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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도 정벌은 1637년, 가도에 주둔하던 모문룡 잔당들을 토벌한 사건을 의미한다.다른 말로는 "피도 전투"라고 한다.
2. 전개
2.1. 모문룡, 가도에 주둔하다
진강대첩에서 패배한 후, 100여명의 병력만을 보유했던 모문룡은 진강을 탈출하여 조선에 상륙하였다. 당연히 100여명의 빈약한 수군을 거느린 모문룡이 후금의 철기병을 상대할 수는 없었고, 결국 요동을 탈출해 조선땅으로 월경해 도망쳐왔다. 후금군은 조선을 자극할까봐 일단 압록강에서 멈추고 조선의 의주부윤 정준에게 서한을 보내 월경해 명군을 추격할 하는 것을 허가해달라고 요구했고 광해군은 이를 허가하였다.[1] 모문룡은 조선땅에서 후금군에게 포위되었으나, 치열한 전투 끝에 이를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평안도 일대를 패주하여 철산의 가도로 도피했다.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조정은 1622년 6월, 공식적으로 모문룡을 평요장군에 봉하고 계급을 총병으로 승진시켰다. 1624년 누르하치는 화평을 위해 동강진에 사신을 보냈고, 모문룡은 사신을 배로 북경까지 보냈다. 이때 모문룡을 좌도독으로 승진시켰다.[2]
2.2.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다
2.2.1. 광해군
앞서 언급하였듯이, 1622년 광해군 14년, 광해군은 모문룡에게 평안도 철산 앞바다인 가도(椵島 또는 皮島)에 주둔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문제가 터지기 시작한다.[3] 모문룡은 동강진(東江鎭)을 설치하였으며, 명군과 난민 1만명이 모문룡을 따라서 가도에 머물게 된다. 모문룡은 명으로부터 은자 20만 냥을 지원받기도 했지만 20만냥으로는 돈이 많이 드는 수군을 유지하기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으며, 더욱이 가도는 농사도 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좁은 섬이라 군량이 부족했으므로 조선에 군량을 강요하여 식량을 징발하였다. 이 식량이 매년 10만석에 달했다. 흉년으로 조선 측의 식량 지원이 여의치 않자 황해도와 평안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벌이기도 했다.모문룡의 부하들이 약탈을 과도하게 벌이자 평안북도 의주부 부윤 이완이[4] 그들 가운데 몇몇을 붙잡아 곤장을 쳤으나 모문룡은 분노하여 "상국의 병사를 때리냐"며 조선 조정에 항의했다. 결국 이완은 벼슬이 강등되었다.[5]
광해군은 모문룡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지 않았다. 특히 모문룡은 가도에서 둔전을 하고, 염전을 개간하여 소금을 만들려고 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영구주둔할 생각이라고 생각했는지 불허했다. 모문룡은 조선 조정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심지어는 조선에 해적질을 하기도 했다.
2.2.2. 인조
인조반정 세력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았던 광해군을 끌어내리는 것이 황제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나라의 승인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이를 도운 것은 모문룡이었다. 당시 후금이 요동반도까지 모두 차지했기 때문에 북경으로 가는 육로는 막혔고, 조선의 항해력은 형편 없어서[6] 육지가 보이는 바다에서 항해하는 연안항해만 가능했고, 인천이나 서해안에서 바로 북경의 외항인 천진까지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7] 이 때문에 인조반정세력은 모문룡에게 조선사신의 안전한 항해를 의탁할 수밖에 없었고 모문룡은 이것을 기회로 조선조정에 더욱더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인조반정 세력은 모문룡에게 빚을 진게 있었기 때문에 모문룡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1624년 1월 22일, 이괄의 난이 평정되자 모문룡은 조선 조정에 축하 선물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선물이 나체의 여인을 상아에 조각해서 만든 춘의(春意)라는 누드 조각상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상대국으로부터 받은 경우에도 논란이 될 마당에 조선 시대에 이런 걸 보냈으니 기겁할 노릇이었다. 춘의를 받아든 권진기는 모문룡이 무례하다고 꾸짖으며 돌려보냈다. 성적 문화 차이도 있겠으나 모문룡의 행적이나 문화 차이를 자각하지 못한 것으로 무례가 맞다고도 하지만 정서 차이를 이해 못하고 그냥 조선 측을 맥이려고 보냈다는 해석도 있는 편.
부하 모유견이라는 자는 말을 타고 조선 궁궐에 들어오려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모문룡은 자신이 많은 명나라 난민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구실로, 조선과 명나라에서 자금지원을 받았으나, 명나라는 당시 각지에 농민반란이 일어나 각지의 진압군을 조직하느라고 자금이 없었고[8] 결국 이 재정부담은 고스란이 조선 몫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정작 명나라 난민들에 대한 식량 지원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가도의 명나라 난민들이 기아로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에서는 급히 식량을 추가 지원하였지만, 난민의 규모에 비해서 엄청난 식량이 지원되는데도 굶주림이 발생하는 기묘한 일이라, 모문룡이 식량을 횡령하여 후금에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9]
게다가 모문룡은 정작 자신 때문에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온 정묘호란 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가도에만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문룡군은 대부분 수군인데다가 바다를 낀 게릴라전을 전문으로 했으므로, 기병 중심인 후금군과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전술적으로는 이해해줄 수는 있지만, 모문룡에게 수탈당하던 조선 입장에서는 배은망덕한 행위였다.[10]
(전략)
상(上)이 이르기를,
“1년을 쓸 수 있는 저축이 있어도 부족할까 걱정인데, 더구나 1달 양식도 없으니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기가 정말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대들이 힘을 다해 꾸려나가야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여 놔둘 수 있겠는가.” 하니,
남이흥이 아뢰기를,
“서쪽의 근심이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고 있는데, 신(臣)은 한 번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몸이야 아까울 것이 없지만 국가의 일은 어찌할 것입니까. 관서(關西)에 가면 그 쪽의 형세를 갖추어 진달드릴까 하는데, 묘당에서 선처해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독(都督)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우리나라를 침해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당해 낼 것인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모병(毛兵 : 모문룡의 병사)이 갈수록 더 침해하고 있는데, 조만간 내지(內地)에서 난동을 부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난동을 부린 뒤에는 격파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승부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하니,
남이흥이 아뢰기를,
“격파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하더라도 일단 이기고 난 다음에 장차 국가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서관(西關)은 옛적부터 번화하다고 일컬어져[11] 사행(使行)이 오갈 적에 혹 주색(酒色)에 빠지는 등 일대의 고을에 폐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아무 일이 없는 태평시대라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될 텐데, 더구나 이러한 때이겠습니까. 이번에 남이흥이 내려가게 되었으니 계칙(戒飭)해서 보내는 한편 방백에게도 하유하소서.” (후략)
상(上)이 이르기를,
“1년을 쓸 수 있는 저축이 있어도 부족할까 걱정인데, 더구나 1달 양식도 없으니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기가 정말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대들이 힘을 다해 꾸려나가야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여 놔둘 수 있겠는가.” 하니,
남이흥이 아뢰기를,
“서쪽의 근심이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고 있는데, 신(臣)은 한 번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몸이야 아까울 것이 없지만 국가의 일은 어찌할 것입니까. 관서(關西)에 가면 그 쪽의 형세를 갖추어 진달드릴까 하는데, 묘당에서 선처해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독(都督)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우리나라를 침해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당해 낼 것인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모병(毛兵 : 모문룡의 병사)이 갈수록 더 침해하고 있는데, 조만간 내지(內地)에서 난동을 부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난동을 부린 뒤에는 격파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승부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하니,
남이흥이 아뢰기를,
“격파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하더라도 일단 이기고 난 다음에 장차 국가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서관(西關)은 옛적부터 번화하다고 일컬어져[11] 사행(使行)이 오갈 적에 혹 주색(酒色)에 빠지는 등 일대의 고을에 폐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아무 일이 없는 태평시대라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될 텐데, 더구나 이러한 때이겠습니까. 이번에 남이흥이 내려가게 되었으니 계칙(戒飭)해서 보내는 한편 방백에게도 하유하소서.” (후략)
1624년 12월 22일, 그의 패악이 어찌나 심했던지 인조가 장만, 남이흥 등과 접견하여 국토방비 문제 등 여러 문제를 논의하던 중에 모문룡의 군대에 대한 이야기가 오르내린다. 특히 도원수 장만의 언사는 다른 이들과 달리 더욱 과격하였는데, 그 내용의 일부는 위와 같다.
1627년 1월에는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의 장수 아민이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범하였다. 이때 후금의 군대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하였는데, 모문룡은 패하여 신미도로 도망쳤다. 이후 3월에는 의주에 주둔한 후금의 군대를 습격하여 60명의 병사들을 죽였다.
4월 17일에는 모문룡의 군사들이 용골산성의 첩서를 가져가던 사람을 살해했으며, 안융창에 있던 난민을 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백성을 마구 죽였다. 평안도 정주에 피난 갔던 조선 백성 1만여명을 공격하였으며, 이들은 물에 뛰어들어 3백여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살해당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급히 병력을 보내 모문룡을 막도록 했고, 충돌이 벌어졌지만 모문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묘호란 3개월 뒤인 6월에는 군선 50여 척을 이끌고 평안도 의주부로 향했으나, 후금군 기병 20여명을 만나자 모문룡의 군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군선에 올라타서 도망가버렸다.[12]
나중에는 조선에 대한 횡포가 점점 심해져서 인삼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했는데, 이는 명나라 고관이나 후금에 보내는 뇌물로 쓰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그를 접견한 회례관 황호는 “남의 재물을 받으면 좋아하는 것이 이익을 탐하는 장사꾼과 같다.”고 혹평했다. 황호가 “지금 조선도 국고가 탕진되고 나라 살림이 어려워 줄 수 없다.”라고 거절하자 모문룡은 앙심을 품었다.
1628년 2월 26일, 모문룡은 "내가 하늘의 별자리를 보니 매우 불길한 징조가 있어, 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조선의 종묘사직이 망한다"는 악담을 보냈다.
11월 22일에는 명나라로 파견되는 조선의 사절단인 동지사 일행이 가진 은과 인삼을 강탈했다. 명나라 황제에게 보낼 조공물을 마음대로 빼앗아간 것이다. 급기야 모문룡의 하인 왕학승이 같은 집 종 15명을 거느리고 평양 인근의 군현들을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약탈을 하고 심지어 고을 수령을 붙잡아 가두고 모욕하는 짓까지 벌였다.
1629년 3월, 가도에 가서 모문룡의 동정을 살피고 온 조선의 특진관 이경직은 “그의 군세가 너무나 피폐해져 있으며 군대 수를 과장하고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면서 명나라에 거짓 보고나 올리고 있습니다. 도망쳐 온 명나라 백성들도 달리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와 붙어 있는 것이지, 진심으로 복종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군율도 엉망이며, 병력과 장비도 전혀 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경직은 모문룡군은 전혀 군사적 잉여라고 생각한 것이다.
2.3. 모문룡이 처형되다
가도에 눌러앉아 왕노릇하던 모문룡은 상관인 원숭환과의 불화 때문에 몰락하고 만다.1624년에는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좌도독에 제수되었다. 이는 현대로 치면 사령관급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문룡은 고작 4년만에 일개 대대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선인 요동 방면 수군 사령관 자리에 오르는 엄청난 초고속 승진을 한 것. 단동을 점령할 때는 겨우 100여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명나라 유민을 모아 몇년만에 1~2만명의 대병력을 보유하게 된 것을 보면 모문룡이 일부 역덕들이나 원숭환의 주장처럼 단순한 떠벌이 만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명나라 조정이 모문룡의 전략적 위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원숭환은 모문룡을 비루하게 생각했으며, 조선 및 요동의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끼치고 있었기 때문에, 구실을 잡아서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이를 실행에 옮긴다.
1629년 4월 27일, 원숭환은 모문룡을 요동 반도의 쌍도로 불러서 군사 관련 문제를 논의한다고 하였다. 두려움을 느낀 모문룡은[13] 병선 40여 척에 2만 8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쌍도(雙島)로 출발했다.
1629년 6월 5일, 모문룡은 쌍도에 이미 와 있던 원숭환과 만났다. 원숭환은 첫날에는 짐짓 주연을 벌여 모문룡을 환대하는 척 했지만, 다음날 모문룡을 즉각 체포하고 그의 죄를 질책했다.
“장수가 외부에 있을 때는 감독을 받아야 하는데도 이를 거부하였고, 있지도 않은 승전 사실을 조작해 허위로 보고하여 감히 황제 폐하를 속였으며, 사사로이 시장을 열어 오랑캐와 내통하였고, 상선을 약탈하는 등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조선 백성들을 마구 죽여 이웃나라에 피해를 끼쳤을 뿐 아니라, 10년 동안 수만 석의 곡식을 받아 가면서도 한 뼘의 땅도 되찾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매우 크다. 너 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을 살려둬서 무엇에 쓰겠느냐?”
그리고 원숭환은 모문룡을 참수하면서 "모문룡이 가도에 수년 동안 있으면서 실로 조선 국왕(인조)의 덕분으로 호사를 누렸는데, 탐욕스러운 성품으로 인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명나라에 수치를 끼쳤으니 내가 황제로부터 받은 권한[14]으로 모문룡을 제거했다"고 밝혔다. 그가 인조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흠명출진행변독수계요천진등래등처군무병부 상서 겸 도찰원 우부도어사(欽命出鎭行邊督帥薊遼天津登萊等處軍務兵部尙書兼都察院右副都御史) 원숭환(袁崇煥)은 삼가 조선 국왕께 첩문(帖文)을 보냅니다. 지난해 황제 폐하께 주문(奏文)을 올리는 일과 관련, 영광스럽게도 국왕께서 변변치 못한 본관을 잊지 않으시고 대도(大道)를 일러주시며 국휼(國恤)에 대해 잊지 않고 정성껏 교시해 주셨으니, 혈기를 가진 자로서 잊지 못할 바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요동 지역에 나오게 되었으니 국왕과는 숙연(夙緣)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전해오는 국왕의 소식을 들으면, 마치 서로 얼굴을 대하는 듯 설레이기만 합니다. 되돌아 보건대 동이(東夷)가 제멋대로 포학한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우리 중원(中原)의 봉시(封豕)는 그냥 놔둔 채 국왕의 강토만 잠식해 왔습니다. 병인, 정묘년의 전역(戰役)에서 노추(老酋)가 스스로 멸망을 불러들이고 노추(奴雛)가 2번이나 넋이 빠질 정도로 혼이 나긴 했지만 동쪽의 산하에서는 여전히 머무르고 있으니, 이 점이 바로 내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잠 자고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애태웠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황천(皇天)께서 이를 애달프게 여겨주지 않으시고 희종 황제(憙宗皇帝)를 앗아갔는가 하면, 나 역시 먼저 참소로 인해 돌아가는 비운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위신이 손상되어 떨쳐지지 못했으므로 내가 정말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아마 국왕께서도 같은 심정으로 슬퍼해 주셨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자께서 천고에 뛰어난 신성(神聖)함과 영무(英武)한 자질을 지니시고 중흥에 뜻을 깊이 두시어 이 조무래기 오랑캐들을 섬멸해 버리려고 하시는데, 불초 본관이 그 길을 안다고 여기시어 특별히 조칙을 내려 시골 가운데에서 불러 세우셨습니다. 제가 요동 땅을 잊지 못하는 만큼 어찌 국왕의 밝은 덕을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행인(行人)이 왕래하노라면 바닷길이 아득하기만 할 것이고 게다가 탐욕스럽고 패려한 도수(島帥) 때문에 거듭 사신의 여정이 고달파질 것이기에 공도(貢道)를 서령(西寧)으로 개정할 것을 특별히 청하여 제가 마초(馬草)를 공급하여 국왕의 풍유(風猷)를 접할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저는 전쟁을 준비하는 일에 관련되는 것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몇 년 동안 정신을 쏟아오면서 하동(河東)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대체로 군사 작전은 기세로써 제압하고 기틀을 보아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평소 기세를 쌓아두었다가 잠깐 사이에 기틀을 보아 결정을 내리는 것이므로, 한 순간의 결정을 위해 1백 년 동안 축적하는 것입니다. 국왕께서도 스스로 힘을 축적하시어 기틀을 보아 결판을 낼 준비를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도 활집을 단단히 잡아 매고 국왕과 함께 동서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어 바다와 육지로 병진(竝進)하면서 앞 뒤에서 합동 공격을 펼치겠습니다. 그리하여 다행히 하늘에 계신 영령의 도움을 받게 되면 한 번 북을 쳐서 중조(中朝)의 12년에 걸쳐 쌓인 분노를 씻고 국왕의 나라 역시 금성탕지(金城湯池)의 형세를 다시 이룩할 수 있을 것인데, 국왕께서는 이러한 뜻이 없으십니까? 모수(毛帥)는 절도(絶島)에 수년 동안 있으면서 실로 국왕 덕택으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계획성이 없는 무인(武人)이라서 탐욕스럽기만 하여 도둑 떼를 길러내며 국왕의 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수치를 끼치고 있습니다. 이에 황상께서 만리 밖을 밝게 내다보시고 저에게 상방검(尙方劍)을 빌려주시어 군중(軍中)에 나아가 그를 주벌토록 하셨습니다. 이는 대체로 섬에 있는 수만 명의 목숨을 보전케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속국의 화란을 해소시켜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니, 밝으신 천자의 깊으신 의도라 하겠습니다. 군대를 해도(海島)에 머물려 두고 멀리 국왕의 나라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찾아뵐 수 없는 처지이기에 사자 한 명을 하집사(下執事)에게 보낼까도 생각했습니다만, 또 종자(從者)에게 공급하는 일로 번거로움을 끼쳐드릴까 염려되었습니다. 편지만 제대로 통하게 되면 서로 다른 곳에 있어도 마음이 같아질 것이니, 오직 국왕께서는 더욱 힘써 충성스럽고 곧은 마음을 다하시어 단숨에 이 적을 멸하심으로써 왕의 공적을 마무리짓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빛나고 빛나는 황령(皇靈)께서도 실로 아름답게 여기는 동시에 이를 힘입게 될 것입니다. |
모문룡에 대해서도 따로 편지를 보내 언급했다.
“성조(聖朝)에서 매우 후하게 관심을 베풀어 주었는데도 난수(亂帥)는 패역한 행동을 하여 복주(伏誅)를 재촉하였으므로 삼가 황위(皇威)를 선포하고 함께 동녘을 평정할 것을 맹세하는 일에 대해 자문(咨文)을 띄웁니다. 살펴보건대, 본부원(本部院)이 명을 받들어 정벌하는 일을 전담하면서 날마다 오랑캐를 평정할 일을 강구해 왔습니다만, 우리 내부의 적도 아직 조용히 만들지 못한 터에 어떻게 오랑캐를 진압시킬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귀국이 우리 중국 조정을 공경하며 따른 지 거의 2백여 년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지난 기미년의 전역(戰役) 때에는 우리도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임했습니다마는 귀국 역시 잇따른 내변(內變)이 있어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선제(先帝)께서 모문룡의 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귀국의 왕을 봉하는 조처를 내리셨습니다.[15]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폐조(廢朝)를 엎고 새로이 반정한 데 따른 전범(典範)이라 하더라도 모문룡으로서는 생색을 낼 일이 아니라 당연히 명확하게 보고해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성명(聖明)께서 먼 나라를 자애롭게 대해주시는 인덕(仁德)을 지니셨기에, 변방의 제후국이 조근(朝勤)하는 예절을 삼가 따르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당치도 않은 얕은 재주와 작은 그릇 밖에 안되는 모문룡이 해도(海島)를 근거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내가 최고다.’라고 하는가 하면, 이젠 용무가 없다는 듯이 국법을 집어 던지면서 ‘누가 나를 어떻게 하랴.’ 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 밑빠진 독에 물 퍼붓 듯 향궤(餉饋)를 공급해 주었습니다만, 그가 실제로 견제한 일이 뭐가 있었습니까. 개진(開鎭)했다고 하는 10년 동안 요동 땅을 한 치라도 회복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속이면서 그가 보여준 것이라곤 그저 많은 관원을 자신의 사유물화한 사실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를 사로잡고 금백(金帛)을 약탈하여 대낮에 국중(國中)에서 강도질을 하는 한편, 항복해 온 오랑캐를 죽이고 난민(亂民)을 살륙한 것으로 날마다 사마(司馬)에게 공을 보고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끝없이 으스대고 요구하면서 동노(東奴)를 큰 이익 챙길 좋은 보물덩이로 삼고, 아무 때고 토색질하고자 조선 땅에 외부(外府)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조정만 무시할 뿐 아니라 속국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염려되었습니다. 이미 요지 부동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으니, 어찌 반역자의 주벌을 늦출 수 있었겠습니까. 본부원은 천토(天討)의 명을 봉행하여 장차 난세를 종식시키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필부로 하여금 거만스레 행동하게 하면서 그냥 놔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어떻게 조정을 높이고 사이(四夷)에게 위엄을 떨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두렵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황명(皇命)을 청하여 동쪽으로 순시나와 해변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모문룡의 죄를 묻게 된 것입니다. 금년 6월 5일 군대를 쌍도(雙島)에 주둔시키고 여러 장수와 관리들을 집결시킨 뒤, 모문룡이 참형(斬刑)을 받아야 할 대죄(大罪) 12개 조목을 뜰에서 열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의견을 물으니, 모두들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군전(軍前)에서 효시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조정의 난수(亂帥)를 제거한 것일 뿐 아니라 귀국의 화도 동시에 진정시킨 것입니다. 피도(皮島)[16]는 원래 중국 땅이 아닙니다. 그래서 동강(東江)에 주둔시킨 한 부대에 영을 내려 서쪽으로 이동해서 진격할 계획을 세우도록 하고, 그전처럼 징수하고 토색질하여 귀국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귀국에서도 해사(該司)에 통지하여 각각 강역을 안정시키고 군민(軍民)의 마음을 안온케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그전처럼 중국 군대가 국경을 넘어 소요를 일으키는 일이 있을 경우 즉시 보고만 해주면 바로 다스려 경계시키겠습니다. 또 공도(貢道)의 경우 바다로 운행하게 되어 있어 실로 사자를 번거롭게 하기에 본부원이 이 점을 매우 염려하여 의논한 결과, 모든 조공을 한 번으로 통일하고 영원(寧遠)의 길로 바꾸도록 하는 동시에 사자 한 사람을 보내 우리의 소식을 통하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동의 옛길을 택한 것은 귀국이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입니다. 황상께서는 천부적으로 신무(神武)한 자질을 지니시고 변방의 계책에 관심을 쏟으시니, 필시 변방의 관리들이 일에 태만한 것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본부원 역시 몸을 기꺼이 나라에 바쳐 기필코 오랑캐를 평정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일을 미지근하게 수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사마(士馬)가 이미 배불리 먹고 사기가 충천하니 일을 이룰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귀국 역시 요즘 한가한 때를 이용해서 속히 군비를 정돈하고 우리와 연합하여 잃은 땅을 수복하도록 하십시오. 《시경(詩經)》에 ‘내 그대와 옷을 함께 함은 어찌 그대의 옷 없음 때문이리오. 혹시라도 국가가 위급하면 창을 잡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네.’ 하지 않았습니까. 모문룡은 오랑캐나 마찬가지로 귀국에게는 고질적인 병폐였습니다. 과거 모문룡은 귀국이 은밀히 오랑캐와 내통하며 때때로 도와준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그러나 본부원은 귀국이 평소에 의리에 따라 우리를 순종했으니 필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황상께서도 만리 밖을 내다보시는 명철한 안목으로 흉포한 자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아,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리는 것이야말로 어김없는 천도(天道)이고,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는 것이야말로 또한 당연히 행해야 할 인사(人事)입니다. 우리 황상의 덕은 너르고 너르시어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다 하여 버리지 않으시니, 그대의 국왕께서 충성스럽고 공경하는 마음을 대대로 밝히시면 후손에 이르기까지 왕업(王業)을 향유하게 되실 것입니다. 본부는 거듭 집사(執事)에게 바라는 바입니다. |
보다싶히, 까기는 정말로 시원하게 까고 있다.
...{전략} 모수(毛帥)가 스스로 왕법(王法)을 범하더니 과연 참형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으로서는 고황에 든 병을 먼저 없앤 것이 되고, 요동(遼東) 백성에게는 호랑이 입을 빠져나와 자애로운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결과가 되고,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종기를 시원스럽게 터뜨려 목숨을 다시 이어 회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진정 합하께서 황상의 은총에 충분히 보답하고자 은밀하게 계책을 협찬하시어 물샐틈없이 기틀을 마련해 놓은 다음 벼락이 치듯 단호하게 결행한 결과로서 일거수 일투족을 마치 귀신처럼 기묘하게 운용하신 것이었으니, 아무리 날뛰는 간흉이라도 어떻게 계책을 써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후략) |
2.4. 모문룡 사후, 가도의 상황
원숭환은 모문룡만을 처단했기 때문에 가도의 동강진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모문룡 같은 리더십이 없었기 때문에 중구난방이 되었다. 모문룡이 조선에 큰 피해를 끼치고, 재물을 횡령하는 등 여러 비행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가도에 주둔한지 불과 몇년만에 100여명의 병력을 1~2만명 수준의 병력으로 늘린 것은 그의 능력으로 봐야하며, 그 머리수는 청나라 측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도 군영를 운영하던 모문룡이 갑자기 처단되어 리더십의 공백이 생기니 그 부대가 제대로 돌아갈리는 없었다.모문룡 처단 이후, 원숭환은 진계성을 도독으로 삼아 가도에 파견했다. 하지만 이미 가도의 병력은 모문룡의 사병화되어 있었기 제대로 지휘가 되지 않았다. 이때 모문룡의 부하였던 유흥치가 진계성을 죽이고, 다시 동강진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후금은 유흥치에게 계속 투항공작을 폈고, 유흥치는 후금에 투항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가도에 있던 모문룡의 다른 부하인 심세괴가 유흥치의 이런 의도를 알고 유흥치를 처단했다. 이어 명나라에서 파견된 황룡(黃龍)이 이곳을 관리하게 되었다.
한편 가도에서는 1631년 반란에 호응해 경중명의 동생 경중우가 지휘관 황룡을 감금했다. 하지만 당시 가도에 있던 상가희는 반란을 진압하고 황룡을 풀어주었고, 황룡은 산동반도의 경중명 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가도를 떠나면서 심세괴를 가도의 우두머리로 앉힌다.
또한 1634년에는 심세괴의 모함을 받은 상가희 역시 후금에 투항한다. 이때 숭정제는 조서를 내어 심세괴를 공식적으로 동강진의 도독으로 임명한다.
이후 가도에는 명나라의 심세괴가 주둔했다. 모문룡이 살아있던 정묘호란 때 청군은 모문룡군에게 보급이 차단당할 것을 우려해 공세를 일찍 끝내고 철퇴했으나, 심세괴가 있던 병자호란 때는 가도의 명군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한성까지 닥돌하게 된다. 가도의 명군은 전혀 조선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모문룡이 조선에 행한 악행에 가려졌지만, 심세괴도 그 못지 않았다. 심세괴는 명나라로부터 봉록을 받고 있었으나, 조선에 사냥을 핑계로 군사를 이끌고 건너와 머물다 갔고, 이를 군사작전을 하는 것처럼 명나라 조정을 속였다. 심세괴가 주둔한 가도에 파견되었다 돌아온 한명욱은 인조에게 보고하기를 "무식한 상인에 문맹이며, 말투가 험하고, 리더십도 없다. 병력은 5천도 안 되지만 조정엔 만 명이라고 허위보고하며, 하태감(내시)에게 뇌물을 바치고 있다"고 혹평했다.[17] 또한 가도에서 온 명나라 천총 하승공이 조선에 노략질을 하려다가 조선측의 정주목사 최유해가 이를 제지하자 하승공이 칼을 뽑아 최유해를 죽이려하다가 역관광을 당해 하승공은 조선병들에 맞아죽고, 이하 명군들은 영변부에 압송된 일이 벌어져 조명 양국의 외교문제가 되었다.[18]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김자점이 전라도에 진을 설치하여 심세괴의 행패를 막자고 건의한 것으로 봐서는 심세괴는 평안도까지 아니라 서해안 전역에서 노략질을 한 것으로 보인다.
2.5. 조청연합군, 가도를 정벌하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과 군신관계가 된 청나라는 조선에 연합작전을 요구해 가도를 정벌하게 된다. 하다나라 마푸타가 지휘하는 조·청 연합군은 70여척의 수군을 이용하여 1637년 가도에 남아 있던 명군을 모조리 몰살시켰다. 가도에는 만 명의 명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결국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조선군은 처음에는 공세에는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청나라 측이 이를 경고하자 그제서야 공세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심세괴는 마푸타에게 사로잡혔으나, 항복을 거부하여 참형에 처해졌다.[19]모문룡이 조선에 행패를 부리기는 했으나, 그가 죽은 뒤에도 가도는 여전히 조선의 골치거리였다. 즉, 말기 명나라군의 느슨한 기강 때문에 도독이 누구냐에 상관없이 명군은 조선에 엄청난 민폐를 끼지고 있었으며, 수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조선에 대한 해적질을 했다는 점이고, 이 때문에 조선도 청나라와 오월동주의 공동작전을 편 것이다.
3. 가도정벌 이후
어찌되었든지간에 모문룡이 사라진 이후 가도는 조선의 땅이 되었고, 청나라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청나라는 가도에 신경쓰지 않고 조선을 침략할 수 있었다.4. 관련 문서
- 가도 - 평안북도에 위치한 그 섬 맞다.
5. 출저
[1] 이것은 청나라측 설명이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무단으로 넘어왔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광해군은 조선군에 후금군에 적대행위를 하지 말라고 지시한 듯 하며,후금군도 조선군과 교전하지 않고 명나라인 500여명을 죽이고 압록강을 건너 귀환했다.[2] 모문룡은 동강진을 거점으로 요동지역을 계속 공격하여, 후금의 후방을 교란했다. 이런 모문룡의 활약으로 당시 명나라 조정 동림당에 속했던 명신 진량훈은 철산 가도의 동강진을 "바다밖의 장성이다"라고 일컬을 정도였다.[3] 광해군은 후금군이 조선 영토내에 들어와 모문룡군을 추격하는 것도 허락했기 때문에, 이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보여주는 제스처라고 할 수 있다. 본래는 모문룡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다.[4] 그 유명하신 충무공의 조카이다. 숙부와 마찬가지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듯, 조선 조정도 모문룡의 요구를 무시하고 이완에게 경징계만 내렸을 뿐 파직하지 않았다. 정묘호란때 후금군에 맞서 의주를 수비하다가 전사한다.[5] 임진왜란 이후 조선조정은 명나라에 대한 저자세로 일관하였다. 일부 역덕들이 병자호란에서 인조의 반청정책을 옹호하면서 청나라의 침략은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 때문이 아니라 청나라의 경제난 때문에 피할 수 없던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록을 읽어보면 조선 조정의 대명 저자세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가 많다. 광해군 시절 의주부윤 이극신이 조정의 명을 받고 여진족 대비를 위한 훈련을 하자, 이를 본 명나라측이 오해하여 조선에 항의했다. 이런 항의를 빌미로 사간원과 사헌부는 이극신이 상국(명나라)을 화나게 했으니 처벌해야 하고 광해군에게 주청을 올리기도 했다. (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1613) 10월 29일기사) 다만 광해군이 이극신을 옹호해서 별탈 없이 넘어갔다.[6] 임진왜란때도 조선과 일본의 해전은 대부분 육지에서 30-40km 근처의 근해에서 치러졌다.[7] 광해군 때만 하더라도 해로로 북경으로 가는 사신 여러명이 실종되었다.[8]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 재정난을 보충하기 위해 중과세를 했고, 이 중과세가 농민을 유민, 또는 반란세력으로 으로 만드는 악순환을 만들어서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9] 모문룡이 죽고 나서 조선 조정에서 그동안 모문룡한테 보내준 식량을 계산해 보았더니 무려 26만 석이나 되었다고 한다.[10] 모문룡을 조금 옹호해주자면 일단 북부 방어선이 망가지게 만든 이괄의 난이 일어난 책임이 조선에 있다는 점이 있고 그 후로도 조선이 이 부분에 있어서 소홀하긴 했다. 즉 모문룡 입장에선 내가 안 도와준건 그렇다고 해도 니들은 잘 하긴 했냐고 따져볼 수도 있던 것. 그러나 정작 모문룡 자신은 청군이 다 철군하고 민간인을 죽여댔다.[11] 평안도는 명나라와 면해 있어 무역이 발달했으며, 전통적으로 대동강 유역의 중심지이자 평안도 감영 소재지였던 평양부는 조선 제2의 대도시였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이런 평안도에서 마음만 먹으면 비리를 마음껏 해먹을 수 있는 평안도 관찰사는 꿀보직 중의 꿀보직으로 유명했다.[12] 이것이 모문룡 군사들이 가진 진짜 약점이었다. 세상에 정상적인 군대라면 고작 적군 기병 20여 명을 만났다고 무기를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는 모문룡이 거느린 군사들이 얼마나 기강이 엉망이고 훈련도 안된 오합지졸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다.[13] 원숭환은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로 제수되어 모문룡의 상관이었다.[14]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상방 보검을 뜻한다. 상방검은 해당 인물이 황제의 신하들을 재판 없이 즉결처형할 수 있는, 생사여탈권을 주는 의미였다. 중화제국과 조선 등 유교권 국가에서 사형은 반드시 국가의 최고지도자인 군주의 결재를 받아야만 집행할 수 있었다. 만력제는 일을 안 해서 30년동안 수억 인구의 명나라에 사형수가 단 하나도 없었다고 할 정도니(…) 상방검의 권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상방검은 판관 포청천에서 송 인종이 포증의 측근 전조에게 하사한 검으로 등장하기도 했는데, 작중에서도 범죄수사를 위해 고위직 용의자들을 압박할 때 매우 요긴하게 쓰인다.[15] 천계제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을 보고 분노하면서 명이 책봉한 왕을 감히 무단으로 몰아낸 것 아니냐고 의심하며 인조를 오랫동안 책봉해주지 않았다.[16] 가도의 별칭.[17] 인조실록 11년 10월 10일.[18] 인조실록 11년 11월 9일[19] 인조실록 15년 4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