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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02:01:45

춘향전

변학도에서 넘어옴

||<tablebordercolor=#c68a12,#43454d><tablebgcolor=#fff,#1c1d1f><bgcolor=#c68a12,#010101><tablealign=center><-2> 판소리 열두 마당 ||
전하는 다섯 마당 수궁가 · 심청가 · 적벽가 · 춘향가 · 흥부가
사라진 일곱 마당 가짜신선타령 · 강릉매화타령 · 무숙이타령 · 배비장타령 · 변강쇠타령 · 옹고집타령 · 장끼타령
<colbgcolor=#f1f1f1,#27292d> 춘향전
春香傳
신영희 명창과 신규식 고수의 춘향가 中 <춘향모 통곡 대목>
작자 미상
배경 조선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갈래 판소리계 소설, 연애 소설
주제 열녀의 교훈, 신분사회의 극복

1. 개요2. 줄거리3. 해외 번역4. 특징
4.1. 성적 묘사4.2. 시대 구현
5. 등장인물6. 대중매체에서
6.1. 소설6.2. 게임6.3. 만화6.4. 드라마6.5. 영화6.6. 애니메이션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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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판소리 춘향가(春香歌)가 원본으로, 한국의 고전 작자미상 연애 소설이다. 양반의 아들 이몽룡과 은퇴한 기생 월매의 딸 성춘향의 양반과 천민이라는 신분차에 굴하지 않는 연애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과거 삼국시대 고구려안장왕과 한씨 미녀 설화와 줄거리가 매우 비슷하다. 신분차를 빼면 신라설씨녀 이야기도 매우 유사하다.

춘향가는 판소리 5바탕(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중에서 가장 문학적, 예술적인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며, 처음부터 끝까지 곡을 다 부르는 완창 시간 또한 평균 7~8시간 정도로 판소리 5바탕 중 가장 길다.

2. 줄거리

남원의 퇴기인 월매의 딸인 이름난 미녀 성춘향이 몸종 향단이와 함께 단오날에 광한루에서 그네를 뛰고 있던 차에 마침 구경 나온 양반가의 후계자 이몽룡이 그녀를 보게 되고 한눈에 반하게 된다. 몽룡의 하인 방자의 도움으로 눈이 맞은 그들은 곧 불같은 사랑[1]에 빠지게 되지만, 남원 부사였던 몽룡의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임명되면서 몽룡도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남겨진 춘향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만 남원 부사로 새로 부임한 변학도에게 억지로 수청[2]을 들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결국 변학도의 수청을 거절한 괘씸죄로 그녀는 옥에 갇히게 된다. 옥에 갇혔으면서도 수청을 계속 거부하다가 참다못한 변학도에 의해 마당으로 끌려나왔고 변학도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줬지만 춘향은 또 이몽룡과의 도리를 주장하며 거부한다.

계속되는 춘향의 저항에 대노한 변학도에 의해 춘향은 고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온 몸이 의자에 묶여 정강이에 곤장을 맞기 시작하는 고문을 당하기 시작했다. 춘향은 고문을 당하는 와중에도 정절을 지키려 들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실신한 춘향은 포졸들에게 재차 끌려가 옥에 갇히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몽룡은 거지가 다 되어서[3] 옥에 갇힌 그녀를 다시 찾아오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정절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생일 잔치 날, 변학도는 운봉, 곡성, 정읍 등의 주변 고을 사또들을 데리고 잔치를 벌인다. 이몽룡은 잔치에 식사를 얻어 먹으려 들어가지만 문지기가 걸인 출입을 금한다. 이에 화가 난 이몽룡이 실랑이를 벌이자, 양반임을 알아본 운봉의 영장이 출입을 허한다. 그런데 차려진 상이 모서리가 부서진 개다리소반과 닥나무 젓가락에 깍두기, 콩나물, 막걸리가 전부임을 안 이몽룡은 옆에 앉은 운봉 영장의 갈비뼈를 찌르며 항의한다.[4] 분위기가 차가워지자 운봉 영장은 한시 놀이를 제안하는데, 변학도가 '고'를 운으로 띄워서 변 사또의 부하들과 변 사또의 동료 사또들 및 생일 잔치에 초청된 양반들이 한시를 짓도록 했다.[5]

허접한 음식을 받아먹고 있던 이몽룡은 자신이 비록 거지꼴이지만 그래도 양반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자신도 한시를 지었다.
金樽美酒 千人血
금준미주 천인혈
(금잔에 담긴 좋은 술은 천 백성의 피요)
玉盤佳肴 萬姓
옥반가효 만성고
(옥쟁반에 담긴 맛있는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 民淚落
촉루락시 민루락
(촛농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歌聲高處 怨聲
가성고처 원성고
(노랫 소리 높은 곳에 원성 소리 높더라)
이 시를 쓴 직후 이몽룡은 관아를 빠져나갔고 이 시를 받아본 운봉 영장은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변학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잔치를 즐기는데[6] 그 직후 암행어사가 출두하면서 변 사또는 혼비백산한다.[7] 사실 암행어사의 정체는 새 장원에 급제한 이몽룡이었다.[8] 출두를 숨기기 위해 부득이하게 거지 꼴로 연인인 춘향이까지 속인 셈.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정절을 지킨 결과 춘향은 마침내 기생의 딸에서 신분을 뛰어넘어 양반의 정실 부인[9]이 되고 이몽룡은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라서[10] 삼남 이녀 잘 낳아서 잘 산다는 해피 엔딩을 맞게 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판소리의 특성상 퍼져나가면서 내용이 변형되어 기록한 판본에 따라 '춘향이 모진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숨진 이야기', '구해졌지만 신분의 격차에 좌절한 춘향이 결국 자살', '구해놓고 이몽룡이 바람피워서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원 지역의 전설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춘향전과는 달리 이몽룡을 기다리다 못해 자살하거나 추녀여서 이몽룡의 외면을 받아 자살해버리는 엔딩도 있으며(일명 <박색춘향전>으로, 1970년대에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다) 가장 널리 퍼진 것은 위 해피 엔딩 버전.

3. 해외 번역

의외로 중국에서도 나름대로 인기가 있는 작품이다. 주로 월극 작품으로 만들어졌는데, 어디서 어떻게 만드냐에 따라서 그 형태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버전은 그래도 보면서 '조선을 배경으로 한 스토리구나' 하고 알아볼 수 있게 배우들이 조선풍 분장을 하고 나오기도 하지만, 어떤 버전은 그냥 중국 배경에 스토리만 춘향전 큰 줄기를 따라간다 할 정도로 중국식으로 현지화하기도 한다.

일본어로도 자주 번역되었다. 이 중 1882년 6월에 나카라이 도스이[11]계림정화 춘향전을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 20회 번역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번역본이 일본에서 발표된 한글 고전문학 번역본의 시초 중 하나가 되었다. 기사

1892년에는 프랑스에서 "향기로운 봄"(Printemps Parfumé, 프랭탕 파르퓌메)[12]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여기서는 몽룡이 춘향을 만나기 위해 여장을 한다. 프랑스 작가에게 춘향전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김옥균을 암살하고, 독립협회에 대항한 황국협회를 이끌었다고 악명높은 홍종우이다. 다만 문서에서도 알 수 있지만, 정치깡패 같은 식으로 욕먹을 인물은 아니다. 그 외에 홍종우는 심청전같은 다른 작품들도 번역하였다. 또한 해당 번역본을 기반으로 ‘사랑의 시련’이라는 이름의 발레까지 나온적이 있다.

베트남까지 전해져 전래되고 있다. 여 주인공의 이름도 春香의 베트남식 발음(난 수엉 후엉)이고, 여기에서도 프랑스어판 영향으로 몽룡이 춘향을 만나기 위해 여장을 한다.

1906년에는 대만에서 신문 연재되었다. 여기서는 춘향이 매를 맞고 죽어서 집으로 실려가는 중에 다시 살아나서 다시 감옥에 갇히나 이맹협이라는 협객이 구출해서 이몽룡(이 작품에서는 이령)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올 때까지 보호한다는 무협지스러운 각색이 들어가 있다고.

4. 특징

고구려 안장왕의 이야기가 춘향전의 모티프가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성제국대학교수였던 다카하시 도오루에 의하면 서상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는 한편 삼국사기에 실린 신라의 설씨녀와 가실의 이야기도 춘향전과 유사한 것을 보면 유행하던 플롯이었을지도 모른다.

4.1. 성적 묘사

춘향과 이몽룡이 한창 사랑에 빠졌을 때 이에 대한 묘사가 굉장하다. 이때 둘의 나이는 17살, 16살이지만 당시 조선시대에선 15세 남성에게 관을 씌웠기 때문에,[13] 지금으로 치자면 대학교 1~2학년끼리의 로맨스라고 보면 된다.

어쨌든간에 현대 기준으로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한창 아청법에 대해 논란이 있을 때 아청법이 소설 등 텍스트 매체에는 적용되면 안 된다는 주장의 근거로 이 춘향전과 같이 성적 묘사가 강하게 나오는 고전 문학 작품들을 드는 경우가 많다.[14]
눈결에 얼핏 보니, 삼삼이를 덮고 있는 것이 맹랑하고 야릇하다. (중략)
생리대를 풀고 과거 시험장에 있는 과녁[15]처럼 잠깐 일어서려무나.”[16]
“그건 곤란합니다. 그만하고 주무시지요.”
“이렇게 부탁하는데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춘향이 어쩔수 없이 반쯤 일어섰다 다시 앉았는데, 몽룡이 정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니, 겹겹이 둘러 싸인 푸른 산속, 늙은 중이 송이죽을 자시다가 혀를 데인 형상이요, 홍모란(紅牧丹)이 반개하여 피어오는 형상이라. 영계[17]찜을 즐기시나 닭의 볏이 거기 왜 있는가? 먹물이 흐른 줄과 도끼자국이 일치하는 구나.[18]
이도령의 움직임좀 보소. 몸이 점점 달아오르니, 훨훨 벗어 제끼고 모두 벗고 이부자리로 뛰어드는데, 춘향이 하는 말이,
"저 보고는 일어서라더니 당신은 왜 안 일어납니까?"
이도령이 눈결에 일어서서 앉아있자 춘향이 묻는 말이
“검은색을 띠면서,[19] 송이버섯의 머리 같은 것이 무엇시오?”
“그것도 모르느냐. 동해 바다에서 대합(大蛤) 조개 일쑤 잘 까먹는 소라 고둥이라 하는 것이라.”
에후리쳐 덥썩 안고 두 몸이 한 몸 되었구나. 네 몸이 내 몸이요, 네 살이 내 살이라. 호탕하고 무르녹아 여산폭포(廬山瀑布)에 돌 구르듯이 데굴데굴 구르면서 비점가(批點歌)[20]로 화답한다.
“우리 둘이 만났으니 만날 봉 자 비점이요, 백년가약 맺었으니 맺을 결 자 비점이요, 우리 둘이 누웠으니 누울 와 자 비점이요, 우리 둘이 벗었으니 벗을 탈 자 비점이요, 우리 둘이 덮었으니 덮을 복 자 비점이요, 오늘 침상 즐겼으니 즐길 낙 자 비점이요, 우리 둘이 입 맞추니 법칙 여 자 비점이요, 우리 둘이 배 닿으니 배 복 자가 비점이요, 네 아래 굽어보니 오목 요 자 비점이요, 내 아래 굽어보니 내밀 철 자 비점이요, 두 몸이 한 몸 되니 모을 합 자 비점이요, 나아갈 진, 물러갈 퇴, 잦을 빈 자 비점이요, 좋을 호 자, 실 산 자자, 수 자 다 비점이라.”
이렇듯이 음탕한 소리와 난잡하게 즐기니 남대문도 개구멍처럼 작게 보이고, 인정도 매방울처럼 작을 뿐이라. 선혜청이 오 푼이요, 호조가 서 푼이요, 하늘이 돈짝만하고, 땅이 맴도는구나.
ㅡ 춘향전 도남문고본. 출처

이도령이 춘향의 가는 허리를 후리쳐 담쑥 안고 기지개 아드득 떨며 귓밥(귓불)도 쪽쪽 빨고 입술도 쪽쪽 빨면서 주홍 같은 혀를 물고 오색 단청 순금장 안에 쌍거쌍래 비둘기같이 꾹꿍꿍꿍 으흥거려 뒤로 돌려 담쑥 안고 젖을 쥐고 발발 떨며 저고리 치마 바지 속곳까지 활씬 벗겨놓으니 춘향은 부끄러워 한편으로 잡치고 앉아 얼굴이 볼그레하고 구슬땀이 송실송실 맺힌다. 어디 이뿐인가, 〈춘향가〉에는 ‘정자타령’ ‘궁자타령’ ‘비점가’ 등 춘향과 이도령의 성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빗대어 부른 사랑가가 즐비하다. 갈 데까지 다 갔지만 전혀 상스럽거나 추하지 않다. 그래서 〈춘향가〉이다. 〈춘향가〉는 이와 같이 은밀한 남녀간의 관능적인 사랑을 열린 공간에 드러내놓고 자연스럽고 떳떳하게 즐길 수 있게 해준다.
ㅡ 김석배 교수. 네이버 지식 백과. 〈춘향가〉의 자력
특히나 이 부분은 유머화 되기도 했다. 업음질이 무슨 뜻인지 몰라 선생님에게 질문했더니 그제야 보이는 부분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춘향전을 일본어로 번역했는데 이 번역본의 성적 묘사가 매우 강해서 '일본인들이 열녀 춘향을 모욕하려고 왜곡한 거 아냐?'라며 연구를 했으나, 알고 보니 원전을 충실히 번역한 것일 뿐이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성적 묘사가 원체 직설적이다보니, 판소리를 배우는 사람들도 미성년자라면 이 부분을 생략한다고 한다. 국악인 박애리벌거벗은 한국사 101회 방송분에서 증언하기를, 9살 때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해 중학생 때 춘향전을 뗐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첫날 밤 대목은 건너뛰고 배웠기에 선생님께 이 대목은 안 배우는 거냐고 질문했더니 "그 대목은 성인이 된 후 가르쳐 주겠다"라는 답을 받았고, 실제로 스무 살이 되어서야 그 대목을 배웠다고 밝혔다.[21] 이해조 역시 춘향전을 음탕교과서라고 평했다.

4.2. 시대 구현

파일:external/www.namwontheme.or.kr/73_13988237492798_3.jpg
남원시 춘향 테마 파크에 있는 재현 모형. 완성도 높은 신장이다.
파일:춘향6.jpg
KBS 다큐멘터리"범법자 춘향 재판기"에서 고문당하는 춘향

변학도가 춘향을 고문하는 방식은 본래 국청에서 죄인을 심문할 때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는 방식인데 차마 여성의 볼기를 치긴 민망했던 지방 관원들이 여성에게 장형을 집행할 때 대체하는 방식으로 자주 사용했다. 사실 여성의 볼기를 칠 때는 속옷 한 장만 입히고 집행을 했는데 옷 위에 매를 치게 되면 나중에 피떡이 되었을 때 처리하기도 힘들어 이런 식으로 정강이를 치는 방식으로 대체한 것이다. 정강이는 볼기와는 달리 노출시키는 데 대해 제한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몽룡과 춘향은 정식으로 혼인한 게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변학도가 이걸 성 풍속 문란으로 몰아 역으로 당할수도 있기에 변학도가 춘향을 처벌한 게 정당화 될 수 있고 심지어 장형으로 다스릴 수도 있었다.[22] 물론 춘향전에서는 이몽룡과 춘향의 사랑이 아름답게 각색되었기에 변학도가 춘향을 수청 안 든다는 이유로 어거지로 처벌한 걸로 처리한 만큼 춘향이 장형을 맞는 굴욕을 면하긴 했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처벌 내용이 간통죄가 되는데, 이러면 춘향이 문제가 아니라 이몽룡, 정확하게는 이몽룡의 집안을 언급하면서 처벌 내역 보고를 중앙에 해야한다. 지방 향반이라면 몰라도 이몽룡 같이 지방 수령 이상을 하다가 중앙으로 올라간 관료 집안을 걸고 넘어진다는 것은 전 지방 수령 처벌 문제와도 엮이는 형태라서 절대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몽룡의 부친과 변학도는 모두 남원 부사로 나오는데, 사또라고 나오면 만만해 보이지만 남원부에는 종3품 도호부사가 임명된다. 그럴 바에는 관기가 되었건 평민이 되었건 여자 하나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 뒷수습이 훨씬 간편할 것이다.

간혹 변학도가 자기 생일날에 춘향이를 죽이겠다고 했던 본문의 내용 때문에 춘향이 참형당하기 직전에 구원받는 걸로 묘사하는 매체가 있지만 지방 관원에게 죄인을 처형할 권한이 없었고 처형권은 오로지 임금의 고유 권한이었던 만큼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다만 정작 춘향전 본문에는 춘향을 참형에 처한다는 내용은 없고 변학도가 춘향을 죽이려는 방식은 장살 즉 장형을 집행하면서 죄인을 치사시켜 버리는 방식이다. 실제로도 탐관오리들이 죽이고 싶은 이가 있으면 이런 방식으로 고의로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내리쳐 죽이는 경우가 허다했다.[23] 춘향전 본문 중에 변학도가 물고장을 운운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물고장이 다름 아닌 죄인이 장을 맞다가 실수로 죽었을 때 올리는 보고서이다.

아래 변학도 소개에 '무능하지만 음서 출신으로 낙하산 임명되었다'라고 나오는데, 남원부는 도호부사가 임명되는 직위이다. 이게 어느 정도 위치냐면, 조선 시대 전라도 지방관은 전라도 관찰사(종2품)이 최고위고, 그 아래에 4목(나주, 광주, 제주, 능주)[24]의 목사(정3품)가 있으며, 그 아래가 7개의 도호부[25]에 임명되는 도호부사(종3품)이다. 현대의 군제로 치자면 낮게 잡아도 장성급이고 관직으로 치면 시장이나 2급 이사관, 국장급이다. 일반적인 낙하산이나 음서로는 이 직위에 임명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변학도는 굉장한 뒷배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게 맞겠다.

그리고 연고지에 지방관으로 부임해서 토호와 결탁해서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거나 부패를 일으킬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 조선 시대에는 고향으로 부임하는 것을 제한하는 상피제가 있었기에 이몽룡이 암행어사로 고향인 남원에 와서 춘향을 구해주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칼럼이나 기사 역사 속 명저를 찾아서 춘향전 속 역사 이야기 상피제(相避制) 《춘향전》의 혁명성은 어디로 갔는가?등이 존재하는데 애초에 이몽룡의 부친이 남원에 부임했다는 것은 이몽룡 집안은 남원과 연고가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부사의 임기는 최대 5년 인데다 이몽룡의 아버지가 승진되어 한양으로 떠나기 때문에 5년을 안채웠을 가능성도 충분하며 채웠다 할지언정 당시 10대 후반이었던 이몽룡의 출신지가 남원일리도 없다. 일족이 현직 지방관이라면 몰라도 부친의 전 부임지라서 상피제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이몽룡의 모티브로 언급되는 성이성도 아버지 성안의 가 남원부사를 지냈고 성이성도 아버지를 따라가 3년간 남원에서 지냈지만 3차례나 되는 암행어사를 모두 호남에 암행어사로 파견된다.

오히려 문제는 암행어사 문서에도 있지만, 암행어사는 이몽룡 같은 초보가 임명받는 보직이 절대로 아니라는 데 있다. 이몽룡이 한양에 올라가고 한 40대, 50대가 되어서 부임했다면 모를까 장원 급제했다고 암행어사 내려보내고 하는 일은 절대 없다. 성이성의 경우는 지방관 경력도 없이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던 상당히 예외적인 사례이긴 한데, 문제는 이 때 성이성의 나이가 42세라는 것. 성이성은 1595년 생으로 1610년에 진사가 되었지만, 과거에 급제한 것은 1627년, 관직에 임명된 기록이 나오는 것은 1634년, 암행어사로 파견된 최초 기록은 1637년이다. 병과로 급제했다는 것과 첫 임명된 관직이 정6품 정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 사이에 미관 말직을 전전했다가 기록만 이 때 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관직 생활 10년차가 된다. 그리고 종6품 현감 정도는 지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만일 이 경우라면 성이성이 어사로 파견된 것은 딱히 예외도 뭐도 아니게 된다.

몇몇 서적에서 조선 시대에 여죄수에게 칼을 씌우지 않아 춘향전에서 춘향에게 칼을 씌운 걸 오류라고 하는 말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문헌을 보면 여죄수에게도 칼을 씌워서 옥에 가두는 게 관례였다. 심지어 민간 소설이 아닌 이덕무가 실화를 바탕으로 남긴 기록인 은애전에도 은애에게 칼을 씌웠다는 기록이 나오며 천주교 박해에 관한 기록에도 하옥된 여신도에게 칼을 씌웠다는 기록이 전하는 만큼 춘향전에서 춘향에게 칼을 씌워서 옥에 가둔 건 전혀 오류가 아니다.

5. 등장인물

춘향이 백년가약 맺고 수절 중이라니까 변학도 처음 반응이, "무식한 상놈인들 무슨 소리냐? 어떠한 양반이라고 엄한 아버지가 계시고 장가도 들기 전인 도련님이 시골에서 첩을 얻어 살자 할꼬?" 그렇다, 이몽룡의 사탕발림은 같은 양반이 봐도 안믿어질만큼 헛소리였던 것이다. 구슬리는 말 중에 '기생이 무슨 수절이냐'란 소리는 안한다. 이 말은 그 밑에 생원이 한거고 변학도는 '장가도 안간 도련님이 무슨 첩이야 말이 되냐', '어린 놈이 희롱하자고 한 말이지 돌아올리가 있겠냐?'로 오히려 무책임하게 춘향을 버린 이몽룡을 비난하고 있다. 춘향전이 당시 조선 사회에서 보수 계층, 지배 계층에 대한 반발과 풍자를 기반으로 탄생하여 살이 붙여지고 발전한 이야기이기에, 원전의 변학도는 당시 지배계층을 대표하는 것만으로 필요한 반동인물의 요소를 충분히 갖추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재해석하며 '권선징악'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모로 이미지가 개악된 인물. 현대의 아동 대상 동화에서 주로 못생긴 외모로 그려지지만, 사실 춘향전의 가장 유명한 판본인 《열녀춘향수절가》 완판 84장본에서는 풍채가 활달한 미남이자[31][32] 문장도 유려하고 풍류도 즐길 줄 아는 인물로 묘사된다. 다만 문제는 여성 편력이 상당하며, 한번 화나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분노조절장애가 있어 세간에서 고집불통이라 불렸다고 한다.

6. 대중매체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연애담이니 만큼 후대에 여러 모습으로 오마주되었다.

* 그룹 큐빅의 2집 타이틀 곡인 Oh! 춘향은 이 판소리를 모티브를 한 곡이다. 또한 part 1,2가 있는데 음은 동일하지만 가사가 다르다.

6.1. 소설

6.2. 게임

6.3. 만화

6.4. 드라마

파일:춘향1.jpg

6.5. 영화

역대 춘향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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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하야카와 고슈, 1923)
춘향전
(이명우, 1935)
그 후의 이도령
(이규환, 1936)
춘향전
(이규환, 1955)
대춘향전
(김향, 1957)
춘향전
(안종화, 1958)
탈선 춘향전
(이경춘, 1960)
춘향전
(홍성기, 1961)
성춘향
(신상옥, 1961)
한양에 온 성춘향
(이동훈, 1963)
춘향
(김수용, 1968)
춘향전
(이성구, 1971)
방자와 향단이
(이형표, 1972)
성춘향전
(박태원, 1976)
성춘향
(한상훈, 1987)
성춘향뎐
(앤디 김, 1999)
춘향뎐
(임권택, 2000)
방자전
(김대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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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애니메이션

7. 기타

파일:춘향7.jpg

[1] 원전(어린이용 동화책이 아닌 조선 시대의 원본)에 따르면 이들은 만난 지 하루만에 하룻밤을 보낸다.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경우도 그렇고 결혼 적령기가 현대보다 빨랐던 과거에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2] 춘향이 관기라고 해도 수청을 요구하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기생은 창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수청이라는 뜻은 "내가 시키는 심부름이나 해라" 라는 뜻이지만 실상은 변학도가 높은 직위라서 대놓고 품위없게 말을 못하니까 반쯤 돌려서 말한 것이다.[3] 이때 월매는 "걸인 중의 상걸인이 돼서 돌아왔구나!"라고 표현한다.[4] 현대의 독자는 연고도 없는 잔치에 얻어먹으러 온 주제에 반찬 투정까지 하는 이몽룡이 뻔뻔한 진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가난하던 옛날에는 잔치를 벌이면 동네 거지나 나그네까지도 대접하는 것이 예의였다. 게다가 이몽룡이 양반임을 알고 있음에도 서민들이나 먹을 법한 상을 차려주는 것은 충분히 비판받을 일이었다.[5] 아예 기름 고(膏: 연고(ointment)에 쓰이는 한자)와 높을 고(高)로 운자를 띄워줬다는 버전(완판본)도 있다. 수능을 위주로 한 교과서에는 주로 이 버전이 쓰인다. 그런데 시를 지을 때 운자(한자의 독음에서 중성, 종성과 성조(엄밀히 말하자면 중국의 규칙을 따라 중고한어에서의 운복과 운미 및 성조)가 맞는 글자를 압운이라고 하는데, 한시, 특히 절구(絶句)를 지을 때는 짝수행의 마지막 글자들에 압운이 되도록 한다. 이러한 한자 순서쌍을 운자라고 부른다)를 지정해 주더라도 정확히 어떤 글자를 쓰라고 지정하는 경우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흔치 않은 일이다.[6] 판본에 따라서는 영장은 무슨 뜻이지 몰라 꿈뻑거리고 그래도 사또라 한시를 알아듣고 변학도가 체념한 표정으로 잔치를 마저 즐긴다거나, 시를 알아들은 변학도가 격노하며 밥상 뒤엎기를 하고 화풀이를 할 겸 춘향을 끌어내 수청 들 것인지 죽을 것인지 고르라며 협박하던 도중 때맞춰 들려오는 암행어사 출두 소리를 듣고 대경실색하며 어디론가로 숨으려 드는 연출로 나오기도 한다.[7] 당황해서 '문 들어온다, 바람 닫아라. 물 마른다, 목 들여라' 라는 말도 하게된다. 고전 문학의 언어의 도치를 이용한 언어 유희를 통한 해학을 가르칠 때 자주 나오는 예시다.[8] 하지만 실제 조선에서는 이 작품에 나온 것처럼 장원 됐다고 바로 암행어사가 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항목 참조.[9] 정경 부인이 되었다는 판본도 있다. 정 경부인은 남편이 정승급인 정1품 또는 종1품에 올랐을 때 그 부인을 예우한 것인데, 이몽룡이 정승 관직인 좌의정까지 올라서 이 호칭을 받았다고 한다.[10] 버전에 따라 영의정까지 올랐다는 내용도 있다.[11] 히구치 이치요의 스승이다. 부산에서 자랐기 때문에 조선어를 할 수 있었고 아사히 신문 부산 특파원으로서 조선의 사건을 보도하기도 했다. 기사[12], 향기로울 . 춘향전의 한자를 그대로 불어로 풀어쓴 것.[13] 즉 16세를 성인으로 봤단 뜻이다. 이러한 조선의 성인식관례(冠禮)라고 한다. 중국 삼국시대 배경의 일본 게임이지만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10편에서도 플레이어의 자녀가 일정 나이에 도달했을 경우 "관례"를 올릴 수 있고 배우자가 "아직 어리지 않냐"고 하는 대사도 있다.[14] 윤승운 화백의 한자 교육 만화(맹꽁이 서당과 형식이 비슷)에서 훈장의 시중을 드는 하인이 자신이 재밌게 읽은 책이 춘향전이라고 자랑스레 말하자 훈장이 "그런 저질 불량 소설을 책이라고 하다니!"라면서 호통친다. 그러면서 "성현의 말씀이 담긴 좋은 책들을 읽어야지"하고 혀를 차는데 하인은 아무말 못하면서도 "춘향전이 손에 땀나게 재밌는데"라고 툴툴거린다. 짧은 내용이지만 춘향전에 대한 정통 유학자의 시선과 일반 민중들의 입장을 명쾌하게 나타냈다. 중국사대기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중 하나인 금병매는 성적인 묘사가 심각하게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조선의 성리학자의 기준으로 보면 금서로 지정해도 할 말이 없지만, 허균에 의하면 몰래 읽었다는 사람이 꽤 있었다고 한다.[15] 원문에는 식년동당(式年東堂)의 기추(騎芻)로 나와 있는데 식년도당은 "식년에 과거를 보는 장소인 동당, 또는 식년에 보는 시험인 동당시"를 의미하며 기추는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것"을 말한다.[16] 원문에서는 눈결에 얼핏 보니 삼삼이에 채인 것이 맹랑하고 야릇해서 "월후(月候) 삼장 끌러 놓고 식년동당(式年東堂)의 기추(騎芻) 과녁처럼 잠깐 일어서려무나."라고 말한다.[17] 원문에는 연계(軟鷄)로 나오는데 영계의 원말로 병아리보다 조금 큰 어린 닭을 의미한다.[18] 이 부분 전체가 춘향이의 성기를 묘사한 글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출처에 있으니 참조.[19] 원문에는 반룡단(斑龍丹)색을 띤다고 나오는데 반룡단은 한약의 일종으로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는 약이다.[20] 여기서 '비점'은 어떤 시에서 좋은 대목이나 비평할 만한 부분을 점으로 찍어 표시하는 것이다.[21] 그 외에도 방송에서 선보인 첫날밤보다 더 수위가 높은 대목이 있다고 밝혔는데(상기한 인용문), 벌거벗은 한국사가 12세 시청가인 관계로 이 부분은 공개하지 않았다.[22] 실제로 조선 시대에 양반과 스캔들을 일으킨 여성이 이런 식으로 처벌받은 사례가 꽤 있다. 평민들끼리의 일이면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잘 나가던 가문의 양반은 예법의 규율을 많이 받기에 사헌부에 걸리면 그 양반 남성이든 상대 여성이든 큰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23] 앞서 언급한 맹꽁이 서당의 작가 윤승운 화백의 다른 작품인 "우리 겨레 위인이야기(개정판은 '맹꽁이 인물열전')" 1권에서 나오는 야사인데, 정조 시대에 현륭원조경사들이 그 권위를 믿고 평민들에게 행패를 부려도 현장 관리들이 윗선이 무서워 보고도 안 하고 넘어가는 사건이 있었다. 조심태라는 관리가 이를 처벌하려고 하나 정조로부터 '사형은 안 되고 곤장 한 대만 때리고 보내라'라는 왕명이 떨어지자, 집행관에게 계속 때리는 척을 하다가 조경사 일당의 두목이 방심했을 때 온 힘을 다해 한 대를 때려 충격으로 죽게 만드는 식으로 처리하고 나머지 일당에게도 겁을 주는 대목이 나온다. 참고 영상[24] 전국에 딱 12개 있다.[25] 전국에 75개가 있고, 그 위에 정3품 관직인 대도호부도 존재하지만, 전라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26] 기생의 딸이라 기생을 해야했는데 대비를 넣고 기생에서 빠졌다.[27] 임진왜란에 관심 많은 역덕후라면 잘 알고 있을 정유재란 때의 의병장 조경남이 그의 스승이다. '금준미주 천인혈'은 조경남의 저서 속잡록에 나오는 명나라 장수의 글을 변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8] 또는 그대로 공연하자 양반가 자제의 스캔들이라고 해서 윗선에서 막았기 때문에 공연자들이 살짝 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다지 좋은 소리는 못 들었다는 증거.[29] 정확히는 성이성이 암행어사 출두를 하면서 이 시를 사용했다는 것으로 기록상 이 시를 처음 쓴 사람은 명나라 사람 조도사(趙都司)이다. 이걸 성이성의 스승인 조경남이 기록(속잡록, 1622년의 기록)으로 남겼고 조경남에게서 학문을 배운 성이성이 이 시를 배워 암행어사 출두 때 활용했다는 것이다.[30] 조선 시대에서 기생이 정절을 내세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 라고 반응할 수 있는데 조선 시대에 몸을 팔았던 기생은 “창기”다. 이들은 천민이었으며 현대 기생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이들의 모습이다. 반면 성춘향은 관가 소속의 관기였다. 매창불매음(賣唱不賣淫), 즉 “노래는 팔되, 몸은 팔지 마라.”라는 것이 당시 기생들의 신념이었고 따라서 매춘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춘향전의 판본이 너무 많고, 애초에 그나마 원판으로 추정되는 경우도 대비정속(왕실이나 조정 고관과 관기 사이에 낳은 자식을 관적에서 빼는 대신에 여종을 관적에 올리는 것. 이는 세종 때 일천즉천의 원칙에 의해서 폐지되었지만 암암리에 계속 이뤄져서 조선 중기 기록에 보면 관기한테 음악과 시서화 좀 가르쳐놓으면 눈맞은 수령이 데려가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종을 대비정속 시켜놔서 관기의 질이 떨어진다는 기록이 있다.)등을 통해서 춘향의 신분을 양민화시켜 놓기도 했다. 이런 판본은 거기에 맞춰서 춘향이의 친부도 성 참판이 된다. 19세기 판본에는 월매가 애초에 기녀가 아니게 되기도 하고, 기적에서 다른 양반이 빼주기도 하고, 심지어 춘향이도 아니고 월매가 양반의 서녀로 등장하기도 한다. 애초에 일천즉천의 원칙에 의하면 서얼 중에서 천첩에서 나온 자식인 얼자는 모두 천인이 된다. 하지만 앞 각주에서 언급된 대비대속이 법적으로 폐지가 되건 말건 실제로 대속한 사례는 많다. 외거 노비의 경우도 이 방식으로 면천할 수 있었고. 월매도 향단이를 몸종으로 거느리는 등 관기이건 일반 기생이건간에 상당한 재력을 쌓았기 때문에 대속 자체는 불가능하지는 않다.[31] 원문: "이때 수삭 만에 신관(新官) 사또 났으되 자하골 변학도라 하는 양반이 오는데, 문필도 유여하고 인물 풍채 활달하고 풍류 속에 달통하여 외입 속이 넉넉하되, 한갓 흠이 성정 괴팍한 중에 사증을 겸하여 혹시 실덕도 하고 오결하는 일이 간다(間多) 고로 세상에 아는 사람은 다 고집불통이라 하것다."[32]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이본인 《남원고사》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없기에, 변 사또의 외모 설정은 전승마다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작 중 원작의 서술을 따라 미남으로 그리는 경우 탐관오리가 아닌 춘향을 사랑하는 순정남으로 묘사하기도 한다.[33] 이건 완판본 버전의 묘사로, 아동용 버전에서 춘향의 전형적인 태도인 '도련님 그러시면 전 어떻게 해요'하며 울기만 하는 청순가련하고 애처로운 이미지와는 괴리된다. 참고로 경판본의 묘사는 아동용 버전과 흡사.[34] 중앙 5군영 및 각도 병영 소속의 아래에 설치된 진영을 관할하는 무관직으로, 법제상으로는 정3품에 해당하여 종3품인 남원 부사 변학도보다 관등이 높다. 다만 실제로는 지방군의 영장은 대부분 지방관 겸임으로 되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 운봉은 현감이 파견되는 현이었으므로 작중에서 운봉 영장이 변학도에게 공대를 하는 것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판본마다 본래 관직인 현감으로 나오기도 하며 영장을 겸했다는 의미로 겸영장이라 나오는대로 따른 것도 있다. 운봉 영장의 직책에서 춘향전이 최소 숙종 이후에 집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운봉현에 1709년(숙종 35) 전라도 좌영이 남원에서 이설되어 운봉 현감이 영장(營將)을 겸하였다.[35] 막걸리 한사발이라는 건 우스개소리로 그렇게 얘기한 것일 뿐 실제로는 다만 5만원 ~ 6만원이라도 그날 일한 대가에 대한 돈을 쥐어줬을 가능성이 높다. 보조출연자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겉으로 보기에 단 한컷뿐이라도 실제로는 하루종일 촬영한다. 물론 막걸리도 실제로 대접해줬을 것이다.[36] 춘향과 한단이 서로를 바꿔서 나가서 변 사또는 이때 한단을 성춘향으로 알고 있었다.[37] 집이 워낙 가난해서 인사만 하러 오면 거마비를 준다는데 춘향이 안 간다 하길래 한단이 춘향인 척 인사하러 가서 거마비만 받아오는 것.[38] 이 드라마에서 이몽룡은 서울에 가서 양반 집 규수와 새로 결혼을 하는데, 이게 춘향이 자살하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39] 당시 16세였는데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가슴 노출과 성 행위를 연기했다. 이것 때문에 당시 말이 많았는데 이전에 길소뜸의 이상아, 꽃잎이정현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상아의 노출은 뒤태만 잠시 나오고 이효정의 노출은 잠시만 나오지만 이정현은 음모 노출까지 했고 꽤 자주 나와 노출도가 훨씬 심했다. 어쨌든 이정현과 이효정의 경우 예술 표현이라는 이유로 유야무야 넘어갔다.[40]마음의 고향》으로 데뷔했으며, 한국전쟁 전에 월북했다.[41] 작중에서 변학도 역을 맡은 배우가 이몽룡에게 심문을 받는 와중에 적반하장으로 자기 죄를 잡아떼다가 극단 소속 드러머의 드럼 연주에 맞춰서 곤장으로 두들겨맞자, 공연을 관람하던 관객들이 고소하다며 낄낄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사족으로, 이때 언년이 며느리인 춘심에게 공연이 재밌다고 말하려다가, 자기 남편인 이득촌이 다른 노파와 사탕을 나눠먹으면서 히히덕거리는 것을 보고는 분노한 바람에, 공연이 끝나고 귀가하기 전까지 득출이 언년에게 죽도록 쪼인트를 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