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D709B, #4682b4 20%, #4682b4 80%, #3D709B); color: #ECE5B6;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마초 馬楚 | 남오 南吳 | |||
<rowcolor=#ece5b6> 초대 | 제2대 | 제3대 | 초대 | 제2대 | |
무목왕 | 형양왕 | 문소왕 | 무제 | 경제 | |
<rowcolor=#ece5b6> 제4대 | 제5대 | 제6대 | 제3대 | 제4대 | |
폐왕 | 공효왕 | 후주 | 선제 | 예제 | |
왕민 王閩 | 전촉 前蜀 | ||||
<rowcolor=#ece5b6>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초대 | |
무효제 | 사왕 | 명효제 | 홍효제 | 혜제 | |
<rowcolor=#ece5b6>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2대 | ||
대효제 | 주문진 | 공의왕 | 순정공 | ||
남한 南漢 | 북한 北漢 | 후촉 後蜀 | |||
<rowcolor=#ece5b6> 초대 | 제2대 | 초대 | 제2대 | 초대 | |
천황대제 | 상황제 | 신무제 | 효화제 | 명효제 | |
<rowcolor=#ece5b6> 제3대 | 제4대 | 제3대 | 제4대 | 제2대 | |
명효제 | 후주 | 소주 | 영무제 | 공효왕 | |
오월 吳越 | 남평 南平 | 남당 南唐 | |||
<rowcolor=#ece5b6> 초대 | 제2대 | 초대대 | 제2대 | 초대 | |
무숙왕 | 문목왕 | 무신왕 | 문헌왕 | 고제 | |
<rowcolor=#ece5b6> 제3대 | 제4대 | 제3대 | 제4대 | 제2대 | |
충헌왕 | 충손왕 | 정의왕 | 고보욱 | 선제 | |
<rowcolor=#ece5b6> 제5대 | 제5대 | 제3대 | |||
충의왕 | 고계충 | 민제 | |||
}}}}}}}}} |
시호 | 없음 |
성 | 고(高) |
휘 | 보욱(保勗) |
자 | 성궁(省躬) |
생몰년도 | 924년 ~ 962년 |
재위기간 | 960년 ~ 962년 |
[clearfix]
1. 개요
오대십국시대 남평의 제4대 군주[1]. 자는 성궁(省躬).2. 상세
고보욱은 924년에 남평의 제2대 군주였던 고종회의 아들이자, 제3대 군주였던 고보융의 아우로 태어났다. 후주로부터 검교태위 겸 형남의 절도부사로 임명되었고, 960년에 고보융이 병으로 죽으면서, 고보욱이 형남 절도사의 지위를 이었다.그런데 고보욱은 날마다 기생을 부르는 등 향락에 빠졌고, 무의미한 토목공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민심이 고보욱에게서 멀어져갔다. 또한 고보욱은 정사도 제대로 돌보지 않아 관료들과도 사이가 벌어졌다. 그리고 형 고보융이 그에게 정사를 위임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고보욱이 업무를 잘한 것도 아니었다.
이전에 고보욱의 아버지인 고종회가 고보욱을 너무 아낀 나머지[2] 고보욱이 안하무인에 군주로서는 실격인 성품으로 자라다보니, 형남의 관료나 민중 누구 할 것 없이 고보욱을 보고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탄식했는데, 이것이 바로 만사휴의(萬事休矣)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었다.
고보욱은 962년에 죽었으며, 그의 조카이자 고보융의 아들인 고계충이 형남 절도사의 지위를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