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11 15:43:55

수정성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의 도성 및 궁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졸본도읍기
동명성왕 ~ 유리명왕
국내도읍기
유리명왕 ~ 장수왕
졸본성[1] 국내성 환도성
하고성자토성 / 나합성[2] 오녀산성
||<-3><tablebgcolor=#000><tablewidth=100%> 평양도읍기 ||
장수왕 ~ 평원왕 평원왕 ~ 보장왕
안학궁 / 청암리 토성[3] 대성산성 장안성

||<-2><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rowbgcolor=#000> 별궁 || 전설 ||
두곡 이궁 구제궁 수정성

||<tablewidth=100%>[1] 졸본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곽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음
[2] 졸본의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토성
[3]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던 평양의 평지성 ||
}}}}}}}}} ||

1. 소개2. 건설 시기3. 기록4. 숨겨진 배경

1. 소개

水晶城

고구려의 궁 안에 있었다는 건축물.

이름 그대로 수정(크리스털)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만약 실존했다면 인류 역사상 유일한 수정 건축물이다.

2. 건설 시기

만약 정말 있었다면 장안성으로 이동하기 이전의 전기 평양(안학궁)을 수도로 활용하던 장수왕~양원왕 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돈지랄 건축물은 쇠퇴기에는 만들기 힘들었을테고, 전성기에 세를 과시하기 위해 만들었을테니 장수왕대에 건축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3. 기록

《양사공기》[1]와 《태평광기[2]에 고구려에 수정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방이 1리(393 m) 가량 되며, 날씨가 좋지 않아도 밝기가 대낮같고, 갑자기 성이 보이지 않으면 월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왕궁 안에는 수정성이 있는데, 사방이 1리 가량 되며, 날씨가 좋지 않아도 밝기가 대낮과 같다. 갑자기 성이 보이지 않으면 문득 월식(月食)이 일어난 것이다.
《해동역사》

이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곽재식의 소설에서는 신라왕[3]이 "우리 이제 땅도 넓어졌는데 멋진 궁 하나 지어야 하지 않겠냐? 너희가 듣거나 본 괜찮은 건물 있으면 말해봐라."라고 하자 개로왕이 만든 바둑 두는 누각과 더불어 나온 것이 바로 수정궁이라고 한다. 성벽과 기둥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들이 모두 수정으로 만들어져 있고 양끝에는 벽을 깎아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었다고 한다.

4. 숨겨진 배경

이 건축물의 목적은 고구려 내 불교 진흥이나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관에 대한 프로파간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 경전인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4]에:
"수정성(水晶城)은 환열천(歡悅天)이요, 금성과 수정성 사이에 비루파차천왕이 귀신들을 거느리고 있고 수정성과 유리성 사이에 비루륵천왕이 모든 가위귀신들을 거느리고 있고..."

라는 기록이 있어 불교와의 연관성을 무시할 수 없다. 불경 속 수정성은 성지 수미산에 있는 네 개의 대성(大城) 중 하나다. 각각 금, 은, 유리, 수정으로 만들어진 이 네 개의 성은 수미산 꼭대기에서 모든 불교 세계관 속 신, 신령, 생물을 감싸고 있다.

즉 수정성이 있는 고구려는 모든 불교 세계관의 중심지다. 수정성의 실존여부와는 별개로 궁극적으로 고구려가 원했던 것은 수정성이 가진 불교적 상징성이었던 것이다.


[1] 梁四公記. 당나라의 연국공 장열(張說, 667~730)이 집필한 설화집으로, 원문은 소실되었으나 조선실학자였던 한치윤과 조카 한진서가 1823년(순조 23년)에 편찬한 《해동역사(海東繹史)》에 수정성 관련 기록이 인용되어 전한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1871)》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2] 송태종의 어명에 따라 981년에 편찬한 500권짜리 설화집.[3] 건복 연간이라고 하니까 아마 진평왕인 듯하다. 건복은 진평왕 때 사용한 연호.[4] 《팔만대장경》에 기록된 불경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