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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국왕 | }}}}}}}}} |
백제의 왕자 부여연 | 扶餘演 |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 615년 이후[1] |
백제 사비성 추정 (現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 |
사망 (음력) | 연대 미상 (향년 불명) |
당 장안 추정 (現 중국 산시성 시안시) | |
성씨 | 부여(扶餘) |
휘 | 연(演) |
부모 | 부왕 의자왕 모후 미상 |
형제자매 | 이복형 부여융, 부여태, 부여효 이복동생 부여풍 등 |
[clearfix]
1. 개요
백제 제31대 건길지 의자왕의 아들.[2]2. 생애
백제 사비성에서 의자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660년 이전 그의 생애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했고 뒤이어 계백이 황산벌 전투에서 패하고 나당연합군이 수도 사비성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자 아버지 의자왕와 태자 효는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한다.
660년 7월 13일 이복형 부여태가 칭왕하며 항전했으나 소정방의 군대가 사비성 성가퀴를 넘어 당나라 깃발을 세우자 부여태는 결국 성에서 나와 항복하고 만다.
660년 7월 18일 웅진성에서 버티던 의자왕도 예식진에 의해 잡혀가 강제 항복당하면서 백제는 멸망하게된다(...) 전쟁이 끝난 뒤 9월 3일 사비를 떠나 당나라 군대를 따라 낙양으로 갈 때 부여연도 의자왕, 태자 부여효와 왕자 부여태·부여융 등 백제의 대신•백성들과 함께 당나라에 붙잡혀갔다.
11월 1일 장안에 도착한 의자왕과 부여융을 비롯한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과 국변성[3]등 37명 등과 함께 조정에 바쳐졌고 그곳에서 그들은 천자 당 고종과 측천무후를 만났다. 고종은 이들의 잘못을 크게 꾸짖은 후에 이들 모두를 사면시켜주였다.[4]풀려난 뒤 그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아마 부여연은 장안에서 생을 마감한 듯하다.
3. 여담
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演) 및 대신과 장사 88명, 백성 12,870명을 당나라 수도로 보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발췌
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演) 및 대신과 장사 88명, 백성 12,870명을 당나라 수도로 보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발췌
-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서 당으로 끌려가는 왕자를 소개할 때 부여연이 태자 부여효, 부여태, 부여융 다음으로 언급되는 왕자이므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의자왕의 4남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5][6]
[1] 큰형인 부여융이 615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615년 이후 출생이다.[2] 기록에서 태자 부여효, 부여태, 부여융 다음으로 서술된 점으로 보면 의자왕의 사남일 것으로 추정된다.[3] 백제의 신하로 팔성팔족 가문인 국씨(國氏)다.[4] 부여연의 아버지 의자왕은 나라를 잃고 나서 심한 충격을 받아 망국의 회한에 괴로워하며 며칠만에 머나먼 이역 땅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5] 의자왕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으며, 융과 태, 효와 연 형제가 서로 모계가 달랐다는 견해도 있다.[6] 山尾幸久, 1992, 「7世紀 中葉 東亞細亞」, 『백제연구』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