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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11:47:32

경(행정구역)



1. 개요2. 유래3. 역사4. 형태5. 사례
5.1. 한국
5.1.1. 신라5.1.2. 발해5.1.3. 고려
5.2. 중국5.3. 일본
6. 여담

1. 개요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수도나 혹은 수도에 버금가는 중요한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으로, 한자의 뜻은 서울을 뜻하는 서울 경() 자를 쓴다. 도()와는 글자만 다르다 뿐이지, 경과 똑같은 행정구역이었고, 경(京)과 도(都)를 혼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도(都)였던 행정구역도 여기서 함께 설명한다.

중세 이후로 점차 경은 (府)로 바뀌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현대에는 동아시아의 어느 국가도 경이라는 행정구역을 사용하지 않는다. 현대에 경과 비슷한 행정구역으로 한국에서는 특별시광역시로, 일본에서는 (都)라는 행정구역이 있다.

경은 보통 지방행정구역과는 구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상위 행정구역을 두지 않고 중앙정부의 직할지였다는 게 핵심이다. 이 점은 현대 대한민국의 특별시나 광역시와 비슷하다.

2.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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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京) 자의 유래에 대한 설은 분분하다.

첫 번째 설은 높은 망루의 모양을 본떠 상형문자로 만든 것이라는 것이 있다.[1] 상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성에는 적의 침입을 감시할 수 있는 높은 망루를 만들곤 했는데, 이 유래가 맞다면 본래 경의 의미는 성읍국가였던 시절의 도시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두 번째 설은 높은 토대 위에 쌓은 궁궐을 뜻한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고대에는 도시를 완전히 에워싸는 성벽이 없이, 왕이 사는 궁궐만을 보호하는 궁성만 존재했었다. 즉, 고대에는 왕이 사는 궁성 일대만을 수도로 보았다는 것인데, 실제로 신라의 초창기에는 수도라 하면 월성을 가리켰다.

세 번째 설은 시경에서 나온 설인데, 京이 커다란 곡식창고를 의미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세금을 곡물로 거두었고, 이것을 이용하여 나라를 운영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사 의식에도 세금으로 거둔 곡물이 많이 이용되었을 것이니, 왕은 많은 양의 곡식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가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京이라는 글자는 처음에는 이 곡식창고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후에 서울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처럼 보인다.

네 번째 설은 시라카와 시즈카가 주장한 것으로, 京이란 이민족이나 적의 시체를 가지고 쌓은 전승기념탑을 의미한다고 한다. 실제로 경관에서 경 자가 이 한자를 쓴다.

3. 역사

경은 수도 그 자체를 의미하는 행정구역이다. 경이라는 행정구역 단위는 상고시대부터 등장하는데, 동아시아사에서 처음으로 실체가 확인되는 경은 주나라수도였던 풍경(豊京), 지금의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이다. 풍(豊)이라는 지명에 경(京)이라는 행정구역 단위를 처음으로 붙인 것이다. 여기서 강을 건너 천도한 곳이 바로 호경(鎬京)으로 현재는 모두 시안시의 영역 안에 있다.

고대 국가는 보통 성읍국가 정도 수준이었으므로 아무리 영토를 확장하고 주변 성읍국가들을 복속시키고 해도 행정력이 미비해서 영토 전체를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됐다. 이런 이유로 중국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도읍의 국인(國人)과 그 바깥의 복속된 사람들을 일컬어 야인(野人)이라 구분했다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도읍 안의 백성들이 정식 국민이고,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2등 국민 취급을 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의 이름만 봐도 이러한 점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고구려도 성읍국가부터 시작해서 주변국들을 복속하며 성장한 국가라, 4세기까지는 성 안의 고구려인과, 성 밖의 속민(屬民)으로 구분했다고 한다. 성 안이 국내고, 성 밖은 식민지 쯤 취급했던 것이다.

그렇게 했던 이유 또한 있다. 성 안의 백성들은 나고 자라면서 본국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있는데, 피정복민들은 성 안의 사람들과는 또 다른, 자기들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 동화가 되는 데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 때문에 성 안의 백성들은 충성도가 높은 데에 반해, 피정복민들은 상대적으로 충성도가 낮다. 또, 성 안에는 지배층이 살았기 때문에 피지배층이 사는 지역과는 격이 다른 행정구역을 설정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수도와 지방은 자연스럽게 구분될 수 밖에 없었고, 경이 탄생한 배경도 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도 이 비슷한 예가 있는데, 바로 북한이다. 수도인 평양에는 조선로동당에 충성심이 높고, 출신 성분이 좋은 사람들만 살 수 있고, 지방과는 달리 각종 혜택을 누리면서 산다. 만약 당의 눈 밖에 나면 평양 밖으로 추방시켜버리는 시스템이다.

주나라는 이후 점점 더 성장하며 영토가 거대해져 갔고, 미비한 행정력을 보완하기 위해 봉건제를 고안하게 된다. 제후를 임명해서 해당 지역에 파견하고, 왕 대신 그 땅을 알아서 잘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정부를 여러 개로 분산시키는 시스템이었다. 초창기에는 왕의 인척이나 가까운 신하를 파견하였으나, 시대가 지나면서 제후들은 점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수도에 있는 왕의 말을 점점 듣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는 아예 스스로 왕을 칭하여 사실상 다른 나라로 분리되었다. 이것이 바로 춘추전국시대의 시작이다.

오랜 전란 끝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였고, 봉건제의 폐단을 몸소 실감한 진시황은 아예 수도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형태의 군현제를 실시하며 중앙집권국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봉건제와 다른 점은, 제후직의 세습이 불가능했으며, 왕을 대신해서 알아서 잘 다스리는 게 아니라 수도에 일일이 보고하고 정책을 전달 받아 시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앙집권국가라고는 해도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전근대 국가 특성상 그 넓은 영토를 다 수도 한 곳에서 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지방의 통치를 조금 더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부수도를 여러 곳에 두고 수도와 같은 경으로 승격시킨다. 부수도는 보통 지방의 중심지에 설치되었다.

주나라가 수도를 낙읍(洛邑)으로 옮긴 후 경이라는 행정구역 단위는 일본에서만 있었을 뿐, 거의 천 년 동안 없었으나 신라에서 지증왕 대에 소경(小京)이라는 형태의 부수도제를 시행하면서 부활하였고, 이보다 늦은 당나라 고조 대에 장안을 수도로 지정하며 수도라는 뜻의 경사(京師)로 개칭하여 마침내 부활하였다.

4. 형태

경이 부활하기 전, 군현제를 시행하던 한나라 때부터 이미 장안낙양은 다른 군현과는 다른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다른 군현의 경우 보통 태수가 그 지역의 장관인데, 장안의 장관은 경조윤(京兆尹), 낙양의 장관은 하남윤(河南尹)이라는 특별한 직위가 주어졌다.

당나라 고조 원년인 618년에 장안에 수도를 정하며 경사(京師)로 승격했고, 현경(顯慶) 2년에는 낙양을 동도(東都)로 승격되며 본격적으로 부수도제가 시행되기 시작했다. 뒤이어 측천무후가 즉위하던 690년에는 태원(太原)이 북도(北都)로 승격됐다.

그리고 현종 원년인 742년에는 장안을 서경경조부로(西京京兆府)로, 낙양을 동경하남부(東京河南府)로, 태원을 북경태원부(北京太原府)로 개칭하는데, 이때의 부(府)는 경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이 당시에는 부가 수도와 부수도에만 설치에는 행정구역이었다.

경은 사실상 수도라는 상징적인 의미였고, 실질적으로는 부가 경의 행정구역을 관할하는 형태였다. 예컨대 서경경조부라 하면 서경 지역을 다스리는 관청의 이름이 바로 경조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경조부를 다스리는 장관직이 바로 경조윤이었고, 이러한 이유로 훗날 수도의 장관직은 경윤(京尹)이 아니라 부윤(府尹)으로 정착하게 된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서울이 중경으로 지정되고, '중경서울시'가 된 격이다. 중경을 다스리는 관청이 서울시청, 중경의 장관직은 서울시장인 셈이다.

한국에서 유명한 판관 포청천 오프닝곡 가사 첫 마디가 '개봉부윤~ 포청천~(開封府尹 包靑天)'인데, 당시 북송의 수도가 동경개봉부(東京開封府)였으니 동경을 다스리는 개봉부의 수장, 즉 포청천이 동경의 수장이었다는 말이다.

발해의 경우는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5경 15부 62주를 설치했지만, 당나라의 것과는 조금 달랐는데, 수도와 부수도에만 부를 두었던 당나라와는 달리 지방에도 부를 두어 다스렸다. 다만 지방에 있는 부는 그저 지방의 행정구역일 뿐이었다.

이후 부는 규모가 조금 있는 도시면 다 부로 승격되어 수도에만 부가 있다는 특성이 다소 사라지고, 17세기 이후에는 경이 사라지고 모두 부로 대체되면서 경이라는 행정구역 단위는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이렇듯 여러 개의 부수도를 설치하고 경 아래에 부를 두고 통치하던 당나라의 제도와는 달리 일본의 경 제도는 오로지 수도만을 경으로 칭하며 하위에 부를 두지 않고 독자적인 제도로 운영되었다.

5. 사례

대체로 방위별로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에 하나씩 설치하여 나라 안에 다섯 개의 경을 두거나 세 개 정도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5.1. 한국

한국사에서 경이라는 행정구역으로 등장하는 첫 사례를 따지자면 고조선의 세 번째 도읍지인 장당경(藏唐京)이 최초라 할 것이나, 이것이 별칭인지, 정식 명칭인지는 알 수 없다. 고구려에서도 평양성, 국내성, 한성(現 황해도 재령군)을 삼경(三京)이라 일컬었으나, 이는 세 개의 큰 도시를 의미하는 것이지, 경이라는 행정구역으로 일컫지는 않았다.

이를 제외하면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514년에 설치된 신라의 아시촌소경이다.

5.1.1.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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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금성(서라벌)
소경
아시촌소경 중원경
(국원소경)
북소경(하슬라소경) 북원경
(북원소경)
금관경(금관소경) 서원경(서원소경) 남원경(남원소경)
양주(삽량주) 강주(청주) 상주(사벌주)
웅주(웅천주) 전주(완산주) 무주(무진주)
한주(한산주) 삭주(수약주) 명주(하서주)
패강진(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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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처음으로 경이라는 행정구역이 등장한 때는 514년(지증왕 15년), 지금의 함안군 혹은 의성군 지역에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을 설치한 것이다.

557년(진흥왕 18년)에는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일대의 중원 지역을 확보하고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한 기록이 있다. 639년(선덕여왕 8년)에는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인 하슬라주(何瑟羅州)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았으나, 658년(태종무열왕 5년) 북소경을 폐지하였다. 이후 678년(문무왕 18년) 강원도 원주시에 북원소경을 설치하였고, 680년(문무왕 20년)에는 옛 금관가야의 수도였던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다.

685년(신문왕 5년)에는 삼국통일 이후 급격히 거대해진 국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기존에 있던 세 개의 소경에 더해 두 개의 소경을 추가로 지정하였는데, 바로 지금의 충청남도 청주시에 있었던 서원소경(西原小京)과 전라북도 남원시에 있었던 남원소경(南原小京)이다. 지금의 남원시 지명은 바로 이 남원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문무왕과 신문왕 대에 설치된 소경의 위치를 보면 알겠지만, 금관경은 옛 금관가야의 수도, 서원소경과 남원소경은 옛 백제의 영토로, 새로 신라의 백성으로 편입된 정복민들을 보다 더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특히 남원소경은 고구려의 유민들을 이주시킨 곳이라는 점에서 그 의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다만 중국에서는 정복민들을 다스리는 행정구역으로 도호부도독부를 설치한 반면에, 신라는 아예 수도 바로 아래 행정구역인 소경을 설치했다는 점이 파격대우인 것이다.

신라가 이렇게 부수도를 만든 이유는 아마도 6세기 이후 신라가 팽창하며 수도였던 서라벌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는 바람에 지방까지 행정력이 닿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실제로 신라는 이러한 어려움으로 지금의 대구로 천도할 계획도 세웠으나, 번번히 좌절되었고, 결국 8세기 무렵에 가면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 하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면서 사실상 경주시 일대의 도시국가로 전락했다가 무너지고 만다.

757년(경덕왕 16년)에 전국의 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치며 금관소경은 김해경(金海京)으로, 북원소경은 북원경(北原京)으로, 국원소경은 중원경(中原京)으로, 남원소경은 남원경(南原京)으로 바뀌었다.

9세기에 이르면 신라도 당제를 받아들여 경 아래에 부(府)를 설치한 것이 확인된다. 이 시기의 금석문에서 서라벌의 통화부(通化府), 김해경의 김해부(金海府), 서원경의 서원부(西原府), 중원경의 중원부(中原府)가 나오는데, 발해처럼 경에만 부를 두지는 않았는지, 정변부(定邊府), ▨강부(▨江府) 등의 부들도 등장한다.

5.1.2.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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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京)
중경현덕부 동경용원부 남경남해부 서경압록부
부(府)
장령부 부여부 막힐부 정리부 안변부
솔빈부 동평부 철리부 회원부 안원부
독주주
영주 | 동주 | 속주 }}}}}}}}}


발해의 경우는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행정구역을 정했는데,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의 오경(五京)이 있었다.

특이한 점은 동시에 존재했던 기간이 기껏해야 수 년에 불과한 당나라의 경우와 달리, 발해의 오경은 국가의 기틀이 잡힌 후 멸망할 때까지 약 160여 년간 존속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요나라금나라의 오경제(五京制)가 당나라보다는 발해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5.1.3.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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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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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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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목 광주충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황주 }}}}}}}}}
||<|2><tablewidth=100%><width=13%><tablebgcolor=#fff,#1f2023><colbgcolor=#fedc89,#670000> 도호부 ||<-2><width=17%> 안변도호부 ||<width=17%> 안서도호부 ||<width=17%> 안북도호부 ||<width=17%> 안남도호부 ||



고려철원성에서 개국하여 이듬해인 919년에 곧장 태조(고려)의 고향인 송악군(松岳郡)으로 천도하고 송악군을 개경(開京)으로 승격하였다. 동시에 舊 개성군(開城郡)은 개주(開州)가 되어 개경의 주변부를 관할하였다.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평양을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하고, 송악군이 개경으로 승격한 거의 그 비슷한 시기에 평양대도호부가 서경(西京)으로 승격되었다. 평양을 개경과 거의 동급으로 대우한 이유는, 평양이 고구려의 옛 수도였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옛 도읍을 수도와 같이 대우함으로써 고려가 옛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인식시키고, 고구려를 이어받은 왕조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었다. 고려의 왕들은 서경을 중요시하여 주기적으로 방문하곤 했고, 고려 초부터 아예 서경으로 천도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서경의 승격은 북방 국경을 안정시키고 나아가 서경을 군사기지로 삼아 북진하여 옛 고구려의 고토를 모두 수복하겠다는 태조의 의지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5도 양계 체제에서는 서경이 북계의 중심지이자 군사도시의 성격을 띄기도 했다.

987년(성종 6년)에는 신라의 옛 수도였던 경주동경으로 승격하였고, 1069년에는 한양천도론이 불거지자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 양주목(楊州牧)을 남경으로 승격하였고, 고려 말에는 남경으로 잠깐씩 천도를 하기도 했다.

고려의 경우 삼경(三京)이라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사경(四京)이 맞다. 다만, 여기서 개경을 제외하고 수도가 아닌 나머지 경들을 삼경이라고 일컫거나 동경을 제외하고 개경, 서경, 남경만을 삼경에 포함하기도 한다. 고려시대의 경은 유수(留守)가 파견되었다.고려의 이 삼경은 삼한일통 정신과도 약간 연관된다. 개경을 제외한 나머지 경은 모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서경과 동경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고, 남경 역시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당시 고려에서도 남경이 곧 백제의 옛 수도인 한성임을 알고 있었다.

원 간섭기가 시작되면서 제후국은 천자국에서만 쓸 수 있는 경(京)을 쓸 수 없다고 하여 1304년(충렬왕 34년)에 모두 신라 때의 옛 이름을 살려 개경(開京)은 개성부(開城府)로, 서경(西京)은 평양부(平壤府)로, 동경(東京)은 계림부(鷄林府)로, 남경은 한양부(漢陽府)로 일제히 격하되었으나 관습상으로는 계속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고려왕조의 뒤를 이은 조선왕조도 제후국의 예를 따라 수도인 한성부를 따로 경으로 높이지 않았으므로 경은 충렬왕 때를 마지막으로 한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5.2. 중국

5.2.1.

주나라호경(鎬京) 이후 오랫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고조 원년인 618년에 장안에 수도를 정하며 경사(京師)로 승격했고, 현경(顯慶) 2년에는 낙양을 동도(東都)로 승격되며 본격적으로 부수도제가 시행되기 시작했다. 뒤이어 측천무후가 즉위하던 690년에는 태원(太原)이 북도(北都)로 승격됐다.

그리고 현종 원년인 742년에는 장안을 서경경조부(西京京兆府)로, 낙양을 동경하남부(東京河南府)로, 태원을 북경태원부(北京太原府)로 개칭하였다.

장안은 숙종 즉위한 756년에 잠깐 상도(上都)로 바뀌었다. 지덕(至德) 2년(757년)에는 남경성도부(南京成都府, 지금의 쓰촨성 청두시)와 서경봉상부(西京鳳翔府, 지금의 산시성 바오지시)가 추가로 지정되며 비로소 오경제(五京制)의 첫 사례가 되었고, 장안은 서경에서 중경으로 바뀌었다. 상원 2년(761년)에 서경봉상부가 폐지되며 다시 장안이 다시 서경으로 바뀌었고, 사경제(四京制)가 되었다.

최종적으로 운영되던 사경제는 다음과 같다. (수도는 볼드체)
서경경조부(西京京兆府) 산시성(陝西省) 시안시
동경하남부(東京河南府) 허난성 뤄양시
북경태원부(北京太原府) 산시성(山西城) 타이위안시
남경성도부(南京成都府) 쓰촨성 청두시
이 중 서경, 북경, 남경은 각 성(省) 성도(省都)가 되었고, 동경과 폐지된 봉상부는 성도는 못 되었어도 나름대로 큰 도시로 남아 있다.

5.2.2.

요나라 역시 당제를 받아들여 오경제(五京制)를 시행했다.

5.2.3.

동경개봉부(東京開封府) 허난성 카이펑시
서경낙양부(西京洛陽府) 허난성 뤄양시
남경응천부(南京應天府) 허난성 상추시
북경대명부(北京大名府) 허베이성 한단시 다밍현
당나라 대의 낙양은 동경이었는데, 송나라 대에는 서경이 되었다. 당나라 때는 수도가 낙양의 서쪽이었던 장안이었던 데에 반해 송나라 때는 수도가 낙양의 동쪽인 개봉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도 개봉은 당나라 때의 명칭을 따라 통속적으로 변경(汴京)이라고도 불렸다.[2]

5.2.4.

5.2.5. 명청시대

북경순천부(北京順天府) 베이징시
남경응천부(南京應天府) 장쑤성 난징시

5.3. 일본

6. 여담

중국에는 북경(北京)과 남경(南京)이 있고, 일본에는 동경(東京)이 있는데, 한국에는 서울()이 있으니 서울이야말로 동아시아의 수도가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다만 일본에도 경도(京都)가 있다는 건 함정. 이와 비슷하게 서경대학교에서도 광고에서 '북경에는 베이징대학, 동경에는 동경대, 서울에는 서경대' 드립을 쳤다. 정작 서경대학교의 서경은 한자로 西京을 쓰는데, 정작 서경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의 옛 이름이다.(...) 또한 그와 별개로 중경 또한 중국에 있다.


[1] 은 '높다', 또는 '크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2] 이를 잘 모르고 송나라 때 개봉이란 지명을 쓰지 않고 변경(汴京)만을 지명으로 쓴 것으로 착각하여 드라마 판관 포청천의 오프닝 곡의 가사 '카이펑 요우거 빠오칭티엔...'을 고증 오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