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弓遵(? ~ 246)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삼국사기에는 이름이 왕준(王遵), 관직은 삭방태수로 나온다.
2. 상세
대방태수로 240년에 제준을 왜국으로 보내 각종 물품을 전하고 히미코를 왜왕에 임명하게 했으며, 245년에 유무와 함께 영동의 예(동예)가 고구려에 예속되었다고 해서 군대를 일으켜 이를 공격했으며, 불내후 등이 읍을 들어 항복했다. 246년에는 관구검, 유무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다.오림이 낙랑군이 본래 삼한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떼어내 낙랑에 넣으려 했는데,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전할 때 다른 점이 있어 신지와 한인들이 분노해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다. 이에 궁준은 유무와 함께 군을 일으켜 대응하다가 전사했다.
조선상고사에는 고구려가 남낙랑을 습격해 이기자 고이왕도 남낙랑의 변경을 습격해 약탈했는데, 궁준은 유무와 함께 남낙랑과 한편이 되어 동부여를 쳐서 이겼다. 고이왕이 위나라와 대적해 싸울 수 없음을 알고 약탈한 백성들을 돌려주고 화의를 청했는데,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떼어내 낙랑에 넣으려고 한 것에 분노해 고이왕이 진충을 시켜 공격하자 궁준은 전사했다.
3. 창작물에서
소설 패왕 삼국지 : 초갑질 역사물에서는 이몽과 고구려가 낙랑을 공격할 때 군사를 파견하지 않으려 했으나, 유하의 재촉으로 제준을 시켜 군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도중에 제준은 매복에 걸려 살해당하며, 낙랑이 패하고 항복하면서 유하의 설득으로 궁준도 항복하고 노후를 보장받는다.소설 고구려사초에서는 변방을 침략하고 신라, 왜와 소통해 고구려의 근심거리가 많아지게 했다면서 고구려에서는 관리에게 명을 내려 한의 신지 등을 이끌고 나가서 이를 쳐 죽이게 했으며, 246년에 궁준은 관구검이 유무와 함께 남쪽으로 들어와서 관구검을 도왔다. 고이왕이 그 틈을 타 낙랑, 대방 두 나라를 기습해 많은 수의 변방 백성을 노략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