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 시대의 지방행정기구
1.1. 전주 및 영암군
시기에 따라 소재지의 변동이 있다. 고려 태조가 936년(태조 19)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전주(全州)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한 것이 처음이다.4년 뒤 940년 다시 전주로 고쳤다. 951년(광종 2)에는 고부(古阜)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하였는데, 1019년(현종 10) 다시 고부군으로 바꾸었다. 995년(성종 14) 이와 함께 영암군에 낭주 안남도호부(朗州安南都護府)를 두었는데, 이곳은 1018년에 다시 영암군으로 낮추었다.
1018년, 1019년 고부에 설치되었던 안남도호부와 영암에 두었던 낭주 안남도호부를 없앤 뒤, 1018년 전주를 안남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1022년 다시 전주로 고쳤다.
1.2. 부평부 및 계양도호부
1150년(의종 4)에는 수주(樹州)를 안남도호부로 삼았다. 수주는 1215년(고종 2) 다시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로 고쳤으며, 1308년(충렬왕 34)에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부평부(富平府)로 낮추었다.『고려사(高麗史)』의 1272년(원종 13) 11월 기사일 기사를 보면, 삼별초가 안남도호부에 침입하여 부사 공유(孔愉)와 그의 처를 붙잡아 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때의 안남도호부가 수주인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인종 때에 제정된 외관록(外官祿)에 따르면, 안남소도호사(安南小都護使)는 120석, 부사(副使)는 86석 10두, 판관은 40석, 법조(法曹)는 16석 10두를 받았다.
2. 당나라의 이민족 통치기구
당 6도호부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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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개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는 중세 중국 당나라의 이민족 통치기관인 도호부의 일종이다. 대체로 중국 최남부의 화남 및 베트남을 다스렸으며 치소는 현 하노이였다.당이 한 무제 이래 800년 가까이 중국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있었던 베트남에 새로운 정복지와 동일하게 도호 행정을 실시한 것은 이전부터 중국이 추구해 온 군현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는 중국의 태도가 미온적으로 변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는 수백 년에 걸친 베트남인들의 계속적인 저항을 막을 수 없어 중국이 직접 지배를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안남도호부는 다른 도호부들이 당의 의욕적인 진출에 의해 설치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1]
2.2. 역사
안남도호부는 교주총관부(交州總管府)의 전신으로 621년, 당고조 때 교지부에 설치됐다.651년, 당나라는 안남도호부를 안남도독부(安南都督府)로 낮춰 개칭했다.
679년, 당고종은 참파, 임읍 그리고 진랍 등 남만족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현 침공하여 정복하였고, 곧 기미지배 기구인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하여 동남아를 기미지배를 시작했다, 안남도호부는 13주 39현 32기미주로 구성되어있다.
722년, 마이 툭 로안(매숙란/梅叔鸞)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군은 참파와 캄보디아인의 진랍(眞臘)과도 제휴하여 도호부의 식민통치로부터 거세게 저항했고 마이 툭 로안은 흑제(黑帝)라는 칭호로 불리며 지배체제를 갖추었다. 이에 당 제국의 당 현종은 환관 양사욱을 지휘관으로 파견하여 10만 대군으로 군사적 진압에 나섰다. 동남아 국가들은 민중들까지 단합하여 당나라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저항을 거세게 하였고 이에 분노한 당은 동남아 현지에서 군인들을 강제로 징병하여 화살받이로 쓰면서 반란을 진압했다.
8세기 중엽 당의 세력이 기울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안록산의 난(755~763)이 일어나 국력을 약화시켰다. 757년, 당 숙종은 진남도호부(鎮南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절도사 제도가 도입되었다.(758) 768년, 당 대종이 진남도호부를 안남도호부로 개칭되고 도호는 절도사를 겸했다.
당선종 연간 안남도호부에 이탁(李琢)이란 자가 안남경략사(安南經略使)로 배치받았다. 이탁은 돈과 금에 환장하는 탐관오리였던데다가 가혹하게 세금을 걷었기 때문에 그에게 세금을 바치던 이민족들이 버티지 못했다. 862년, 결국 가혹한 세금 때문에 죽게 생긴 이민족들은 당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남조와 결집해 당의 안남도호부를 급습했지만, 견고한 성은 무너지지 않았고 남조는 재차 공격해 안남도호부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조와 이민족 반란군들을 진압하러 온 고병 휘하 형남의 군인들이 교주성을 포위 공격하여 남조를 쫓아내고 성을 다시 탈환했고 863년, 당은 안남도호부를 재건하면서 기미통치 이민족 착취를 이어나갔다. 이후에도 당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안남과 남조의 반란은 계속되었지만 강력한 당나라의 군인들의 진압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880년, 안남도호부에서 군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절도사 증곤은 성을 빠져나와 퇴각했으며, 옹관(邕管)에 파견되어 그 수비를 담당했던 제도(諸道)의 병력 중 일부는 스스로 귀환했다. 안남도호부는 함락되었고 당 제국은 당시 황소의 난으로 당말오대의 기나긴 내란이 시작되면서 국경에 배치할 병력이 모두 내전에 투입된 상황인지라 결국 안남도호부를 폐지하고 월남에서의 철군을 결정했다. 황소의 난(875~884)이 일어나 당 왕조를 멸망의 길로 치닫게 함으로써 베트남에 대한 당의 통치는 이름만 남게 되고 실질적인 지배는 종말을 고했다. 이후 베트남 지역은 쿡씨를 위시한 토착세력이 통치하면서 오대십국 이후 중국의 통치는 마침내 종말을 맞게 되었으며 베트남은 독립국으로 나아가게 된다.
현재까지 '베트남'을 '안남'이라고 부르는데, 이 '안남'이라는 용어는 당이 베트남 및 동남아 국가들을 지배하기 위해 개칭한 안남도호부에서 비롯된 단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