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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氏羙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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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안장왕(? ~ 531년) 시기의 인물. 안장왕의 연인이다. 한씨미녀는 본명이 아니라, 한씨(漢氏) 성을 가진 미녀라는 뜻이다. 안장왕과의 연애 일화가 알려져 있다.조선상고사가 인용한 해상잡록에는 한주(韓珠)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2. 기록
2.1. 삼국사기
왕봉현(王逢縣)【개백(皆伯)이라고도 한다.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安臧王)을 맞던 곳이라 하여 왕봉으로 불렀다.】 (중략) 달을성현(達乙省縣)【한씨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놓고 안장왕을 맞던 곳이라 하여 후에 고봉(高烽)이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한씨 미녀는 왕봉현 (경기도 고양시 행주내동) 혹은 달을성현(경기도 고양시 관산동)에서 안장왕을 맞이했다고 한다. 삼국사기가 12세기 중반(1145년 편찬)에 지어진 점으로 보아 한씨미녀 설화 자체는 12세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2. 조선상고사
20세기 초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 후기 저술된 해상잡록을 인용해 안장왕과 한씨 설화를 기술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안장왕이 주가 갇혀 있음을 몰래 탐지하여 알고 짝없이 초조하나 구할 길이 없어 여러 장수를 불러 “만일 개백현(皆伯縣)을 회복하여 한주를 구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과 만호후(萬戶候)의 상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아무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왕에게 친누이동생이 있어 이름을 안학(安鶴)이라고 했는데 또한 절세의 미인이었다.
늘 장군 을밀(乙密)에게 시집가고자 하고 을밀도 또한 안학에게 장가들고자 하였으나 왕이 을밀의 문벌이 한미하다고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 을밀은 병을 일컬어 벼슬을 버리고 집에 들어앉아 있었는데 , 이에 이르러 왕이 한 말을 듣고는 왕에게 나아가 뵙고 “천금과 만호후의 상이 다 신의 소원이 아니라 , 신의 소원은 안학과 결혼하는 것뿐입니다 . 신이 안학을 사랑함이 대왕께서 한주를 사랑하심과 마찬가지입니다 . 대왕께서 만일 신의 소원대로 안학과 결혼케 하신다면 신이 대왕의 소원대로 한주를 구해오겠습니다 .”라고 하니 , 왕은 안학을 아끼는 마음이 마침내 한주를 사랑하는 생각을 대적하지 못하여 드디어 을밀의 청을 허락하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였다 .
을밀이 수군(水軍) 5천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떠나면서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먼저 백제를 쳐서 개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살려낼 것이 니 대왕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천천히 육로로 쫓아오시면 수십 일 안에 한주를 만나실 겁니다 .”하고 비밀히 결사대 20 명을 뽑아 평복에 무기를 감추어가지고 앞서서 개백현으로 들여보냈다 . 태수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그 생일에 관리와 친구들을 모아 크게 잔치를 열고 오히려 한주가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 사람을 보내 꾀었다 .
“오늘은 내 생일 이다 . 오늘 너를 죽이기로 정하였으나 네가 마음을 돌리면 곧 너를 살려줄 것이니 , 그러면 오늘이 너의 생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한주가 대답하였다 . “태수가 내 뜻을 빼앗지 않으면 오늘이 태수의 생일이 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태수의 생일이 곧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요 , 내가 사는 날이면 곧 태수의 죽는 날이 될 것입니다 .” 태수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빨리 처형하기를 명하였다 .
이때 을밀의 장사들이 무객(舞客)으로 가장하고 잔치에 들어가 칼을 빼어 많은 손님을 살상하고 고구려의 군사 10만이 입성하였다고 외치니 성안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 이에 을밀이 군사를 몰아 성을 넘어 들어가서 감옥을 부수어 한주를 구해내고 , 부고(府庫)를 봉하여 안장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 한강 일대의 각 성읍을 쳐서 항복받으니 백제가 크게 동요하였다 . 이에 안장왕이 아무런 장애 없이 백제의 여러 고을을 지나 개백현에 이르러 한주를 만나고 , 안학을 을밀에게 시집보냈다
《조선상고사》(출처:위키문헌)
늘 장군 을밀(乙密)에게 시집가고자 하고 을밀도 또한 안학에게 장가들고자 하였으나 왕이 을밀의 문벌이 한미하다고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 을밀은 병을 일컬어 벼슬을 버리고 집에 들어앉아 있었는데 , 이에 이르러 왕이 한 말을 듣고는 왕에게 나아가 뵙고 “천금과 만호후의 상이 다 신의 소원이 아니라 , 신의 소원은 안학과 결혼하는 것뿐입니다 . 신이 안학을 사랑함이 대왕께서 한주를 사랑하심과 마찬가지입니다 . 대왕께서 만일 신의 소원대로 안학과 결혼케 하신다면 신이 대왕의 소원대로 한주를 구해오겠습니다 .”라고 하니 , 왕은 안학을 아끼는 마음이 마침내 한주를 사랑하는 생각을 대적하지 못하여 드디어 을밀의 청을 허락하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였다 .
을밀이 수군(水軍) 5천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떠나면서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먼저 백제를 쳐서 개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살려낼 것이 니 대왕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천천히 육로로 쫓아오시면 수십 일 안에 한주를 만나실 겁니다 .”하고 비밀히 결사대 20 명을 뽑아 평복에 무기를 감추어가지고 앞서서 개백현으로 들여보냈다 . 태수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그 생일에 관리와 친구들을 모아 크게 잔치를 열고 오히려 한주가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 사람을 보내 꾀었다 .
“오늘은 내 생일 이다 . 오늘 너를 죽이기로 정하였으나 네가 마음을 돌리면 곧 너를 살려줄 것이니 , 그러면 오늘이 너의 생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한주가 대답하였다 . “태수가 내 뜻을 빼앗지 않으면 오늘이 태수의 생일이 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태수의 생일이 곧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요 , 내가 사는 날이면 곧 태수의 죽는 날이 될 것입니다 .” 태수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빨리 처형하기를 명하였다 .
이때 을밀의 장사들이 무객(舞客)으로 가장하고 잔치에 들어가 칼을 빼어 많은 손님을 살상하고 고구려의 군사 10만이 입성하였다고 외치니 성안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 이에 을밀이 군사를 몰아 성을 넘어 들어가서 감옥을 부수어 한주를 구해내고 , 부고(府庫)를 봉하여 안장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 한강 일대의 각 성읍을 쳐서 항복받으니 백제가 크게 동요하였다 . 이에 안장왕이 아무런 장애 없이 백제의 여러 고을을 지나 개백현에 이르러 한주를 만나고 , 안학을 을밀에게 시집보냈다
《조선상고사》(출처:위키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