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0:07:18

박처원


파일:대한민국경찰참수리.svg
대한민국 경찰청 차장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73A3C,#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파일:치안정감계급장.svg
경무국 부국장 (1945~1946) 경무부 차장 (1946~1949)
초대
윌리엄 매글린
제2대
크롱 · 김태선
초대
최경진
제2대
한종건
내무부 치안국 부국장 (1949~1954)
초대
한종건
직무대리
김병완
제2대
김상봉
제3대
김장흥
직무대리
천세기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내무부 치안본부 1차장 (1986~1991)
초대
홍세기
제2대
김우현
제3대
유길종
제4대
김원환
제5대
홍명균
제6대
김인수
제7대
김영두
제8대
안윤희
내무부 치안본부 2차장 (1986~1991)
초대
조종석
제2대
유길종
제3대
이종국
제4대
김효은
제5대
여관구
제6대
최재삼
제7대
남상용
제8대
김화남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내무부 치안본부 3차장 (1986~1991)
초대
김우현
제2대
이경조
제3대
김원환
제4대
이인섭
제5대
이강년
제6대
박일룡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내무부 치안본부 4차장 (1986~1991)
초대
주병덕
제2대
김우현
제3대
이종국
제4대
김원환
제5대
이인섭
제6대
김원환
제7대
김종일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내무부 치안본부 5차장 (1986~1991)
초대
박처원
제2대
김우현
제3대
백형조
제4대
남상용
제5대
허진원
제6대
윤정원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경찰청 차장 (1991~현재)
초대
김효은
제2대
여관구
제3대
김화남
제4대
김기수
제5대
이기태
제6대
이승환
제7대
조성빈
제8대
유상식
제9대
구홍일
제10대
김형진
제11대
이근명
제12대
이헌만
제13대
최기문
제14대
성락식
제15대
임상호
제16대
김홍권
제17대
최광식
제18대
한강택
제19대
강희락
제20대
김석기
제21대
임재식
제22대
이길범
제23대
최병민
제24대
모강인
제25대
박종준
제26대
김기용
제27대
김정석
제28대
안재경
제29대
이인선
제30대
홍익태
제31대
이상원
제32대
이철성
제33대
김귀찬
제34대
박진우
제35대
민갑룡
제36대
임호선
제37대
장하연
제38대
송민헌
제39대
진교훈
제40대
윤희근
제41대
우종수
제42대
조지호
제43대
김수환
제44대
이호영
}}}}}}}}}}}}}}}
<colbgcolor=#0054a6><colcolor=#fff> 대한민국 초대 내무부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朴處源 | Park Cheo-won
파일:박처원.jpg
출생 1927년 5월 13일
평안남도 진남포 (현 북한 남포시)
사망 2008년 (향년 80~81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1. 개요2. 생애3. 기타4. 수상 경력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흥분한 수사관이 책상을 탁!하고 치니까 억!하고 쓰러지더랍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기자회견장에서 한 발언
대한민국경찰공무원. 제5공화국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의 총책임자였으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를 지시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1927년 5월 13일 평안남도 진남포(현 북한 남포시)에서 태어났고 최종 학력은 5년제 중학교 졸업이다. 해방 후 아버지가 친일 혐의로 체포되자[1] 소련군 사령관 통역을 맡으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홀로 월남하여[2] 경찰학교 17기에 응시한 후 1947년 종로경찰서 사찰계로서 경찰 근무를 시작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남조선노동당 지하조직 적발과 조직원 검거에 참여하는 등 처음부터 대공수사에 전념했고 9.28 서울 수복김창룡 특무부대장 산하의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서 검사 오제도와 함께 남로당원 및 부역 혐의자 검거 임무를 수행했으며 1958년에는 내무부 치안국 특수정보과(경위)로 발령받았다. 3.15 부정선거 때도 이강학 내무부 치안국장이 경찰서에 하달한 부정선거 계획의 외부 유출을 막는 비밀경찰 일을 수행했는데 4.19 혁명 후 부정선거 공작 은폐에 참여한 비밀경찰 대부분이 쫓겨났으나 박처원은 쫓겨나기는커녕 오히려 바로 그해 11월 4일에 전북경찰서 정보과로 발령받았다.

1966년에는 경감으로 승진해 치안국 정보과 3계로 발령받았고 1971년부터는 치안국 정보과 공작분실에서 근무했으며 1975년에는 총경으로 승진하여 치안본부 공작실장을 맡았고 1982년에는 경무관에 올랐는데 1986년에는 무려 치안감(5차장)에 오르기까지 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40여년간 경찰 생활을 하며 승진해 오면서도 경찰서장이나 시,도경찰국장 증 직책을 마다하고 오로지 대공업무만 담당하며 치안감 자리까지 오른 것이다.[3][4] 통상 경찰서장을 맡게 되는 경정-총경 시절이나 지방시도경찰국장(현재의 지방경찰청장)을 맡는 경무관 계급에서도 일선 지휘보직은 일절 맡지 않았다. 당장 그의 치안감 보직인 치안본부 5차장도 원래 정보외사파트인 4차장 관할이었던 대공수사파트를 이 사람의 치안감 진급에 맞추어 따로 분리하고 신설하여 만들어준 것이었다.[5]

2.1. 남영동 대공분실

치안감으로 영전하면서부터 치안본부 대공수사처 처장으로서 5공화국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남영동 대공분실을 총괄하게 되었는데 그는 부하들에게도 애정이 남달랐다.[6] 특히 그는 후술할 이근안 경감과 백남은 경정, 김수현 경정을 더 신임했다고 한다.#

그는 임기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일하며 1981년 학림 사건, 1985년 서울대 민추위 사건 등 온갖 공안사건 처리를 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운동권이 남영동에서 죽었으며 당시 남영동의 위상은 남산 국가안전기획부, 서빙고 국군보안사령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7] 이러한 수사 처리능력을 높이 산 정부는 박 치안감에게 1980년 녹조근정훈장, 1981년 홍조근정훈장 등을 수여했다. 이 시기에 그가 이끈 대공 수사조직은 경찰 내의 베테랑 수사 인력 중 선발된 요원들로 구성되었으며 '박처원 사단'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던 이가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이었다. 즉, 그는 수많은 민간인들을 고문하도록 명령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조작한 악행의 실무 책임자였던 셈이다.[8]

1987년 2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진 후 5월 29일에 고문 경관을 축소해 발표하고 거짓 진술을 지시한 혐의로 유정방, 박원택 등과 함께 구속되어 9월 21일 징역 1년 6개월 및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그는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과 함께 항소하여 1990년 8월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1991년 12월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됐고 1993년 파기환송심을 거쳐 1996년 대법원 상고심에서 최종적으로 1심처럼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자신이 지시하고 은폐한 고문 행위에 대해 사과는 없었으며 당뇨 증상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 사이인 1988년에 퇴직한 후 1993년까지 경찰청보안간부연수소 사무실을 빌려 '현대비교문화연구소'를 세워 공산주의 비교 연구를 하기도 했다.

2.2. 이후

1999년 이근안 도피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기소되었지만 2000년에 당뇨 및 치매 등 중병으로 징역 1년 및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거의 전해지는 바가 없는데 2018년에 나온 기사에 따르면 2008년경에 사망했다고 한다.[9]

1996년 11월호 월간조선에 실린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내가 뭘 더 바라겠다고 거짓말을 하겠소. 난 국립묘지에 묻힐 자격도 상실했소. 무슨 미련을 갖겠소."라며 뒤늦게 후회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10]

2014년 '학림 사건' 관련자였던 우파 언론인 박성현뉴데일리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저자 측은 수년 전 재향경우회 측에 그의 근황에 대해 물었으나 경우회 측은 "저희는 그런 사람 선배로 인정하지 않습니다"라며 없는 사람 취급하기도 했다.

3. 기타

4. 수상 경력

5. 대중매체에서


[1] 정확히는 아버지 박동훈이 경성제국대학 법학부 제1회 졸업생 출신으로, 조선총독부평안남도청에서 근무한 후 군수로 일했다고 한다.[2]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군 보급기지를 습격하다가 체포되어 손톱과 발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3] 이는 상술한 것처럼 가족이 공산당에 몰살당한 것으로 인한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라고 한다.[4] 오히려 이런 점 때문에 민주화 이후 급격히 몰락하고 현재 경찰계에서도 기수열외 당한 면도 있다. 다룬 분야에도 걸쳐져 있으면 그쪽으로라도 인맥을 터서 라인을 형성했을텐데 시대가 바뀌고 경찰의 대공분야가 힘을 잃게 되자 경찰쪽에서도 더 이상 박처원을 챙겨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5] 박처원의 치안감 승진발표가 10월 24일에 났는데# 내무부 직제개정을 통한 치안본부 제5조정관 보직 신설은 10월 27일에 이루어졌다.#[6] 경찰 내부에서는 박처원이 '업무에서는 호랑이처럼 굴다가도 부하들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고 평가했다.[7] 많은 사람들의 착각과는 다르게 5공 정권의 고문 행위는 주로 남산 안기부가 아니라 남영동을 비롯한 경찰에 의해 자행되었으며(애초에 안기부는 그렇게 인원이 많은 곳이 아니다.) 5공 정권의 대표적인 치부인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안기부가 아닌 경찰의 소행이다. 심지어 당시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로 악명높은 이근안도 안기부나 보안사 소속이 아닌 현직 경찰로서 박처원의 경호와 허드렛일을 도맡던 사람이다.[8] 남영동 대공분실 소속 전직 경관의 증언에 따르면 윗사람이 내려와 "말로 해서 되겠느냐"라며 고문을 독려했다고 한다.[9] 링크의 기사(2018년 기사)에 '10년 전 고령으로 사망했다'는 언급이 있다.[10] 그러면서도 박처원은 "간첩 잡을 경찰이 다 없어졌어요"라는 발언을 남겼다.[11] 해당 에피소드 내용은 박처원의 숨겨진 딸이라고 주장하는 한 여성의 사기 사건이었다. 그녀는 박처원이 사실 미국에서 은거 중이며, 박처원의 유산이 7천조라고 주장했다.[12] 다만, 박처원의 이런 지침이 실제로 반영되는 일은 그닥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5공시기 대공 사건들 중에는 공안조작 사건도 다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누구누구를 간첩으로 몰아서 여론을 묻으라' 는 청와대의 지시로 조작 대상이 구체적으로 지정되어 내려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13] 이전 서술에서는 46년~48년 2년여간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을 맡았던 노덕술에게 종로경찰서 사찰계원이었던 박처원이 직접적인 고문기술을 전수받았을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으나, 둘은 소속부서부터가 수사부서/사찰부서(현재 정보부서)로 달랐고, 수도경찰청 내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고위직이었던 노덕술에게 겨우 입직 2년차에 불과했던 말단 순경 박처원이 직접적인 업무지시 및 기술전수를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