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올드리치 에임스 Aldrich Ames | |
본명 | 올드리치 헤이즌 에임즈 Aldrich Hazen Ames |
출생 | 1941년 5월 26일 ([age(1941-05-26)]세) |
미국 위스콘신 리버 폴즈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낸시 세게바스 (전처) 마리아 델 로사리오 카사스 뒤푸이 (아내) |
학력 | 시카고 대학교 중퇴 조지 워싱턴 대학교 역사학 / 학사 |
종교 | 없음 |
직업 | 첩보원 |
소속 | 미국 중앙정보국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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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첩보원.본래 중앙정보국의 방첩 책임자로 일했으나 일할 당시 소련에 정보국의 정보를 판 것이 드러나 현재 종신형으로 수감되어 있다.
2. 생애
올드리치 에임스는 1941년 5월 26일 위스콘신주 리버 폴즈에 칼튼 세실 에임즈와 레이첼 에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CIA요원으로 동남아에 발령받아 올드리치는 그 곳에 지내기도 했다. 아버지가 CIA에서 일하니 아들인 올드리치도 자연스럽게 진로를 그쪽으로 정했고, 고등학생 시절 CIA 직원 자녀들에게 인턴을 주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3년 동안 기록 분석가로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시카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타국의 문화와 역사를 공부하려고 했지만, 금방 싫증이 나서 2학년을 마치기도 전에 중퇴했다. 그리고 CIA에 정식으로 입사해 인턴 시절 했던 업무와 똑같은 일을 했다. 그 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입학해서 학위를 딴 올드리치 에임스는 1969년 같은 CIA 동료인 낸시 세게바스와 결혼하기도 했다.그 후 튀르키예 앙카라로 가서 당시 튀르키예 정부 전복 활동을 하고있던 공산주의 학생 조직 튀르키예 혁명청년연합[1] 와해 활동을 하거나 소련 동유럽 부서에서 자산 관리를 담당하기도 했다.
3. 활동
1981년 올드리치 에임스는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 시티에 발령 간다. 거기서 그는 뉴욕에 있는 아내를 버리고 외도를 저질렀는데 그 대상은 주 멕시코 콜롬비아 대사관의 문화부 직원인 마리아 델 로사리오 카사스 뒤푸이였다. 원래 외국인과의 연애는 CIA에 보고해야 하는데 그는 보고하지 않고 계속 그녀와 만났다.[2] 하지만 이는 아내 낸시의 귀에 들어갔고 결국, 1983년 아내와 이혼한 후 2년 뒤 불륜상대였던 로사리오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이혼 합의의 일환으로 아내에게 진 빚을 갚고 낸시에게 위지료로 매달 총 46,000달러를 지불하기도 합의했다. 하지만 CIA 하급 직원인 그는 정도의 위자료를 지불 할 능력이 없었고, 새부인인 로사리오는 매우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여자라 그의 지갑과 봉투는 두둑해질 날이 없었다. 결국 올드리치 에임스는 소련에 정보를 팔기로 결정했다. 때 마침 그가 대(對)소련 방첩관에 보임되며 소련 관련 공작 기록 등 주요 기밀문서를 다루어 거의 모든 중요 자료에 접근이 가능했다.1985년 4월, 올드리치 에임스는 본격적으로 스파이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소련 대사관으로 대담하게 들어가 거기 있던 외교관에게 봉인된 봉투를 건넸다. 그 봉투에는 미국 스파이로 활동하고 있는 KGB 요원 2명의 명단과 함께 5만달러를 달라는 쪽지가 있었다. 그걸 본 소련은 그 즉시 그를 소련 스파이로 삼기로 결정하고 거액의 돈을 지불했다. 그리고 그는 해외에 있는 소련 대사관 KGB 요원들과 접촉하면서 25명 이상의 소련 내 미국 스파이 명단과 100건이 넘는 CIA의 대소련 공작 기밀 문서를 넘겼다.[3] 그렇게해서 올드리치 에임스는 총 460만 달러를 소련으로 부터 받아냈다.[4]
올드리치 에임스는 소련에게 받은 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게 그의 발목을 잡고말았다.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에 호화 주택을 사들였고 고급 승용차 재규어를 구입하고 필리핀 출신 메이드를 두는 등 자신의 연봉인 6만~7만 달러로 감당할 수 없는 소비를 하자 동료들이 그가 수상하다고 눈치를 챘기 때문이다. 결국, 1993년 3월 CIA와 FBI는 그에대한 집중적 수사를 시작했다. 때 마침 그가 130만 달러를 예치해 둔 스위스 은행 계좌가 발견되어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1994년 2월 22일, FBI는 러시아 모스크바로 출국하려던 올드리치 에임스를 체포했다. 1994년 유죄 협상의 일환으로 올드리치 에임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그의 아내 로사리오는 탈세와 간첩 공모 혐의로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현재 그는 인디애나 테레 오트에 있는 교도소에 복역 중이고, 조국을 판 올드리치 에임스가 사형이 아니라는 사실에 분개한 미국 여론에 의해, 미국 의회는 외국 스파이 활동에 대한 사형을 부활시켰다.
4. 여담
에임스를 소재로 영화 ‘올드리치 에임스: 내부의 배신자(Aldrich Ames: Traitor Within)’(1998)와 ABC 방송의 미니시리즈 드라마 ‘디 애세츠(The Assets)’(2014)가 제작되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1] 1965년 튀르키예에서 설립된 공산주의 단체로 1969년 당시 튀르키예 주재 미국 대사 로버트 코머가 앙카라 대학 캠퍼스를 방문하자 그의 차에 불을 지르거나, 미국 제6함대가 튀르키예에 정박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조직은 1971년 튀르키예 쿠데타 때 해산되었다.[2] 몇몇 직원들은 알고있었지만 쉬쉬했다.[3] 그가 넘긴 스파이 명단에는 KGB 제1총국 책임자인 게나디 바레닉과 25년 동안 미국 스파이일을 하던 소련군 참모본부 정찰총국(GRU)의 고위간부인 드미트리 폴랴코프도 있었다. 그 2명은 정체가 발각된 직후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4] 올드리치 에임스와 소련 KGB요원과 접촉한 방법 중 하나는 USPS 우체통이었다. USPS 로고 위에 수평 분필 자국이 소련측과의 접촉이 필요하다는 신호였다. 지금 그 우편함은 현재 워싱턴 D.C.에 있는 국제 스파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