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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22:52:18

테오도어 모렐

<colbgcolor=#000><colcolor=#fff> 테오도어 모렐
Theodor Morell
파일:external/ona.c.blog.so-net.ne.jp/Dr.20Theodor20Morell-917bb.jpg
본명 테오도어 길베르트 모렐
Theodor Gilbert Morell
출생 1886년 7월 22일
독일 제국 헤센 대공국 뮌젠버그
사망 1948년 5월 26일(향년 61세)
연합군 점령하 독일 바이에른 주 테게른제
국적
[[나치 독일|]][[틀:국기|]][[틀:국기|]]
학력 조제프 푸리에 대학교 (약학 / 학사)
파리 대학교 (약학 / 학사)
뮌헨 대학교 (의학 / 박사)
직업 의사
배우자 한느로레 모렐(1920년 결혼)
서훈 내역 나치당 금배지
전공십자장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성장2.2. 나치당 활동2.3. 종전 이후
3. 그가 히틀러에게 처방했던 약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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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처음에 든 생각은… 한 사람에게 그렇게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위험한 약들을 복용하게 했다는 게 매우 큰 충격이었어요. 거기서 또 한 가지 놀라웠던 건 너무 이상하고 수상한 약들이 있다는 거예요. 요즘 사람들한테 그런 주사를 놓겠다고 하면 절대 안 맞죠!
바스 대학교 생화학, 약학박사. 세라 베일리 교수와 롤랜드 교수
아돌프 히틀러주치의. 그리고 제대로 된 의학박사 학위와 의사 면허가 있는데도 히틀러를 마약 중독자로 만든 이상한 의사로 유명하다. 정치적인 욕심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다른 나치 간부들에게 경원시당하면서도 히틀러에게서는 크게 신임받았고, 이 때문에 히틀러가 자살하기 고작 며칠 전까지 그를 돌봤을 정도의 최측근이었다. 하지만 행실은 나치와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물론 히틀러와의 관계를 이용해 권력을 누리고 뇌물을 받는 비리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거야 수단이 히틀러라는 것만 빼면 어느 집단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고, 홀로코스트나 인체실험 같은 '나치스러운' 막장 전쟁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다.

그가 내린 처방은 아무리 봐도 히틀러를 치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한 것에 가까워서, '히틀러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이런 처방을 했다' 혹은 '연합군이나 소련이 보낸 비밀 스파이 겸 킬러가 아닌가'라는 의혹까지도 있다. 처방이 개판이었을 뿐 행실은 나치와 거리가 먼 인물이었고, 연합군과 소련군의 공식적인 입장 또한 자신들과 아무 관련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발표해서, 전후 재판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이자 학살자가 신임하여 기용한 주치의가 정작 그를 죽이는 것에 가까운 처방을 내렸고, 그의 사상에도 동조하지 않았으며, 돌팔이 의사였지만 인격적으로는 멀쩡한 인물이었다는 아이러니에서 나오는 평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흔히 알려진 인식과 다르게, 모렐은 돌팔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기준으로 매우 뛰어난 의사에 속했다. 그의 처방은 현대 기준에서야 치명적인 독극물이지만, 당시는 현대적 의학이 막 발전하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당대의 의학 수준은 에벤 바이어스처럼 라듐같은 방사능 물질을 몸에 좋다고 먹고, 안전한 어린이용 기침약으로 헤로인을 먹이던 시대[1]를 갓 벗어난 시대였다. 모렐이 유독 해괴한 처방을 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의사 대부분은 모렐과 비슷하거나 더 위험할수도 있는 돌팔이 처방을 일삼았다.[2]

현대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환자가 의사 멱살을 잡아도, 혹은 당장 의료법 위반으로 잡혀들어가도 할 말 없을 만한 막장 처방도, 당시에는 단기적인 효과가 좋다면 버젓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현대인들이 안전한 처방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과학의 발전도 있지만 의사들의 이런 처방들을 통한 생체실험 자료(…)와 그만큼 많은 희생이 축적되어 그 중 안전한 치료법이 정립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반대로 현대에 흔히 쓰이는 치료법이 훗날에는 잘못으로 여겨질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즉, 모렐은 단순한 돌팔이가 아니라, 의학 발전의 여명기에 사용되던 위험천만한 처방으로도 눈에 띄는 부작용 없이 환자를 살려 둔 약물 조합의 마술사로 칭찬받을 만한, 당대 기준으로는 뛰어난 의술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모렐은 초등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르노블파리의 산부인과에서 공부해서 1913년에 박사 학위를 땄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독일 제국군육군 군의관으로 종군했으며, 종전 후 베를린에서 '구식 치료법에 얽매이지 않는 의사'로 명성을 얻었고, 페르시아 레자 샤 팔라비루마니아의 국왕이 그를 주치의로 두길 바랐지만 거절했다. 모렐은 후일의 노벨상 수상자 일리야 메치니코프에게 배움을 받기도 하고, 여러 대학의 교수로 활동했으며, 규모가 큰 제약회사의 대주주였고, 1936년에는 베를린의 번화가 쿠담 거리에서 잘 나가는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요약하면 평범한 의사의 출세 이야기이겠지만, 어느 날 그에게 아주 특별한 인생의 전환점이 생겼다.

2.2. 나치당 활동

모렐은 1933년에 나치당에 입당했다. 입당 계기도 딱히 나치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그가 운영하던 병원이 테러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오인당해 험악한 페인트 낙서가 병원 벽을 뒤덮었고, 이 때문에 모렐은 보신책으로 나치당에 입당했다.[3] 그 후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을 치료해주면서 인맥을 쌓기 시작, 호프만과 에바 브라운에게 히틀러의 주치의 자리를 소개받는다. 당시 히틀러는 피부 발진과 위장 가스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모렐은 인체에 유익한 치료용 대장균인 뮤타플로(Mutaflor)를 사용하여 히틀러를 치료하는 데에 성공했다. 모렐은 이때 얻은 신임을 바탕으로 해, 1936년 12월 31일 히틀러의 공식적인 주치의로 임명되었다.

대다수의 나치 지도자들은 그를 높게 평가했으나, 헤르만 괴링하인리히 힘러는 그가 돌팔이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괴링이 당시 이미 모르핀에 찌든 약물중독자가 되어서 한창 정신나간 짓거리들을 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파했다. 어찌 보면 자신이 마약을 하고 있으니 역설적으로 모렐의 처방이 사짜라는걸 간파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때문인지 모렐이 계급을 희망했음에도 히틀러는 끝끝내 그에게 군 계급을 수여하지 않았다.[4] 궁여지책으로 녹색으로 제복 비슷한 걸 만들어 입고 다녔지만 비웃음만 샀다고.

한편 후술할 비정상적인 처방전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처방을 내린 적도 있다. 그 예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체코에서 영국 공작원에게 피습당해 심한 패혈증으로 중태에 빠지자, 모렐은 당시 독일에서 개발한 항생제술폰아미드의 처방을 권했다. 당시 독일에선 페니실린을 구할 수 없어서 대체제로 술폰아미드를 택한 것이다. 전쟁중이라 수입도 불가능한 데다 당시에는 기술의 미비로 페니실린의 개발지인 영국 본토에서도 페니실린은 구하기 힘들었다. 현재에도 패혈증이 확실한 중환자에게 각종 항생제를 때려부어 수술을 진행하고 경과를 지켜보는 만큼, 이 처방 자체는 의외겠지만 흠잡을 데가 없는 합리적인 처방이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의 치료를 맡았던 카를 게프하르트는 이 처방을 무시했고, 결국 하이드리히는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하이드리히를 껄끄럽게 여긴 힘러가 의사들을 매수해서 하이드리히를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다.[5]

모렐은 이후 친위대 출신의 다른 주치의인 카를 브란트와 경쟁했는데, 히틀러는 모렐의 편을 자주 들어주었다. 얼마나 심했냐면 1944년 10월 5일에 카를 브란트가 모렐의 약 처방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내자 히틀러는 이 의견서를 보고 역으로 카를 브란트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을 정도였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은 아예 총통부 의사직에서 해임당하게 되었고, 전후 나치의 장애인 절멸 계획에 동참하며 온갖 비인도적인 인체실험을 한 혐의로 처형된다.

이렇게 모렐은 히틀러 옆에서 치료 활동을 했고, 1944년에 7월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에도 모렐은 각종 약을 써서 히틀러의 기운을 차리게 했다. 암살 사건 이후 히틀러는 여동생 파울라 같은 일부를 제외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의심[6]했는데, 모렐도 의심받지 않은 예외 중 한 명이었다. 최측근인 괴링이나 힘러같은 인물도 이미 히틀러에게 반역에 가까운 행동을 한 상황에서, 정치적 욕심을 일절 보이지 않고 자기 건강만을 충실히 책임지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히틀러가 최후를 맞이하기 전까지 벙커에 있던 모렐이지만 언제까지 있었는지는 서술이 엇갈린다.

이언 커쇼의 책에서는 모렐이 결국 히틀러의 분노를 사 도망쳤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945년 4월 21일 모렐은 서재에 있던 히틀러가 기운 없이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모렐은 인체에 무해한 포도당 주사를 히틀러에게 놓으려 했지만, 히틀러는 갑자기 화를 내면서 자신을 모르핀으로 중독시킬 셈이냐며 펄펄 뛰었다. 그러면서 장군들이 자기한테 약을 먹여서 베르히테스가덴[7]으로 실어 가고 싶어하는지 자기도 안다고 했다. "자네는 나를 미치광이 취급하는 건가?" 하고 고함을 질렀다. 모렐이 히틀러에게 처방한 약이 객관적인 효과는 몰라도 심적으로는 큰 의지가 되었던 모양인데, 히틀러는 결국 그렇게 의지했던 모렐을 이제는 쏴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모렐은 벌벌 떨면서 도망갔다고 한다.[8]

전쟁 후반부에 모렐의 역할은 사실상 오이코달, 메스암페타민, 모르핀 등을 주사하여 패전 직전 궁지의 몰린 히틀러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이었으나 연합국의 폭격으로 이러한 약물들의 공급이 끊기고 모렐이 노환으로 주사조차 제대로 놓지 못하는 신세가 되자 필요가 없어져 내쳤다는 해석도 있다. 화를 내며 총으로 위협해 쫓아냈다는 내용은 위와 동일하다.[9]

반면 요아힘 C. 페스트가 쓴 히틀러 평전에 의하면 1945년 4월 20일 히틀러는 이제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며 모렐을 총통 방공호에서 내보냈다고 하며, 여러 기록을 종합해 봤을 때 모렐이 히틀러의 허락을 받아 베를린을 떠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히틀러의 경호원이었던 하인츠 링게의 회고에 따르면, 베를린 전투가 한창일 때 모렐이 울면서 히틀러를 찾아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하자 히틀러가 모렐을 위로하며 베를린을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2.3. 종전 이후

나치가 몰락하면서 독일에서 마지막 비행기를 타려던 모렐은 미합중국 육군에게 체포되었으나, 처벌은 커녕 석방되어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왜냐하면, 우선 모렐은 반인륜적인 범죄에 관여한 적이 없었다. 나치에는 충성했지만 한 일이라고는 히틀러의 건강을 악화 관리한 것뿐이고, 카를 브란트카를 게프하르트 같이 의학실험을 핑계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한 것도 아니다. 히틀러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뇌물을 받아먹거나 자신이 개발한 의약품을 군 일선에 억지로 납품하는 등의 부정 축재를 벌이긴 했지만 이건 전쟁범죄가 아니었고, 당시 일반 정치인이나 기업가들도 다들 하던 짓이었다. 게다가 당시 모렐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서 뇌졸중 등 여러 병을 앓던 상황이라 증인으로 법정에 세우기 어려운 상태였다. 다른 나치의 중요 수뇌부들도, 암 등으로 오늘내일 하는 사람들은 석방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연합군 입장에선, 모렐을 억지로 법정에 세워 봤자 이득 볼 부분이 없었을 것이다. 정치적·군사적 권력이 전혀 없는 일개 주치의인 모렐이 증언할 만한 것이라곤 히틀러의 사생활같이 연합군에겐 영양가 제로인 정보들 뿐이다. 게다가 히틀러는 항목에서도 나와 있듯이, 사석에서는 말단 병사의 이름 하나하나를 다 외우고 있고, 주변인들이 자신의 직함인 총통으로 자신을 부르는 건 너무 딱딱하다며 편하게 '히틀러 씨'라고 불러줄 것을 요구한 데다가, 동물을 좋아해서 근대 국가들 중 최초로 동물보호법을 제정할 정도로 '인심 좋은 동네 삼촌'이었다. 히틀러와 나치당의 이미지를 최대한 나쁘게 조성해 놓아야 전쟁 범죄를 물을 명분이 제대로 서는 연합군 입장에서는 이런 정보밖에 모르는 모렐은 법정 증인으로서는 쓸모없었다.

그리고 모렐은 3년 뒤에 고향 테게른제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세상 그 누구보다 히틀러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음에도 제대로 천수를 누리고 갔다. 트라우들 융에처럼 히틀러의 주변인이되 정치나 군사엔 일절 관여하지 않은 인물[10]들은 이렇게 평온한 최후를 맞을 수 있었다.

연합군의 처벌을 피하고자 도피하려 했지만 체포당한 덕에 역설적으로 무고함을 입증받아 자유로운 말년을 보내게 된 아이러니의 산 증인인 셈. 사실 위에 나왔듯이 건강 문제 때문에 풀어준 거라서 만약 건강 문제가 없었다면 루돌프 헤스처럼 무죄 여부를 떠나서 통제 받는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전범으로 판정되어 징역을 살던 다른 나치당 인사들도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가석방해 줬고 이들 또한 모렐과 마찬가지로 얼마 안 가 지병으로 숨졌다.

3. 그가 히틀러에게 처방했던 약

모렐은 히틀러에게 전쟁 기간 동안 모두 90가지의 약을 처방했고 하루에 28가지 씩의 알약과 물약, 주사약을 처방했다. 하도 주사를 찔러대다 보니 모렐의 진료 기록에는 주사바늘이 휘었다는 기록[11]도 간간히 나온다.

아래에 나오는 약물의 리스트는 그가 히틀러에게 처방한 약들이다. 처방의 특징과 효과를 간단히 살펴보면 한 마디로 이독제독이라고 할 수 있다. 업 계열의 마약과 다운 계열의 마약을 같이, 그것도 장기투여한 점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이 경우 진통 효과와 각성 효과가 동시에 나타나며, 환각 같은 즉각적인 부작용은 드물었을 것이다.[12] 아울러 필로폰 때문에 일시적으로 머리가 맑아지고 활기가 넘쳤을 것이다. 또한 캐모마일과 술폰아미드, 효소 등 일부를 빼면 하나같이 일시적으로 괜찮아 보일 뿐인, 잠깐의 효과만 내는 땜빵에 불과한 것들이며 그 대가로 장기적으로는 더 안 좋은 효과를 가져다주는 사실상 독약들이었다. 심지어 일부는 양을 조금만 더 늘렸다면 바로 죽어도 할 말 없을 정도로 지독한 약들이었다.

즉, 테오도어 모렐의 의사로써 강점은 단기간에 확실한 효과가 나타나는 처방이었는데, 단기적으로 굉장히 효과가 좋을지는 몰라도 단점이 큰데, 장기복용시 부작용도 그만큼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부작용이 어마어마한 약인데, 히틀러는 타고난 귀차니즘과 충동적 기질 때문에 이 약이 어떤 약들이고 어떤 효과가 있는지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았고, 들으려고도 안 했다. 결과적으로 히틀러는 부작용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약에 가까운 것을 장기투여했으니, 서서히 몸이 망가져갔던 것이다.

현대 기준으로 위의 투여한 약물 목록을 쭉 훑어보면, 이 정도의 약을 때려박았는데도 히틀러가 1945년에 권총 자살을 하기 전까지 살아있었다는 것과, 이걸 투여한 사람이 누굴 죽이려고 악감정을 품고 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해왔다는 사실에 신기하다 못해 어이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모렐을 돌팔이 취급하기는 어렵다. 모렐이 히틀러에게 처방했던 약물들은 그 위험성이 나중에야 알려졌을 뿐, 당대 기준으로는 완전히 잘못된 처방이라고 하기 어렵다. 방사성 물질인 라듐을 몸에 좋다고 먹던 시절[20]의 의약품 안전을 지금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20세기 초중반은 현대 의학의 토대가 쌓이던 시대인 동시에, 발전에 따르는 부작용으로 과도한 과학지상주의 때문에 서구 사회 전반이 현대 시각으로는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약물 오남용을 저지르던 시대다.[21] 탈리도마이드 같은 사례도 그렇고 그보다 한세대 전으로 올라가면 윈슬로 부인의 진정 시럽 같은게 멀쩡히 팔리던 시대였다. 물론 당대에도 이런 마법같은 '과학'의 이름 아래 행해지던 지나친 낙관주의와 약물적 처방 남용에 경계를 표한 지식인, 의학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중은 장기적인 치료보다는 (히틀러처럼) 당장 체감효과가 뛰어난 처방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보니, 이런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정신나간 대약품시대가 성행했던 것이다.

모렐의 처방 또한 당대에 알려진 의료 지식 수준에서는 맞는 처방이었다. 예를 들어 모르핀을 비롯한 마약들은 의학적 목적으로 사용 시 의약품으로 분류된다. 현대에는 중독과 여러 부작용으로 인해 말기 환자나 절단, 심한 화상 환자 등 정말 고통으로 쇼크사할 정도의 환자들한테만 진통제로 쓰이지만, 과거에는 마약성 부작용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의무병들이 1인 3회 제한만 두고 야전 병원과 전장에서 부상자들에게 모르핀 주사를 놓았다. 즉, 그냥 진통제로 처방된 것이고 진통제 처방 자체는 통증 완화를 통해 환자의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에서 하는 것이니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다.[22] 다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런 극약은 물론이고 비타민같은 약품들까지도 지나치게 장기간 동안, 다량을 투여했다는 것이다.

당대에는 멀쩡한 처방으로 여겨졌을지언정 근본적으로는 확실히 문제가 있는 처방이었으므로, 이 처방은 히틀러가 서서히 몸과 정신이 망가지고 1944~45년에는 파킨슨병 징후를 보인 원인 중 하나로 추정된다. 미국의 정신과 전문의 나시르 가에미는 저서 『광기의 리더십』에서 모렐의 처방이 히틀러의 조울증 증세를 악화시켰다고 단언하며, 난폭하지만 부하들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도 알았던 지도자에서 난폭하고 부하들의 말도 듣지 않는 지도자로 바뀌는 데엔 모렐의 처방이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히틀러 전기를 서술한 이언 커쇼는 좀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 모렐이 처방한 약 때문에 히틀러의 몸이 망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1944년부터 히틀러의 몸에 생긴 수많은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히틀러의 생활 습관 때문이라는 것이다. 히틀러는 선천적으로도 건강이 좋다고 할 수 없었는데, 생활 습관조차도 매우 나빴다. 극단적인 채식주의자였고, 단 음식을 매우 좋아하여 한 끼에 케이크 한 통을 넣거나 차를 마실 때 찻잔에 붓는 차보다 각설탕을 더 많이 집어넣었다. 그렇잖아도 영양소 섭취가 불균형한 상태인데 당분이 몸 안에 마구 들어왔으니 당연히 건강상태는 바닥을 쳤을 것이다. 단 음식을 매일 먹었으니 치아 건강이 나빠 치통도 심했을 것이라고 하고, 새벽 4~5시쯤에 잠을 자고 아침 11시쯤에 일어나 하루 종일 회의하거나 부하 붙들고 넋두리만 늘어놓았으니 당연히 운동도 안 했다. 가끔 바람이나 쐬는 게 야외 활동의 전부였다고. 또한 자리가 자리이다보니 관절염이나 만성 피로로 인한 통증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원래부터 뭔가에 집착하는 불안한 정서가 있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색이 짙어지고 격무에 시달리는 극단적인 환경에서 큰 부담감을 느껴, 더욱 극단적인 성격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오히려 커쇼의 주장에 따르면 히틀러 본인은 오히려 모렐의 처방에 의지하면서 심리적 불안감을 가라앉힐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렇게 식습관도 생활습관도 개판이고 스트레스와 과로에 시달리는 인간을 저 독한 약들을 죄다 박아서 10년에 걸쳐 케어한 걸 보면 돌팔이가 아니라 굉장히 수준 높은 의사라고 해야 맞다. 현대 기준으로 모렐을 돌팔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겠으나, 그 기준으로는 당대 의사들 대부분이 돌팔이다. 오히려 저렇게 독한 약들을 어마어마하게 섞었음에도[23] 10년 이상 히틀러를 부작용을 최소화해가며 연명시켜준 걸 생각해보면 21세기에 태어나서 현대화된 의학을 배웠을 경우엔 칵테일 요법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을 수도 있다.

4. 여담

흑발검은색 눈, 뭉툭한 코 등 이목구비가 '아리아인'스럽지 않아 유대인으로 오해를 많이 받았다.[24] 나치당에 입당하게 된 계기부터가 자신의 병원이 유대인 병원이라며 테러를 당해서 보신책으로 입당한 것이고, 히틀러의 주치의를 하던 시절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유대인 같은 놈이란 소리를 들었다. 게다가 살찐 체형에, 음식을 소리 내서 먹고, 몸에서 암내가 심했다는 증언이 있는 등[25] 외양이 비호감스러웠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헤르만 괴링은 비꼬는 투로 그를 '제국 주사부 장관'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드 소프트웨어의 전설적인 고전게임 울펜슈타인 3D에 등장하는 대머리 안경 돼지 매드 사이언티스트 샵스 박사의 모델로 추정된다. 다른 나치 의사들은 샵스 박사와는 거리가 있는 외모이기 때문. 하지만 앞서 나왔듯이 정작 모렐은 인체실험을 극렬히 거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모렐의 외모와 게프하르트 등의 인체실험 등 안 좋은 점만 모아다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 독일 회사인 바이엘이 생산해서 아스피린과 함께 나란히 놓고 '기침엔 헤로인, 두통엔 아스피린' 하는 식으로 판매했었다.[2] 당장 동시대의 지도자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고혈압을 앓고 있었는데, 제대로 치료되지 않아 병원에서 측정한 마지막 혈압이 무려 350/190㎜Hg이었다. 이 때의 고혈압 치료법은 피를 뽑거나 일부러 염증을 일으켜서 혈압을 낮추는 요법이었다. 당연히 둘 다 일시적인 땜빵 효과만 있고, 장기적으로는 건강만 해치는 방법이다. 대영제국의 조지 6세의 왕실 주치의도 폐건강을 위해서 오히려 담배를 계속 피울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3] 사실 '유대인처럼 생겼다'라는 것이 당시에나 지금이나 코에 걸면 코걸이 수준의 말이긴 하지만 여하간 모렐의 외모는 당시 기준으로 '유대인'스러운 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4] 다만 이는 모렐에게 명예욕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치의 자리를 놓고 카를 브란트와 경쟁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계급을 받아 공식적으로 지위를 인정받고 싶어했으나 군을 불신하고 있던 히틀러는 그를 특정 조직에 소속되게 두지 않고 자신의 직속으로 삼는 편을 택했다.[5] 마침 카를 게프하르트는 힘러의 주치의이며 이후로도 각종 범죄 행각으로 악명이 높았다.[6] 나치 초기부터 동고동락한 괴링·힘러 등의 측근들이 아니라 권력 서열의 저 아래에 있었던 해군 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정했을 정도다. 힘러와 괴링 둘 다 이미 히틀러의 눈 밖에 났고, 괴벨스·보어만·카이텔 등의 측근은 히틀러와 함께 베를린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후계자로 삼아봐야 며칠 내로 소련군에 잡히거나 죽어 지휘를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7] Berchtesgaden.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 있는 도시. 히틀러의 별장인 "켈슈타인하우스"(Kehlsteinhaus, 독수리 둥지)가 위치해 있었다.[8] 이언 커쇼 히틀러 2권 17장 불타는 제국 977페이지[9] 노르만 올러 저,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10] 다만 융에는 전쟁범죄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결혼한 지 1년 반 만에 SS 장교남편이 전사했고, 말년의 회고에서 젊었을 때 나치를 따랐던 것이 정말 후회된다는 말을 남길 만큼 고통스러워했다.[11] 주사기는 현대 기준으로 무조건 1회용이지만, 19~20세기에는 주사기 재사용이 상식에 가까웠다. 주사기가 소모품으로 처음 인식된 시기는 히틀러 사후인 1950년대이고, 1회용 주사기가 상용화된 것은 1956년의 일이다. 심지어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의무병들이 살균하지 않은 붕대를 사용했다. 비용이나 이런 문제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몰랐던 것이다.[12] 물론 모렐이 적정량이 얼마인지를 계산하고 약물을 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반인이 멋대로 이랬다간 부작용 감소는커녕 바로 훅 간다. 사람 잡는 걸로 악명 높은 마약인 '스피드볼'이 바로 이런 종류이다.[13] 원래는 바르비탈로 전신마취를 한 뒤, 판큐로늄으로 호흡을 비롯한 모든 근육 운동을 마비시키고 염화칼륨으로 심장을 정지시키는 방법이었지만, 약물 수급에 문제가 생겨서(유럽에서 수입해왔는데 유럽연합이 사형 집행을 목적으로 한 약물의 판매를 금지해버렸다) 현재는 바르비탈 단일 제제를 과량 주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어차피 바르비탈 자체만으로도 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판큐로늄과 염화칼륨이 없어도 집행에 문제가 없다고.[14] 2차대전 당시 미국 OSS에서는 히틀러의 지도력을 떨어트리기 위해 구강흡수가 가능하고 쉽게 변질되지 않는 여성 호르몬을 히틀러에게 먹이겠다는 황당한 작전을 수립한 적이 있다. 실제로 히틀러에게 공급되는 채소밭에 약물을 뿌리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했는데, 공교롭게도 테스토스테론 처방이 그 시점 이후에 이루어졌다. 관련성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듯이 이 두 가지가 길항작용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15] 아트로핀벨라돈나나 맨드레이크 같은 독초의 독 성분으로, 옛날부터 독살용으로 널리 쓰인 맹독으로 여겨졌다. 아트로핀은 아세틸콜린이 신호를 전달하는 것을 막아 신경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살짝 막으면 경련 완화가 되지만 많이 막으면 뇌와 중추신경이 끊어지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16] 이 때문에 2020년대인 현대에는 군용으로만 쓰이며, 신경마비 독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적절한 용량을 사용한다. 야전에서는 아트로핀 주사를 최대 세번까지만 허용하고 그 이상은 군의관의 판단에 따라야 하는데, 아트로핀의 유독성 때문에 신경마비가 심각할 경우 사용을 제한받는다.[17] 박테리아를 이용한 합성으로 페니실린이 대량생산된 것은 1945년 이후였다. 그 이전에는 플레밍이 쓴 방법인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추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는데 문제는 이 곰팡이가 유리몸인데다 생산 효율까지 낮았다. 게다가 몸에 투여해도 너무 쉽게 배출되는 탓에 작정하고 한 명을 치료하려면 엄청난 양의 페니실린을 써야 했다. 이렇다 보니 페니실린의 발견자인 플레밍조차 페니실린을 불안정하다고 보고 술폰아미드 연구로 방향을 틀었을 정도다.[18] 특히 히틀러는 식습관도 생활습관도 개판이였으니 신진대사 활동이 좋을리가 없고 이러면 섭취한 비타민에서 노폐물들이 빠져나가지 못한다.[19] 암페타민류는 작용기 하나 차이로 효능이 크게 바뀌기 때문에 암페타민, 메스암페타민, 메틸렌다이옥시메스암페타민은 전부 분자구조는 흡사하지만 약효는 전혀 다르다. 한국에서 다이어트 약으로 쓰이는 펜터민도 사실 암페타민의 일종이다(정확히는 substituted amphetamine).[20] 그 라듐으로 만든 '라디톨'을 3년동안 1400병이나 마시다가 비참한 몰골에 엄청난 고통을 안고 세상을 떠난 에벤 바이어스 같은 사람도 있다.[21] 그리고 기조가 과도해서 역풍이 분 것이 안아키같은 반지성주의, 반과학주의 수준으로 흐르는 의약품과 현대 의학에 대한 불신이다.[22] 실제로 대부분의 환자는 당연히 의학적 지식에 근거해서 자신의 몸 상태를 판단하지 않고 자기 몸에 일어나는 통증의 강도를 근거로 몸 상태를 판단하므로, 의사가 공들여 지은 약을 몇 달 동안 먹어 서서히 제대로 낫는 것보다 진통제 한 방 맞고 잠깐이라도 곧바로 쌩쌩해지는 쪽을 더욱 만족스러워한다. 실제 약효는 거의 없이 진통 효과가 전부인 파스가 만년 스테디셀러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단 빨리 쌩쌩해져야 투병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업과 같은 고용인 또한 노동자가 장기간에 걸쳐서 병을 완치하고 오기까지 기다려주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아도 자신과 가정이 그럭저럭 먹고사는 게 가능한 일부 계층을 제외하면 다수의 노동자들은 설령 장기적 관점에서의 완치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인 진통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23] 여러 약물들을 동시에 투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약물은 효과와 부작용이 모두 존재하며 섞일 경우는 부작용이 더 심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 특히나 모렐이 쓴 약물들은 하나같이 효과도 부작용도 강렬한 것들이다. 비유하자면 용접불꽃과 액체질소만 사용해서 토스트를 굽는 정도라고 보면 된다.[24] 사실 나치당이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외쳐대던 "금발벽안에 몸 튼튼 머리 텅텅" 식의 '이상적인 아리아인'은 나치 수뇌부 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히틀러는 흑발에 잠복고환 환자였고, 힘러는 얼굴만 보면 자타공인 일본인이었으며, 괴벨스는 소아마비 장애인인데다, 괴링은 마약 중독자에 비만이었다. 하다못해 주요 인원 중에서 '금발벽안' 조건을 모두 갖춘 인물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정도밖에 없었다.[25] 원래 백인이 체취가 강렬한 편이지만, 독일인의 경우 같은 백인끼리도 꺼릴 정도라 어느 조사에서 체취 때문에 가장 연애하기 싫은 대상 1위로 선정된 바 있다. 이때문에 반농담으로 독일인들은 집을 잠깐이라도 환기시키지 않으면 죽는다는 우스개도 있다. 실제로 독일인들은 대부분 사계절을 가리지 않고 창문을 열고산다. 그리고 모렐처럼 살찐 사람은 체내 지방 때문에 암내가 더 심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