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88><colcolor=#fff> 판보이쩌우 潘佩珠(반패주) | Phan Bội Châu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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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7년 12월 26일 |
대남국 응에안성 남 단 | |
사망 | 1940년 10월 29일 (향년 72세)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안남 보호령 후에 | |
직업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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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판보이쩌우는 베트남의 근대화, 독립운동가이다.2. 생애
1904년에 베트남 유신회를 결성을 주도하여 반프랑스 운동을 벌였으며, 일본으로 근대문물을 배워 올 유학생을 파견하는 '동유운동'도 활발히 추진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며, 외세를 이용한 독립,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비슷한 개혁을 추구하였는데[1],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반군주제 성향의 독립운동가였던 판쭈찐(Phan Chu Trinh, 潘周楨, 반주정, 1872~1926)과 토론해 보고 서로 의견이 다른 것 같다고 여기고 대화를 그만두기도 했다.[2] 그러다가 1911년 중국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에 영향을 받아 무장투쟁 공화파로 돌아서며 중국 광저우에서 베트남 광복회를 조직하였다.러일전쟁이 끝나간 1905년에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양계초)와 함께 베트남의 과거와 역사에 대해 만담을 나누었다. 만담의 내용은 훗날 편집되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책으로 출판되는데, 이것이 《월남망국사》이다. 월남망국사는 훗날 한국에 소개되어 당시 일본 제국의 식민지화 위협에 직면해 있던 한국인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1924년 상하이에서 프랑스 관헌에 체포, 하노이로 호송되어 프랑스 정부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민중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그를 후에시 교외에 종신가택연금 상태로 두었다. 죽기 얼마 전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여 후에를 점령했지만 계속 연금상태로 두었고, 베트남이 독립하는 것을 못본채 세상을 떴다.
사후에는 베트남 주요 도시 길거리에서 거리명칭이 붙어지는 등 베트남에서 애국지사로 평가받으나 현대 역사교육에서는 비중이 좀 떨어지는 편이다. 국부 호찌민의 아버지 응우옌신삭의 친구였기 때문에 직접적인 인간관계가 있었지만 호치민이 외국에 나갔다가 다시 귀국하게 된것은 판보이쩌우가 죽은 뒤였기 때문에 다시 만나지 못했다.
[1] 판보이쩌우는 초기에 아시아주의를 지지하였기에 일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으나, 1910년대~1920년대 이후 일본이 그냥 제국주의 국가임을 간파하고는 반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였다.[2] 참고로 판쭈찐은 어린 시절 근왕운동에 참여했던 아버지가 왕을 배반했다는 혐의로 부당하게 처형된 과거의 경험과 후에에서 경험한 조정 내의 부패 때문에 군주제 폐지를 주장한 인물이었다. 판쭈찐은 베트남이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기존의 상태로 독립을 이룬다면 또다른 세력의 지배 아래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프랑스를 이용하여 베트남을 발전시킨 후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던 인물이기도 했는데, 당시 베트남 총독이었던 보(Beau)에게 서한을 보내 프랑스가 기존의 관료제를 묵인해서 베트남 관리들이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고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는 것이라 지적하며 인재 등용, 과거제 철폐, 법령 개혁, 교육시설 확충 및 상공업 교육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낼 정도였다. [출처: 유인선,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2002, 이산) p324-p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