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f><colcolor=#0039A6> 세르게이 부냐첸코 Серге́й Буняче́нко | |
본명 | 세르게이 쿠즈미치 부냐첸코 (러시아어) Серге́й Кузьми́ч Буняче́нко Sergéy Kuz'mích Bunyachénko |
세르히 쿠즈미치 부냐첸코 (우크라이나어) Сергій Кузьмич Буняченко Serhiy Kuzʹmych Bunyachenko | |
출생 | 1902년 10월 5일 |
러시아 제국 쿠르스크현 릴스크구 코로뱌콥카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쿠르스크주 글루시코보군 코로뱌콥카) | |
사망 | 1946년 8월 2일 (향년 43세)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부티르카 교도소 (現 러시아 모스크바 중앙 행정구 트베르스코예구 부티르카 교도소) | |
학력 | 오데사 육군사관학교 프룬제 군사대학 |
소속 정당 | 소련 공산당 → 무소속 |
복무 | 노농적군 |
1918년 ~ 1943년 | |
러시아 해방군 | |
1943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대령 (노농적군) 소장 (러시아 해방군) |
주요 참전 | 러시아 내전 소련-일본 국경분쟁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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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군인. 원래 소련군에서 복무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루마니아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안드레이 블라소프의 러시아 해방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전후 소련으로 끌려가 처형된다.2. 생애
2.1. 출생과 성장
부냐첸코는 1902년 러시아 제국 쿠르스크현 코로뱌코프카에서 가난한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4월 15세에 나이로 러시아 내전에 적군 편으로 참전하여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백군을 상대로 싸웠다. 1919년 전러시아 공산당에 가입하고 1923년 오데사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다. 졸업한 후 대위로 진급하여 바스마치 반란을 진압한다.[1] 이후 부냐첸코는 무공훈장을 수여받고 1932년부터 1935년까지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공부했다.1937년 부냐첸코는 소련,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이루어진 농업 집단화 정책을 비판한 혐의로 공산당에서 제적되었고 1938년 제39소총군단의 부참모장으로 임명되어 하산 호 전투에 참전했다.
1942년 자캅카스 전선에서 싸우는 제389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사령관으로 있는 동안 부냐첸코는 모즈도크-체르뱟뇨 지역 근처의 테레크강을 가로 지르는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부냐첸코는 주어진 명령을 따랐지만 붉은 군대의 일부 부대들은 아직 강을 건너지 않았고 주요 방어 대형이 와해된 이유로 부냐첸코는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다.
1942년 10월, 부냐첸코는 군사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부냐첸코의 형은 전쟁이 끝난 후 10년 형을 복역하는 것으로 감형받고 장교로 복직한다. 그 후 전투에서 부대인원 35% 이상을 잃은 제59소총여단의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11월 이미 병사들을 35%나 잃은 제59소총여단이 잘 싸울 리는 만무했고 결국 궤멸당한다.
2.2. 러시아 해방군
1942년 12월 부냐첸코는 블라디카프카스에서 서쪽으로 25km 떨어진 루마니아 육군 제2보병사단 정찰대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 포로로 잡힌 후 1943년 6월까지 크림반도와 헤르손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고. 5월, 부냐첸코는 안드레이 블라소프 장군을 만나고 러시아 해방군에 가담한다.1943년 7월 부냐첸코는 프랑스 르망에 있는 독일 육군 제7군 사령부의 통신장교로 복무하게 되었다. 1944년 6월과 7월에 그는 프랑스 해안에서 오버로드 작전을 방어하기 위해 2개 동방부대로 구성된 연대를 이끌었다. 서부전선에서의 공로로 2등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11월 10일 부냐첸코는 러시아 해방군 제1보병사단의 사령관으로 승진하여 제1보병사단을 이끌게 되었다.
1945년 2월 부냐첸코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3월에는 동부 전선으로 교체됐다. 4월 중순에는 붉은 군대로부터 오데르강을 방어하기 위한 작전인 4월 날씨 작전에 참전했다. 4월 날씨 작전이 실패하자 부냐첸코 장군은 4월 16일 제1보병사단을 오데르 강에서 체코 방면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 프라하 봉기가 일어난 5월 4일, 프라하에서의 부냐첸코와 안드레이 블라소프. 오른쪽 키가 큰 인물이 블라소프고 왼쪽의 상대적으로 단신인 인물이 바로 부냐첸코다.
부냐첸코의 제1보병사단이 프라하 최전방에서 진군하자 부냐첸코는 1945년 5월 4일 프라하 봉기를 이끈 파르티잔들과 협정을 맺고 파르티잔과 함께 부냐첸코의 병사들은 5월 6일 프라하 봉기를 진압하는 슈츠슈타펠을 상대로 교전했다. 5월 7일 저녁 체코 의회(CNC)[2]는 체코의회 내에 소련에 동조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인해 러시아 해방군이 프라하를 떠날 것을 요청했다. 부냐첸코는 프라하를 떠나고 미군이 진주해 있는 서부 체코슬로바키아로 철수했다.
2.3. 최후
5월 12일, 부냐첸코는 미군이 그의 사단의 공식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사단을 해산하고. 5월 15일, 부냐첸코와 사단 본부는 미군들에게 항복했다.하지만 소련과 미국 간의 합의로 인해 소련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포로는 소련으로 이송되게 되어 소련 시민권을 보유하지 않은 백계 러시아인을 포함한 부냐첸코와 그의 부하들은 전쟁 포로로 소련으로 보내졌다.▲소련군에게 인도된 세르게이 부냐첸코의 머그샷
항복 후 부냐첸코는 모스크바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부냐첸코의 재판은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의 다른 위원들 및 러시아 해방군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 참여한 12명은 모두 사보타주, 반 소비에트 선동, 쿠데타 음모,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재판은 피고의 참여 없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정치국은 이미 재판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인 7월 23일에 대학에 사형을 선고하도록 지시했다. 부냐첸코를 포함한 12명의 피고들은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946년 8월 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처형된 이들은 각각 NKVD에 의해 화장되었고 재는 돈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2001년 11월 1일, 러시아 연방 군사 대학은 부냐첸코를 포함한 모든 피고인에 대한 반소비에트 선동 유죄 판결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하지만 나머지 4개의 혐의는 유지됐다.
3. 기타
Hearts of Iron IV의 나치 승리 대체역사 모드인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 러시아 해방군으로 등장한다. 안드레이 블라소프 장군이 군벌들이 난립한 서러시아를 통일한 후 물러난 뒤 후계자가 취임하는데 이때 후계자중 하나가 부냐첸코다.부냐첸코는 전제주의 성향으로 블라소프의 유지를 이어 독일과 손절한다.- 또 다른 나치 승리 대체역사 모드인 Thousand Week Reich에서 모스코비엔 국가판무관부가 무너지고 나오는 러시아 해방군의 지도자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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