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colcolor=#fff> 초대 러시아 보호군 사령관 미하일 표도로비치 스코로두모프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Скороду́мов Mikhail Fedorovich Skorodumov | ||
출생 | 1892년 4월 12일 | |
러시아 제국 | ||
사망 | 1963년 11월 15일 (향년 71세) |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
직업 | 군인 | |
최종 계급 | 소장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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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군인.러시아 내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망명했고, 2차대전 시기 나치 독일 휘하에서 러시아 보호군[1]을 창설했다.
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1차대전에 복무하였다. 독일 제국군에 포로가 되었으나 포로교환으로 생환했으며, 중상을 입고도 적군의 포, 탄약 등을 탈취하는 전공을 세우는 등 1차대전에서의 전공으로 성 게오르기, 블라디미르 훈장을 수훈받았다.2.2. 러시아 내전
이후 내전이 발발하여 볼셰비키를 피해 백군에 가담하였다. 남부로 도망하여 표트르 브란겔 휘하에서 복무하였다. 백군이 패배하고 난 뒤 세르비아로 망명하였다.2.3.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추축국에 점령당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위시한 공산주의 세력의 파르티잔 활동이 늘어나는 상황을 목도하게 된다. 때문에 반공주의의 입장 및 이주해 온 러시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르비아 군정청에 민병대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세르비아의 반공주의 정치인 및 나치 독일에 군사조직을 창설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독일은 약간의 지원만 하여 사실상 거절당했다. 스코로두모프는 포기하지 않고 세르비아의 군정장관인 하인리히 단켈만 항공대장과 그 참모장인 에리히 케비치 대령을 끈질기게 설득했으며, 결국 본인을 사령관으로 하는 러시아 보호군을 조직하기에 이른다.하지만 독일 국방군 산하의 조직으로 형성되었음에도 최고 지휘관만 독일의 명령체계 및 계급을 받고, 그 외 러시아 보호군 소속 러시아인들은 자체적인 러시아식 계급 및 명령체계를 갖출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독일은 애초에 백계 러시아인들조차 불신하고 있던 차에 스코로두모프의 다소 독립적인 행태의 군사조직의 운용을 용납할 수 없었다. 때문에 러시아 보호군을 창설한지 3일만에 독일군의 강압에 의해 사령관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참모장이었던 러시아 제국군 출신의 보리스 시테이폰으로 교체된다.
이후 게슈타포에 의해서 체포되었으며, 독립국의 수장이 되려 하였다는 누명이 씌워졌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교수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었으나 에리히 케비치 대령과의 관계 덕분에 3주 정도 체포되는 것으로 무마되었다. 석방 후에도 지속적으로 게슈타포에 의해서 감시받아 왔으며, 공산주의에 대한 항전을 선전하는 문서에 서명을 강요받았다.
스코로두모프는 다른 백계 러시아인 장교들이 그렇듯 동유럽에서의 상황을 러시아 내전의 연장선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백계 러시아인들의 안전을 위해 독일의 편에 서 있으면서도 독일의 남동유럽에서의 파르티잔 진압과 그 선전 내용을 비판하는 등 독일과 다소 거리를 두고 있었다.
2.4. 석방 이후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러시아 보호군에 관심을 두었으나 정식으로 부대 운영에는 관여할 수 없었다. 3년동안 구두 수선공으로 지내다 1944년에 이르러는 오스트마르크주로 이동하여 사병으로 러시아 보호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러시아 보호군은 영국군에게 항복하였는데, 대부분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고 완전 이주한 러시아인이었기 때문에 소련으로 송환되지 않았다.
때문에 스코로두모프는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고, 러시아 보호군 출신 러시아인들의 미국 이주를 도우며 여생을 보냈으며, 1963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사망하여 할리우드 포에버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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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배경 | 러시아 내전 | 제2차 세계 대전 | 독소 전쟁 | |
주요 이념 | 파시즘 | 반소주의 | 반자본주의 | 러시아 내셔널리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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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독일 국방군 소속이었으나, 1944년부터는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에 소속되었다. 남동유럽의 파르티잔 토벌을 중심으로 작전을 수행하였다. 초기에는 러시아인으로만 구성되었으나 점차 동남부 유럽 각 국가, 민족의 인력으로 충당되었고, 인력이 가장 많을 때는 만 여 명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