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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5:37:04

브라이텐펠트 전투

브라이텐펠트 전투
Battle of Breitenfeld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1631년 9월 17일
장소

브라이텐펠트
교전국 스웨덴-작센 연합군
(공세)
신성로마제국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스웨덴 국기.svg 구스타브 2세
파일:작센 선제후국 국기.svg 요한 게오르그 1세
지휘관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틸리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파펜하임
병력 연합군: 42,000명
- 스웨덴군 24,000명
- 작센 선제후군: 18,000명

대포: 100문 ↑
신성로마제국군: 35,000명
대포: 34문
피해 사상자: 2,100명 ~ 5,200명 사상자: 20,000명
- 전사자: 7,600명
- 부상자: 12,400명

포로: 6,000명
결과 스웨덴-작센 연합군의 승리
- 신성로마제국군의 80% 궤멸
- 구스타브 2세 신화의 첫전투
- 신교군의 최초의 승리이자 신교군의 반격 시작
1. 개요2. 전투 이전3. 개전4. 결과

[clearfix]

1. 개요

1631년 9월 17일 수요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4km정도 떨어진 브라이텐펠트에서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장군이 지휘하는 황제군과 스웨덴 국왕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지휘하는 신교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30년 전쟁의 최대 분수령 중 하나로 꼽힌다.

구스타브의 군사개혁의 성과를 보여준 전투로 이전까지 패배가 없었던 무적의 제국군을 박살내고 사상 최초로 선형진이 테르시오를 격파하고 그 위력을 알린 전투이며,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위용을 처음으로 각인시킨 전투이기도 하다.

2. 전투 이전

30년 전쟁에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는 틸리 백작의 군대에게 루터 전투에서 참패한 뒤 발렌슈타인과 틸리백작이 이끄는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에 밀려 덴마크로 돌아가게 된다. 이 무렵 또다른 야심가였던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역시 이 때를 노려 끼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루터파이기도 했던 그는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한다는 명목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과 대립하던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 포메른 공국에 상륙, 독일 침공을 개시했다.

이 와중에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제후들의 반발로 인해 발렌슈타인을 황제군 총사령관에서 해임하고 역전의 노장 틸리 백작을 앉혔다. 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황제군의 식량이 떨어지자 황제군은 발렌슈타인에게 식량보급을 요청했지만 발렌슈타인도 궁핍한건 마찬가지라[1][2] 보급을 못했다. 결국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황제군은 신교도 도시인 마그데부르크를 약탈했는데, 이 과정에서 대 학살이 벌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신교도들은 똘똘 뭉쳤고 네덜란드 연합주와 작센의 요한 게오르그 1세도 구스타브 2세를 지지했다. 그러자 틸리백작은 요한의 변심을 이유로 작센을 침공했으며 1631년 9월 13일에 라이프치히에 맹공을 퍼부어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틸리 백작은 스웨덴군과 작센군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라이프치히의 성채에서 농성하기로 결심했지만 부사령관인 고트프리트 하인리히 추 파펜하임이 대규모 정찰대를 이끌고 나가다가 스웨덴군과 마주친 것. 결국 파펜하임의 구원군을 보내달라는 전갈을 받은 틸리 백작은 별 수 없이 전군을 이끌고 맞서기로 한다.

3. 개전

황제군의 포격대가 포격을 시작하자 스웨덴군 역시 응사하면서 전투가 개시되었다. 틸리 백작의 황제군은 기병대가 양 날개에 포병대가 후미에 보병대는 50열 횡대로 서는 전통적인 블록대형을 이루고 있었다. 반면 스웨덴군의 중앙을 구성한 보병들은 구스타브 아돌프가 고안한 전략에 따라 5~6열 횡대로 넓고 얕게 퍼져 있었고, 우익은 구스타프 아돌프가 직접 지휘하는 스웨덴 기병대가, 좌익은 동맹군인 작센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정오경 전투가 시작되자 우선 양측의 대포들이 포격을 주고받았는데, 황제군의 포격은 전열을 횡대로 배치하고 예비대를 후방에 빼놓은 스웨덴군에 생각만큼 큰 타격을 주지 못했던 반면, 스웨덴군의 포병은 숫적으로 황제군에 우세했고[3], 더 효과적인 유산탄 기술을 사용했으며, 황제군의 테르시오 진형은 밀집대형이었기 때문에, 스웨덴군보다 더 큰 피해를 받았다. 하지만 오후 2시경 강한 바람이 스웨덴군 정면을 향해 불어오자, 대포의 포연과 흙먼지로 인해 스웨덴군은 정면을 향해 눈을 뜨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에 파펜하임이 이끄는 황제군 좌익 기병대는 스웨덴군의 우익을 공격했다. 당대 최고의 기병대장 파펜하임이 이끄는 카라콜 기병대는 당대 최강의 총기병대로, 흑기병이라는 별칭까지 있을 정도의 강군이었다. 하지만 구스타프 아돌프가 지휘하는 스웨덴 우익은 기병과 보병의 합동 사격으로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고전하던 파펜하임은 스웨덴군의 우측을 크게 돌아 후방으로부터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 격퇴되었고, 오히려 스웨덴군 기병대가 역공을 개시하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반대쪽인 좌익의 작센군이었다.다국적군으로 구성된 황제군의 우익 기병대가 중앙의 보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돌격하자 최신 전술에 대한 지식도 훈련도 없었던 작센군은 이를 버티지 못했고 선제후를 포함한 작센군은 대부분이 도망쳤다. 이때 작센군의 일부는 퇴각하면서 스웨덴군의 보급마차를 약탈했고, 일부 스웨덴 병사들은 전투에서 패전한 줄 알고 같이 도주하는 추태를 보였다. 전체 병력의 40%에 달하던 작센군의 대부분을 잃으면서, 이제 스웨덴군은 황제군에 대해 숫적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테르시오 대형은 밀집대형이어서 기동성에 약점이 있었고, 작센군을 몰아낸 황제군 우익이 방향을 틀어 스웨덴군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기는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에 중앙의 스웨덴군을 지휘하던 구스타프 혼 장군은 스웨덴군 예비대와 도주하지 않았던 일부 작센군을 규합해 15분만에 좌익을 재편성했다.

스웨덴군은 수적 열세에서 양방향으로 위협당하면서도 위치를 고수하는 데 성공했고[4] 오히려 황제군이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후 4시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황제군 병사들의 얼굴에 흙먼지를 뿌리기 시작했고, 구스타브 아돌프는 1,000명 정도의 기병대 예비 병력을 지휘해 총공격에 나서 황제군 보병대와 기병대를 분리해 전열을 무너뜨렸다. 틸리 백작은 세 군데나 몸에 상처를 입은 체 전장에서 후퇴했고 파펜하임은 후위를 보호해 끝까지 살아남은 4개 연대를 이끌고 라이프치히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오후 7시에 전투가 종료되고 황제군은 전체 3만 5천명의 병사들 중 7.6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더해서 12400명의 병사가 부상을 입었고 6,000여명의 병사가 포로로 잡혀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5] 전투 중에 시골 마을로 흩어져 도망친 황제군 병사들의 운명도 가혹했는데, 잔인한 약탈에 분노한 작센의 농민들이 그들을 붙잡아 수백명씩 학살했다. 황제군은 라이프치히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투 다음날 철수했으며 구스타브 아돌프는 당당하게 라이프치히에 입성했다.

4. 결과

구스타브의 개혁의 성과를 증명한 전투이고 백전백승을 하며 신교군을 박살내던 제국군에게 제대로 한방을 먹인 전투이다.

이날 이 전투에서 제국군은 사상자와 포로를 합쳐 3만 5천중 2만 6천명이 사라지는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하게 되었다. 이전의 30년 전쟁 기간동안 백전백패하며 사기가 떨어진 신교군에게 있어 제국군과 전면전으로 붙어 첫 승리를 안겨준 전투였으며 이 전투로 인해 신교측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반면 다시 30년 전쟁이 한쪽이 유리해지면 다른 쪽이 반격을 하는 식으로 전쟁이 길어지는데 결과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전투이기도 하다.

스웨덴 진영에서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는데, 구스타브의 보병들이 황제군에 종군했던 사제들에게서 빼앗은 교회 종이었다. 이 소리에 구스타브는 "우리 형제들이 얼마나 기뻐하는가"라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1] 발렌슈타인이 라이벌인 틸리 백작한테 의도적으로 보급을 거부했다는 야사가 있지만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일단 당시 보급품은 아무리 자신의 영지라도 강제 징발이 아닌 구입으로 구했다. 30년 전쟁의 군사비는 현재와 비슷하게 엄청나게 비쌌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서 발렌슈타인은 독일 제후들한테 세금을 거두는 한편 자신의 방대한 영지를 담보로 돈을 빌렸다. 하지만 이 시점에선 발렌슈타인은 제국군 총사령관 지위를 잃고 메클렌부르크 영지를 막 상실한 상태였다 보니 수중에 자금이 거의 없었다. 카톨릭 군대가 패배하면 자신의 영지도 공중분해 될 수 있는데, 발렌슈타인이 바보도 아니고 케케묵은 라이벌 감정 때문에 보급을 거부했을리는 없다. 그보다도 황제도, 틸리의 돈 많은 주군도 폭주하는 군사비를 대지 못했는데 영지 반토막난 발렌슈타인이 보급을 제대로 해줄 수 있을 리가…[2] Mortimer, Geoff (2010). Wallenstein: The Enigma of the Thirty Years War. Palgrave Macmillan Press.[3] 스웨덴군은 3파운드 구경등의 경량포를 대량으로 사용했기에 연사력면에서도 스웨덴 포병의 높은 숙련도등의 이점을 가져 중포 위주의 황제군보다 유리했고 때문에 황제군의 중포들인 12파운드,24파운드 포의 장전시간은 대략 10여분이 걸리지만 스웨덴군은 때때로 머스킷 소총보다도 빨리 쏘기까지 하였다. 또한 무게가 가볍기에 당연히 황제군의 포병보다 기동성 면에서도 우위를 가졌다.[4] 구스타브가 유동적이고 혼란스러운 전투 속에서도 신속하게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전열을 배치했고 잘 훈련된 정예 머스킷 총병이 믿을 수 없는 발사속도를 유지했던 것이 컸다.[5] 현대전을 기준으로 해댱 부대 전투력의 1/10이상을 잃으면 무력화, 1/5 이상을 잃으면 전멸이라 표현하는데 이때의 황제군은 전사, 부상, 포로를 합쳐 수치상으로만 배치된 군대의 60% 가량을 잃어 말 그대로 전멸(...)을 기록하게 된다. 패주하면서 와해된 병사들을 합친다면 손실률은 더 올라간다. 이런 상황에서 파펜하임이 4개 연대라도 수습한 것이 대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