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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08:34:28

표도르 트루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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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39A6> 러시아 해방군 참모장
표도르 이바노비치 트루힌
Фёдор Иванович Трухин
파일:Fyodor_Trukhin_ROA.jpg
출생 1896년 2월 29일
러시아 제국 코스트로마
사망 1946년 8월 1일 (향년 50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국적
파일:러시아 해방군기(1944–1945).svg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학력 프룬제 군사학교
직업 군인
최종 계급 소장
정당 러시아 연대주의 인민노동연맹
경력 러시아 해방군 참모장
1944년 10월 ~ 1945년 2월 16일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생애
2.1. 독소전쟁
3.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소련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에 생포된뒤 러시아 해방군에 합류해 참모장를 지냈다.

2. 생애

1896년 코스트로마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1914년 코스트로마 제1김나지움을 졸업한뒤 모스크바 대학교에 입교해 약 2년간 법학을 공부하다가 1916년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연대 내에서 연대장으로 선출되어 적군으로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다.
파일:Fyodor_Trukhin.jpg
노농적군 표도르 트루힌 소장, 1940년
1925년 프룬제 군사학교를 졸업해 여러 부대의 참모장을 지냈고, 1936년 총참모부 학교 수료 후 전략부서 수석강사로 재직했다. 3년 뒤 여단지휘관에 이어 소장으로 진급했다.

2.1. 독소전쟁

파일:트루힌 블라소프.jpg
러시아 해방군 시기의 트루힌과 안드레이 블라소프[1]
1941년 6월 27일 북서전선 부참모장으로 리투아니아 페네베지스 지역에서 철수하던 도중 야코브슈타트 남쪽에서 독일 국방군에 의해 부상을 입고 생포되어 슈탈루포넨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얼마안되어 하멜부르크의 Oflag XII-D 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 그해 10월 러시아 노동인민당에 가입해 독일 당국에 반소 활동 의사를 표명했고 러시아 해방군 창설을 추진했다.1942년 9월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트루힌은 안드레이 블라소프에 의해 러시아 해방군 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1945년 4월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국군 남부군집단 사령관으로 체코 서부에 진주한 미 육군 제26보병사단과 협상을 하던 중 블라소프와 세르게이 부냐첸코의 제1보병사단은 프라하 봉기를 일으켰다. 트루힌은 부냐첸코의 제1보병사단과 합류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프라하로 향했으나, 가는 길에 친소 체코 파르티잔에 생포되어 5월 8일 소련군에 넘겨졌다.

모스크바로 이송된 트루힌은 안드레이 블라소프, 세르게이 부냐첸코 등 러시아 해방군의 주요 지휘관들과 법정에 세워져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1946년 8월 1일 모스크바 부르티카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했다.

3. 참고 문헌



[1] 오른쪽의 콧수염이 난 인물은 미하일 메안드로프 소장으로 적군 출신이며 소련군에서는 대령까지 진급하였고 소련-핀란드 전쟁과 독소 전쟁에 참여하였다. 1941년 키예프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고 1942년부터 나치 독일에 협력하였다. 그 해부터 1943년에 이르기까지 표도르 트루힌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노동인민당을 조직하고 반소 자원병을 모집하여 활동하였으며 선전전에도 참여하였다. 1944년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의 창설에 개입하였으며 여기에 배속되게 된다. 종전 후 1946년 부역자 재판의 심문에서 원래부터 소련 정권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조사결과가 있으며 그 재판에서 교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