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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后 松氏? - 기원전 17년 음력 10월
고구려 제2대 국왕인 유리명왕의 왕후. 아버지는 송양이다.
2. 생애
기원전 18년(유리왕 2년) 음력 가을 7월 유리명왕의 왕비가 되었다.이듬해인 기원전 17년(유리왕 3년) 음력 10월, 유리왕의 왕비가 된지 1년 3개월만에 사망했다.[1] 왕후 송씨가 사망하면서 유리왕은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를 후비로 들였다.
3. 기타
송씨의 아버지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대에 최초로 고구려에게 복속된 비류국의 왕으로 비류국은 복속 이후 고구려 오부의 서부(西部)인 소노부가 되었기 때문에 송씨는 소노부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이때는 비류국이 고구려에 복속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인 만큼 공주급에 가까운 위상으로서 고구려와 소노부의 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 유리명왕과 정략결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4. 의문점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즉위하였다.[원주] 이름은 무휼(無恤)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장성하여서는 영웅다운 호걸[雄傑]로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년(14)에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는데, 그때 나이가 11세였다. [유리명왕이 죽자] 이때에 이르러 즉위하니, 어머니는 송씨(松氏)로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讓)의 딸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즉위기사(18년) 10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즉위기사(18년) 10월-
민중왕(閔中王)은 이름이 해색주(解色朱)이고, 대무신왕(大武神王)의 동생이다. 대무신왕이 사망하였으나, 태자가 어려서 [나라의] 정사를 맡을 수 없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민중왕 즉위기사(44년 10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민중왕 즉위기사(44년 10월)-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이 왕후 송씨의 소생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대무신왕의 뒤를 이어 죽위한 민중왕을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유리왕의 왕후 송씨는 기원전 17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어 대무신왕(기원후 4년 출생), 민중왕 형제(기원후 5년 ~ 기원후 18년 사이 출생)의 어머니가 될 수 없는 오류가 발생한다.
이에 대해선 대무신왕이 화희 소생으로 파악하는 설[3], 송양의 다른 딸과 혼인해서 낳은 자식이라는 설[4], 대무신왕이 유리명왕의 가계에 포함되면서 부자지간임을 강조함에 따라 생긴 오류라는 설[5]이 제기된 상태다.
5. 창작물에서
바람의 나라에서는 왕후 송씨가 두 자매로 각색되었다.[6] 다만 언니 쪽인 송씨는 작중 고인이라서 여동생 쪽인 서화만 직접 등장한다.[1] 혼인당시 유리왕이 20세였던 점으로 보아 요절했을 가능성이 높다.[원주]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한다.[3] 이병도, 1992, 「高句麗 初期 王系의 復元을 위한 檢討」, 『韓國學論集』 20, p176-177[4] 한영화, 1999, 「고구려 地母神 신앙과 母妻制」, 『史學硏究』 58‧59, p.219[5]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6] 상술한 역사 기록상의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한 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