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6b6b, #008080 20%, #008080 80%, #016b6b); color: #fbe673;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전지왕조 | 상좌평 | 부여신 |
구이신왕조 | |||
비유왕조 | 상좌평 | 해수 | |
개로왕조 | 상좌평 | 부여문주 | |
성왕 | 상좌평 | 사택기루 | |
의자왕조 | 대좌평* | 사택지적 | 사택천복 | |
* [ruby(대좌평, ruby=大佐平)]은 일반적으로 [ruby(상좌평, ruby=上佐平)]과 동일한 직위로 추정. | |||
}}}}}}}}} |
백제국 대좌평 사택천복 | 砂宅千福 | |
<colbgcolor=#00A6A9> 직위 | 대좌평(大佐平) |
성씨 | 사택(砂宅) |
이름 | 천복(千福)[1] / 정복(貞福)[2] |
생몰연도 | 미상 |
[clearfix]
1. 개요
백제의 인물. 의자왕 시기 대좌평(大佐平)[3]을 역임했다.2. 기록
『삼국사기』 무열왕 7년조에 따르면,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660년 7월 13일 사비 도성이 함락될 때 대좌평이었던 사택천복은 부여융 등과 함께 사비성을 나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660년 7월 18일 웅진성에서 버티던 의자왕도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하게 되었고(...) 9월 3일 의자왕 및 왕자들, 대신과 장수들, 백성 등 총 12,807명이 사비를 떠나 당으로 돌아가는 당나라 군대를 따라 낙양으로 갈 때 사택천복도 함께 끌려갔다.
『일본서기』 제명 5년 7월조의 세주에 인용된 『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에는 11월 1일에 소정방 등에게 잡힌 의자왕, 태자 융 등 여러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과 국변성(國辨成)[4]이하 37명 모두 50여 명을 조정에 바쳤는데, 천자가 은칙을 내리고 그 자리에서 풀어주었다고 한다. 풀려난 이후 그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3. 기타
- 「당평백제비」에 적힌 대수령(大首領)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사비 도성이 함락될 때 항복한 대표적인 귀족 관료임을 추측할 수 있다.
- 대당평제국비명에는 사타천복(沙吒千福)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