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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3 00:52:36

계루부

고구려 5부
<colbgcolor=#f0ef75,#bd7f14>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계루부 연노부[1]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
후한서
(주석[2])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
(중부·내부·황부) (서부·우부·백부) (북부·후부·흑부) (동부·좌부·청부) (남부·전부·적부)
삼국사기 계루부 비류나부 연나부
(제나부[3])
관나부 환나부
[1] 소노부의 오기로 추정된다.
[2] 이는 당나라 장회태자가 남긴 주석에 근거한 것이다. 다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것이 고구려 초기의 5부와 후기의 방위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착오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3] 연나부의 오기일 수도 있고, 절노부와 음이 통하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 이표기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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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부친 고재사 · 모친 부여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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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칠성산 871호 · 계루부 · 소노부
기타 해씨 고구려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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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桂婁部

1. 개요

고구려 초기, 나라를 이끈 5부(五部)[1] 중 하나이다. 제9대 고국천왕이 지방 행정적인 방위명 부로 바꾼 뒤에는 중부(中部), 내부(內部), 황부(黃部)로 불렸다. 계루부의 핵심 영역은 국내성이 위치했던 지안(集安) 지역으로 추정된다.

2. 상세

고구려의 창업군주이자 계루부 집단의 초대 수장으로 여겨지는 동명성왕이 부여 출신임을 고려할 때, '계루'는 동명성왕을 중심으로 고구려를 세운 부여계 집단의 명칭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서 더 나가면 《삼국지》 〈동이전〉 기록[2] 등에 의거해 소노부 출신인 제5대 모본왕이 시해되고, 계루부 출신인 제6대 태조대왕이 등극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것은 해씨 고구려설과도 연관되어 있는데, 해씨를 쓰는 제2대 유리명왕부터 제5대 모본왕까진 해씨이고, 그후의 왕인 제6대 태조대왕은 고씨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보면 비정상적으로 긴 태조대왕의 생몰연도나 태조라는 명칭부터가 묘하긴 하다. 허나 왕계는 건국 시기부터 계루부가 가지고 있었으며, 해씨와 고씨의 차이는 그저 표기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 여러 데이터를 고려하는 학계에선 더 우세한 설이긴 하다.

계루부는 고구려 왕실의 부로, 고구려 초기의 5부 중 유일하게 《삼국사기》나 중국측 사료에서 동일한 이름으로 나와 있다. 이는 계루부가 고구려 왕실의 부로서 그만큼 강력하고 중심적 역할을 하였기에 외국인에게도 정확히 전달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후기부터는 표기가 괘루(卦婁)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신라울주 천전리 각석 계사년(453년) 명문에 괘루라는 글귀가 적혀 있고[3], 6세기 유물인 평양성 석각 제5석에 괘루(卦婁) 개절(蓋切) 소형(小兄) 가군(加群)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683년 6월 1일 보덕국의 하부(下部) 조유(助有) 괘루(卦婁) 모절(毛切)이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799년 12월 5일에는 고구려계 도래인 괘루진로(卦婁眞老)가 개성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일본 사서에 전해진다.


[1]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2] 처음에는 소노부가 고구려 국왕을 배출했으나 나중에 계루부가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3] 전호태(2018)에서는 규루(邽婁)로 판독했지만, 뒤의 사례들을 참고하면 자형이 비슷한 괘루(卦婁)일 가능성이 높다. 계사년 명문에는 고구려 관등 대형가(大兄加)가 등장하기 때문에, 명문이 작성될 당시 고구려 관료들이 동행했다고 가정하면 계루부가 언급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