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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21:52:34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

스페인어: Plazas de Soberaní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a_del_sur_de_Espa%C3%B1a_neutral.png
1. 개요2. 역사3. 개별 섬4. 영토 분쟁5. 관련 문서

1. 개요

세우타멜리야를 제외하고, 스페인이 차지하고 있는 모로코 해안선 가까이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작은 북쪽 섬들을 일컫는다.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란 '주권의 장소들'이라는 뜻인데, 19세기 들어서야 스페인이 차지한 모로코 본토 북서부와 달리[1] 스페인이라는 국가가 성립할 때부터 차지하고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세력이 침투하면서 북아프리카 지역에 수많은 항구가 개항했고 발달됐으며, 이를 통해 무역과 해적의 노략질을 방지하고자 하는 노력도 함께 병행됐다. 바르바리 해적의 침략도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이런 북아프리카의 스페인령 영토들을 Plazas Fuertes de África (아프리카의 요새들)이라 불렀다. 19c~20c에 걸쳐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들이 독립하고, 1956년 모로코가 독립하여 '스페인령 북아프리카'로 불리던 본토는 상실됐지만, 다음의 조그만 섬들은 아직까지 스페인령이다. 이들 섬에는 민간인은 없고 수비대 군인들만 거주하며 사실상 군정이 이뤄지고 있다.

스페인의 자치지방(Comunidad autónomas)이 아닌 스페인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리하는 특수영토이다. 섬들의 총면적은 0.59㎢이다.

2. 역사

16세기 초 스페인 제국은 북아프리카 진출 교두보를 마련할 목적으로 서지중해를 따라 오랑, 멜리야, 튀니스, 트리폴리 등 여러 항구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때 페뇬 데 벨레스 데 라 고메라(Peñón de Vélez de la Gomera)와 알우세마스 군도(Islas Alhucemas)도 점령 대상에 포함되었다. 페뇬 데 벨레스 데 라 고메라는 오스만, 바르바리 해적과 엎치락 뒤치락한 끝에 1564년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2]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가 점령했으며, 알우세마스 군도는 1673년 점령되었다. 북아프리카를 연결한 이 일련의 성채와 요새들(Presidios)은 바르바리 해적이나 카빌리인 같은 내륙 부족 등 스페인에 적대적인 여러 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레판토 해전 이후 서지중해 해역에서 오스만의 위협이 줄어들고, 바르바리 해적의 활동량도 줄어들자 북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스페인의 관심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후 스페인의 관심은 아메리카 식민지 확장과 플랑드르, 이탈리아의 패권전쟁으로 옮겨지고, 이즈음 오랑을 제외한 북아프리카의 다른 항구들도 뺏기자 이 지역은 19세기까지 별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본토에서 떨어진 감옥 역할을 했다. 쿠바 독립 운동가들이나 스페인 정계에서 밀려난 카를리스타(Carlista) 파벌들이 이곳에 수감되기도 했다.
1820년대를 기점으로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들이 하나 둘씩 독립하자, 스페인은 이곳의 가치를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3]

그러던 중 1860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모로코가 와드-라스 조약(Treaty of Wad-Rass)으로 이들 지역을 공식적으로 스페인령으로 승인함과 동시에 모로코 해안을 자유항구로 개방하기 시작하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이 개항시키는 방법과 유사한 방법으로 스페인이 모로코의 문을 열자, 이 지역들은 북아프리카 지역 상업 활동의 중개기지 플랫폼으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해상 연락선 확충과 더불어 세우타-멜리야를 연결하는 전화선과 해저 케이블이 이 지역을 지나가도록 설치되는 등 인프라가 확충되자 인구도 급격히 증가해 한때 네자릿수 인구를 기록하기도 했다.

가장 인구증가율이 높았던 시기는 1900~1920년대였고, 인구가 정점을 찍은 시기는 1919년이었다. 알우세마스의 경우 인근 해안으로 향하는 스페인 생산제품들이 선적되는 항구 역할을 했으며, 영국령 지브롤터와 연계되어 하나의 경제권을 형성했다. 총기를 비롯한 군수품 밀거래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는데 스페인 행정관들의 묵인으로 밀거래가 계속되자 모로코의 술탄이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무역 규모가 팽창하자 스페인은 직접 모로코의 해안을 통제하고자 했고, 1912년, 페즈 조약(Treaty of Fez)으로 모로코는 결국 스페인과 프랑스에 분할되었다. 모로코 북부 해안지역이 스페인령 모로코로 편입되자 북아프리카 영토시스템의 상황을 구조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세우타와 멜리야가 주요 도시로 부상했다. 스페인의 모로코 본토점령은 아이러니하게 이 지역의 중요성을 다시 감소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게다가 1921년 발발한 리프 전쟁[4]으로 리프 반군이 페뇬과 알우세마스 군도를 포위하자 스페인 정부는 거주민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하여 인구 감소 추세는 4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이 지역이 지리적 중요성을 회복한 계기는 1957년 스페인령 모로코가 모로코 왕국으로 독립한 후로, 다시 국경지대로서의 지위와 기능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작은 영역이지만 스페인은 이곳에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일부 민간인들의 입도를 허용하여, 세우타-페르데-알후세라스-멜리야를 잇는 정기교통편도 재개되었다.

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공간 및 경계 기능은 1957년부터 계속 유지되었으며 특히 70년대 이후 과학조사를 통해 이곳의 생태학적 가치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차파리나스 제도(Islas Chafarinas)와 알우세마스 군도(Islas Alhucemas)의 경우 독특한 식생과 희귀조류, 포유류의 서식지라는 결과가 나왔다.[5]

이후 1989년 특수 조류 보호 구역(ZEPA, 1989)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이후 유럽 생물권 중요 자연보호지역(LIC, 2006)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의 풍부한 생태자원을 연구, 보존하기 위해 연구소가 들어섰으며, 스페인군과 함께 환경관련부서나 생물학자, 생태학자들도 거주하고 있다.

21세기 들어서는 항공교통의 발달로 지리적 중요성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스페인 입장에서는 스페인 제국 시절부터 이어진 상징성과[6] 생태학적 가치가 있는 지역이다. 반면 모로코로서는 스페인인이 다수 살고 있는 세우타, 멜리야와는 달리 지리적 요인과 국제역학 관계에 따라 반환될 가능성도 있기에 잊을 만하면 세우타, 멜리야와 함께 반환을 거론하고 있다.

3. 개별 섬

4. 영토 분쟁

영토 분쟁
실효 지배 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
영유권 주장 파일:모로코 국기.svg 모로코

지리적으로 모로코와 가까워 모로코에서 역사적, 지리적 이유를 들면서 세우타, 멜리야와 더불어 소베라니아의 영유권을 주장하여 함께 영토 반환을 요구하는 중이나 스페인은 모로코가 국가 개념을 세우기 이전부터 스페인의 영토였다며 거부하고 있다. 우습게도 영국이 지브롤터에 대해 비슷한 논조로 스페인의 반환 요구를 거부한다.

현재는 유럽 난민 사태의 영향으로 난민들이 유럽으로의 주요 망명 및 밀입국 루트로 활용해 스페인에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다. 종종 스페인에서 모로코에 책임이 있다고 따지는데 밀입국자들은 모로코에서도 골칫거리라서 적반하장이라며 비웃는다.

5. 관련 문서



[1] 스페인령 모로코는 1956년 모로코에 반환하였다.[2] 스페인의 명장이자 네덜란드의 압제자 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가 그의 사촌형이다. 가르시아는 이후 1565년 몰타 공방전(#)에도 스페인 지원군을 이끌고 공을 세워 펠리페 2세로부터 페르난디나 공작위를 수여받았다.[3] 이미 스페인이 영유권을 주장한 북위 61도 남부 유콘부터 자원이 워낙 빈약했고, 볼리바르의 거병을 기점으로 스페인령 식민지 곳곳에서 군사적 충돌이 동시다발로 일어나 스페인 내부에서도 이득이 없고 관리가 어려운 지역은 서둘러 처분하고, 기존 식민지나 잘 관리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4] 베르베르 부족을 이끄는 아브드 엘크림이 스페인의 식민지배에 저항하여 일으킨 무장봉기.[5] 생태 조사결과 9종의 멸종위기 무척추동물과 더불어, 개체수가 세자릿수에 불과한 지중해몽크물범, 보호대상종(Species of European Conservation Concern)인 오두앵 갈매기(Audouin’s gull)의 세계에서 두번째로 규모가 큰 서식지임이 밝혀졌다.[6] 사실 무역을 위한 거점 확보 성격의 1차 식민지들, 원료 획득과 시장 확보 목적의 18~19세기 초의 식민지들과 달리, 19세기 말 2차 식민지들은 발전된 열강의 군사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목표 대신 민족주의, 위신, 애국심 고취를 앞세운 국격 상승을 위한 비경제적 목적으로 구축된 것이다. 이러한 2차 식민지들(이탈리아령 리비아와 에리트레아, 독일령 뉴기니, 프랑스령 부르키나파소와 베냉, 베를린 회담으로 분할된 식민지들 등)은 21세기 기준 모두 독립했다. 1860년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는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2차 식민지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