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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십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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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십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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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년경 오대십국 전반기의 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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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년경 오대십국 중반기의 형세.
파일:중국 남당.jpg
951년경 오대십국 후반기의 형세.

1. 개요2. 특징3. 오대4. 10국5. 기타 지방 세력6. 영향
6.1. 중국 및 북방 초원6.2. 한반도6.3. 베트남
7. 외교8. 둘러보기

1. 개요

주씨 이씨 석씨 유씨 곽씨(朱李石劉郭)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梁唐晉漢周)
모두 합쳐 열다섯 황제(都來十五帝)
어지러운 오십 년을 펼쳤네(播亂五十秋)
수호전 서문

5대 10국 시대(五代十國時代,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period)는 (唐)(618년~907년) 왕조가 멸망한 10세기 초엽부터 (宋)(960년~1279년) 왕조가 개창된 10세기 중엽까지 53년, 약 반세기 동안 이어진 시대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시기는 혼란기로, 한국사후삼국시대부터 고려 광종 치세까지 겹치는 시기다.

5대 10국에서 5대는 화북 지방에 자리잡은 5개의 왕조를 지칭하며, 10국은 중원 이외의 강남사천 지방에 자리잡았던 10개의 나라들을 통칭한다.[1]

사이의 시기라는 점으로 인해 ‘당말송초(唐末宋初)’, ‘당ㆍ송 교체기(唐宋交替期)’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5대 10국시대를 줄여서 ‘5대 10국’ 또는 ‘5대(五代)’라고도 부른다.

서진이 멸망하고 전개된 5호 16국 시대와 이름은 비슷하고, 그 전개 양상은 비슷하다. 또한 불교세도 강했다는 게 공통점이다. 다만 5호 16국보다 약 600년 후의 시대다.[2]

2. 특징

같은 중원의 혼란기이지만 춘추ㆍ전국 시대(기원전 770년~221년)위ㆍ진ㆍ남북조 시대(220년~589년)보다 훨씬 짧게 전개되었기에 일부에서는 이 시기 이미 중국인들에게 통일 왕조에 대한 강한 염원이념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중국사에서 고대로부터 중세로 이르는 기간 동안 분열의 시기는 점차 짧아진다. 5대 10국 이후로는 분열기 자체가 장기화되지 않는다.[3]

5대 10국 시대가 시작하기 이전부터 당은 이미 혼란스러운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당 후기 번진 세력이 할거하기 시작한 안사의 난이 발발한 755년 또는 난이 끝난 763년부터 주전충애종에게 선양을 받는 907년까지인 번진 할 거 시기부터 각 번진별로 반독립한 상황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안사의 난 이후로 당나라 조정은 대항하는 지방 절도사들과 대립하다가 토벌과 역습을 당하는 어지러운 세월이 이어졌다. 안사의 난 때는 곽자의 등이 있어 버틸 수는 있었지만 혼란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5대 10국 시대만 보면 50여 년이었지만 실질적인 혼란 시기는 755년~763년부터 979년까지 약 2백 년 정도로 볼 수 있어 짧다고 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전의 혼란 시대와 양상과는 다소 달랐다. 당 이전의 통일 왕조인 한과 비교하면, 한과 당 모두 중앙 정부의 권위와 통제력이 실추되자 황건적의 난안사의 난이라는 반란으로 망국의 길을 밟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후한의 멸망 이후 도래한 혼란기인 위ㆍ진 남북조의 경우 초기인 삼국시대에는 한의 정통성을 계승한 통일 왕조 건설이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다뤄졌다. 때문에 한나라의 정통성과 국가 구조를 계승한 조위와, 조위를 계승한 진이 일시적으로 중국을 통일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북방계 유목민들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당시로서는 변방인 강남 지역으로 자리를 옮겨 명맥을 유지하는 데 급급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당시의 문화와 경제 중심지이던 중원을 차지한 것은 북방 유목민이 중심이 된 수없이 많은 유목 국가들이었다.

결국 370여 년에 이르는 기나긴 대혼란기에서 이전 통일 왕조를 계승한 새로운 통일 왕조의 건설이 주요한 정치적 과제로 다뤄진 것은 길게 잡아도 초기의 100년 정도에 불과했다. 중국을 재통일한 의 경우 북방 유목민의 유입으로 세워진 국가들을 통합하여 세워진 국가라는 점에서 중국의 통일 왕조 개념에서 중요한 '이전의 통일 왕조가 붕괴하면 새로운 통일 왕조가 나타나 대체한다'는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고, 새로운 통일 국가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하지만 5대 10국 시대는 위ㆍ진ㆍ남북조와 혼란의 양상이 조금 다르다. 당이 붕괴한 이후에도 당시까지 문화와 경제, 정치의 중심지였던 중원을 통제하던 5대와, 이전 시대에 비해 경제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변방에 가깝던 강남을 중심으로 독립한 10국의 양상이 이어진 것이다. 즉, 중앙 정부의 통제력 상실로 외곽 지역의 10국 및 절도사 세력들이 독립해 나갔지만, 통일 제국의 중심부인 중원 지역 자체는 5번이나 왕조가 교체되는 와중에도 단일한 정치적 구조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중심부의 신 왕조로 탄생한 북송이 독립 세력인 10국을 흡수하는 형태로 중국이 재통일되었다는 점까지 생각한다면, 5대 10국 시대의 양상을 제국의 영향 범위 축소와 외곽 지역의 독립 → 제국의 왕조 교체 → 새 왕조에 의한 영향 범위 재확장으로 보는 관점 역시 나름의 정당성을 가진다. 다른 혼란기인 춘추ㆍ전국 시대는 통일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이니 논외며, 당 이후에는 왕조가 교체된 사례는 여러 번 있지만 이와 같은 분열로 인한 혼란기는 다시 오지 않았고, 중국 통일 왕조 교체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왕조가 몰락하면 다른 왕조가 그를 대체하는 체제가 구축되었다.

특이한 점은 왕조는 몇 번이나 바뀌었음에도 신하와 관료층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재상 풍도는 자신이 "5왕조 8성씨 11군주(五朝八姓十一君)"를 모셨다고 회상했다. 또한 이런 경향은 남북조시대 남조의 상황과 동일하다. 후경의 난이 벌어지기 전까지 남조 역시 황실만 교체되고 나머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송태조의 조씨 가문도 마찬가지로 송태조가 성인이 될 때까지 바뀐 세 왕조에서 꾸준히 근무했다. 남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국내 정세가 덜 어지러웠고, 왕조가 바뀌면서 전란이 일어났어도 일반 백성들의 삶은 궁핍하지만 어느 정도 유지가 되었다. 백성들에 대한 학살이 빈번했던 남북조시대 남조(유송, 남제, 남량, 남진)의 폭군들에 비하면 이 시기에 기본적인 선을 지켰다.

기회주의자 간신배 같이 지조 없고 몸보신에 인생 바친 처신의 대부 풍도는 백성들을 돕기 위해 재산과 체면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사랑받았던 명재상이었다.[4] 그리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후량의 태조 주전충 또한 애민정신이 있어서 백성들에게는 동정적인 면모를 보여준 일도 있었다. 심지어 천 년 넘게 한간이라고 비난 받는 석경당도 백성들을 상대로 학살하거나 크게 문제를 빚지 않았다. 또한 후당의 황제 이종가는 요의 지원군과 함께 쳐들어온 석경당에게 패퇴하고 절망하여 궁궐에 불지르고 자결하려 했으나 황후 유씨가 궁궐이 불타면 백성들이 다시 짓느라 고생하게 될 테니 그러지 말라는 조언을 듣고 낙양 현무루에 가족들과 함께 올라가 현무루만 태운 일화도 있다. 후주의 시영 또한 "첫 10년 동안 천하를 통일하고 다음 10년 동안 백성이 삶을 안정시키고 마지막 10년 동안은 태평성대를 이루어보리라"라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이를 보면 백성들 삶이 힘든 이유도 지배계층의 학정이나 전란이 많아서 그렇다기 보다는, 혼란스러운 내치 문제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은 세금 걷는 악당인 후당의 공겸 같은 전형적인 '안정적인 왕조 시대의 문제'들로 괴로워했다.

반란과 외세의 침략에 시달린 당 말기와 비교하면, 갈라진 지방 정권들이 터를 잡은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했던 편이라서 백성들 입장에서는 나은 면도 있었다. 실제로 이 시대의 지방 정권인 10국들의 경우 오호십육국 시대의 국가들이나 남조 국가들보다 정권의 안정성도 강했고, 경제적ㆍ문화적으로 더 번성했다. 실제로 북송이 중국을 재통일한 이후 이 시기의 기반을 바탕으로 문화적, 경제적으로 크게 융성했다.[5] 이처럼 분열기를 막연하게 난세였다고 보는 시각은 전형적인 전통 중국사 관점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시기에는 중국의 '중심이 한 번 이동하게 된다. 진나라 때부터 수도 역할을 해왔던 장안, 낙양 일대가 황폐화되자 후량은 주전충의 봉지였던 개봉으로 천도했다. 이후 개봉은 남송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지가 된 반면, 장안낙양은 두 번 다시 제국의 수도가 되지 못한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 2가지가 꼽힌다. 하나는 기후변화로 오랜 기간 농사를 지어 관개가 중요하지만 이 지역의 잦은 전란으로 인해 사회 기반 시설이 붕괴되어 환경 파괴가 일어나 토질이 악화, 관중 평야의 생산력이 떨어지면서 수도에 요구되는 막대한 100만 규모 인구를 더 이상 자체적으로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2번째로는 강남 개발화북 중에서도 대운하에 훨씬 가까운 동부 지방이 인구 부양에 유리해진 것이다. 환경변화로 인한 국력 쇠퇴는 문명을 존속하고 발전하는 데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중국 대륙은 광활한 지역이다보니 화북ㆍ강남 같은 대체 가능한 지역들이 있어서 마치 돌려막기처럼 문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6]

전근대 중국에서 가장 부계혈연에 연연하지 않는 시대이기도 했다. 후당의 2대 황제 이사원이극용의 양자지만 혈연상 남이었고[7] 후주의 2대 황제인 시영곽위의 양자지만 처조카였다. 후량의 건국자 주전충도 친자식들이 있음에도 양자인 주우문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다 친아들 주우규에게 시해당했다. 당시에 이름난 세력가들은 유능한 청년들을 양자(가자)로 들여 자신의 부하로 삼는 것이 유행했는데 이러한 유행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3. 오대

오대십국시대 5대(代)
후량
(後梁)
후당
(後唐)
후진
(後晉)
후한
(後漢)
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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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후당 교체기(923년)의 지도[8][9] 후주 건국기(951년)의 지도

오대 왕조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후량(後梁, 907년~923년)
  2. 후당(後唐, 923년~936년)
  3. 후진(後晉, 936년~946년)
  4. 후한(後漢, 947년~951년)
  5. 후주(後周, 951년~960년)

이들은 당의 후신이자 송의 전신으로서 중앙의 정통왕조로 분류되는 다섯 왕조이며, 이 다섯 왕조들의 흥망성쇠가 오대십국이라는 연대의 중추가 된다. 물론 "후"라는 이름은 전부 훗날 붙여진 것이다. 연대를 보면 알겠지만 2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하나도 없었고, 다섯 왕조를 모두 합쳐도 고작 53년밖에 가지 않았다. 단명왕조인 전국시대 통일 후의 진나라, 오호십육국시대에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후연, 또는 오호십육국을 처음으로 잠시 통일한 전진이나,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보다 더 짧다. 심지어 후한은 고작 4년이다. 단, 후한은 북한까지 합치면 오히려 오대 중 가장 오래 존속된 나라라고 볼 수도 있다.

이 5대 왕조는 왕조의 안정성이 굉장히 취약했고, 몇몇 황제들을 빼면 중대한 결점을 지니고 실책을 저질렀다.
  1. 후량의 주전충은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헤게모니를 해체하는 과정이 굉장히 비윤리적이고 잔인했던 사람이었으며 사생활 면에서도 굉장히 음란하여 며느리와 간통하던 인간으로, 결국 아들의 손에 처참히 죽었다.
  2. 후당의 이존욱은 전쟁 면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세웠지만 막장 인성을 가진 황후를 만난 것과 지나친 음주가무, 그리고 어이없는 중과세 등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3. 후진의 석경당은 황제가 되고 싶어서 적국의 군주인 야율아보기와 내통해 요충지를 통째로 바쳤고, 요나라를 상국으로 떠 받들었다. 막상 황제가 되었지만 통치를 잘하지도 못했다.
  4. 후한은 4년 만에 망해버려 최단명 정통왕조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5. 후주는 잘 가던 중 세종 시영(곽영)의 요절로 그대로 무너졌다.

다섯 왕조의 국호를 보면 흥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양(梁)을 제외하면 그 이전 정통 통일 왕조의 이름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당 → 진 → 한 → 주) 그리고 후주의 뒤를 이어 탄생해서 통일 왕조를 수립한 (宋)은 본래 상(은)나라의 후예였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이것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볼 수 있다.[10] 주나라가 상나라의 후손들을 위해 분봉해 준 땅이 송나라였다. 참고로 하나라 후손에게 분봉한 나라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기나라였다.

특이한 점이 있는데, 처음부터 서로 적국이었던 후량과 후당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의 시조가 전 왕조 시조의 측근이었다는 것이다.
  1. 후량의 시조 주전충은 하남군벌의 거두였다.
  2. 후당의 개조 이극용은 산서군벌의 거두였으며 후당의 2대 황제인 명종 이사원은 이극용의 양아들로, 이존욱의 인척이자 장수였으면서 반란으로 황위를 획득한 인물이다.
  3. 후진을 세운 석경당은 그 이사원의 측근이자 사위였다.
  4. 후한을 세운 유지원은 그 석경당의 측근이었다.
  5. 후주를 세운 곽위는 또 유지원의 측근이었다.
  6. 송을 건국한 조광윤은 곽위의 양아들인 시영의 측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나라가 난립한 듯하면서도 연속성이 있는 이 시대의 특징을 잘 말해주고 있다. 나라 한번 바뀌면 피바람이 휘몰아쳤던 오호십육국시대와는 달리 이 당시 중원의 혼란기는 바뀐 것은 황성과 국명뿐이고 나머지는 큰 변화가 없었다. 1인자를 제거한 2인자가 왕위에 오른 것이다. 풍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밑의 사람들과 정치 체제는 거의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주전충 때 당나라 기득권들을 잔인하게 제거한 일이 있었고, 풍도가 '난세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그렇지 이 시대의 관료나 백성들에게 있어 오대십국시대는 이전 시대처럼 왕조가 바뀌거나 정권 실세가 바뀌면 피바람이 부는 그런 시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후당 왕조 교체기쯤 되면 당나라 때의 명문가들이나 기득권들도 다시 어느 정도 존중을 받기도 했었고[11], 그때 만들어진 관료조직이 왕조가 바뀌어가는 과정에서도 송나라가 건국될 때까지 안정적으로 이어졌다. 즉, 풍도가 특별히 처신을 잘 했다기 보다는 당시 세태가 왕조가 바뀌어도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단명왕조의 연속이었던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천하는 생각보다 안정적이었다.

이는 중화의 헤게모니 자체가 혈통이 다른 지도자로 바뀌면, 즉 역성혁명이 일어나면 나라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이었으면 단일 국가로 지속되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로마 군인 황제 시대나, 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말기의 위그노 전쟁과 이를 수습한 앙리 4세의 부르봉가로의 왕조교체, 장미 전쟁 시기의 잉글랜드 같은 유럽의 왕위계승 혼란기와 거의 유사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여러 왕조가 단명했던 이유도 역설적으로는 왕조가 바뀌어 손해보는 사람이 이전 왕조의 황제나 그 가문들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관료들이나 선비, 백성들의 경우는 왕조가 바뀌더라도 안정적으로 자기 안녕과 기득권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왕조가 바뀌는 데 저항할 필요가 없었으니 반발도 적었다. 주전충이 당 애종에게 선양이라는 형태로 보위를 넘겨받은 이후에는 왕조가 바뀌는 과정이 철저하게 힘과 힘의 대결로 이뤄졌던 것도 그런 측면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선양이라는 형식을 따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분이 덜 중요한 사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명분을 따져가며 살던 시대보다 더 안정적이고 평화로웠다고 할 수 있다.

3.1. 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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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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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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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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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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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0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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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楚)

(吳)
오월
(吳越)
전촉
(前蜀)

(閩)
남평
(南平)
남한
(南漢)
후촉
(後蜀)
남당
(南唐)
북한
(北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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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년대 9국 병립도

한편 10국은 5대의 왕조들처럼 차례차례 건국되지 않고,[12]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세워졌으며 그 세력 규모도 천차만별이었다. 심지어 오가 남당으로 교체된 것처럼 이전의 왕국을 멸망시킨 다음 그 자리에 새로 건국한 경우까지 있어서 십국이 전부 동시에 존재하는 일은 없었다. 그 외에 전촉은 후당에게 망했고 민, 초는 남당에게 망했다.

여기에 오월처럼 외왕내제를 택하는 국가가 있었다. 오월의 군주는 5명인데 이 중에 처음 3대는 황제를 칭하고 묘호를 정했으며 아예 초대 황제의 경우 능호까지 있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오대의 제후국을 자처했다. 한편 남당처럼 황제를 칭했다가 제후국으로 쭈그러 앉은 경우도 있다. 밑에 나오지만 남당은 후주 세종 이후 후주-송에게 굽신거리는 나라로 전락했는데 이때 아예 국호까지 강남국으로 바꾸었다.

10국 중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는 당이 멸망하기도 전에 이미 건국된 초(楚, 897년~951년)와 오(吳, 904년~937년)와 오월(吳越, 904년~978년)이었다. 10국 중 가장 나중에 세워진 왕조는 5대 왕조 중 하나인 후한의 황족이 세운 북한(北漢)으로 951년에 건국되었다. 이들은 멸망 시기도 제각각이어서 가장 빨리 망한 나라는 925년 후당에 병합당해 건국 18년 만에 망한 전촉(前蜀)이었고 가장 나중에 망한 나라는 979년에 망한 북한(北漢)이었다. 북한을 제외한 대부분은 남방에 건국되었다.

이 중 오월은 지금의 저장성(절강성) 지역에서 존재했다. 존재 기간(75년)도 가장 길었고, 세수 인구수가 최대 55만에 달했다. 후삼국시대후백제, 고려와도 교역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남당이 망하고 송과 국경이 접하자 항복했다.

후기의 남당은 오를 멸망시키고 들어섰다. 회수 이남의 초와 민을 멸망, 합병시키며 남방의 패자를 꿈꿨으나 후주 세종의 공격으로 많은 땅을 잃고 후주, 송에게 굽신대며 살아가는 소국으로 전락했고 송에서는 제후국으로 공을 자처했다. 그러다가 송태조의 공격으로 남당의 후주 이욱이 항복하면서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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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년대 9국 병립도 ▲950년대 8국 병립도

남방은 촉과 남당을 중심으로 문화와 시서가 발달했다. 촉에서는 화조화의 시조인 황전과 문필가 모문석, 구양형이 유명했고, 남당에서는 한희재 야연도를 그린 고광중, 화조화의 시조 서희, 하북 산수의 창시자인 형호, 강남(중국) 산수의 동원, 문필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서현, 문사 한희재가 있었다. 남당 후주(3대) 이욱송휘종과 함께 예술가 기질이 다분하나 그 때문에 나라를 망친 인물이지만, 능력만큼은 뒷시대인 송의 4대 문학가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건국 시점을 기준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편의상, {중괄호 안}에 한자명, 존속기간, 왕조의 국성(國姓)과 수도 소재지, 그리고 각 나라를 멸망시킨 나라도 함께 기술한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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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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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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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전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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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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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남평(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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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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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후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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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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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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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지방 세력

건국을 선언하지는 않았거나 후대에 정식 왕조로 인정되진 않았지만 사실상 독립 세력을 유지했던 여러 절도사 세력들도 존재했다. 이런 세력들도 오대십국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다 중앙 정권에 병합되었다.

6. 영향

6.1. 중국 및 북방 초원

960년 후주의 무신 조광윤이 후주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였고, 979년 2대 황제 송태종이 72년간의 혼란기를 끝내고 천하통일을 완수한다.

하지만 당나라가 멸망한 틈을 타 북쪽에서는 거란족요나라를 세워 만주몽골 고원을 장악한 뒤 후진석경당으로부터 연운 16주를 할양받아 송나라를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서북쪽에서는 탕구트족서하를 건국하여 하서주랑 일대를 차지한 뒤 송나라의 변경을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중국 역사상 북방민족(거란, 여진, 서하, 몽골)들의 힘이 가장 강성한 시기로 접어들면서 한족 중심 중원 왕조인 송나라가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18]

송나라는 특유의 문치주의 체제로 인해 군사력이 허약하였고 거란이 장악한 연운 16주로 인해 방어적인 이점도 살릴 수 없어 거란에 많은 세폐를 바쳐 평화를 유지해야만 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후 요나라가 쇠퇴한 틈을 타 여진족금나라를 세우자 송은 금나라와 손을 잡아 요나라를 서쪽으로 내쫒았으나(서요) 곧바로 금나라의 공격을 받아 남쪽으로 도피하여 남송을 세웠고 이후에는 몽골에게 서하, 서요, 금나라와 같이 멸망하였다.

6.2. 한반도

한반도에서는 신라발해가 공존하던 남북국시대가 종결되고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시대가 시작되었다.

남쪽 신라에서는 왕권이 약해지고 나라의 실권을 쥔 지배층인 진골들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궁예고려(이후 국호를 마진 → 태봉으로 바꾼다)를, 견훤백제를 세워 후삼국시대가 성립되었다. 이후 궁예가 폭정을 일삼자 신하들이 고구려계 호족들의 대표인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면서 고려 국호를 회복한다. 때마침 중국이 분열되어 혼란한 덕분에 삼국통일전쟁 때와는 다르게 후삼국시대 통일은 외세의 개입 없이 고려의 주도 아래 진행될 수 있었다.[19] 또한 중원의 분열기 속에서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고려로 귀화하여 새로운 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과거제도를 본격적으로 이식한 후주 출신의 쌍기나, 역시 광종 대 귀화한 채인범 등이 그러했다.

한편 북쪽 발해 역시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말갈족의 이탈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틈타 발흥한 거란족 요나라의 침입으로 멸망하면서 한민족의 활동영역이 한반도로 축소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오대십국을 통일한 송나라는 거란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고려와 친선관계를 맺었고,[20] 고려는 이런 사정을 이용해 송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역으로 강하게 밀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동북아의 세력균형 구도는 거란이 금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북송이 금의 공격으로 남천할 때까지 이어졌다.

6.3. 베트남

한편, 베트남에게는 독립이라는 좋은 기회의 시기였다. 그전까지 베트남 지역은 한무제가 정복한 이래 남북조시기 말에 잠시 전 리 왕조가 들어선 것 외엔 독자적인 정권이 들어서지 못했는데 중국 지역이 화북은 물론 강남까지도 갈갈이 쪼개진 상태가 되자 베트남이 독립해도 막을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중원의 혼란은 970년대에 가라앉았지만 이미 베트남은 응오 왕조를 지나 딘 왕조 말기 시기를 보내고 있었으며[21] 이후 전 레 왕조, 리 왕조, 쩐 왕조 시기에 매번 재정복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고 호 왕조가 들어선 혼란기에 잠깐 점령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레러이에 의해 다시 쫓겨난다. 이후에도 떠이선 왕조 때 내정에 개입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주도권을 쥐려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7.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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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둘러보기

오대십국시대 5대(代)
후량
(後梁)
후당
(後唐)
후진
(後晉)
후한
(後漢)
후주
(後周)

오대십국시대 10국(國)
마초
(馬楚)

(吳)
오월
(吳越)
전촉
(前蜀)

(閩)
남평
(南平)
남한
(南漢)
후촉
(後蜀)
남당
(南唐)
북한
(北漢)


[1] 예외로 10국 중 북한(北漢)은 산서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북한이 후한과 후주의 교체기때 후주의 건국에 반발한 유숭(후한의 건국자 유지원의 동생)이 세운 나라였기 때문이다.[2] 사족으로, 학계는 대체로 의 멸망으로부터 중국사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므로 위ㆍ진ㆍ남북조 시대는 중국 중세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한국사를 기준으로 시대를 나누는 대한민국 중학교ㆍ고등학교에서는 수ㆍ당까지를 고대로 본다.[3] 원말명초, 명말청초의 왕조 교체기는 있었지만 오대십국시대보다도 짧은 기간이었다. 가장 최근의 혼란기인 군벌시대도 청나라 멸망(1912년)~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년)까지 37년이고 그 사이에 잠깐동안 안정기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기간에는 군벌들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한 중화민국이 있어 지방 통제력이 저하된 혼란기라고 할 수 있어도 이 기간 전체가 완전한 분열기라고는 할 수 없다.[4] 후진의 출제 석중귀를 사로잡고 개봉에 입성한 요태종이 군대의 약탈을 허용하여 지옥도가 벌어지자, 풍도는 요 태종을 부처에 비유하며 약탈과 학살을 멈춰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5] 다른 한편으로는 삼용(三冗)으로 대표되는 거대 국가의 사회적 비효율 문제가 크게 나타나기도 했다.[6] 중국보다 훨씬 좁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자리했던 앙코르 왕조는 지나친 개발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어 문명이 쇠퇴하고 주도권을 외래민족인 시암이나 베트남에게 빼앗겼다.[7] 한자문화권 기준으로 양자는 부계의 조카뻘을 들이는 것이 국룰이다. 소목지서, 종족 참조.[8] 당나라 안남도호부였던 베트남 안남 응오 왕조(주황색 나라)가 포함되어있다. 남청색은 태원의 이극용의 영역[9] 다만 지도에 오류가 있는 것이 한반도 전체가 신라 영역으로 되어 있는데 이 시기 당시 신라는 이미 후백제나 후고구려 등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한반도 전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경주시와 그 주변 일대로 영토가 줄어든 뒤였다.[10] 송까지의 국호는 춘추전국시대에 있던 국명을 차용하였고, 원나라 이후로는 추상적 개념을 국호로 채택하게 되는 것도 소소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11] 이존욱이 제위에 오르겠다고 했을 때 이존욱의 명장이자 충신이었던 장승업이 다시 당나라 황족을 왕위에 올려야 된다며 간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홧병으로 죽었던 일이 이때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해 준다. 분명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복고적인 분위기가 있기는 했다.[12] 다만 5대의 왕조도 후량과 후당은 동시기에 존재하기도 했다.[13] 이 나라의 왕건은 중국의 대표적 욕인 왕팔(王八)의 어원이 될 정도로 문제가 많은 폭군이었다.[14] 그래도 순순히 항복해서 그런지 소원대로 진왕에 봉해졌다.[15] 이 과정이 참 허무한데 자세한 건 이존욱 문서 참조.[16] 본래는 장의조가 돈황 일대를 비롯한 하서주랑과 하황을 수복하여 당에 바쳤지만 장의조 사후 하서주랑은 회흘에 넘어갔고 하황은 토번에 넘어가게 되었다.[17] 이 당시의 일을 다룬 작품이 있는데, 바로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둔황이다.[18] 이런 이유로 중원 왕조가 분열된 중원을 통일하거나 왕조교체기를 마무리하면 주변국을 제압하기 위해 원정을 가던 다른 시대와는 다르게 송나라는 주변국 원정은커녕 자국 방어에도 급급하게 되었다.[19] 다만 그렇다고 후삼국이 외교에 무관심했던 건 아니었다. 견훤의 후백제가 오대십국을 포함한 중원 국가들은 물론 거란, 일본 등 모든 주변국과의 외교에 적극적인 노선을 취했다면 왕건의 경우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부터 후당, 후진등 중원 세력과의 외교에 전념했다. 신라 역시 후당에 조공하는 등 생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중원 세력들은 고려를 정통으로 인정하면서 신라를 박대하였다. 당초에 신라는 중국과 통교하기 쉬운 서해안 연안을 전부 잃고 다시 소백산맥 안쪽으로 축소된 상황이었다.[20] 고려는 3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막아내 거란이 함부로 할 수 없게 없었다.[21] 타이밍도 절묘한 게 응오 왕조는 혼란을 겪다 얼마 못 가 망하고 잠시 분열기가 있었는데 이 시기동안 중국도 분열된덕에 베트남의 독립은 무탈하게 지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