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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13:13:42

카민스키 여단

러시아 국민해방군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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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SS의용기병사단
뤼초프
38 SS척탄병사단
니벨룽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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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제29무장척탄병사단 러시아 국민해방군
Die 29. Waffen-Grenadier-Division der SS RONA
(russische Nr. 1)
Русская освободительная народная армия
Russian National Liberation Army
파일:로코트 자치국 국기.svg 파일:카민스키 여단 엠블럼.svg
깃발 휘장
창설일 1941년 11월
소속 무장친위대
규모 여단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역사
2.1. 창설2.2. 전성기2.3. 몰락의 시작2.4. 바르샤바 봉기2.5. 소멸
3. 편제4. 평가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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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장친위대의 러시아인 사단이다.

2. 역사

2.1. 창설

1941년 겨울, 소련 영토 깊숙이 진입한 독일 국방군은 소비에트 파르티잔의 활동으로 후방과의 연락 유지에 큰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초래된 것은 전적으로 독일의 멍청한 행동 때문이었는데, 애초 독일 국방군이 진격했을 때 발트와 우크라이나 등의 소련인들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해방군으로서 독일 국방군을 환영했으나, 이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학살을 저질러 "우리는 너희를 모두 죽이러 왔다!"고 천명하는 바보짓을 한 건 독일군 스스로였다. 당연히 주민들이 독일 국방군을 점점 더 싫어하게 될 수밖에 없고, 반대로 파르티잔의 활동 영역은 넓어져 가기만 했다. 그래서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땅에서 밀려나는 그날까지 나치 독일군은 이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1942년 봄, 아직 땅이 녹지 않은 추운 날씨를 뚫고 한 마리의 말이 끄는 썰매가 러시아 민간인 몇 사람을 태운 채 브랸스크 남동쪽에 있는 나블리야와 로코트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이 썰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우두머리는 독일 주둔군 지휘관에게 제2기갑군 사령관 루돌프 슈미트(Rudolf Schmidt) 상급대장이 서명한 명령서를 내놓았는데, 이 명령서에는 이 명령서를 가진 사람에게 가능한 모든 협력을 하라는 지시와 함께 이 사람을 "나블리야, 로코프, 드미트롭스크, 드미트리예프, 솁스크 등의 지방도시를 포함하는 지역의 지사로 임명하라"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카민스키 여단의 지휘자인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로, 자신의 옛 학우이자 빨치산과 싸우다가 전사한 콘스탄틴 보스코보이니크(Constantine Voskoboinik)의 후임으로 온 것이었다.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로코트 자치국이라는 괴뢰국의 수반이 되어 이 지역에서 독자적인 행동권과 함께 지방 관리의 임명권, 경제권을 편제할 권리 등 완전한 자유재량권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독일군 장교도 카민스키의 행동에 대해 간섭할 수 없었으며, 그는 오직 슈미트 상급대장 단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는, 말 그대로 이 지역의 수반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사가 된 카민스키는 즉각 자기 영역 내 도시의 행정을 주관할 시장을 임명하고, 집단농장제도의 폐지를 선포했다. 농토는 물론 수확한 농작물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고 아직 남아있는 농기구 및 가축도 모두 각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치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치안을 유지하고 지역방어를 맡을 민병대도 창설했다. 이것이 바로 카민스키 여단의 탄생이었다.

2.2. 전성기

토지와 곡식, 가축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게 된 농부들은 곧 태도를 바꾸어 독일군에 대한 지지를 보내게 되었다. 당장 증오의 대상이었던 집단농장을 해체해 주었을 뿐 아니라 행정의 전권을 장악한 카민스키의 책임 하에 주민들에게 자치권까지 부여했으므로, 이 지역의 독일군들은 다른 지역에서처럼 주민들을 마음대로 착취하거나 학살하는 등의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독일군의 역할은 전적으로 군사적인 필요에만 국한되었다.

브랸스크에서 남쪽의 르고프로 가는 철로를 경계로, 카민스키의 지배영역인 동쪽은 평야로 이루어져 있어 확보가 쉬웠지만 서쪽은 숲이 우거져 있어 독일군이 손을 대지 못한 탓에 상당수의 빨치산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카민스키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식량을 찾는 게릴라들이 집단농장의 재산을 가져가더라도 농민들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새로이 지주가 된 이 지역의 농민들은 예전과 달리 자신의 암소를, 자신의 돼지를, 자신의 곡식을 가져가는 게릴라들에게 강렬한 분노를 품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카민스키 휘하의 민병대에 입대했고 지주들은 이들을 여러 면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해 지원해주었다. 1942년 여름에는 카민스키 민병대의 활동으로 인해 이 지역 지주들은 더 이상 게릴라 부대의 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빨치산이 은신처인 숲을 벗어난다는 것은 곧 피를 흘리는 충돌을 뜻했고 유혈 없이는 어떤 식량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카민스키를 보낸 슈미트 상급대장으로서는 러시아인들이 독일에 대한 증오를 잊고 서로 죽여대고 있으니 모든 것이 계획대로 돌아가는 매우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 민병대는 독일군으로부터 총알 한 발 받아서 쓰지 않았다. 독일군이 장비를 지원해주지 않자 이들은 퇴각하는 소련군이 숲에다 버리고 간 무기들을 주워 모아 무장했고, 심지어는 전차-대전차포-야포-박격포-기관총 같은 중장비까지 재생했다. 그 결과 이 민병대는 여단 병력까지 성장하게 되었는데, 500에서 600명의 병력을 가진 5,6개의 보병대대와 10~12대의 경전차를 보유한 전차중대, 20문 가량의 포를 보유한 포병대대로 이루어진 민병대 치고는 엄청나게 막강한 부대가 되었다. 그리고 1942년 말에는 전체 규모가 만 명 가까이로 확장되었으며, 여기에 독일군이 소련군으로부터 노획한 야포 36문과 T-34-76 전차 24대를 추가로 제공받았다.

카민스키 민병대가 이만한 병력을 갖게 되자 촌락이나 도시에 대한 게릴라의 습격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고, 이젠 도리어 반격도 충분히 가능하게 되었다. 실제로 1943년 봄에는 소규모 독일군 부대의 지원을 받아 역습을 가한 결과 드미트롭스크, 드미트리예프, 솁스크, 로코트 사이의 거의 전지역에서 게릴라를 완전히 축출했으며, 로코트로부터는 북서쪽으로 10 내지 15km, 브랸스크-르고프 철도로부터는 서쪽으로 약 7km 떨어진 해방구의 거의 변방까지 게릴라들을 밀어붙였다. 이 모든 것들은 독일군 당국으로부터 단 한 정의 총도, 단 한 발의 탄환도 지원받지 않으면서 이루어낸 성과였으며 시간만 충분했다면 카민스키는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전 지역에서 단 한 명의 게릴라도 남기지 않고 청소하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1943년 여름에는 그를 암살하려는 소련 측의 음모도 몇 번이나 있었다. 덕택에 카민스키는 수차례나 죽음의 위기를 넘겼고, 심지어는 카민스키의 사령부에 첩자를 박아 넣어 그를 암살하려던 계획이 적발되는 바람에 사령부 주변 나무가 졸지에 줄줄이 매달린 내통자들의 시체로 장식되기도 했다. 사령부 요원이 너무 많이 처형되는 바람에 부대가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 독일군 연락장교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2.3. 몰락의 시작

하지만 문제는 카민스키의 능력과는 별개로 그들을 비호하고 있던 독일군 그 자체가 쿠르스크 전투의 패배로 인해서 서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소련군이 들어오면 카민스키 민병대의 대원들이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고, 결국 이들은 가족을 데리고 독일군과 함께 철수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수가 3만에 달했다.

서쪽으로 퇴각하는 혼란의 와중에 탈주자의 수는 늘어만 갔고, 그 과정에서 접촉한 빨치산들은 카민스키에게 병력을 이끌고 투항할 것을 제안했지만 카민스키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어차피 이 시점에서 투항해 봤자 최선의 경우라도 전쟁이 끝나면 처형당하는 것이 예정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기에 카민스키는 투항제의에 응하기는커녕 연대병력을 몽땅 이끌고 빨치산으로 넘어가려고 한 2연대장을 체포해서 부대원들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버렸고, 엄격한 태도로 부하들을 다루면서 속출하는 탈주자들 속에서도 부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결국 벨라루스 지역의 폴로츠크(Polotsk) 지구의 레펠(Lepel)이라는 도시로 이동한 후 이곳을 담당지역으로 지정받고 이해 내내 이 지역의 빨치산들과 격전을 치르게 된다. 1944년 초에는 원래 폴란드의 서부 영토였다가 독일령으로 통합된 바르테가우(Warthegau)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는데, 여기서 정식으로 무장친위대 29사단(러시아 제1사단)으로 재편되며 그동안 손실된 병력의 보충을 위해 인원 보충을 받았다. 지휘관인 카민스키 역시 그동안의 전공에 대한 보상으로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고 무장친위대 소장으로 임관하였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부대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래 민병대였던 이들은 고향 땅에서 멀어지면서 계속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고, 싸워야만 할 이유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독일군에 정식으로 편입되면서 그동안 유지해 온 지휘체계도 무너졌고, 인원보충이라는 미명으로 벨라루스인 경찰부대, 소련군 포로, 범죄자들이 부대에 들어오면서 동향 출신이라는 부대원들 사이의 유대감조차 사라져 버리게 된다. 여기에 사단장이 훈장쪼가리 하나 받았다고 뭔 도움이 되겠나.

여기에 설사 탈영해서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소련 당국에게 반역자로서 처형당할 것이라는 공포가 더해지면서 카민스키 여단은 완전히 자포자기한 막장집단이 되었다. 이들은 민간인을 약탈하는가 하면 진탕 취해서 독일군 병사들과 싸움질을 벌이거나 자기들끼리 싸움판을 벌였고, 정작 전투임무는 거절하는 도적집단 비슷한 존재가 되었는데 그 결정적인 모습을 보인 곳이 바르샤바였다.

2.4. 바르샤바 봉기

바르샤바 봉기 진압을 맡은 친위대 보안군을 지원하러 출동하라는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을 받은 카민스키는 자신의 부관인 유리 프롤로프(Yuri Frolov) 중령에게 노획된 T-34 전차 4대와 SU-76M 자주포 1문, 몇문의 야포가 딸린 미혼의 병사 1,700명을 주어 1개 연대를 편성해서 파견했는데, 중령은 휘하 병력에게 무제한적인 강간과 약탈을 허용했고 대부분의 병사들이 무척 기쁘게 그 지시를 수행했다.

사실상 카민스키 여단은 전투의지 따위는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여단장인 카민스키 자신도 민가에서 약탈품을 찾으러 다니는 형편이었다. 여기서 카민스키의 부하들은 1만 명 가까운 시민을 학살했다. 그래도 디를레방어 여단보다는 덜 죽였는데, 그 이유는 이들의 진군로에 보드카 양조장이 있었기 때문에 술에 취해 진군을 멈춘 탓이었다고 한다. 만행을 명령한 프롤로프 중령은 후에 시가전에서 화염방사기에 맞아 사망하였다. 만행에 격분한 폴란드 국내군은 카민스키 여단을 포함한 모든 SS 병사들, 특히 카민스키 여단과 디를레방어 여단의 구성원들을 포로로 붙잡는 그 즉시 사살했다고 한다.

바르샤바에서 보인 카민스키 여단의 행태는 정말 개판 그 자체였다. 너무 안 싸우면서도 병력은 500여 명이나 상실한다. 그래도 디를레방어보다는 나았다. 장교 16명을 포함하여 초기 병력은 881명이었지만, 시가전에서 대차게 갈려나가고 이후 2천 5백에 이르는 병력을 추가로 증원받으면서 싸워 봉기가 끝날 즈음에는 손실이 2,733명에 이르렀다. 초기 병력의 무려 315%(...)

그리개 시외로 돌려진 후에도 곳곳에서 손실을 입었다. 결국 친위대 수뇌부로서도 이들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게 되어 카민스키와 여단 지휘부를 국가의 재산을 훔친 죄로 전원 폴란드 서부에 있는우치시에서 군사재판에 회부, 처형하였다. 카민스키의 부하들이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KDF)" 소속의 독일 소녀 두 명을 강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던 것 역시 게슈타포가 카민스키를 처형할 수밖에 없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2.5. 소멸

카민스키가 처형되자 그의 부하들이 자기들 몫이라고 생각하고 공산당으로부터 해방시킨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을 감안해서 "러시아 해방 자금"이라는 이름으로 챙기려고 계획했던 약탈품들은 모조리 힘러에게 보내졌다. 카민스키의 부하들에게는 그가 폴란드 게릴라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는 거짓 해명이 전해졌으며, 부하들이 그 이야기를 믿지 않자 게슈타포는 카민스키의 차를 도랑에 처박은 다음 기관총을 갈기고 거위 피를 뿌려서 습격 현장을 조작했다. 그제야 사령관의 전사를 확신한 카민스키 여단은 빨치산 활동이 없는 북쪽으로 이동했다.

이후 카민스키 여단이 받았던 친위대 29사단의 사단번호는 회수되어 "이탈리아 1사단"에 부여되었다. 여단의 잔존병력은 안드레이 블라소프러시아 해방군(ROA)에 일괄적으로 편입할 예정이었으나 러시아 해방군 쪽에서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러시아 해방군들도 점령지에서 패악질을 벌이는 이들이 싫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해방군 지도부 세르게이 부냐첸코 및 안드레이 블라소프는 카민스키 여단 인원들을 뷔르템베르크의 러시아인 수용소로 가는 도중 목격했는데, 그들이 목격한 러시아 국민해방군 집단들은 약탈한 드레스와 보석으로 휘감은 여자들을 대동한 채 군복을 입은 무장한 사람과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를 다 태운 마차 행렬을 이루는, 군대가 아닌 도적패와 더 가까운 외향에다 장교들은 양손에 시계를 줄줄이 차고 있었다.[1] 이 꼬락서니를 보고 기가 막힌 세르게이 부냐첸코"당신들이 내게 주는 것이 이 비적, 강도, 도둑 떼입니까?"하고 따지기도 했다.

카민스키 여단의 이미지는 위의 인용문처럼 답이 없는 수준이었고, 블라소프는 결국 자기가 실시한 세심한 시험을 통과한 2천 명 정도만 자기 부대에 받아들였다. 이때까지 이들을 따라온 민간인들과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병사들은 나이세 선 방어선 구축에 노동자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렇게 카민스키 여단은 소멸된다. 이후 잔존 병력은 러시아 해방군에 흡수되었고, 이에 가담한 사람들은 러시아 해방군의 소멸과 함께 소련에 체포되어 반역자로 처단당했으며, 노동자가 된 사람들도 독일군의 거친 대접과 함께 전후 소련에서 뻗어온 추적 때문에 운좋게 빠져나가서 신분을 숨기고 사는 몇몇 사람들을 빼고는 처단당했다.

3. 편제

4. 평가

나름대로 비극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카민스키 여단의 입장을 생각해서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것 자체를 제외한다고 해도, 추축국에 협력한 것과, 바르샤바에서의 대만행은 단연 전쟁범죄다. 덕분에 똑같이 독일군에 협력했지만 그래도 최후의 백군 소리를 듣기도 할 정도로 전후사정을 이해받기도 하는 러시아 해방군에 비해서도 평가가 좋지 않다.

5. 관련 문서



[1] 손목시계 약탈은 이들과 적대관계인 소련군 측에서도 자주 저지르던 범죄였다. 광복 이후 소련군정 지역에서 주둔한 소련군들이 점령지 민간인들의 손목시계를 자주 약탈해서 지역 주민들은 한 여름에도 긴팔 소매의 옷을 입어야 했고 베를린 공방전이 끝나고 시가지 한 목판에 소련 국기를 계양하는 사진에서 해당 군인이 팔에 손목시계를 하나 이상 감고 있는 것이 찍히자, 이미지가 실추될 것이 우려된 소련군 지도부가 사진을 수정한 해프닝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