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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17:51:51

학열

1. 신라의 인물2. 조선의 인물

1. 신라의 인물

郝熱

생몰년도 미상

대야주(경상남도 합천군) 출신으로 관위는 찬간[1]을 지냈으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그의 아들 죽죽선덕여왕 재위 11년(642년) 가을 8월 대야성 전투에서 부하 용석과 함께 끝까지 성을 지키다가 죽은 것을 보아 대략 진평왕 시대의 인물인 건 틀림없다.

죽죽이 전사하기 전에 학열이 죽죽의 이름을 지은 것이 추운 겨을에도 시들지 않는 절조를 지켜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말게 한 것이라고 한 것이라면서 대야성에서 싸우다가 죽기로 하고 사망했다.

화랑세기에만 나오는 대남보의 아들로 대남보의 아들들이 천한 탓에 거리에 노래가 있다고 언급되며, 학열을 승부에 천거해 오지의 벼슬을 줬다고 하며, 호림공이 풍월주가 되면서 등용되어 동생 두 명과 함께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들었고, 두 동생과 함께 모두 충절을 숭상했다고 한다.

2. 조선의 인물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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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경순공주 경허 경헌
광언 기화 김연일 만공
명안 명연 무학대사 보우
불노 선수 설제 신미
영규 유일 유정(사명대사) 윤우
의엄 이동인 이회광 일옥(진묵대사)
지안 지탁 진희 청학
체정 초의선사 쾌선 태능
학열 학조 한용운 해안
혜희 휴정(서산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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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悅

생몰년도 미상

이름이 신미에 버금갔고 신미, 학조와 함께 세조가 삼화상(三和尙)이라 일컬어 매우 존경했다.

1452년에 학열은 권총의 비첩 세 사람과 함께 간통했으며, 권총이 의심해서 보니 학열이 한 비첨과 함께 누웠다. 학열은 권총에게 들키자 도망갔고 권총의 비첩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1459년에 신미, 학조 등과 함께 월인석보를 간행하는 등 한글 보급에 참여했다.

1468년에는 낙산사를 지었고 이를 조성하기 위해 세금을 민간에 과도하게 세금을 거뒀으며, 세조의 명에 따라 학조와 함께 명나라의 사신으로 금강산으로 오자 접대할 준비를 했다. 후에는 상건사도 창건했고 절을 세우면서 사치를 부리고 노역을 동원하거나 강릉의 제방을 세조에게 하사받고 밭을 소유해 관개의 이익을 독차지하는 등 탐욕을 부려 대신들의 비판을 받았다.

세조 시기의 승려들 중에 가장 간악해 가는 곳마다 해를 끼친다는 사관의 평가를 받았으며, 감사와 수령이라도 기가 두려워하며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1483년에 학조의 병이 중하다는 기사에서 신미와 학열이 모두 죽었다는 언급으로 보아 1483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1] 5두품나마에 해당되는 벼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