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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20:04:43

요서경략설

파일:요서경략설.jpg

1. 개요2. 문헌
2.1. 직접적 기록2.2. 간접적 기록
3. 논쟁사
3.1. 전근대 역사학3.2. 근대 역사학3.3. 현대 역사학
3.3.1. 긍정론의 형성3.3.2. 부정론과 절충론의 대두3.3.3. 기타 주장
3.4. 최근 역사학
3.4.1. 절충론: 해양사관의 상업거점설3.4.2. 긍정론: 일시적 군사진출설3.4.3. 사이비: 유사역사학의 대륙백제설3.4.4. 부정론: 중국사와의 교차 검증3.4.5. 기타 주장
3.4.5.1. 웅진도독부 관련3.4.5.2. 시기와 정세 문제3.4.5.3. 양직공도 관련3.4.5.4. 북조와 한반도 측 기록의 부재?
4. 기타5. 소결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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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당시 백제중국 위진남북조시대부터 수나라의 통일 이전[1]까지의 요서 지방[2]을 지배했다는 학설이다.[3] 이는 사실무근의 낭설은 아니며 '송서(宋書)'와 '양서(梁書)' 등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계통의 문헌에서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4] 다만 동시기 북조, 수나라 측과 현존하는 한반도의 사서에는 이와 관련된 직접적 기록이 등장하진 않는다.

이 학설의 진위 여부는 조선시대의 실학자들부터 시작해서 오늘날 현대 역사학자 및 역사 애호가들에게 이르기까지 고대사 부분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난제 중 하나이며,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후술되어있듯 부정론[5] 혹은 절충론적으로 지역에 대한 영토적 직접 지배라기보다는 상업적 거점을 확보한 것으로 보는 주장이 보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편이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군사적 직접 지배 주장 또한 학계에서 여전히 떡밥으로 남아있으며, 이 경우에는 단기간(기껏해야 근초고왕 아니면 침류왕 시기 정도)만 지배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때문에 현대의 국정 및 검인정 교과서 등에는 '진출했다', '영향력을 미쳤다' 정도의 한정적 용법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지도상에는 별도의 영토 표기 없이 화살표만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예 서술을 하지 않기엔 관련 기록이 버젓이 있는데다 굳이 그걸 무시할만한 확실한 반론이 정설로 들어서지도 않은 상황인데다, 반대로 진짜 기록대로만 쓰기엔 당대 정황이나 고고학 등의 사료가 뒷받침해주지 못해 뭐가 더 나오기 전까진 뚜렷한 답을 내기 어려운 상황.

이렇게 주류학계에서도 결론을 못내는 복잡한 상황이니, 비주류 재야사학계에선 더 소설급 담론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비주류 담론도 담론 나름인지라 이런 떡밥을 놓칠리 없는 유사역사학환단고기론자들 수준까지 가면 안드로메다가 따로 없다.

2. 문헌

2.1. 직접적 기록

그 뒤 고려는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이른다.
其後 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송서》 97권 동이열전 백제(5세기 후반)[6]

백제는 변진(弁辰)의 나라로 진대(晋代)에 일어나 번작(蕃爵)을 받았다.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
《남제서》(南齊書), 건강실록(建康實錄)(537년 이전)

진나라 말기, 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낙랑도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

(또는)

진나라 말기, 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경략하자, (백제는)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7]
晉末 駒麗畧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晉平縣
《양직공도》 백제국사(6세기 전반)

진나라 시대, 구려가 앞서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晉世 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양서》 54권 동이열전 백제(7세기 전반)

진나라 시대, 구려가 앞서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晉世 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남사》 79권 동이열전 백제(7세기 중반)

진나라 시대, 구려가 앞서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차지하였다.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이다.
晉時 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 今柳城北平之間
《통전》 185권 변방 동이 상 (9세기 초엽)

2.2. 간접적 기록

처음 부여는 녹산에 있었는데, 백제의 침략으로 부락이 쇠하여 흩어졌다. 서쪽 연나라 근처로 이동했는데,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았다. 연왕 황이 세자를 보내어……부여를 습격하였다.
初 夫餘居於鹿山 為百濟所侵 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設備 燕王皝遣世子……襲夫餘
《자치통감》 97권 진기 효종목황제

고구려·백제 및 우문부·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세에 따라 옮겨진 바, 중원의 의로움을 좇아 여기에 온 것이 아니므로 모두 돌아갈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8]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 皆兵勢所徙 非如中國慕義而至 咸有思歸之心
《십육국춘추》 16권 전연록 모용황(6세기 말엽)

이해 위나라 오랑캐가 다시 기병 수십만을 보내어 백제를 쳐서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가 장수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보내어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대를 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6세기 전반)

건무 2년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지난 경오년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6세기 전반)

위나라가 병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지만, 백제에게 패배하였다. 【진수가 말하길, 삼한은 78개국이고, 백제는 그 중 하나이다.】 【이연수의 사서에는, 그 전에 백가가 바다를 건넜는데, 후에 강성한 국가를 세웠으므로 백제라고 하였다. 진나라 시기에, 구려가 요동을 다스리자,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에 의탁하였다.】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陳壽曰: 三韓凡七十八國, 百濟其一也. 據李延壽 史, 其先以百家濟海, 後浸强盛以立國, 故曰百濟. 晉世 句麗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무황제 상지하 영명6년(488) 12월조.

10년 위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 26권 백제본기 동성왕(12세기 중반)[9]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에 강병이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주와 연나라, 제나라, 노나라를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좀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삼국사기》 46권 열전 최치원[10][11]

3. 논쟁사

3.1. 전근대 역사학


이른바 '요서경략설'에 대한 진위 논쟁은 이미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고 있었다. 신경준은 1770년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에서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을 근거로 들어 백제의 요서 진출을 긍정하고, 이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이에 반해 한진서는 1823년 《해동역사》 지리고에서 만리나 되는 바다를 건너가 요서 지역의 몇 개 군을 차지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이를 부정하고, 양서문헌통고의 기록은 그저 송서의 기사를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3.2. 근대 역사학


근대에 들어서 백제의 요서 진출을 긍정하는 주장은 신채호정인보를 비롯한 일제강점기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학설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은 일제에 맞서기 위한 이념적인 성격이 강했으므로 당연하게도 사료 가운데 조선민족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데 유리한 부분을 취합하는 것이었고, 이로서 긍정론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나 그것은 지금의 사이비 역사의 주장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야마토 왕권이 천신의 힘으로 신라를 거의 수장시켜 버렸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정설이랍시고 버젓이 내세우는 등, 오히려 고대사 속에서 조선의 역사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이었던 식민사관에서는 그런 거 없다. 이쪽은 요서경략설에 대해 있는대로 깠고, 거꾸로 보면 말 그대로 있는 것을 비판한 것이어서 당시 이들이 제기한 문제점은 지금까지도 요서경략설을 긍정하기 위해 1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기본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3.2.1. 식민사관

동진 대(東晋代) 요서(遼西)는 모용씨(慕容氏)의 세력 하(勢力下)에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不可能)하며 《송서(宋書)》의 기록 자체(記錄自體)는 오문(誤聞)에 근거한 것임.
백제의 대외관계, 유원재, 백제의 요서영유설에 대한 주요 견해 정리.[12]
동양사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평가되는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는 1902년 국어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1905년과 1906년에 중국, 만주, 한국을 시찰하고 연구한 뒤 원나라사의 대가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백제의 요서 경략에 대한 부정론을 주장하였는데, 동양사라는 개념을 제창한 만큼 그 주장의 주요 근거는 바로 그당시 요서가 빈 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백제가 진출했다고 하는 동진 시대의 요서는 본래 선비족 모용씨의 지배 하에 있는 지역으로서, 모용외 시대에 흥기하기 시작한 선비족 모용부는 평주자사 최비가 고구려로 달아나자 이를 대신해 평주를 접수하였고, 선비족의 다른 지파인 우문부단부를 격파하고 고구려를 압박하는 등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것. 실제로 당시 모용씨의 본거지는 극성(棘城)으로 지금의 랴오닝 성 진저우 시(錦州市)에 위치하고 있으며, 342년에 천도한 용성(龍城)은 지금의 랴오닝 성 차오양 시(朝陽市)에 위치하고 있어 모두 요서 지방이다.
490년(年) 백제(百濟)의 대북위전쟁기록(對北魏戰爭記錄)을 동성왕(東城王)이 북위(北魏)의 적국인 남제(南齊)로부터 관직(官職)을 제수받기 위한 것으로 봄.
백제의 대외관계, 유원재, 백제의 요서영유설에 대한 주요 견해 정리.
여기에 동경제국대학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는 백제의 요서 진출이라는 사건을 허구로 보는 처지에서 한반도의 백제와 중국의 북위가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에 대해 해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해당 기사를 동성왕이 북위의 적국인 남제로부터 관직을 제수받기 위해 허구의 사실을 꾸며낸 것으로 보았다.
백제(百濟)가 요서(遼西)를 지배하였다는 시기(時期)는 모용씨(慕容氏)가 지배하던 때이다. 《송서(宋書)》, 《양서(梁書)》 등의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은 괴이한 곳이며 이는 4, 5세기(世紀) 고구려(高句麗)의 남하(南下)로 인한 허설(虛說)임.
백제의 대외관계, 유원재, 백제의 요서영유설에 대한 주요 견해 정리.
한편 와다 하카토코(和田博德)는 1951년 <백제의 요서영유설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백제의 요서 경략에 대한 부정론을 주장하였다.

하카토코는 백제의 요서 경략을 부정하는 주요 근거로 진나라 시기의 요서는 5호 16국의 하나인 선비족 모용씨의 연나라가 지배하고 있어 백제가 침투할 만한 힘의 공백 상태가 아니었으며, 더불어 백제가 지배했다고 하는 진평군 진평현은 어디서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괴이한 지명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백제의 요서경략설은 4~5세기 고구려의 남하로 인한 헛소문이라 단정지었다.

이것은 이후 백제와 북위의 전쟁기사에 대하여 정작 당사자인 동성왕의 표문에서 침략국을 단지 '험윤'과 '흉리'라고만 지칭하고 있는 점에 주목, 이것이 모두 흉노와 같은 말으로서 북방 이민족에 대한 고전적인 비칭이며 따라서 이것이 실제로는 고구려와의 전쟁이라고 보는 주장의 시초가 되었다.[13]

3.2.2. 민족사학

근구수왕이 기원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한 번 평양 침입이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을 경략 하여 선비(鮮卑) 모용씨(慕容氏)의 연(燕)과 부씨(符氏)의 진(秦)을 정벌하여, 지금의 요서(遼西)·산동(山東)·강소(江蘇)·절강(浙江) 등지를 경략하여 넓은 땅을 장만하였다.
조선상고사, 신채호, 근구수왕 즉위 후의 해외 경략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의 거두인 단재 신채호는 1931년 조선일보에 <조선사>를 연재하면서 백제의 요서 경략에 대한 긍정론을 주장하였다. 백제의 부흥운동에서 중단되어버린 이 연재작은 신채호가 죽고 광복 후인 1948년에 <조선상고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백제의 요서 경략에 관련된 부분은 제7편 2장인 '근구수왕의 영무(英武)와 고구려의 쇠퇴(백제의 해외 정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키문헌 참조

여기서 신채호가 주장한 긍정론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백제의 요서 경략을 '대세론적 맥락'에서 이해하였다는 점. 위 문헌의 '진나라'에 해당하는 것은 전진 시대인데, 당시 화북은 전체적으로 황실의 내분에서 막장의 막장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상황이었고, 이에 반해 백제에서는 근초고왕근구수왕이 한창 잘 나가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니 요서 경략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백제의 요서 점유지를 산동, 강소, 절강까지 뻥튀기 해놓은건 덤.

그러나 정작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이 왜 전하지 않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그저 중원의 역사가들이 부끄러운 기록이므로 지웠다거나[14], 당태종이 백제와 고구려에 쳐들어가면서 지웠다거나,[15]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지웠다거나, 조선에서 사대주의 때문에 지웠다거나 하는 '이게 다 누구 때문이다'식의 음모론으로 일관하고 있어 문제가 된다.

물론 당대 충분히 축적되지 못한 고고학적 성과라든지 다양한 사료를 열람하지 못한 개인적, 시대적 한계는 감안되어야 한다.[16]
등래 이동(登萊以東)의 해각(海角)에 근거지(根據地)를 둔 뒤에 해안선(海岸線)을 끼고 요서 해안(遼西海岸)으로 나아가기가 형세(形勢) 이미 순(順)하며……기루(己婁)의 증손(曾孫) 현손(玄孫)들이 요서 쟁패(遼西爭覇)의 거(擧)를 행(行)하고……마침내 유성(柳城)과 북평(北平)의 간(間)을 영유(領有)하야……해로(海路)의 패권(覇權)은 백제(百濟)가 잡았던지라.
『오천년간 조선의 얼』, 정인보, 백제의 해상발전[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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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와 마찬가지로 민족주의 사학자인 위당 정인보는 1936년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하면서 백제의 요서 경략에 대한 긍정론을 주장하였다. 삼국시대로 마무리된 이 연재작은 광복 후인 1946년과 1947년에 <조선사연구>라는 제목으로 각각 상·하권이 출간되었고, 백제의 요서 경략에 관련된 부분은 제22장인 '백제의 해상 발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인보는 백제가 산동에 먼저 진출한 뒤, 요서로 세력을 확장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한발 더 나아가 요서 경략 시점을 책계왕분서왕 대로 끌어올리고 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낙랑군이 중국 요하 유역에 있다는 주장에 의한 것이다. 학계통설로 낙랑군이 한반도 밖에 있다는 주장은 사실상 설득력을 상실한 지 오래이나, 정인보가 주장한 긍정론의 진정한 의의는 바로 전투와 겸행하는 무역관계라는 측면을 제시, 지금의 '해상왕국'이라는 백제의 이미지가 성립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백제의 요서 경략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지금으로 보면 가히 가공할 만한 떡밥 종결자. 이미 낙랑군이 요동에 있다는 주장 자체가 고고학적 증거로 무력화된 지 오래이고, 동쪽으로 습격했다는 기록이 서쪽으로 습격한 것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던가, 옥저가 요서에 있다던가, 고작 사당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산동 지방을 정복했다고 주장한다던가(...) 하여간 곳곳에서 지나치게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설득력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후 대륙백제를 신봉하는 주장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황현에 백지래왕의 사당이 있으니까 백제가 산동을 점거하였다는 정인보의 주장을 역지사지로 대입해본다면, 시가현에 신라명신의 사당이 있으니까 장보고가 일본을 점거하였던 것이고, 서울특별시에 관제묘가 있으니까 관우가 백제를 점거하였던 것이고, 괴산군에 만동묘가 있으니까 만력제가 조선을 점거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 백지래왕의 사당이라는 것 자체가 서기 2년에 수집되어 서기 84년 편찬된 한서 지리지에 벌써 그 존재가 드러나는데 비류왕은 서기 304년에 즉위했으니 이 주장은 진짜 답이없다. 한서 지리지 링크

3.3. 현대 역사학


광복 이후 이어진 분단과 전쟁으로 초토화된 것은 역사학계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패망으로 인해 식민사관이 무력화된뒤,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기반하고 있던 백남운김석형은 당연히 분단 과정에서 북으로 넘어갔고, 민족사관에 기반하고 있던 정인보·안재홍·손진태민족사관 사학자들도 6.25 전쟁으로 대거 납북되면서 그 학맥이 단절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자연 역사학계는 이병도를 위시한 실증사관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이러한 가운데 민족사관이 주도하던 요서경략설 긍정론도 묻히는가 싶더니 그럴 줄 알았지?

이어지는 반공 독재 속에서 우익적 민족주의 경향이 대세를 차지하고, 식민사관 청산이 역사학계 전반의 문제로 대두되는 마당에,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식민사관의 주장에 따라 나서서 요서경략설을 부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후사정에 의해 긍정론이 주류이던 역사학계는 이후 양직공도의 내용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본격적으로 혼돈의 카오스에 빠지게 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부정론과 절충론이 대두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3.3.1. 긍정론의 형성

6.25 전쟁 이후 요서경략설을 주장한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는 단연 동빈 김상기[19]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김상기가 1967년 《백산학보》[20]에 게재한 요서경략설에 대한 논문은 사실상 지금의 '요서경략설'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는 바탕이 되었고, 이후의 흐름에 비추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부분 모두에서 백제의 요서경략설과 관련된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
백제의 요서경략은 고구려의 요동영유에 대응하여 행해진 것으로 간주되는 바……근초고왕 말년의 일이 아니었던가 억측되는 바…….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하여』, 김상기
우선 긍정적으로는 당시까지 특별한 명목 없이 영토 확장[21]의 측면에서 이해되던 요서 진출에 대해 나름대로 당시의 국제정세와 결부된 까닭을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김상기는 원 사료에 충실한 해석을 통해, 백제의 요서경략이 고구려의 요동점령을 견제하기 위한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김상기는 부정적인 면에서 더욱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문제를 남겼는데, 바로 이전까지 기루왕·책계왕·분서왕·근구수왕 등으로 의견이 분분하던 백제의 요서경략 시점을 근초고왕 시대의 일로 '억측'한 것이다. 이처럼 김상기의 '억측'에서 시작된 근초고왕 시대로의 요서경략 시기 비정은 이후 대세론의 힘을 받아 고스란히 정착되었고, 이 여파는 오늘날 국사 교과서의 서술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것은 고국양왕광개토대왕 시대의 일인데, 이 시대 백제는 근초고왕의 손자인 진사왕과 증손자 아신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요동 점령에 맞서기 위해 요서에 진출했는데, 정작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것은 그 증손자 시대라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의 요동 침공이 미천왕 시대에 있었으니 여기의 '고구려의 요동 점령'을 미천왕 이야기로 보면 근초고왕 시대에 요서경략했다는 설에 모순은 없다.

사실 김상기 스스로 본문에서 '억측되는 바'라고 조심스럽게 밝히고 있는 점에서 이것을 단지 김상기 개인의 문제라고만 하기도 어렵다. 굳이 따지자면 대세론에 업히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요서경략설의 근본적인, 그리고 고질적인 문제라는 측면도 있다.

어찌되었든 이후 백제사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진행되었으며,[22] 1971년 방선주는 <백제군의 화북진출과 그 배경>이라는 논문에서 5~6세기 화북의 상황을 면밀히 검토하는 방법을 통해 당시 전란이 이어지던 화북의 인구밀도가 낮았고,[23] 이민족에 의해 세워진 정복국가에 한족들이 잦은 반란을 일으켰으며, 부여와 고구려 계통의 사람들이 상당수 포로가 되어 화북으로 이주되었으므로 백제가 화북에 진출하기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대세론적 해석에서 벗어나, 중국 측 사서의 분석을 통해 요서경략설의 사실성을 검증하고 부여를 백제의 조력자로 보는 관점을 제시한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3.3.2. 부정론과 절충론의 대두

이처럼 긍정론이 주류이던 국사학계는 1973년 이홍직의 <양직공도논고>에 의해 '양직공도'의 내용이 소개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대의 기록에 가까운 양직공도가 요서점거의 주체를 백제가 아닌 낙랑으로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낙랑을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으로 해석한다면, 낙랑이 요서를 점거했다는 말은 곧 313년 고구려에 축출된 낙랑군이 요서로 이동해간 사건과 일치시킬 수 있었다. 다만 이 문구가 백제에 대한 기록 가운데 삽입되어 있으며, 근초고왕의 책봉호[24]에서 보이는 것처럼 낙랑을 백제와 일치시켜 보기도 했으므로 이에 대해 설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요서경략설을 부정하는 주장은 당연하게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를 위시한 일본의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주장되고 있었고,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했기에 그 안티테제민족사관적 학풍이 있던 한국 사학계에서 백제의 요서경략을 부정하기는 아무래도 껄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위 양직공도의 기록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긍정론이 가지고 있던 주류로서의 권위는 이미 흔들린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1981년에는 김정학과 이명규가 각기 부정론과 수정론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요서경략설에 처음으로 부정론을 개진한 김정학은 저서 <백제와 일본>에서 백제의 지리적 위치가 요서 진출에 용이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였고,[25] 사서에 있는 관련 기록이 정작 본문인 제기(帝記)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앞선 기록인 송서의 기사는 기실 '부여'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 주장하여 본격적인 부정론을 제창하였다.
백제가 동북아(東北亞)의 해상무역을 주도하게 됨에 따라 대륙-백제-가야-왜로 연결되는 하나의 해상세력권을 형성하였고, 그 결과 대륙에 무역기지나 거류민지역이 성립되어 유지되어 오다가 5호 16국의 혼란기를 맞아 이들 무역기지를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군사적 활동이 병행되어 요서의 백제군과 같은 것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기는 것이다. ─ 백제대외관계에 대한 1시론, 이명규
한편 이명규는 논문 <백제의 중국대륙에서의 상업적·군사적 활동 배경과 성격>을 통해서 백제의 대륙진출이 그저 군사 정복활동이었을 뿐이라면 고구려로 인한 본토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동기를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먼저 백제의 해상무역과 이로 인한 정착이 이루어진 뒤 이러한 무역기지를 보호하기 위해 백제의 군사적 개입 또는 무역세력의 자체적인 군사활동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자연스럽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명규의 주장은 이후 백제의 무역 활동으로서의 측면을 중시하는 절충설로 이어지면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교과서 상에서 '진출'이라는 순화된 표현이 나타나는 근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82년 이기백이기동이 공저한 <한국사강좌>에서도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정설로 하기에는 아직 문제가 있다는 식의 보류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요서경략설은 지금까지 차지해오던 학계의 주류설에서 완전히 밀려나 다시 불확실한 논쟁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 책에서 '요서경략설'이라는 표현이 쓰임으로서 요서경략설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정착되었다.

유원재는 <百濟의 歷史와 文化>(1996) 제5장 '백제의 대외관계'(p239-302)에서 백제의 요서영유설이 한반도와 요서의 상황에 대한 남조계 사서 찬자의 인식과, 그 인식을 답습한 후대 사서의 기록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유원재에 따르면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내용은 오직 중국의 남조계 사서에서만 전해지는 특수한 기록인데, 이 기록은 남조에서 전통적인 낙랑, 대방의 관념에 의하여 백제관이 분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남조계 사서 중 하나인 <송서>에 관하여 유원재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백제에서는 5세기 후반부터 즉 <송서>가 편찬되기 전후에 걸쳐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서 공공연하게 '帶方太守' '樂浪太守'의 관작을 청구하여 허락받으며, '帶方太守'를 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요동진출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백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낙랑과, 대방에 대한 시대적 상황에서 백제의 영유권 주장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남북조의 첨예한 대치상태에서 <송서>의 편찬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송서>의 찬자인 심약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전대에 이루어진 낙랑, 대방의 요서이동을 백제와 관련된 사실로 기록하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다른 내용과 달리 오직 요서영유 사실만 초시대적인 전대의 사실로 기록케 된 것 같다. <송서> 편찬 이전인 472년부터 백제의 이러한 주장이 외교문서상에 나타나고 있기 대문이다.
유원재, <百濟의 歷史와 文化>(1996) 中 제5장 '백제의 대외관계' p284

그리고 <양서>는 <송서> 및 <남제서>의 요서영유에 대한 기록을 답습했고, <남사>는 다시 <양서>를 답습했다. 반면에 북조계 사서의 찬자들은 남조계 사서의 찬자들과 달리 백제나 고구려관이 보다 동시대적이었고, 보다 구체적으로 위치관계를 파악하고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이 편찬한 사서에서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3.3.3. 기타 주장

물론 역사가 편협한 국수주의(國粹主義) 내지 민족주의에 오염되는 것은 지양되어 마땅하나, 역사에는 일찍부터 남다른 관심을 가져온 중국인들의 기록을 의심해 가면서까지 조상들의 활동 무대를 한반도 안으로만 국한시키려 드는 데는 비록 문외한(門外漢)일망정 의문을 금할 길이 없었다. 확실히 증명할 근거가 없다고 하여 반드시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우리 민족의 기개와 긍지를 위해서도 일단은 그 존재를 믿는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시켜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대륙의 한』, 이문열, 머리말
이러한 가운데 1986년 이문열의 소설 '대륙의 한(恨)'이 역사소설이라는 형식을 최대한 이용해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소설의 중심 주제로 다루면서 대중 일반에 요서경략설의 존재를 알리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소설은 그 전반부에서 근초고왕 시대 백제의 내분과 대외 확장, 후반부에서 후연의 흥기를 배경으로 삼아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백제의 왕족이 대륙에 건너가 후연과 동맹을 맺고 중원에 정착하는 이야기로, 치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절충적인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연의적을 구성해내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1971년에 무령왕릉이 발굴되고 1973년에 요서경략설의 진위 여부를 놓고 논쟁이 막 시작된 시점인 1976년에 한국 유사역사학의 대부 문정창은 자신의 저서 <백제사>에서 백제의 중국대륙 진출을 주장하면서, 중국의 남북조가 모두 백제의 속국이었고, 이 가운데 남조 나라의 건국자인 양무제는 본래 백제인이며, 무령왕릉의 벽돌무덤 양식은 양나라로부터 수입된 것이 아닌 백제의 문화라는 정신나간 주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무령왕릉이 포함된 송산리 고분군만 봐도 이 시기 백제의 무덤은 절대 다수가 돌방무덤이었고, 무령왕릉 지석에는 무령왕이 양나라로부터 받은 관직인 '영동대장군'이 가장 앞에 쓰여 있다.[26]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백제와 무령왕릉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이 주장은 적어도 당대에는 대중적인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으나, 이는 곧 십여 년이 지나 사이비 역사의 대두와 함께 대륙백제설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각은 이문열 본인이 본문에서 '우리 민족의 기개와 긍지를 위해서도 일단은 그 존재를 믿는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시켜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라고 밝힌 바와 같이 '잘 모르겠으면 우리꺼라고 생각하자'의 수준에 지나지 않아서,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식민사관 같은 역사왜곡과 결을 같이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현대 역사학에서는 이와 같이 목적성 및 방향성이 정해져있는 역사연구를 금기시하고 있다.

유사역사학자들은 사실 자국의 위상을 위해 일부러 사서에 기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고구려인이 기록한 것으로 유이하게 남아있는 광개토대왕릉비, 충주고구려비의 400년 신라 구원 관련 기사나 고구려가 신라에 신라토내당주를 두었다는 기록 등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서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중국인이 쓴 북위서의 경우에도 수나라 양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수차례 편집되고 다시 편찬되었다. 즉 북위서도 백제가 북위의 요서를 오랜기간 점령했다고 해도 자국의 위상을 위해 일부러 쓰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북위서의 경우 자국을 찬양하기 위하여 외국들의 조공 기록을 쓰기도 하였으며 이는 일본서기가 왜국 천왕을 찬미하기 위해 외국에서의 조공 기사를 쓴 것과 비슷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3.4. 최근 역사학

1990년대 이후부턴, 이전까지의 각종 자료와 연구 축적, 인터넷 발달 등에 힘입어 제반 사료에 대한 접근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이와 더불어 중국사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주류학계에서는 자연스레 직접 지배를 통한 요서경략설에 대해선 회의적인 분위기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현재까지도 일부 요서경략설을 긍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학자들은 존재한다.

3.4.1. 절충론: 해양사관의 상업거점설

오늘날 요서경략설의 진위에 대한 여러 의견 가운데 가장 무난한 주장으로 학계의 대표적인 일반론이다. 이른바 '해양사관'을 표방하는 동국대 윤명철 교수, 목포대 강봉룡 소장이 대표적.
이러한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백제가 요서지방에 식민정권을 장기간 설치하였다면, 백제의 국력은……대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국제정세는 백제의 요서진출을 뒷받침하기엔 불리한 면이 있다.……백제가 요서지방과 관련이 있는 것은……해양질서의 입장이 더 바람직하다.……크기는 불문하고, 최소한 교역을 위주로 하는 식민도시나 상업기지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국 해양사』, 윤명철 지음

백제가 당시 중국 대륙에 해양 거점을 두었던 사실을 반영한다. 여기에서 요서군은 요하 서안을 지칭하는데, 백제가 여기에 해양 거점을 둘 수 있었던 것은……힘의 공백 상태에 빠져 있던 상황에 편승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진평군은 오늘날 복건성 복주시로 비정되기도 하는데,……남조 동진의 양해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바다에 새겨진 한국사』, 강봉룡 지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소장도 2011년 4월 4일자 네이버 캐스트를 통해 이와 유사한 주장을 했다.
대륙으로 세력을 넓혀라
두 개의 중국역사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에 고구려 서쪽인 요서지역에 영토를 갖고 있었다. 요서, 진평군은 백제의 중심지인 한강 일대와는 바다를 사이에 둔 먼 곳이다. 따라서 백제가 이곳에 영토를 가지려면 강력한 해군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당시 요서 지역은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으므로, 백제가 영토를 갖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정확히 언제, 어떤 적들을 물리치며 영토를 확보했고, 언제 이곳을 빼앗겼는지를 알려주는 자료가 없다. 심지어 북중국의 나라들의 기록에는 없고, 오직 남중국의 나라들의 기록에만 이런 기록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백제가 이때 요서, 진평군을 지배하지 않았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백제가 아닌 중국 측에서 기록한 것들을 굳이 잘못된 기록이라고 볼 이유로 충분하지가 않다. 근초고왕 시기 백제는 고구려, 마한, 가야를 제압할 정도로 국력이 크게 강해져 있었다. 또한 직접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해양 활동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근초고왕 시기에 충분히 백제가 이곳에 영토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가 일본열도로 진출할 때의 상황 등을 봐도 거리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다. 현재로서는 이때 백제가 요서 지역을 지배했는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근초고왕 시기 백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요서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백제를 백제답게 만든 근초고왕
근초고왕은 영토 확장 외에도……372년 진(晉)나라와 사신 왕래를 하는 등 외교 활동 무대를 넓혔다. 무엇보다 그는 백제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 업적을 남겼다.……근초고왕이 개척한 길을 따라 백제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와 대륙 동해안은 물론, 차츰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백제가 화려하고도 개방적인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근초고왕이 이룩한 업적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는 백제사에 큰 길을 열어준 임금이었다.
출처
비록 비전공자지만 상당한 연구 끝에 요서경략설과 관련된 논의를 잘 정리하고 있는 임길채의 저서 <매몰된 백제 역사를 복원한다!>도 이와 같은 적극적 상업거점으로서의 결론을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른바 백제군은 북연이 백제에 대하여 교역을 위한 활동거점을 허용해 준 곳으로, 오늘날로 치면 물류 내지 무역기지에 해당하는 것이다.……백제의 태수는 당해 군(郡)에 대한 전반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국민에 대해 제한된 권한을 가진 오늘날의 영사(嶺事)와 비슷한 존재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매몰된 백제 역사를 복원한다!』 임길채 지음

즉, 통일신라 시대의 신라방이나 현대의 코리아타운처럼 일종의 백제타운이 요서 지역에 있었다는 것인데, 다만 이 설도 약점이 하나 있다. 바로 후술된 백제-북위 전쟁 관련 기록이 요서 지역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가정하면 이를 제대로 논파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단순 상업 지역이라면, 북위에서 대규모 군사를 끌고 올 이유가 뭐냐는 것.[27] 독립 시도라도 했나 다른 설을 연계 채택해 보완할 수 있는 문제긴 하다. 이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선 항목 참조.

3.4.2. 긍정론: 일시적 군사진출설

실제로 중국 기록을 훑어보면, 요서 지역에서 백제 군현이 몇 년 이상 존속할 만큼 힘의 공백상태를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아주 짧은 기간이나마……힘의 공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백제가 아주 단기간, 즉 몇 달 정도만이라도 세력을 뻗쳤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28]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 한국 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지음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명예교수, 대구가톨릭대 강종훈 교수가 대표적.
중국의 최남부지역인 광서장족자치구에 '백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백제군은 그 자치구 내의 해변에 있는 흠주시의 북방 50㎞에 위치한 지금의 백제향 일대가 되겠다. 진평군은 그 자치구 내의 창오현 일대가 아니라면 복건성의 복주로 새롭게 비정된다.……이러한 위치 비정이 타당하다면 백제가 항로와 관련지어 설치한 진평군은, 이것을 둘러싼 유송과의 갈등으로 3년 만에 폐지되었다.
『살아있는 백제사』, 이도학 지음
이도학 - 본래 백제군을 중국 광서장족자치구의 백제 관련 지명으로 비정하는 의견이었으나 2010년 연말에 대하사극 근초고왕 방영이 임박하여 요서경략설이 다시 주목받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이도학 교수가 요서경략설을 지우지 말아야 한다며 요서경략은 백제가 후연과 함께 공동의 적인 광개토대왕고구려에 맞서는 과정에서 후연 영토에 파견한 백제군이 후연 멸망후 후연의 옛 땅에 눌러앉으며 이루어진 것이라는 다소 독특한 견해를 제시했다.
다급한 후연은 고구려의 앙숙인 백제에 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백제군은 요서 지역에 진출해서 고구려의 서진을 막고자 했다. 그런데 그 직후 붕괴된 후연 정권의 후신이자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운의 북연 정권은 408년에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었다.……결국 백제군은 기왕에 진출한 요서 지역에 대한 실효 지배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백제의 기원과 모용선비』, 이도학 지음
한편 강종훈 교수는 동진이 요서지방의 부여계 여씨[29] 군벌과 백제를 이용해 고토회복을 하려 했던 게 백제의 요서경략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개연성보다는 가능성이라 할 정도의 가설이라 정설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30]

참고로 전격적인 군사진출이 아니라 위에 있는 것처럼 단순 무역 수준의 진출이었다고 해도, 최소한의 군사력은 동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그 지역에 발을 디디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대항해시대 당시의 유럽 국가들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이 먼 나라까지 가서 얌전히 무역만 한게 아니라, 돈이 되는 상품을 값싸게 조달하고자 원산지의 도시들을 점령하거나[35], 현지에 상관을 개설하는 일이 많았는데, 당연히도 현지인들의 반발이 없을 리가 없어서 무력을 동원해서 그 지역을 침략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36] 고구려 때문에 육로로의 외연 확장이 어렵던 백제중국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위해, 이런 식의 해외 진출을 꾀했을 공산은 있다.[37]

3.4.3. 사이비: 유사역사학의 대륙백제설

요서경략설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유사품으로 대륙백제설이 있다. 바로 1989년 김산호가 출간한 대쥬신제국사와 소설가 박영규[38] 황당한 주장으로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각종 타지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는 일련의 환빠공정이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백제의 영토는 중국 대륙의 동쪽 절반으로까지 확대 과장되곤 한다. 이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백제판 임나일본부설, 아니 그 이상이다.

이쪽은 백제가 애초에 대륙에서 출발했다거나 요서경략설에서 주장하는 것 이상의 거대한 영토를 대륙에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 위례성은 산동반도에 있고, 관미성은 황하 하구에 있다...고 주장하나, 그 주장의 황당함이 환빠스틱하기 이를데 없어 논하기도 민망한 주장이다. 한자오독에서 시작되는 무개념, 무논리, 비이성의 3박자가 고루 갖춰진 주장이므로 임나일본부설과 다름없다. 아니 실상을 따지자면 학계의 정식 주장이 아니며, 그보다 더한 재야의 사이비역사학에 불과하다. 판타지 소설을 쓰고 싶더라도 어지간하면 더 좋은 소재를 잡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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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2010년 대하사극으로 제작된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도 관련 내용이 일부 묘사되었다.[39] 드라마 근초고왕의 원작으로 인용된 이문열소설 '대륙의 한'은 백제의 대륙진출보단 부여계 군벌이 요서에 기반했다는 쪽으로 가정해 스토리를 펴냈다. (소설 요서 진출의 주체는 근초고왕과 권력투쟁에 진 계왕의 자식들이다.) 즉, 원작도 요서경략설은 절충론에 가까운 주장이었는데, 드라마는 원작도 왜곡해 무리수를 뒀다.

3.4.4. 부정론: 중국사와의 교차 검증

여호규 교수는 후연의 여암을 비롯한 여씨 가문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을 가지고 백제 왕실 성씨가 여씨인 것과 헷갈렸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위의 강종훈 교수와 같은 사료를 주목했지만, 다른 결론을 낸 것이다.
구당서 고려전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高麗者, 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即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裏. 東渡海至於新羅, 西北渡遼水至於營州, 南渡海至於百濟, 北至靺鞨.

구당서 백제전에는 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裏,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고구려의 백제의 위치 관계는 서로 渡海하여 至하도록 되어 있군요. 西渡海至越州를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영토를 보유하여 그 영토는 월주와 접경한다." 또는 "서쪽으로 월주를 영토로 삼아 땅이 여기까지 이른다."라고 해석한다면,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인천 앞바다를 건너 상대편 쪽에 영토를 보유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3.4.5. 기타 주장

3.4.5.1. 웅진도독부 관련
백제의 요서지배를 암시하는 기록으로는 후술되기도 한 백제-북위 전쟁 기록이 있다. 한편, 통전에는 요서지방의 백제 식민지가 소멸해과는 과정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기록이 있다는 설이 인터넷에서 제기되곤 하는데, 당의 백제 지배 기지인 웅진도독부가 요동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에 따르면,
"본국(백제가) 무너지자 성 밖에 남아있던 무리들은 차차 약해져서 돌궐과 말갈로 흩어져서 투항해 버렸으며, 군주인 부여숭扶餘崇은 고국에 돌아갈 수 없음으로 하여 마침내 백제는 소멸하였다."
통전
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 인용한것. 괄호 부분이 바로 빠진 부분이다. 여기서 빠진 문장을 집어넣으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나오게 된다.
(其舊地沒於新羅) 城傍餘衆 後漸寡弱 散投突厥及靺鞨 其主扶餘崇 竟不敢還舊國 (土地盡沒於新羅靺鞨) 扶餘氏君長遂滅
그 옛땅은 신라에게 넘어갔다. 성의 남은 무리들은 점점 적고 약해져 돌궐말갈로 흩어졌다. 그 주인 부여숭은 옛나라에 감히 돌아가지 못했는데 토지가 신라와 말갈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부여씨 군장은 드디어 멸망했다.

이 내용은 부여융 이후의 웅진도독부를 요동으로 옮겨보냈다가 결국 폐지시킨 내용인것이다. 《삼국사기》에도 隆不敢入舊國이라고 비슷한 문장이 나오므로 낚이지 말자.

또 흔히 양당서에 발해가 백제의 옛땅을 차지했다는 것을 긍정론의 근거로 삼기도 하는데 그에 대한 반박으로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는 것을 들수 있다.
二月,甲戌,徙安東都護府於遼東故城;先是有華人任安東官者,悉罷之. 徙熊津都督府於建安故城;其百濟戶口先徙於徐ㆍ兗等州者,皆置於建安.
이것은 웅진도독부를 요동의 건안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인데 웅진도독부는 당시에 백제라고도 불렸고, 후에 발해가 웅진도독부(백제)가 있던 요동 일대에 진출하면서 그 땅을 차지하니 양당서에 발해말갈이 백제의 구토를 신라와 함께 나눠가졌다는 기록이 나온 사정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라와 말갈(발해)이 백제의 땅을 차지했다는 내용에 대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백제가 기록대로 요서를 점령했다면 이후 요서 부근 세력과의 충돌이 기록에 나타나야 하는데 요서 백제를 암시하는 기록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3.4.5.2. 시기와 정세 문제
진말이라는 시기는 사마염의 그 진으로 서진과 동진이 있는데, 서진 멸망이 316년. 이후는 오호 십육국의 혼란기가 시작된다. 그 이후의 진은 이미 남쪽으로 이동한 동진. 동진이 멸망한 것은 5세기초 420년이다. 이 시기 요서 지역의 북조 국가는 광개토대왕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의 후연이 존재했다가 무너지고 북위가 정복하는 과정이다. 때문에 진말을 서진으로 보느냐 동진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중국의 상황은 하늘과 땅 차이가 되고, 동기도 가능성도 전혀 달라진다.[40]

요서가 아닌 백제의 상황을 보더라도 과연 백제가 요서로 진출할 여력이 있었는가에 문제가 제기된다. 진말에 고구려가 요동으로 진출한 시기라고 하면 이는 백제가 광개토대왕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근초고왕 시대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해당 시기에는 고구려는 요동으로 진출하지 못했고 오히려 요동을 차지하고 있던 전연의 모용황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기는 등의 굴욕을 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긴다. 백제가 요서 지역으로 진출한 시기라 하면 우선 최전성기인 근초고왕 시기로 잡는다. 그러나 정작 요서경략설을 증명하고 있는 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가 요동을 약유하니 백제가 요서를 점령하였다."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것은 광개토왕 시기이다. 즉, 시간적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박도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다. 고구려왕으로 요동을 공격한 최초의 사례는 미천왕의 서안평 공략이기 때문에,[41] 시기적으로 후대인 소수림왕의 요서공략 가능성도 모순이 없어진다. 그런데 이런 반박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고, 요서경략의 최초가능시기만 더 앞당겨 놓은 셈이 되어서 혼란만 더 커졌다.
3.4.5.3. 양직공도 관련
양직공도에서 요서 점령의 주체를 백제가 아닌 낙랑으로 표기했다는 것도 부정론의 주된 근거 중 하나이며, 긍정론이 주류였던 과거 국사학계를 한바탕 뒤집어놓은 문구기도 하다. 물론 백제왕의 책봉호에 낙랑이 들어가는 점에서 보듯이 낙랑을 백제 등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곤 했으므로 설명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로 파장을 일으킨 까닭은 바로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 때문이다.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하면서 낙랑군을 쫓아냈을 때 낙랑군이 백성들과 함께 요서로 옮겨간 것은 확실하게 기록이 남아있는 내용이므로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할 때 낙랑이 요서에 진출하였다"로 읽는다면 기사의 '낙랑'은 거의 의문의 여지 없이 낙랑군으로 보게 되는 것. 더구나 양직공도의 해당 기사는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는 다른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서 백제 대신 낙랑이라고 고쳐썼기 때문에 마치 백제가 진출했다는 기록의 오류를 바로잡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양직공도 때문에 부정론에서 "백제가 실제로 요서로 진출하지 않았다면 백제가 요서로 진출했다는 기사는 대체 왜 나타나는가" 라는 점을 설명해야 하는 난점이 거의 해소된 점도 긍정론 입장에선 문제였다. 이는 바로 백제를 낙랑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점 때문인데, 백제가 요서로 진출했다는 기록 자체가 바로 낙랑군을 지칭한 '낙랑'을 백제로 착각한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설명이 되었다고 그걸로 정리가 되었다면 이 문서가 이렇게 장문으로 작성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주장이 완전히 정설로 기록되지 못한 것은 그에 대한 반론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띄어쓰기가 없는 한문 특성상 양직공도 문장도 어떤 부분을 나눠 읽냐에 따라 뜻이 확연히 달라지기도 하는데, 晉末 駒麗(구려)畧有遼東樂浪(요동낙랑)亦有遼西(요서)晉平縣 이 부분을 晉末 駒麗畧有遼東 / 樂浪亦有遼西晉平縣가 아닌 晉末 駒麗畧有遼東樂浪 / 亦有遼西晉平縣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면 앞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고구려의 요동 및 낙랑 공격이 거의 동시대로 이해되기 때문에 미천왕대의 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해당 문장은 양직공도 백제 챕터 내용인데, 문장의 앞 부분이 백제는 마한의 무리였다는 설명이므로, 바로 뒷 문장에서 뜬금없이 낙랑이 주체로 나올 이유가 없다. 고로 '백제는 마한의 무리였는데, 진나라 말기 고구려가 요동을 다스리게 되자, 낙랑도 요서에 있게 되었다'라는 해석보단, '백제는 마한의 무리였는데, 진나라 말기 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다스리게 되자, (백제도) 요서에 있게 되었다'라고 해석하는게 좀 더 자연스럽다.

다만 다른 골치 아픈 점은 양직공도를 모사한 것으로 알려진 제번공직도를 다시 제기만 옮긴 애일음노서화소록[42]의 백제국사 제기에는 해당 항목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기존의 양직공도와 현재 발견된 판본의 진위 논란부터 시작해서, 해석의 문제 등에 설왕설래가 제기되었다.
3.4.5.4. 북조와 한반도 측 기록의 부재?
가장 큰 결점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북조와 한반도 측 기록의 부재다. 이를 커버할 수 있는 고고학유물 유적 또한 부재 또는 있어도 확인이 어려운 현실. 당시의 기술력을 보았을 때 원거리 항해가 힘들었다는 것 또한 부정적 의견에 힘을 실어준다. 다만 연안항해는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가능했고, 서해안에서 산동반도로 넘어가는 항로를 원거리 항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기록상 남조계 사서에만 등장하며, 이후 백제가 차지했단 요서지방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도 거의 없다. 또한 백제가 요서로 진출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필요성의 문제도 있다. 요동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였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고구려와의 충돌이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다음과 같은 주장도 있다. 남조측 사서에만 기록되어 있고, 북조측 사서에는 없는 걸로 보아 남조측에서 라이벌격인 북조를 깎아내리기 위해 이런 내용을 서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조와 북조가 모두 사서에서 상대의 국명을 깎아내리기는 했지만, 없는 사실을 기록한 예는 거의 없다는 것이 이런 주장의 약점이다. 물론 현지에서 떨어진 남조측 사서가 잘 몰라서 사실이라고 착각하고 서술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정작 북조 사서 역시 그 사서들의 저본이 되어야 할 북위서가 신뢰도 측면에서 시원찮다는 문제점이 있다.

북위서는 정사임에도 편찬 당시부터 5호 16국 시대를 포함한 북위 이외 국가들에 대한 내용의 부실함에 더해 정통성 문제 등으로 공정성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받아서, '예사(穢史:더러운 책)'라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때문에 다시 편찬하기도 했지만 그 책들은 모조리 소실되었고, 북위서 자체도 난리통에 부분부분이 손실되어서 북위서를 포함해서 편집되었던 북사에서 역으로 내용을 가져와야 했는데, 바로 그 북사는 위서의 내용을 빼먹었다거나, 남북조간의 전투 기록을 빼먹었다거나 하는 비판이 존재한다.

실제로 이런 점을 들어서 비판하는 내용이 학술논문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후 5호 16국 시대에 대한 정사로 꼽히고 있는, 당 시대 저술된 진서통사를 기술한 송 시대의 자치통감이 관련해서 남조의 역사서를 답습한 것 역시 이 때문 아니냐는 반발이 존재하는 것이다. 자치통감도 북사와 그 저본이 되는 북위서와 남사가 한쪽에는 있고 한쪽에는 없는 상황이라 서로 배치되는 백제의 요서경략설 문제에서 남사측의 기사를 넣었다.

한편, 직접적인 기록은 없어도 간접적인 기록은 유추해볼만한 내용들이 몇 있는데, 일단 북조 시절 기사는 아니지만 청 황제의 명에 의해 발간된 만주원류고에는 ‘백제의 국도는 요서에 있었다.(國都在遼西)’는 내용이 있다. 친절하게도(?) 북평(北平)과 유성(柳城) 사이라고 상세한 위치까지 알려준다.[43] 물론 오늘날 이런 내용은 정설로 인정받지 못한다.

한편, 상기된 ‘양직공도(梁職貢圖)’의 백제 설명에는 ‘백제국기(百濟國記)’를 인용하여 ‘백제는 옛날의 내이(萊夷)이며 마한의 속국이다.’라는 내용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내이란 우이와 함께 청주(靑州), 즉 오늘의 산둥성 일대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하나다.[44] 그들은 산둥성 내산(萊山) 밑에 살아서 내이(萊夷)라 불렀는데 내산은 바로 오늘의 칭다오옌타이 일대다. 이렇게 정작 요서가 아닌 산동과 관련된 기록이 나오며 그것도 경략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백제가 산동에서 나왔다고 했으며[45], 거기에 마한까지 끌어들여 버린다. 답이 없다.

청주(靑州) 지역과 관련해서는, 삼국사기에 571년 북제(北齊) 사실상의 마지막 황제 후주로부터 백제위덕왕이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의 관직을 수여받은 기록이 있다. 그런데 북제는 요서경략설 기록들의 출전인 남조도 아니었고 청주(靑州)는 자신들의 영토라 묘한 부분이 있다. 백제타운이 있었다고 가정하면 명예직 비슷하게 허직으로 준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만 기록이 사실이라면 자사는 약간 뜬금없는 직책이긴 하다.

심지어 최치원은 상기된 '상태사시중장'에서 백제가 백만대군의 강병을 거느리는 나라이며 양쯔강 부근까지 침공했다고 주장했다.[46] 여기까지 오면 정말 답이 없는 상황이다. 이렇듯 기록이 매우 난잡해 파면 팔수록 떡밥이 나온다.

4. 기타

4.1. 산동경략설?

백제의 산동 진출 논란 역시 한국사 및 중국사와의 교차 검증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백제 위덕왕이 571년 북제로부터 '동청주자사'라는 책봉명을 받았는데, 청주는 바로 현대 중국의 산동 지방이다. 다시 말해 동청주는 산동 동쪽 부분이라는 뜻이다.[47] 결론적으로 당시에는 중국이 정치 명분 하에 자국 내, 혹은 자국의 영토라 생각하지만 실질적인 통치력은 없거나 타국이 자국의 영향권이라 여기던 제3국의 영토를 정치적 논리 하에서 책봉명으로 하사하는 일이 매우 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제의 산동이나 규슈경략은 상술한 것처럼 요서경략설보다 더 기록이 부재하여 검증할 수가 없어 단지 국사 교과서에만 수록되어 있으나 학계에서는 제대로 된 학설이 성립되지 못한 상황이다.

4.2. 백제-북위 전쟁

영명 2년(484) 위로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모도를 크게 격파하였다.
永明二年, 魏盧征之, 大破百濟王弁都.
건강실록

(동성왕 재위) 10년(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년(488) 12월조

이해(490) 위로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국경에 들어왔다. 이에 모대는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로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건무 2년(495)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중략) 지난 경오년(490)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말을 몰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 죽이니 그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꾀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합니다. 이제 임시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찬수류를 '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해예곤을 '행무위장군 불중후'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 데다 또 누선[臺舫]을 깨뜨렸으므로 '행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았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또 표문을 올리기를
신이 사신으로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신(臣) 모견,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 '겸 삼군 행진위장군 조선태수' 신 장새,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공무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의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그의 지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실로 관직을 올려주어야 마땅하므로 각각 가행직에 임명하였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성조에서는 특별히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허락함과 아울러 장군의 호를 내려주었다.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중략) 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尸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襃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贊首流爲行安國將軍辟中王, 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竝賜軍號.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백제 동성왕 당대에 탁발선비족의 북위와 백제가 서로 교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484년, 488년, 490년 총 3차례 충돌 기록이 있는데 놀라운 점은 북위명군이었던 효문제였던 반면, 백제는 불과 10여 년 전에 장수왕의 침입으로 왕이 죽고 수도가 불타버린 경험이 있었던 상황에서 중원의 맹주였던 북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북위의 백제 침공은 한국사에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중 하나인데, 당시 백제와 북위는 서로 전쟁(전투)을 펼칠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이에 근거해 북위군이 쳐들어온 곳은 만주와 화북의 사이에 위치한 요서 지방의 백제 식민지라며 이 사건을 백제의 '요서 경영설'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

5. 소결

위의 내용처럼 각 주장에는 긍정설과 부정설 모두 반박과 재반박이 존재하는데, 이게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시기도 서진이 멸망한 316년 이전부터 시작해서 동진이 멸망한 420년 이전인 후연 멸망시기까지 아주 다양하다. 이 때문에 긍정설의 경우도 만일 존재하였다면 도대체 언제 등장했느냐에 대한 이설도 분분하다.

규모에 있어서는 그렇게까지 큰 규모는 아닐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통설로, 경제적 영향력을 주장하는 학설도 유력하다. 이 경우라면 신라방의 백제버전.

다만 기존 학설들이 하나 놓치고 있는게 있는데,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하니 백제가 요서/진평에 두 군을 설치한 것을 병렬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천왕의 서안평 점령과 한군현의 멸망은 요서경략설의 커다란 힌트가 될 것이다. 백제가 기존에는 중국과 교류하려면 육로로 교류할 수 있었겠지만, 고구려가 서안평을 점령한 이후부터 백제의 중국교역로는 바닷길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선비족이 이제 막 중원에 왕조를 세우고 있을 때라 수많은 군현들에 행정력 부족 사태가 심각했을 것이다. 선비족이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대륙으로 끌고온 부여인들에게 백제와의 교역을 담당하는 조차지와 비슷한 땅을 내어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백제는 중국과 교류할 육로길이 끊겼어도 해로로 교역은 이어졌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상업적 거점설이 가장 무난하게 받아들여 지는 것이다.

다른 시대의 유사한 역사를 보자면 후삼국시대에 신라 말기의 혼란상 속에서 후고구려와 고려가 후백제에 대응해서 나주 주변의 호족들과 연계하여 군사적 거점을 마련한 것처럼 백제가 오호십육국, 북조 시대의 화북의 대혼란기에 현지 호족, 일부는 백제와 관련이 있는 부여계와 연계해 해상 군사, 경제 거점을 마련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오호십육국과 북조 초기의 화북은 일반 민중들에게 거의 문명의 붕괴 수준으로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참상들이 많이 벌어졌던 시기로 해안쪽의 호족이 그나마 상업 거래를 해왔고 보다 문명인에 가까운 백제와 결탁하고 북방 기마민족에 대항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영향력을 유지하려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혼란으로 인해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어느 한 쪽이 진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러 주류 학설들이 보이는 공감대는 '백제가 대규모의 식민지를 장기적으로 경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정도이다.

요서경략설과 함께 묶여서 떠도는 '동성왕 시기 위로의 공격 기사'는 그 자체로 사실이냐 아니냐 논란이 많은 동시에, 북위의 도해 공격 가능성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요서경략설의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연관을 부정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참고대상.

현재 금성출판사를 비롯한 검정 국사교과서에서는 요서경략설에 대해 '진출하였다' 정도로 기술할 뿐 그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고 있다. 일단 현재 요서경략설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없는 상황에서 교과서에서 해당 내용을 삭제하라고 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한 주장이다.[48] 문제는 이러한 백제의 요서 진출을 근초고왕 대로 비정하는 것과 산동 지방에 대한 진출을 다룬 부분. 이 부분들에 대해서는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49]

6. 같이보기



[1] 통치기간도 사실 논쟁 중인데 요서경략설이 진짜 있었다면 위진남북조시대 초중기에 잠시 있었을 것이라고 좀 더 보며(이조차 기록이 부족해 확실하지 않다), 백제 후기는 국력이 많이 약해졌을 시기이기에 남북조 후기 및 통일 이전 수나라 초기까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적다.[2] 지금의 랴오닝 성 요하 서부, 허베이 성 일대.[3] 산둥반도, 일본 규슈, 중국 강남 연해까지 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강남과 규슈는 대개 부정된다. 강남 등 양쯔강 하류 유역은 중국 남조계 왕조가 있었고, 규슈는 일본이었는데 둘 다 당시 백제와 친한 나라였기 때문. 산둥반도의 경우는 남북조의 세력 변화에 따라서 남북조의 세력이 오락가락했고 아주 약간의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여기서 뭔가를 했을 가능성 자체는 존재하지만, 그럴듯한 학설을 형성할 정도는 아니다.[4] 사족으로 진평현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中国古地名, 晉平郡晉平縣是南朝史書記載 百濟在中國晉朝 平壤地區建裊的建制縣(고대 중국 지명인 진평현(金平郡)은 남조사기에 기록된 진나라 때 백제가 중국 평양지방에 세운 유기현이다)이라고 나와있다고 한다.[5] 사실 좀 더 정확하게 언급하자면, 현재 연구하는 학자 중에서 이 주제를 다루는 대표적 인물인 공주대학교 유원재 교수가 대표적인 부정론자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답이 안 나오는 논란의 본격적 연구가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다.[6] 여기서 언급된 시기는 사서가 기록된 시기이지 실제로 사건이 이뤄진 시기는 아니다. 표기상으로 오해하기 딱 좋기 때문에 언급해둔다.[7] 문구 끊어읽기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참고로 해당 문구 앞 구절은 '백제는 마한의 무리였다'는 내용으로 백제가 서술의 주체이기 때문에, 요서진평현도 주체인 백제가 생략된 것일뿐이라고 추정하면 이런 해석도 가능은 하다.[8] 이 기록에 대해서 본문에 언급이 없기 때문에 배경 설명을 해두겠다. 우선 모용외와 모용황 시기에 전연은 백제와 단 한번도 전쟁을 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전쟁포로가 등장할 수가 없고, 두번째로 모용황 시기에 옮긴 전연의 수도인 용성은 바로 문제가 되는 요서에 존재하였다. 때문에 요서경략설 긍정하는 처지에서는 미천왕 시기 백제의 요서경략과 그 결말에 대해서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되는 사료이고, 부정설 가운데 부여 주체설을 지지하는 처지에서는 저기서 언급된 백제를 부여의 오기로 본다. 까닭은 모용외와 모용황 시기에 부여가 멸망 직전까지 전연에게 털리기 때문이다. 즉 저정도의 대규모 포로는 백제로는 불가능하고 부여라는 것.[9] 위에 있는 남제서의 두 기사가 모두 이 동성왕의 전쟁기록을 전하는 것이다. 이른바 동성왕 시기 위로의 침입기사. 자세한 것은 동성왕 항목 참고. 이건 독자적으로 논쟁거리다.[10] 그런데 최치원의 이 '상태사시중장'은 애당초 "고구려와 백제가 짱짱 셌는데 그걸 정벌한 너님은 더 짱짱. 그런데 그거 정벌하면서 우리랑 혈맹 맺었고 우리가 그 뒤로 하루이틀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내가 당나라에 들락날락하는 데 편의 좀 봐주세요(...)"이라는 글이다.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프로파간다성이 짙으니 유념할 것.[11] 그러나 신라 3최로 불린 최치원이 아무런 증거없는 근거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면 이 또한 모순이다.[12] 일제강점기 당시의 식민사관을 요약한 것으로, 유원재가 이렇게 주장했다는 뜻이 아니다! 이하도 동일하다.[13]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 주장도 그 근거가 미약한 것으로 평가된다는 의견도 있으나,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을 모두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백합야 전투만 하더라도,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는 왕자인 위덕왕이 직접 지휘에 나서고, 고구려는 양원왕이 직접 출정한 중요한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다.[14] 하필이면 근거로 드는 것이 북위서라서 틀렸다고 하기도 좀 그렇다. 북위서는 요서경략설이 등장하지 않는 북조의 역사서로 의도적인 왜곡이 많다는 비판을 달고 다닌다. 따라서 요서경략설이 실리지 않은 것도 편찬자의 편향된 서술이라는 것. 북위서가 엿같다는 것을 인정하면 환빠같은 일부 층에서 좋아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대놓고 언급을 하지 않을 뿐이다. 딱히 대신할 역사서도 없고.[15] 하지만 정작 백제로 쳐들어간 것은 그 아들 당고종이다. 다만 당태종도 역사와 관련해서는 자랑스럽지 못한 인물이다. 다만 역시 위서와 같은 사정으로...[16] 어차피 박은식선생쪽도 아마도 결국은 비슷한 루트였고 이념과 시대적 상황을 무시하고 객관성을 추구한 인물이 결국은 이병도인데, 이쪽도 결국 2000년대 시점 평가에선 민족주의적 관점을 완전히 배제했다고 보긴 또 어려운데다가 그의 연구가 비판받는건 신채호나 마찬가지고 일본인스승인 쓰다에게 문헌고증학 배운건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신채호와 똑같이 발음 비슷하다고 지명 비정하는 역사연구를 했기 때문이다. 다만 역사적 연구 성과나 후학들에게 미친 영향은 이쪽이 좀 더 크다는 차이는 있다.[17] 동아일보, 1936년 3월 3~18일,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18] 원나라 때 편찬된 산동 지방의 지방지.[19] 1931년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1945~1961년에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20] 1966년에 설립된 고대사 연구 학술단체인 '백산학회'가 발행하는 학술지이다.[21] 물론 이 또한 한민족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이었겠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단지 '영토 확장을 위해 정복전쟁을 벌였을 뿐인' 제국주의자로 비치게 되며, 굳이 가까운 가야나 신라를 놔두고 어렵게 바다를 건너 중원으로 진출한 까닭을 해명하기 어렵다.[22] 위의 김상기와 같은 해, 북한의 김세익은 백제의 요서진출을 3세기 말의 사건으로 앞당겨 보는 학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중국 료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 력사과학 1967년 1기>[23] 그런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4세기 중반 하북에 자리잡고 있던 전연(前燕)에는 6주 157군에 246만 호 999만 명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4세기 말~5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후연 모용씨 군주들의 막장 행각으로 이 많은 인구들의 2/3이 공중분해된다.(...) 근데 어찌되었든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은 4세기 사람이니 전진 시대의 인구로 보아야 한다. 즉 근초고왕 시대의 화북은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24] 근초고왕은 동진에게 영동장군-영낙랑태수(領東將軍-領樂浪太守)로 책봉받았다. 그러나 근초고왕 이후 백제왕의 책봉호에서 낙랑 관련 직함은 사라지고, 대신 고구려의 책봉호에 낙랑공(樂浪公)이 나타나게 된다.[25] 사실 따지고 보면 요서 지방은 경기만에서 산동반도 앞바다를 거쳐서 북쪽으로 나아가 묘도군도를 거쳐 발해만으로 깊숙히 들어가야 하는 길이다.[26] 결정적으로 1932년에 이미 무령왕릉 바로 옆의 송산리 6호분에서 양나라 관청의 기와를 모방해 만들었다는 '梁官瓦爲師矣'(판독에 따라 '梁宣以爲師矣'라고도 함)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나와 있었다.[27] 참고로 전격적인 군사진출이 아니라 단순 무역 수준의 진출이었다고 해도, 거점 확보나 경비 등을 위한 최소한의 군사력은 동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8] 다만 이것은 백제의 요서 진출을 긍정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대단히 조금이긴 하지만 적어도 완전히 없지는 않다는 말.[29] 백제 왕성인 부여씨의 축약형이 아닌, 보통 모용선비에게 끌려갔던 부여의 왕족으로 여겨진다.[30] 강종훈,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30호, 2003[반박] 일본이 10만 대군을 파병했다는 기록은 그 신빙성에 매우 의심을 받고 있다. 당시의 일본은 10만에 이르는 대군을 파병하기는커녕, 10만 명의 호구를 다 집계할 능력조차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게다가 최소 200년에서 400년에 이르는 시대 격차가 나는 요서경략시점과 백제의 멸망 시점을 기술적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32] 하지만 정작 혼돈의 핵은 요서가 아니라 화북 지방이었다. 그 혼란상은 역사 기록으로 상당히 추정 가능한 부분도 있고.[33] 후연은 고구려, 백제를 둘 다 털어버렸다.[34] 하지만 이것을 침류왕과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다. 이미 위에서 "여암은 부여계 인물임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놓은 상태인데다, 또 이걸 보완한답시고 침류왕이 젊은 시절 여암과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면(...) 젊은 시절에 요서에서 소금장수라도 한 모양이다.[35] 1510년에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가 이끄는 포르투갈 해군 함대가 인도디우코지코드를 점령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36] 16세기 초에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이끈 포르투갈 해군의 함대가 오늘날의 말레이시아믈라카에 있던 믈라카 술탄국을 공격해서 수도인 믈라카를 정복한 일이 있었는데, 이에 믈라카 왕실이 오늘날의 조호르 주 일대로 도망가서 조호르 술탄국을 세우고 항전을 계속했음은 물론 우방국인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에 명나라 해군이 자국과의 무역을 시도하던 포르투갈 함대를 격파해버렸다.[37] 비슷한 시기에 백제가야일본규슈로 진출했다는 기록에 대해서도, 위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무력을 동반한 무역거점의 확보를 묘사한 것이라는 설이 학계에서 지배적이다.[38] 다만 박영규는 대륙삼국설을 부정하는 등 진성 환빠까진 아니다.[39] 백제가 요서 지역도 아닌 석가장에 진출했다는 자막으로 빼도박도 못하게 되었다.[40] 그런데 자치통감이나 진서의 시대 구분에서 보이는 것처럼, 전근대 역사관에서는 서진과 동진을 연속된 국체로 파악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즉 전근대 역사관에서 '진말'이라고 하면 따지고 자시고 없이 당연히 동진 중후반 시대인 것이다. 굳이 서진을 분리시켜 서진 말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근대 이후에나 가능한 소리기에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현실.[41] 그리고 이 경우에는 서진이 멸망한 시기와 정확하게 겹친다. 8왕의 난=308년, 미천왕의 서안평공략=311년, 서진멸망=316년. 다만 이 경우도 낙랑 이치 주장을 막지는 못한다. 미천왕의 낙랑군 정벌이 313년이기 때문에.[42] 사실 이게 주목받은 것은 신라국사 제기의 '혹은 왜에 속하였다' 부분이지만 이건 이것대로의 골치 아픈 부분이다.[43] 참고로 한반도 전주에도 백제 수도가 하나 더 있었는데 둘을 나중에는 전주의 수도 하나로 합쳤다고 한다.(...) 주류사학계(환빠 입장에선 강단사학계) 입장에선 익산이면 모를까 전주는 수도도 아니었기에 황당하게 들릴만한 소리고 실제 이 내용은 만주원류고의 부정확한 신뢰성을 드러내는 기사 중 하나로 볼 수 있으나, 어찌됐든 환빠 계열에선 대륙백제 관련해 매우 좋아하는 기사다.[44] 서경 우공편.[45] 허나 일반적으론 많이들 알듯, 백제부여-고구려에서 나왔다고 여겨진다. 당대 백제 지도층 역시 부여 계승 의식을 드러냈다. 물론 그것조차도 지도층 한정. 산동쪽은 취급도 안했다.[46] 백제가 백만대군을 실제로 굴렸을리는 없으므로, 백제의 무도함을 규탄하고 신라와 당의 친분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된 어법으로 보기도 한다.[47] 유사 용례로 남서울, 서인천과 같은 식으로 이해하면 된다.[48] 혹자는 환빠들의 영향으로 요서경략설이 교과서에 들어갔다는 주장도 하는데, 이건 한국이란 나라에서 국정, 검정교과서가 어떻게 편찬되는지,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가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약간이라도 알면 나올 수 없는 이야기다. 차라리 국정, 검정교과서 특성상 정부에서 이런 방침을 원하기 때문이라면 모를까, 역사학계에서도 가장 보수적으로 기술되기 마련인 교과서가 사회적 압력 같은 사정으로 작성되진 않는다.[49] 사실 이 부분도 국사학계의 보수성과 국사교과서의 수정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예 가르치는 양을 줄여서 간략화 시킬 것이 아닌 이상 해당 부분의 볼륨을 어느정도 유지 할 것이라면 이 부분을 빼내는 것 자체의 논란, 그리고 이 부분을 빼내는 것이 가져오는 파장, 그리고 이걸 빼낸 자리에 대신 어떤 부분을 집어넣을 것인가가 합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가는 것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