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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2 05:27:11

레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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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대 총비서
베트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초대 총비서
레주언
Lê Duẩn | 黎筍 (여순)
파일:1682216181161.jpg
출생 1907년 4월 7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꽝찌 성
사망 1986년 7월 10일 (향년 79세)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하노이
소속 정당
[[베트남 공산당|]]

1. 개요2. 초기 생애3. 독립운동과 공산당4. 베트남 전쟁시기의 활동5. 그 후6.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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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의 노동운동가, 독립운동가, 공산주의 지도자이며, 월남전 때 북베트남을 이끌었던 최고지도자다.

그는 북베트남을 지배하는 권력 집단인 베트남 노동당의 중앙집행반(중앙위원회) 총비서를 지냈기에 북베트남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고 여겨진다.[1] 그는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1976년 당명을 베트남 노동당에서 베트남 공산당으로 고치고 초대 총비서로 취임하였다.

2. 초기 생애

레주언은 1907년 베트남 꽝찌 성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아들로 태어났다.[2] 1920년 고등학교입학하기 위해 타지로 떠났는데, 결국 가정 형편으로 인해 학업을 그만 두었다. 1925년 판보이쩌우 사면 요구 운동이 일어나자 이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여러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의 사면 요구 운동에 참가하여 반식민주의 운동가가 되었다. 1926년 5월부터 다낭철도원으로서 일하면서 임금 협상 및 파업을 동반한 노동운동에 관여했고, 이 과정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을 접하게 되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1928년 신월혁명당(新越革命黨,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전신)에 입당하였다.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3. 독립운동과 공산당

베트남 공산당 입당 이후 노동자 투쟁을 통해 프랑스 식민 정부에 저항하다가 1930년 12월부터 1936년에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가 석방을 할 때까지 대략 7년간 투옥된다. 재판에서는 징역 11년 형을 선고 받았으나, 감형되어 풀려난 것. 그 후, 인도차이나 공산당 중기 지방 위원회 비서를 맡아 1939년에 당 중앙위원에게 선출되었지만, 1940년에 노동자 봉기를 계획한 혐의로 다시 5년간 투옥되었다. 1945년 8월베트남 독립동맹회하노이를 해방할 때 석방되었다.

같은 해9월 2일, 호찌민국가주석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이 건국된다. 레주언은 그 후, 주로 베트남 남부에서 활동하여, 1947년에 남부 지방 위원회 비서, 1951년 남부 중앙국 비서를 맡아 동년의 베트남 노동당 결당 대회(이 대회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부터의 지속을 강조하여 공식으로는 제2차 전당대회로 간주된다)에서 당 정치국원 겸 비서국원으로 취임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레주언은 베트남 중남부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이끌었으며, 프랑스군을 상대로 제법 많은 성과를 올렸다.

주언은 베트남 노동당 내에서 당내 급진파로 통하게 되었는데, 남베트남에 지하 조직의 확대 등을 지도하며, 이후 당내에서 남부파라고 주목받게 되었다. 1954년, 남부 중앙국을 개편한 남부 위원회 비서로 취임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에도 레주언은 남부에 머무르면서 저항운동을 조직하는 비밀 활동을 책임졌다. 1956년 당시 선언문 '남부에서 혁명으로 가는 길'을 집필했으며, 이를 통해 레주언은 남부에서의 혁명을 제1의 과제로 해야함을 역설했다.

4. 베트남 전쟁시기의 활동

토지개혁 이후 쯔엉찐 제1비서의 해임에 따라, 레주언은 1957년월북하여 하노이에서 당 제1비서 대리를 맡았다. 당시 북베트남 노동자당은 일단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황폐화된 북부부터 안정화시키자는 북부재건파와 남부에서의 혁명투쟁을 통한 빠른 적화통일을 우선시하는 남부해방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남부 출신이던 레주언은 남부해방파의 거두로서 호찌민과 보응우옌잡 등 북부재건파와 대립하였다. 1951년 당시 레주언을 만났던 베트민 출신의 응우옌 응옥(Nguyen Ngoc)은 PBS 베트남 전쟁에서 레주언에 대해 다음과 회상을 남겼다.
저는 레주언을 1951년에 처음 만났습니다. 전 젊은 간부였죠. 레주언은 다른 지도자들과는 너무 달랐어요. 그는 남쪽 국민들의 의지를 이해했습니다. 레주언은 그들의 의지를 북베트남에 가지고 온 것이죠.

1956년 제1비서 쯔엉찐이 시도한 대약진 운동을 모델로한 과격한 토지개혁의 대실패로 북부재건파가 수세에 몰리자 호찌민은 쯔엉찐을 해임하고 레주언을 제1비서 대행으로 임명하였다. 원래 호찌민은 심복인 보응우옌잡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레두언은 그저 대행으로서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레주언은 어부지리로 얻은 자신의 직책을 활용해 순식간에 당을 장악했으며, 1960년 제3차 전당대회에서 남부해방론에 경도된 당내 분위기를 등에 업은 레주언은 호찌민의 지지를 받은 경쟁자 보응우옌잡을 누르고 제1비서로 선출되었다. 정식으로 권력서열 No.2로 등극한 레주언은 보응우옌잡 등 북부재건파의 실권을 빼앗고 당과 군부를 레득토와 응우옌찌탄 등 자신의 심복인 남부해방파로 채웠으며 호찌민은 북베트남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가장한 뒷방 늙은이로 밀려났다.[3]

1969년에 호찌민이 사망하면서, 국가주석이 공석이 되자, 제1비서로서 명실공히 당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레주언이 최고지도자가 된 시점부터 미국은 베트남에서 닉슨 독트린에 따라 철군을 선택하게 됐다. 이에 힘입어 레주언은 1972년 이른바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를 감행했지만,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력에 저지 당했다. 부활절 공세 이후 닉슨 정부는 제1차와 2차에 걸쳐 북베트남에 상상을 초월하는 폭격을 가했지만, 1973년 1월 파리회담을 통해 미군은 철수했다. 레주언은 1974년부터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최종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고, 디엔비엔푸 전투영웅 보응우옌잡의 조언을 바탕으로 1975년 3월 최종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호치민 캠페인으로 불리는 이 작전을 통해 북베트남군은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을 함락시키고 최종적인 통일을 이룩했다.

북베트남의 주도로 남북 베트남이 통일되어 1976년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건국되었다. 같은 해 12월, 제4차 전당대회에서 베트남 노동당을 베트남 공산당이라고 개칭하여, 레주언은 총비서로 취임했다. 베트남의 국가 기구는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것이 헌법으로 명기되어 있어 베트남의 정치 구조상, 총비서가 된 주언은 베트남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5. 그 후

그 후 레주언은 남베트남의 급속한 사회주의화를 추진하여, 계획 경제에 의거한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의 관철을 목표로 했다. 한편 외교적으로는 관계가 악화된 중국에게 대항하기 위해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1978년코메콘에 가맹, 1978년 11월에는 소월우호협력조약을 체결했다. 같은 해 12월, 중국이 지원하는 이웃나라 캄보디아폴 포트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캄보디아 침공을 결행하였다. 또한 국내의 화교들을 중국으로 추방하였고, 1979년중월전쟁이 발발했다. 이러한 외교 정책은 미국이 주도한 국제적인 고립의 빌미가 되었으며, 경제가 침체가 되었다. 1979년 이후는 신경제정책을 제창하여, 생산 청부제의 도입, 농산물 거래를 일부 자유화시켰다. 1985년 가격통제의 폐지,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 등을 밝혔지만, 대규모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기 때문에, 국민의 불만은 높아졌다. 당내에서도 보다 근본적인 경제개혁이 불가피하다는 논의가 다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미 병상에 누워있던 주언은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신장병이 악화되어, 병 치료를 위해 1986년 1월부터 3월까지 소련에 체류하였다. 같은 해 5~6월의 제5차 중앙위원회와 제10차 총회를 열었고, 총비서의 직무를 쯔엉찐, 팜반동, 레득토 등 3명의 정치국원이 대행하도록 결정했다. 이 총회로 레주언은 권력을 잃었고, 그리고 7월 10일에 사망했다. 후임으로는 쯔엉찐이 서기장에 취임하였고, 같은 해 12월 제6차 전당대회에서 도이머이가 시행될 때까지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6. 관련 항목




[1]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베트남이 승리할 수 있는 3가지 요소로 베트콩의 반미투쟁, 호치민의 지도력 그리고 레주언의 결단력 및 능력으로 평가했다.[2] 베트남 노동당 지도부 중에 노동계급 출신으로 최고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라 할 수 있다.[3] 물론 호찌민은 최고 권좌에서 내려왔지만 공산권 및 제3세계를 향한 외교 활동은 활발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