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437년 9월 파저강에서 벌어진 전투.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진행돠었으며, 해당 전투를 통해 조선은 4군을 설치하게 된다.
2. 배경
제1차 파저강 야인 정벌을 실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북방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원정군이 철수한 뒤 이만주는 다시금 세력을 회복했으며 조선에게 원한을 품고 수 차례 수백~수천 명을 동원하여 조선의 국경을 침범했다. 한편 제1차 파저강 정벌이 이루어진 세종 15년(1433) 10월 두만강 하류의 여진족 추장 양목답올(楊木答兀)이 건주좌위(建州左衛)의 동맹가첩목아를 살해하자 건주좌위의 잔여 세력은 올적합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이만주가 있는 파저강 지역으로 이동하여 합세하려는 기색이 보였다. 조선은 이에 긴장했는데 세종 19년(1437) 5월 올량합(兀良哈) 기병 3백여 기가 다시 조명간구자를 습격해오고 비슷한 시기에 건주좌위에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전하기 위해 이만주가 두만강 하류까지 직접 내려오자 세종은 김종서의 건의를 바탕으로 이만주를 토벌하자고 제의했다.신료들이 명나라와의 관계 및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를 대어 정벌에 반대했으나 세종은 조정의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측근 신료들과의 의논을 바탕으로 평안도도절제사 이천(李蕆) 등과 함께 가을을 목표로 실질적인 정벌 준비를 개시했다.
3. 파저강에서 2번째 전투가 시작되다
제2차 파저강 정벌은 9월 7일 개시했는데 정벌군 총 8천여 명은 3로로 나뉘었다. 도절제사 이천은 여연절제사 홍사석(洪師錫)과 강계절제사 이진(李震)과 더불어 4772명을 거느리고 옹촌(甕村)·오자점(吾自岾)·오미부(吾彌府) 등지를 향해 강계에서 강을 건넜다. 상호군 이화(李樺)는 좌군 1818명을 거느리고 올라산(兀剌山) 남쪽 홍타리(紅拖里)로, 대호군 정덕성(鄭德成)은 우군 1203명을 거느리고 올라산 남쪽 아한(阿閒)으로 향하여 모두 이산(理山)에서 강을 건넜다. 정벌군은 이렇게 세 갈래로 나뉘어 여진족의 본거지를 습격하고 불태운 뒤 16일에 돌아왔다. 조선군은 적군 6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동안 단 1명만이 전사했다.4. 평가
제 2차 파저강 야인 정벌은 여진족의 근거지에 타격을 주는데 성공했으나 제1차 파저강 정벌보다 전과도 적었고 이만주 제거에도 실패했다.[1]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정벌의 성과에 대한 평가 및 이천을 비롯한 정벌군 장병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둘러싸고 세종과 신하들 간에 논란이 있었으나 세종은 적을 징계하는데 성공한 것이라고 단정함으로써 논란을 봉합했다.5. 의의 및 한계
2차례에 걸친 파저강 정벌을 통해 조선은 압록강 건너의 여진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를 이용하여 압록강 중류에 4군을 설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건주본위의 지휘자 이만주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불만족스러운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만주 제거라는 목표는 결국 다음 세대로 넘어갔다.6. 관련 문서
7. 출저
[1] 이는 파저강 야인들이 정벌군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피해버렸기 때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