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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덕기 金悳基 | |
| |
별명 | 고문의 황제 |
출생 | 1890년 |
강원도 양양군 | |
사망 | 1950년경 (추정) |
직업 | 고등계 형사 |
학력 |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졸업)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출신 고등계 형사. 그러나 조선인 출신 고등계 형사들이 그렇듯이 일본인 형사들보다 더욱 더 악랄하게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악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얼마나 악행이 컸는지 반민특위에서 유일하게 사형 선고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1]2. 생애
1890년 강원도 양양군에서 태어나 1911년 3월 관립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일제 하에서 33년 동안 관리로 근무하였는데, 그 중 23년 동안 경찰에 있었다. 1913년 3월 조선총독부 순사보에, 5월 강원도 양양경찰서 순사보에, 1917년 9월 강원도 경찰부 순사에 임명되었다. 1920년 6월 평안북도 제3부 고등경찰과 순사로 전근했고, 같은 해 8월 경부보로 승진해 평안북도 제3부 고등경찰과 경부보 겸 의주경찰서 경부보로 근무했다. 1922년 1월 경부로 승진해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 겸 의주경찰서 경부로 근무했으며, 8월부터 관동청 안둥경찰서 경부를 겸직했다. 1924년부터 1927년 6월까지는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 신의경찰서 경부, 관동청 안둥경찰서 경부를 겸하여 지냈고, 1927년 6월 경부 자격으로 고등경찰과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경시 직급까지 승진해 1934년 12월까지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시로써 고등경찰과장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관동청 안둥경찰서 경부를 계속 겸직하기도 했다.그렇게 그는 23년의 경찰 생활 중 16년을 평안북도 경찰부의 주임과 고등과장으로 있었다. 이때 만주 독립군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누구보다 가혹하게 탄압했다. #
2.1. 친일 행적
1921년 1월 평안북도 제3부 고등경찰과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시절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조사원 장경순을 체포했다. 같은 해 중반 대한광복군총영 부원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의 포고문을 배포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김원준, 이형련 등을 체포했다. 이 덕분에 다음 해인 1922년 경부로 승진할 수 있었다.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로 재직 중이던 1922년 가을 무렵,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단원들을 국내로 파견하여 의거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탐지하고 중국 안둥, 평톈 등지를 왕래하면서 정탐 활동을 벌였다. 1923년 2월에는 의열단이 현직 경찰인 황옥과 함께 계획한 대형 의거 계획을 탐지하여 이를 저지함으로서[2] 1924년 8월 조선총독이 주는 경찰 최고의 훈장인 경찰 공로기장을 받는 등 '공'을 인정받았다.
1924년 4월 평안북도 의주의 천마산 일대에서 무장 독립운동 단체 천마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최시흥을 체포했다. 같은 해 7월에는 평안북도 강계 일대에서 낭림대 대원으로 활동하던 단장 장창헌과 김용규를 체포하면서 곧바로 직접 엽총을 쏴 사살해 버렸으며[3], 정의부의 김형출과 그 부원 2명은 부하들에게 사살을 지시하고 그 자리에서 사살해 버렸다.
그의 자백에 따르면 그는 조봉암, 박헌영, 심지어 안창호까지 체포한 적이 있다고 한다. 1925년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돼 있던 박헌영, 임원근 등을 신의주로 압송했으며, 1926년 7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예심 중이던 박헌영 등이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관련하여 경성지방법원에서 병합심리를 받게 되자 경성으로 압송했다. 1927년 2월 만주 지린성에서 나석주의 추도식을 겸한 안창호의 대중 강연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탐지한 경무국이 평톈으로 파견한 형사대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당시 중국 지린성 헌병사령관에게 "길림에 한국인 공산당 5백여 명이 집합한다니 잡아주오"라면서 "놈들은 당신네 만주를 뒤덮으려는 놈들이요"라고 허위 제보를 했다. 그는 안창호 등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중국 정부에게 힘을 빌려줄 것을 요청함으로서 중국군이 그들을 체포하도록 한 뒤 신병 인도 절차를 밟으려 했던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해 강연회에 참석했던 안창호 등 200여명이 체포되었지만, 안창호에 경우 다행히 중국 정부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신병 인도를 거절한 덕분에 김덕기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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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림 등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기 위한 김덕기의 활동을 소개한 기사. - 매일신보 1932년 5월 11일 |
1927년 12월 정의부 군사총사령관으로 활동 중이던 독립운동가 오동진 장군을 지린성에서 체포하여 신의주로 압송했다. 1928년 11월 일제로부터 쇼와 덴노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5월 한국혁명군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이응서를 하이룽현 일본영사관 경찰들과 함께 공조하여 체포한 후 신의주경찰서로 압송했다. 1932년 1월 조선혁명군에서 활동하던 이진무 등을 체포했고, 같은 해 5월 평안북도 신의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격문 살포 사건'을 주도한 이종림, 박병상 등을 체포하기 위해 당시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를 지내던 계난수와 함께 형사대를 이끌고 경성으로 출장을 가서 체포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그는 경시로 재직하면서 항일 독립군에 대한 정보 수집과 체포, 철교 보호와 경계, 민심 사찰, 유언비어 취제, 시국강화회 개최, 일본군이 주도하는 신의주 비행기 건설공사 협조 등의 업무를 적극 수행했다.
이렇게 그가 일본 경찰로 복무하던 시기동안 체포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고 청산리 전투에도 독립군을 이끌고 참여했던 오동진 장군, 의성단 단장을 역임했던 편강렬, 참의부의 장창헌, 일목장군 이진무, 정의부의 김형출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체포 이후 이진무는 사형 집행, 오동진은 1928년에 옥사, 편강렬은 옥중 고문으로 병을 얻어 가출옥 중 사망했다.
반민특위에서 그가 한 자백에 따르면 자기가 취급한 독립운동가 관련 사건만 4,000여건에 체포하고 검거한 독립운동가 숫자만 무려 1,000여 명에 달하며 그 중 사형이 9.6%, 무기징역이 9.4%, 10년 이상의 징역이 10%, 1년 이상 징역이 71%에 달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조선의 롤란트 프라이슬러[4]라고 봐도 손색이 없다.
1934년 4월에는 쇼와 6~9년 사면 조군기장(漎軍記章)과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행정 관료로 중용되어 1934년 12월부터 1938년 7월까지 전라북도 내무부 산업과 이사관으로 산업과장을 지냈다. 재직 당시 도민들에 대한 시국강연회 개최 등을 통해 내선일체 이념을 전파했으며, 도내 물가·물자 조정 등의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1935년 10월 일제로부터 시정25주년기념표창을 받았다. 1938년 3월 조선교육령 개정이 공포되자 <매일신보> 1938년 3월 5일자 기사에 「경하에 불감」이라는 환영 담화를 발표했다. 같은 해 7월부터 1940년 9월까지 전라북도 산업부 농촌진흥과 이사관으로써 농촌진흥과장을 재직할 당시 시국인식 강화, 근로보국 활동 등의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했고, 1939년 4월 전라북도 중견여자훈련소 소장에, 6월 전라북도 지방이원양성소 강사에 위촉되었으며, 10월에는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0년 9월부터 1942년 6월까지 함경남도 산업부 상공과 이사관으로써 상공과장을 지냈으며, 같은 해 11월 열린 기원2600년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받고 일제로부터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친일단체 국민총력 함경남도연맹이 북청에서 개최한 강연회에 강사로 참여해 「물가와 물자의 배급」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강연 활동을 벌였고, 같은 해 12월 함경남도방공위원회 간사에 임명되었다. 1942년 6월부터 1943년 8월까지 평안북도 참여관 및 산업부 사무관으로써 산업부장을, 1943년 9월까지 평안북도 임금위원회 위원을, 1943년 10월까지 평안북도 농회 회장과 평안북도 지방미곡통제조합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3년 8월부터 9월까지 경상남도 참여관 및 산업부 사무관으로써 산업부장을 지냈고, 같은 달 동시에 경상남도 이원징계위원회 위원과 경상남도 황민연성도장 장장을 지냈다. 9월 경상남도 임금위원회 위원을 지내면서 동시에 12월까지 경상남도 참여관 겸 식량부 사무관으로써 식량부장을 지냈으며, 경상남도 식량부 관리과장 사무취급을 겸직했다. 같은 해 10월부터 조선식량영단 경상남도지부 감리관을, 12월부터 해방 때까지 경상남도 참여관 겸 농상부 사무관으로써 농상부장을 지냈고, 1944년 9월 조선철도간선 긴급증강 부산지방연락부 간사를 지냈다.
2.2. 해방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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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기의 체포를 알리는 기사. |
하지만 그의 출세가도는 8.15 광복을 기점으로 꺾였다. 그가 경찰로 재직하던 북한 땅에는 소련군정이 들어섰고 소련군정은 간접 통치를 택하면서 북한 지역의 친일파 청산 작업이 남한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밑돌을 깔아 주었다.[5]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직접 죽이기까지 했던 이 악인을 당연히 살려둘 리는 없었기 때문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는 곧바로 남한으로 도주하고 은둔해야 했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뤄지면서 반민특위가 결성되었고, 1949년 2월 8일 정오 무렵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녹촌리344번지에서 결국 반민특위 특경대에 체포되어 4월 16일 특별검찰부에 송치되었다. 그간의 악행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같은 해 6월 3일 사형이 구형되었고, 결국 7월 1일 최초이자 유일하게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같은 달 7일 즉시 항소하여 재심을 요청했지만 22일 각하되었다. 나중에는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6.25 전쟁이 터지기 전에 석방되었으나 독립투사인 정이형의 딸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직전에 정릉 근처의 산에 갔다가 추락사했다고 한다. 악행이 악행인 만큼 최후도 비참했지만 악행에 비해서도 너무나 허무한 최후를 맞이한 셈이다.
3. 여담
- 친일인명사전에 그로 알려진 유일한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 김태석, 노덕술, 하판락, 유승운과 함께 일제강점기 친일 고문 경찰의 대명사로 유명하지만 본인은 1949년 4월 27일 반민특위 1차 공판에서 장창헌을 살해한 것과 오동진을 옥사케 한 것은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고문은 해 본 적이 없다고 전면 부인했다. #[6]
[1] 참고로 원래 반민특위 처벌 대상을 보면 사형을 선고할 사람은 한일합병에 가담한 사람들밖에 없었고 독립운동을 탄압한 자는 최대 무기징역으로 처벌하도록 했다. (여기서 김태석이 최초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런데도 재판관들은 이 규칙을 깬 채 사형 선고를 내렸다.[2] 사건 당시 그는 김시현, 김재진 등이 폭탄을 가지고 국내로 잠입했고 폭탄 일부를 안둥현의 홍종우의 집에 보관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3월에 경기도 경찰부를 비롯해 신의주경찰서, 안둥경찰서 등과 합동으로 체포에 착수했다. 그 결과 홍종우, 조동근, 백영무, 조영자를 체포했으며, 폭탄 수십개와 각종 선언서 등을 압수했다.[3] 이게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이냐면 노덕술, 하판락, 신상묵 같은 극악무도한 고문 경찰들조차 아예 독립운동가를 체포한 자리에서 즉시 직접 총을 쏴 살해하는 만행은 저지르지도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4] 나치 독일 시기 독일의 대법원장격인 인민재판소장을 역임했고 인민재판소장을 역임한 3년 동안 혼자서 2,600여건의 사형 판결을 내린 것과(물론 이들 중에는 진짜 흉악범이나 간첩들도 있었지만 반나치 정치범들도 굉장히 많았다.) 피고인들에게 가혹한 태도로 일관한 것 때문에 '피의 재판관'이라고 불린다. 김덕기가 직접 형량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그가 취급한 독립운동가 대다수가 무자비한 형량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프라이슬러와 비교해도 큰 무리는 없다.[5] 사실 통상적인 인식과는 달리 북한도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에 있어서는 떳떳하지 못했는데 당장 북한의 제2의 국가인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작사한 리찬(李燦, 1910~1974)도 일제강점기 말기에 선전 시를 지어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온 사람이다. 다만 남한이 노덕술, 신상묵은 물론이고 김덕기와 비견될 수준의 악질 친일파였던 이종형처럼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지른 자들까지 모조리 면죄부를 주고 등용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양호해 보이는 것일 뿐이다.[6] 다만 생전 그의 별명이 '고문의 황제\'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이는 거짓말일 가능성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