 제국 977페이지[7] 노르만 올러 저,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8] 다만 융에는 전쟁범죄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결혼한 지 1년 반 만에 SS 장교인 남편이 전사했고, 말년의 회고에서 젊었을 때 나치를 따랐던 것이 정말 후회된다는 말을 남길 만큼 고통스러워했다.[9] 주사기는 현대 기준으로 무조건 1회용이지만, 19~20세기에는 주사기 재사용이 상식에 가까웠다. 주사기가 소모품으로 처음 인식된 시기는 히틀러 사후인 1950년대이고, 1회용 주사기가 상용화된 것은 1956년의 일이다. 심지어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의무병들이 살균하지 않은 붕대를 사용했다. 비용이나 이런 문제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몰랐던 것이다.[10] 물론 모렐이 적정량이 얼마인지를 계산하고 약물을 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반인이 멋대로 이랬다간 부작용 감소는커녕 바로 훅 간다. 사람 잡는 걸로 악명 높은 마약인 '스피드볼'이 바로 이런 종류이다.[11] 원래는 바르비탈로 전신마취를 한 뒤, 판큐로늄으로 호흡을 비롯한 모든 근육 운동을 마비시키고 염화칼륨으로 심장을 정지시키는 방법이었지만, 약물 수급에 문제가 생겨서(유럽에서 수입해왔는데 유럽연합이 사형 집행을 목적으로 한 약물의 판매를 금지해버렸다) 현재는 바르비탈 단일 제제를 과량 주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어차피 바르비탈 자체만으로도 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판큐로늄과 염화칼륨이 없어도 집행에 문제가 없다고.[12] 2차대전 당시 미국 OSS에서는 히틀러의 지도력을 떨어트리기 위해 구강흡수가 가능하고 쉽게 변질되지 않는 여성 호르몬을 히틀러에게 먹이겠다는 황당한 작전을 수립한 적이 있다. 실제로 히틀러에게 공급되는 채소밭에 약물을 뿌리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했는데, 공교롭게도 테스토스테론 처방이 그 시점 이후에 이루어졌다. 관련성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듯이 이 두 가지가 길항작용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13] 아트로핀은 벨라돈나나 맨드레이크 같은 독초의 독 성분으로, 옛날부터 독살용으로 널리 쓰인 맹독으로 여겨졌다. 아트로핀은 아세틸콜린이 신호를 전달하는 것을 막아 신경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살짝 막으면 경련 완화가 되지만 많이 막으면 뇌와 중추신경이 끊어지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14] 이 때문에 2020년대인 현대에는 군용으로만 쓰이며, 신경마비 독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적절한 용량을 사용한다. 야전에서는 아트로핀 주사를 최대 세번까지만 허용하고 그 이상은 군의관의 판단에 따라야 하는데, 아트로핀의 유독성 때문에 신경마비가 심각할 경우 사용을 제한받는다.[15] 박테리아를 이용한 합성으로 페니실린이 대량생산된 것은 1945년 이후였다. 그 이전에는 플레밍이 쓴 방법인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추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는데 문제는 이 곰팡이가 유리몸인데다 생산 효율까지 낮았다. 게다가 몸에 투여해도 너무 쉽게 배출되는 탓에 작정하고 한 명을 치료하려면 엄청난 양의 페니실린을 써야 했다. 이렇다 보니 페니실린의 발견자인 플레밍조차 페니실린을 불안정하다고 보고 술폰아미드 연구로 방향을 틀었을 정도다.[16] 특히 히틀러는 식습관도 생활습관도 개판이였으니 신진대사 활동이 좋을리가 없고 이러면 섭취한 비타민에서 노폐물들이 빠져나가지 못한다.[17] 암페타민류는 작용기 하나 차이로 효능이 크게 바뀌기 때문에 암페타민, 메스암페타민, 메틸렌다이옥시메스암페타민은 전부 분자구조는 흡사하지만 약효는 전혀 다르다. 한국에서 다이어트 약으로 쓰이는 펜터민도 사실 암페타민의 일종이다(정확히는 substituted amphetamine).[18] 다만 히틀러는 테오도어 모렐을 너무 신임하고 있어서 이 의견서를 냈던 카를 브란트를 좌천시켰다. 게다가 이 카를 브란트는 쓸데없이 잔인한 인체실험을 주도했던 사람으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다.[19] 참고로 괴링은 마약인 모르핀과 필로폰을 너무 중독되어 있어서 주변 사람들과 척을 친 사람이다. 이런 당대의 마약 중독자가 봐도 테오도어 모렐의 처방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20] 독일 회사인 바이엘이 생산해서 아스피린과 함께 나란히 놓고 '기침엔 헤로인, 두통엔 아스피린' 하는 식으로 판매했었다.[21] 당장 동시대의 지도자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고혈압을 앓고 있었는데, 제대로 치료되지 않아 병원에서 측정한 마지막 혈압이 무려 350/190㎜Hg이었다. 이 때의 고혈압 치료법은 피를 뽑거나 일부러 염증을 일으켜서 혈압을 낮추는 요법이었다. 당연히 둘 다 일시적인 땜빵 효과만 있고, 장기적으로는 건강만 해치는 방법이다. 대영제국의 조지 6세의 왕실 주치의도 폐건강을 위해서 오히려 담배를 계속 피울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22] 사실 나치당이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외쳐대던 "금발벽안에 몸 튼튼 머리 텅텅" 식의 '이상적인 아리아인'은 나치 수뇌부 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흑발에 잠복고환 환자였고, 하인리히 힘러는 얼굴만 보면 거의 무슨 일본인이었으며, 요제프 괴벨스는 소아마비 장애인인데다, 헤르만 괴링은 마약 중독자에 비만이었다. 하다못해 주요 인원 중에서 '금발벽안' 조건을 모두 갖춘 인물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정도밖에 없었다.[23] 원래 백인이 체취가 강렬한 편이지만, 독일인의 경우 같은 백인끼리도 꺼릴 정도라 어느 조사에서 체취 때문에 가장 연애하기 싫은 대상 1위로 선정된 바 있다. 이때문에 반농담으로 독일인들은 집을 잠깐이라도 환기시키지 않으면 죽는다는 우스개도 있다. 실제로 독일인들은 대부분 사계절을 가리지 않고 창문을 열고산다. 그리고 모렐처럼 살찐 사람은 체내 지방 때문에 암내가 더 심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