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6:24:16

사농공상

1. 개요2. 동아시아
2.1. 중국2.2. 한국2.3. 일본
3. 동아시아 밖에서
3.1. 미국3.2. 유럽3.3. 중동

[clearfix]

1. 개요

사농공상()은 중국 춘추시대부터 근대까지 동아시아한국, 중국, 일본에서 통용되던 직업의 분류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사민(四民)이라고도 한다.

사농공상은 각국의 정세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졌으며 흔히 알려진 계층적인 성격은 유교에서 이 개념을 받아들인 후의 일이다. 유교를 받아들인 경우에도 상공업 등이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크면 그 계층적인 성격을 완화하려는 시도가 빈번하였다.

2. 동아시아

2.1. 중국

용례는 춘추전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士(학자), 農(농민), 工(장인), 商(상인)으로 백성을 분류하였다. 다만 아주 초창기의 士는 학자가 아닌 병사를 뜻했다.[1] 공자를 보면 알다시피 당시에는 군인으로서의 능력이 상류층의 기본 소양이었기 때문이다.[2][3] 이후 군현제가 확립되면서 의미가 변했다.

보통 한국 사회에서는 사농공상이란 표현을 고려조선과 연관해서 접하기 때문에 자칫 오해하기 쉬운데 중국에서 사농공상 대신 사민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특정한 신분제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민은 그냥 백성이란 뜻으로 쓴다.

관자에서 사농공상, 춘추곡량전에선 사상공농으로 표기했는데 어느 쪽이든 그냥 백성을 통틀어 부르는 표현이다.
桓公曰: "定民之居, 成民之事, 奈何?"
管子對曰: "士農工商四民者, 國之石民也, 不可使雜處. 雜處則其言哤, 其事亂. 是故聖王之 處士必於閒燕, 處農必就田壄, 處工必就官府, 處商必就巿井."

제 환공이 말하기를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고 백성들에게 일거리를 주는 것을 어찌하면 좋겠소?"
관중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학자, 농민, 장인, 상인 네 부류의 백성들은 (모두)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백성들이므로 섞여 거처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섞여 살게 되면 그 말이 난잡하고 그 (맡은 바)일들이 어지럽혀집니다. 이런 까닭으로 성인된 왕의 치하에, 학자들은 반드시 한가롭고 편안한 곳에 거하고 농민들은 반드시 밭과 들판에 거하며 장인들은 반드시 관청에 거하며 상인들은 반드시 저자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
ㅡ 「관자」 8권 20편 소광(小匡) 中
백성들을 네 부류로 나눈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계급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보긴 어렵다. 굳이 요즘 식으로 해석하면 "산업은 1차 산업, 2차 산업, 3차 산업이 있다" 같은 표현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관중의 말은 현대로 치면 분업이 안 된 채로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하는 것보단 분업을 통해 각자가 각자의 일을 해서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낫다는 의미가 된다. 관자의 위 대목에 대해서는 대중적으로 오해가 매우 짙은데 보통 두 문장들 중 가장 첫 문장만 들어 사농공상을 같은 장소에 기거하지 못하게 하는 대민통제를 실시하려고 했다 정도로만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두번째 문장까지를 보면 실제로는 사농공상민이 아예 서로 다른 마을에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한 것이 아니라 단지 농민은 밭 근처에서, 장인은 관청 근처에서, 상인은 저잣거리 근처에서, 즉 모두가 각자 본인들 직장 근처에서 거주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현대로 따지자면 일종의 도시계획적인 주장일 뿐이다.

유교적인 관점에서 사농공상이라는 구분이 있기는 했어도 정세상 상업이 유리한 송나라 등의 시대에는 상업은 유교의 가르침을 재해석하는 식으로 오히려 장려되었고 외부 정세가 교역에 비교적 불리하던 명나라청나라도 상업을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당장 화교를 떠올려 보자. 사실 한국사조차 중국에서 해금령 등의 조치가 내려지지 않던 시대에는 상업이 발전하고 중국과 일본의 개방도에 따라 상공업이 발전하며 임상옥처럼 그냥 상업을 천시하는 경향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을 정도다. 애초에 중국 같은 대제국에서 상업은 단순히 뭘 사고판다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사실상 통일국가를 유지하게 해 주는 원동력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한국보다 과거제를 먼저 도입한 나라이기 때문에 시험으로 성공한 신사와 같은 계층이 사회 지배층으로 떠오르고 이런 경향이 너무 심해 다른 직업이 천시되는 부작용이 있기는 했으나 상업이 유리한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는 상업도 발전하고 너무 외세가 발전하면 상공업이 발전한 외세의 제도를 중국도 받아들이는 시도는 있었다.

여담으로 상인(商人)이란 표현 자체가 "상나라(=은나라) 사람"이란 뜻인데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한 뒤 흩어진 상나라계 유민들이 장사를 해서 먹고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2.2. 한국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각각 자기의 분수가 있습니다. 선비[士]는 여러 가지 일을 다스리고, 농부[農]는 농사에 힘쓰며, 공장(工匠)은 공예(工藝)를 맡고, 상인(商人)은 물화(物貨)의 유무(有無)를 상통(相通)시키는 것이니, 뒤섞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
ㅡ 성종실록 140권, 성종 13년 4월 15일 계축 2번째 기사 中 #
이 문화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되었으며 고려조선 시대에 사용되었다. 이전에는 이런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물론 육체적으로 힘든 농공상을 하위 계층이 대체로 담당하기는 했지만 금입택을 가진 신라 대귀족 집안에서 정창원 신라 양탄자불상 같은 공예품을 직접 제작하고(공) 귀부인 이름을 브랜드로 내걸어 판매하는(상) 것처럼 사농공상이라는 용어마냥 선이 그어진 문제는 아니었다.

사농공상이라는 표현이 선비, 농민, 장인, 상인을 엄격한 신분질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이진 않았지만 상, 공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같은 양인이라고 하더라도 공상천예(工商賤隷)라는 표현을 쓰며 관직에 오르는 데 제한을 두었다. 가령 과거 시험경국대전 상에서는 천인이거나 다른 결격사유만 없으면 모든 양인은 지원할 수 있음에도 조선 중종 때 편찬된 법전인 대전후속록에 과거 응시 자격에 4대조를 살피라는 규정을 넣어 공상의 과거 응시를 제한했다. 다만 과거 응시에 제한이 있었을 뿐 공상인이 관리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조선 전기 화원이었던 최경은 아버지가 염간(鹽干), 즉 소금 굽는 일꾼이었음에도 당상관에 임명되었고 신하들이 격렬히 반대하여 취소했다가 훨씬 후대에 다시 임명하였다. 그밖에도 잡직계가 설정되어 잡직 품계를 받아 관리로 진출되었으며 조선 말기에는 이용익처럼 보부상으로 일하다 관료가 된 사례도 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시대가 이미 신분제의 강고함이 많이 줄어들었던 구한말이었던 데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세가 영락했을지언정 어쨌든 넓은 의미의 왕족(완풍대군파)이었다는 점도 작용했으리라 보이지만.

간혹 조선이 사농공상을 너무 융통성 없이 적용하여 현실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아 망했다는 주장이 많지만 조선이 현실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아 망했다고 하기엔 개항 시기부터 시작해 임오군란 이전까지를 보면 상당히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옳지 않다. 이후는 청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청일전쟁까지 개혁에 제동이 걸린 상태였다. 당장 갑오개혁의 개혁안은 1880년대 초에 이미 논의된 내용이며 사농공상이 그렇게 엄격했으면 정조 때 수원에서 연암 일파 등 일부 학자들이 양반의 상업 종사를 주장하고 실제로 행해졌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문제는 조선의 여건상 농업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농에 가중치를 크게 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첫째로 고려시대부터 한반도는 중원의 왕조나 북방왕조, 일본 왜구부터 시작한 해양세력의 끊임없는 외침을 겪으면서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국가 전체가 총동원되는 방어전을 하면서 존버하는 것이 역사적 일상이었고 언제나 병력 동원이 가능한 군역제를 수행하면서 자유무역이나 해상 진출 같은 확장이 매우 어려웠다. 삼남지방의 쌀을 한양 조정으로 실어오는 것조차 쉽지 않을 만큼 해상교역이 어려웠기 때문에 생산하면 그 지역에서 쓰기에 급급했지 교역으로 부를 쌓기엔 너무 외부 리스크가 커서 교역으로만 얻을 수 있는 정말 중요한 자원(ex:화약 등)이 아닌한 생산하지 않고 물건을 바꿔먹는 장사는 국가적으로 권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조선 전기는 조금 사정이 나았지만 양란으로 전국토가 쑥대밭이 된 후기에는 강력한 중농정책 외에 다른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고 그 와중에 경신대기근까지 겪으면서 1800년대가 되어서야 간신히 초기적인 민간 상업자본이 형성될 수 있는 수준의 농업생산량이 확보되었다. 특히 한반도는 좁은 면적과 척박한 산성토양, 중부 이북은 냉대기후라는 여건상[4] 농업생산성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낮았기 때문에 더더욱 농업인구의 이탈을 적극적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고 인구 말고도 주식작물 농경지가 상품작물 재배지로 전환되어 발생하는 식량 손실도 막아야 했다.

조선과 비교해 상업에 어느 정도 관대했던 전 왕조 고려는 오히려 대자본을 독점한 권문세족과 부패사찰의 발호로 국가 시스템이 고작 사단급 외적도 제대로 막지 못할 정도로 결단이 나고 고려 후기 거란 유민의 침공 때부터 1세기 가까이 쉬지 않고 북에서 남에서 쳐들어온 외세 때문에 조선 왕조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조정이 엄격하게 상업의 흐름과 규모를 통제하는 체제를 지향했다는 배경도 있었다. 고려만 문제가 아니라 신라 역시 실크로드 해상무역의 붕괴가 불러온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졌는데, 이 때야 문제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 국한되었기에 중국과 한반도 양쪽 모두 그 붕괴를 각 지방 할거세력이 주도했지만 원말명초, 여말선초는 흑사병이라는 대재앙 앞에 원과 고려라는 두 통일국가가 통째로 전복되었으니 조선의 건국세력은 명나라가 추구한 농업 중심 향촌사회를 그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질소 비료의 개발 이전에는 기근이 21세기보다 더 잦았으므로 사실 식량을 만들지 않는 공업과 상업의 우선 순위는 농업보다 낮은 게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일단 식량이 없으면 누구나 굶어죽으니. 이를 극복하고 상공업이 발전하려면 그 상공업으로 벌어들인 재화로 식량을 수입해 생활을 지탱할 수 있어야 한다. 유럽의 경우 전근대부터 풍요로운 국토에 비해 고질적인 인구정체에 시달렸던 프랑스동유럽이 이 식량수출을 도맡아줬다. 반면 조선은 이웃나라들도 주기적으로 인구과잉 문제가 터져 기근에 시달리기일쑤라 딱히 식량을 사먹을 곳도 없었고, 심지어 일본은 영아살해 풍습이 일반적이었을 정도로 농담과 과장을 조금 보태면 조선이 일본에게 지원해야지 일본이 조선을 지원해 줄 상황이 아니었다.[5] 이 만성적인 식량 문제는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대에도 알게 모르게 한반도 국가들의 산업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6] 당장 최대 교역대상인 중국부터 원나라 말기에 흑사병의 창궐로 인한 비단길 무역 타격과 지나친 교초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사회 혼란으로 명나라로 왕조 교체가 이루어졌는데 명나라는 이에 대한 반동과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 확립을 위해 대외무역을 조공무역으로만 받고 해금령을 통해 강력하게 외국과의 사무역을 규제해 버렸다. 그나마 명나라는 자체 체급이 워낙 거대하니 내수만으로도 화폐경제를 돌릴 수 있었지만 비공식 인구 다 털어도 1천만이 안 되는 전기 조선으로서는 답이 없었다. 간신히 행해지던 민간 밀무역도 주로 바닷가이면서도 산악 투성이인 데다 동남해안이라서 베이징에서 일일이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멀었던 점이 합쳐져서 목숨 걸고 바다로 나가려 드는 푸젠성 중심이라 조선이 여기에 참여하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일본 역시 15세기 중엽 전국시대가 시작되면서 민간무역을 대규모로 하기 힘들었으니 상업의 발전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청 왕조가 천계령을 내렸다가 해제하고 일본 역시 에도 막부로 통일되어 안정되면서 외국과의 대규모 민간무역이 수월해진 조선 후기에 들어서 상업이 빠르게 발전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게다가 전근대 절대적 무역흑자국인 중국과의 교역은 그야말로 블랙홀 수준의 은 유출을 감내해야 했는데, 만성적인 귀금속 부족에 시달리는 조선은 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대단한 이와미 은광을 가진 일본조차 이를 감당하기 힘들어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 은 유출을 통제해야 했고,[7] 산업혁명의 선두주자로 이미 인도 면직물 산업을 초토화시켰던 영국마저 대청 무역의 적자를 벌충하기 위해 아편이라는 범죄적 수단까지 동원하다가 급기야 아편전쟁에 이르렀을 지경이었다.

사실 사농공상은 사회적 신분제라 하기는 하지만 막상 신분제로 보기가 어려운 이유는 일단은 사농공 3가지에서는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상인이라도 국역을 부담하는 시전에 속하거나 행장을 발급받지 않은 행상인이 아니면 난전이나 도적으로 분류되어 처벌받았다. 애초에 상인을 도둑놈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평가한 공자는 "백성이 상업에 종사하면 민심이 흉흉해진다"라는 말을 남겼고 그 공자의 논어를 어릴적부터 달달 외운 관료층이 상인을 좋게 볼 리가 없다. 공인이 농민이 될 수도 있으며 농민이든 공인이든 누구나 양반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가능성을 열어 뒀지만 실제로 되기란 어려웠다. 이는 현대에 누구나 경영자나 정치인이 될 수는 있지만 모두가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 것과 비슷하다. 차라리 농민, 상인, 기술자들이 신량역천처럼 다른 직업으로의 이직이나 과거 응시가 제한되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농공상에 대해서 이런 부분이 제한되지는 않았다.

현대에 들어와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직업에 따른 신분 서열을 구분짓지 않으나 농담삼아 '상사공농', '사상공농', '상공사농' 등의 용어를 입에 담으며 각 영역별 소득차나 사회적 인식 등을 논하는 사람들은 있다. 이른바 '사'자 들어가는 직업이야 예나 지금이나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는 대기업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면서 취업시장에서도 돈을 다루거나 불리는 기술이 있는 사람, 혹은 사업적/상업적 마인드를 지닌 사람이 갈수록 우대받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 농업의 소득 불안정성[8]과 수입산 농산물과의 경쟁 등으로 인해 곡물자급률과 식량자급률은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예전부터 유수원, 신위 등이 언급하거나 양반전에서 "사민(四民)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사(士)이니 이것이 곧 양반이다."라는 언급이 등장하듯 양반이 다른 직업 계층을 멸시하거나 농공상에 속한 사람들이 실질적으로는 관직에 나아가는 데 차별이 있기는 하였는데 사농공상이 단지 분업을 의미하지 차별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 위의 글을 다시 읽어 보면 굳이 '양반의 상업 종사를 주장'할 정도로 이것이 보편화되고 당연시되던 건 아니란 것이다. 가난한 양반이나 어쩔 수 없이 일을 했고 남의 땅을 소작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이 특권 의식을 버리지 못해 제멋대로 평민을 부려먹거나 지주들에게 욕을 해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려시대의 사치를 문제 삼아 세워진 조선이었지만 조선 후기로 들어가면 경쟁적으로 사치를 부리는 풍조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

제도 측면의 차별은 줄어들었지만 일제강점기에도 일제는 은근히 자신이 가르쳐주는 학문을 배우면 양반이 된다고 하여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묘사되듯 계층의식을 조장했다.[9] 현대에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사농공상이 변질된 풍토로 인해 '공부를 잘해서 책상에 맍아 서류를 다루고 편하게 돈을 버는 직업'은 숭상하는 풍조가 강하여[10] 좁으면 블루칼라 직업 종사자나 기타 노동자, 넓게는 국책연구소의 이공계열 박사까지 제대로 대우를 안 해 주고 이직이나 하라는 식의 비아냥이 있지만 '사'처럼 느껴지는 직업은 최대한 장점을 부각시키고 부조리에 저항하지 않는 풍토[11]를 두고 중화권을 제외한 외국에서도 찾기 힘든 풍조를 비판하는 수사로 쓰이는 경우는 있다. ####

현대적인 직업 윤리는 '농공상'의 직업 등 낮다는 낙인이 박힌 그 직업에, 그 종사자가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윤리적 기준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부당한 신분제 유지의 주된 수단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상업 자체의 윤리, 공업이나 농업 자체의 윤리를 발전시켜서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인격적 존중과 사회적 역할을 제한하고, 사회 전체의 윤리적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일을 막고자 한다. 조선시대부터 임상옥과 같은 거상이 이를 시도하기 시작하였으며, 현대 한국에서도 합리적인 상업의 방식을 강조하는 유명인, 장인 정신을 가지는 블루칼라 등이 이런 이상을 발전시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 윗세대로부터 받은 교육의 영향이나, 누군가의 위에 선다는 권력을 유지하는 시도 등이 남아 있어서 현재도 직업 등을 부당하게 가르는 잔재가 없지는 않은 것이다.

여하튼 사농공상은 단점으로만 보기보다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바뀔 뿐이라는 관점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고려는 조선보다 상업에 긍정적이었으나 그것이 극에 달해 사치가 심해지고 동아시아의 무역이 고려 말기에 혼란에 빠지면서 국가경제가 도미노처럼 무너지면서 고려 멸망에 기여했다. 이후 등장한 조선은 고려의 혼란을 보았는데 당시 주변국은 사농공상을 주장했으니 자연스레 상업보다는 농업을 지향하는 국가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최근에는 능력주의에 대한 의구심이 가중되며 직업에 대한 차별을 혁파하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다만 인간의 판단력이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도 세계 어디에서나 잘못된 정책이 등장하듯 사농공상을 주장하던 사대부들도 상공업의 단점을 보완할 방안도 잘 고려하지 않고 아예 차등을 두는 식의 대안만을 생각하는 처방이 잘못되었을 수는 있겠으나 어떻게든 개선을 위한 노력은 이어진다는 건 확실하다.

국가 통제가 강력한 북한에서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당원이나 일군, 즉 '사'의 우월적 지위는 유지되는 반면 농민은 그야말로 하층민 취급인 것이 과거와는 다른 점이다. 시장화의 진전 속에서도 농민은 여전히 협동농장에 매여 별 다른 소득원 없이 농사지어 국가에 수매당하고 빈궁한 삶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군 제대 후 그 고된 탄광지역 배치라도 받아서 농촌을 탈출하려는 이들도 있다.[12] 국내 산업기반이 몰락한 상황에서 외부 생산품을 거래해 돈을 버는 상인의 지위가 높아져 현재는 사상공농 체제가 형성되어 있다.

일부 극단적 정치진영에서는 재벌 등 기업인들이 부패 혐의로 지탄이나 처벌을 받는 것을 유교 혹은 사농공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전혀 관련이 없다. 기업인들이 시장 왜곡과 정경유착을 행하지 않도록 처벌하는 것은 애덤 스미스 등 유럽의 경제학자들도 하던 주장이다. 오히려 나라의 경제를 위해 기업인들에 대한 법적인 처벌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야말로 사농공상과 유사한 신분제적 주장이다.

2.3. 일본

일본의 사농공상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으며 에도 시대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계급 체계는 사농공상 순 그대로지만 사에 선비 대신 일본의 무사(武士)가 들어간다. 무사, 즉 사무라이가 득세했던 일본의 사 회상황이 반영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대 조선과 달리 상공업이 상대적으로 발달하였던 에도 시대의 상인들은 공식적인 사농공상의 순위와 달리 현실에서는 생각보다 파워가 셌다는 의견도 있다. 상공업의 발달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존의 토지 생산에 기반한 경제에 의존하던 대부분의 다이묘들로서는 점차 상인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서 오죽하면 오사카[13]의 상인이 대노하면 천하의 다이묘들이 벌벌 떤다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지폐에 사업가 출신도 등장하기도 하며 에라비토리라는 돌잡이에는 건축과 꼼꼼함을 상징하는 자, 손재주를 상징하는 가위와 같은 소재가 등장할 정도로 한국보다는 그래도 농공상의 인식이 나은 편이었다. 현대에도 과거 제도가 없던 면이 크지만 고졸에 대한 인격적인 차별도 적어 고졸대졸이 하는 일은 잘 못 해도 그걸로 심하게 멸시를 받지는 않는다.

유럽과는 달리 상인 계급들은 근대화의 주역이 되지 못하였을 뿐이지만 핵심 조연, 흑막 정도는 되었다. 일단 에도 시대부터 나름 재벌 가문이었던 미쓰이 같은 가문이 유신 웅번 측에 자금을 댔는데 이들은 그 덕분인지 몰라도 이들 재벌 가문은 메이지 유신 후 국가와 결탁하여 독점재벌로 성장했으며 재벌 가문들은 화족이 되었다. 이 외에도 조금 더 뒤에 유명해진 미쓰비시, 스미토모 재벌도 마찬가지로 일본 경제의 발전사와 함께했다. 하지만 덕분에 일본은 상업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1차 산업인 농업이 붕괴되어 버렸는데 이는 에도 시대 후기에 일본 국민의 평균 신장이 감소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14]

다만 일본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상인이 대우받지는 않았으며 에도 막부가 상인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무역을 금지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외에도 조선은 농민이 사족이 되는 과거제도가 있었지만 일본은 그러한 제도도 없었기 때문에 계층이동은 조선보다 폐쇄적인 측면이 있었다.[15] 또한 상인 계급들이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는 걸 막기 위해 재산을 빼았는 일도 존재했던 걸 보면 당시 동아시아에서 다른 나라보다 특수하게 대우받는 위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반론도 있다.#

일본에 사농공상 제도가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2000년경을 기점으로 일부 교과서에서 사농공상 제도에 대한 내용이 삭제되었다.[16] 사농공상이 삭제된 최근의 교과서 내용에 의하면 무사(武士)만 상위계급이고 농민을 백성(百姓), 상공업인을 정인(町人)이라고 하며 백성과 정인은 대등한 관계였다고 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한 일부의 상인은 무사보다 상위로 취급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처럼 일본에서도 이공계 홀대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몇몇 과학, 공학자들이 일본을 떠나고 그것을 동료 과학자에게도 회유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3. 동아시아 밖에서

3.1. 미국

오히려 정반대인 상공농사를 지향하는 대표적인 국가다.

미국은 태초부터 민주주의자본주의로 시작된 국가다. 미국이라는 나라 워낙에 축복받은 땅덩이를 가져서 나라가 커지는 동안 계속 생겨나고 개발되는 농지와 그곳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만으로도 충분히 국민들이 먹고 살 수 있었고 21세기에는 전세계 2위의 농산물 생산량을 자랑하는 농업대국이다. 그렇게 잔뜩 쌓인 물자를 바꿔먹으면서 돈을 벌어들이는 상업이 미국의 부를 가져온 근간인 것이다. 하술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농업에서도 상업과 공업의 힘을 접목해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기업화 전략에 성공해 현대 미국의 대형 농업 법인과 그들의 스케일에 걸맞은 농산물을 제공하는 농부는 그 자체가 거대 기업화되어 전세계 생활물가는 물론 미국 정치, 나아가 웬만한 개발도상국 정치판쯤은 이들의 기침 한 번에 흔들릴 정도로 막강한 실물경제의 파워를 가진 자들로 존재하고 있다. 오죽하면 아이오와 코커스가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대선 레이스의 시작이겠는가.

오히려 틀에 얽매이고 딱딱한 관료제 대신 틀에서 벗어나 자유도가 높고 부드러운 사기업 위주 및 창업 위주의 문화를 지향하는 국가다. 그래서 그런지 공무원은 미국에서 굉장히 인기가 없는 직업이다.[17]

물론, 대통령, 총리(국무장관), 상/하원의원, 지역상/하원의원, 장관, 차관 정도로 공무원 중에서 가장 높으신 분들에 해당하는 직업들은 당연히 미국 사회에서도 매우 선망의 대상이며 가장 선호된다.

미국의 공무원은 복지 혜택이 좋긴 하지만 사기업보다 급여가 매우 적고 보수적인 데다가 하나도 안 즐겁고 재미도 없는 직장인지라 아무래도 매일매일 즐겁고 재미있게 살고 싶어하는 미국인들이 매우 싫어하기 마련이다. 특히나 미국의 공무원들은 대체로 너드 이미지도 있어서 졸업을 앞둔 미국의 대학생들 및 미국의 고등학생들은 '공무원 vs 중소기업' 중에서 차라리 중소기업을 간다고 하지 공무원은 절대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미국에서는 지방 읍면동사무소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은 중소기업보다 돈도 많이 못 받고 여러모로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 1997년 외환 위기부터 2010년대까지 공무원이 대기업보다 훨씬 최고의 직장이었던 한국과는 정반대의 케이스를 여실히 보여준다.[18]

오죽하면 블랙 기업처럼 임금체불이 잦고 직원간 부조리가 매우 심각한 영세기업보다도 더 대우가 나쁜 데가 바로 공무원일 정도며, 영세기업일지언정 그래도 해당 직무에 대한 경험을 충분히 쌓고 경력직을 통해 더 좋은 회사들로 충분히 이직을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국가가 바로 미국이다. 게다가 미국의 공무원은 유럽의 공무원과 동일하게 신규 채용을 잘 하지 않고 이전 사기업에서 근무했던 경력을 토대로 삼아사 경력직 위주로 채용한다. 미국은 이 정도로 상공농사인 사회상을 지향한다.

그러나 극도의 개인주의 사회인 미국 특성상 자신이 원하는 직업이라면 공무원을 하는 것도 스스로 주눅드는 게 결코 아니다.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서 셧다운처럼 아예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도 한 달은 일을 해나가던 사례도 존재한다. #

빅테크 기업들의 경우 사업분야상 공학도들이 ceo의 역할을 겸하는 공+상이 일체화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3.2. 유럽

앙시앵 레짐 이전의 유럽 사회는 전통적으로 "사" 계급의 우위가 확정적이었으나 그 이하 계급의 신분 차이는 명확하지 않았다. 중세 봉건제 이래 유럽 구체제의 신분 구별은 기본적으로 세 신분, 즉 1신분인 기도하는 자와 2신분인 싸우는 자, 그리고 3신분인 일하는 자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사농공상의 틀에 맞추어보면 문화, 이념과 지식 권력을 차지한 성직자(기도하는 자)와 군사력, 영토를 차지한 기사귀족(싸우는 자)이 "사"의 신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신분이 바로 귀족, 즉 평민들을 지배하는 우월한 신분이었다. 반면 평민인 3신분은 일하는 자, 즉 농부, 장인, 상인까지 실질적인 생산과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이를 포괄하는 것이었으니 농공상은 모두 3신분에 속해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3신분 내에서 우열이 갈리기 시작한 계기는 바로 중세 성기 이후 도시의 발전이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유럽(특히 이탈리아를 제외한 서유럽) 대부분의 영역은 자급자족적인 장원제로 통치되었고, 교통통신망의 붕괴로 인하여 상업 역시 크게 위축되었다. 이러한 봉건적 장원제가 주도하던 중세 전기까지의 사회에서 3신분 내의 계층 구별은 별 의미가 없었다. 장원 마을의 농부건, 목수나 대장장이건 영주(기사귀족) 앞에서는 그저 자신의 영지민 중 하나일 뿐이었고 상인들의 세력 역시 보잘것없어 영주나 주교를 위협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들 모두 세금을 내서 귀족(기사와 사제)를 부양하는 '일하는 자' 였을 뿐이다. 하지만 중세 성기에 들어서 도시가 발달하고 교통통신망의 복원으로 상업이 부흥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도시에는 시골 장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인력과 기술, 자본이 집중되었고 이에 힘입어 도시에 모인 장인과 직인, 상인들은 자치집단인 길드를 조직해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실력행사에 나선 것이다. 이를 통해 아직 시골에 남아 영주의 영향력 아래 있던 영지민인 농민과 도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상인과 장인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 사이에 계층 분화가 시작된 것. 이들 도시민을 일컫는 표현이 바로 '성 안에 사는 사람들', 즉 부르주아이다.

따라서 중세가 무르익은 성기~근세 무렵에 들어서면서 유럽 사회의 구도는 대량 사공상농 내지는 사상공농 정도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공상/상공, 즉 부르주아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키워나가기 위해 이후 수백년에 걸친 기나긴 정치적 투쟁을 시작한다. 도시를 기반으로 자본과 인력을 축적하고, 자신들의 이익과 입장을 대변해줄 조직(길드)를 세운 이후에는 사(성직자/기사귀족)으로부터 정치권력까지 빼앗아오기 위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한 것. 이들은 자신들의 주도하는 도시지역의 자치권을 얻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봉건적으로 분산되어 있던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를 원했던 절대왕정 시대의 군주들과 연합하여 (전통적인 귀족 지배층을 대체할) 전문 관료들의 주된 공급원이 되기도 하였으며, 중상주의가 바로 이 시기의 정책이다. 또 그 다음 시기에는 민족주의자유주의의 이념을 무기삼아 기존의 신분질서 자체를 '구체제'(앙시앵 레짐)으로 규정하여 무너트리려 시도하는데 이르렀다.

그리고 유럽의 신분구조를 뒤바꾸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흐름은 바로 자본주의의 발달과 산업혁명이다. 봉건제 이래의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토지(농토)가 곧 부의 기반이었기에 장원을 가진 영주가 가장 부유한 자였다. 하지만 경제의 발달로 다량의 화폐를 축적한 이들이 나타나고,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그 화폐 축적의 상한선이 계속 높아지면서 토지 없이도 부유한 상인들이 나타날 수 있게 된 것. 게다가 산업이 점차 발달하면서 농토가 아닌 다른 생산시설이 부의 기반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되었고, 충분한 화폐(자본)을 축적한 이들은 이런 생산시설(공방, 공장)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위에서 설명한 유럽의 구체제(앙시앵 레짐)이 무너진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토지(영지)를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귀족("사" 계급, 즉 기사와 성직자)가 가진 부보다 부르주아, 즉 시민계급인 상인("상" 계급)이 가진 부가 더 커진 것 역시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근현대에 이르면 본래 귀족보다 낮은 성내 거주 시민계층을 지칭하던 '부르주아'가 특권계층을 지칭하는 표현이 될 정도로 전통적 계급구조가 명확히 전복되었으며, 본래 시민 계층의 두 구성원이던 "상"과 "공" 계급 중에서는 "상" 계급의 우세가 두드러졌다, 즉 자본을 축적한 상인들이 자본가가 되고, 그 자본가가 가진 공장에서 장인과 직공을 고용하는 구도가 탄생하였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는 말하자면 근대 후기에 이르면 사상공농, 또는 상사공농의 구도가 자리잡았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

물론 이러한 사회의 변화 과정에서 소외되던 농민들 역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정치세력을 만드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근대~현대 초기까지만 해도 농민은 수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집단이었기에 저러한 사회의 변화 과정에서 도입되고 정착된 '민주주의', 특히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이념을 뜻하는 Agrarianism은 흔히 농본주의로 번역되며, 유럽 내에서도 농본주의를 표방하는 여러 정당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대에도 북유럽을 비롯한 몇몇 유럽 국가들은 Agrarian 성향의 정당이 어느 정도 세력을 떨치고 있는데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유하 시필레 前 총리가 소속된 핀란드 중앙당을 들 수 있다.

3.3. 중동

농민의 지위보다 장인과 상인의 지위가 높았던 사정은 중동도 비슷했으나 한편으로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는 상인들의 파워가 동시대의 기독교 유럽 사회와 비교해서도 훨씬 더 강했고 따라서 사상공농의 구도가 유럽 사회에 비해서 훨씬 빠른 시점에서 자리잡았다. 이슬람이 발흥한 중동 지역은 기후 때문에 농업이 가능한 넓은 평야지대가 없이 분산되어 있어서 선지자 무함마드부터 유목민이자 상인이었고 이슬람 자체가 무함마드가 물과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며 유목민들을 이끌면서 유포한 종교였기 때문에 원래부터 생산을 위해서는 계속 옮겨다녀야 하고 그러면서 외지에서 계속 가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는 만큼 전근대 어느 문화권보다 상인 계급에 대한 배려가 강했다.[19] 이는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유럽 사회보다 한 발 앞서 상인의 높은 지위가 확립되고 상업 활동을 일찍부터 우대하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중세를 이슬람 문명의 최전성기로 이끄는 주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다만 근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상업 활동을 다른 생산 활동보다 우대하는 경향이 유럽 기독교 세계에 대한 경계심과 더불어 오히려 유럽 기술의 수용에 의한 기술 발전과 근대화 과정에 지장을 주기도 했다는 의견도 있다. 관련 뉴스


[1] 장기에 왕을 지키는 말이 士이다.[2] 이런 경향은 동아시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전쟁은 노예가 아닌 시민 계급, 즉 권력자의 일이었다. 전쟁이 나면 권력자들이 사비를 털어서 갑옷을 갖춰입고 지휘관으로 나섰다.[3] 그 시기에는 직종이 그렇게 세분화되어 있지 않았다. 현대의 화학, 문학, 법학 등 여러 학문들은 당시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으며 정치가는 군인인 동시에 학자이기도 했다. 플라톤을 비롯해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던 것도 이런 세분화되지 않은 학문을 배경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4] 조선 후기까지도 이앙법이 남부에서만 머물렀던 것은 기후 문제가 컸다.[5] 식량공급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공업의 발달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는지 보려면 북한을 보면 된다. 아니면 역시 고질적인 쌀 부족에 시달리는 필리핀이나 쌀 소동 시절의 일본도 좋은 사례다.[6] 당장 '빵값'이 이 문제의 일면을 보여준다.[7] 이를 대체하기 위해 국내 은광을 개발하는 대신 조선이 발굴한 대표적인 교역품목이 바로 홍삼이었다.[8] 사실 이 문제는 한국의 농업 형태가 대규모 기업농이 아닌 소규모 자영농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규모의 경제를 만들기 힘든 것도 있다.[9] 정작 친일 양반이 아닌 서민층이 고위 행정 관료가 되는 건 조선보다도 어려워졌으며 이들이 배운 것도 이공계 학문이 아니라 문과 학문이었다.[10] 아직 한국은 부도덕한 직업이 아니어도 돈만 잘 벌거나 워라밸만 좋은 직업은 공부를 잘해서 얻는 직업이 아니면 멸시하는 성향이 없지가 않다. 예컨대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은 2020년대에도 '사회적 시선'을 느끼는 경우가 존재하며 공개적으로 직업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다는 언급도 하기도 한다. #[11] 대기업의 경영인은 제외지만 경영학이 과거 양반들의 주 종목이었던 인문학과 연관성이 깊고 이들이 노동자를 아랫사람처럼 부린다는 점에서는 재벌들도 '사' 혹은 양반에 비유하자는 의견도 있다. 사실 양반, 소농들이 경영하는 농장도 넓은 의미에서 기업에 해당한다.[12] 북한에서는 농촌을 탈출하지 못하면 평생 그 농촌에서 썩어야 한다.[13] 당시에는 수도였던 교토의 외항이었다.[14] 물론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금지령이 내려졌을 정도로 육식 자체를 금기시한 것도 있다.[15] 일본의 신분상승은 돈을 모아 족보나 신분을 사거나 무사를 따라 다니는 사례들이 있었다.[16] 물론 국정교과서가 아니므로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사농공상 제도를 가르치는 교과서도 있다.[17] 어디까지나 한국처럼 문(文)의 성격을 띠었으면서 고위직 코스도 아닌 중·하위직 코스인 7·9급 행정직에 연간 만 단위 이상이 목을 맨 적이 없고 한국의 과거처럼 양반집 자식이 하다못해 면서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경찰공무원이나 소방공무원 등의 무(武)의 성격을 상당히 갖고 있는 공무원 직군은 물론이고 각종 전쟁을 승전으로 이끈 역사 덕에 모병제 국가인 것과 더불어 군인에 대한 대우는 징병제 국가인 한국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좋은데 식사비를 대신 내주는 것 정도는 기본적인 미덕으로 여겨질 정도다. 하지만 미국에서조차 군인이 매력 있는 직업도 아닌 데다가 대침체 이후로 고착화된 양극화와 고용 불안정 때문에 공무원의 인기가 눈에 띄게 올라갔다.[18] 한국에서는 2010년대까지 7급 공무원이 삼성전자&현대자동차보다 훨씬 좋은 직장이란 인식이 강했으며 결혼 상대로도 대기업 직원보다 7급 공무원이 훨씬 더 선호됐는데 대기업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해고당할 수 있지만 공무원은 누구나 무조건 60세 정년 꽉꽉 채우고 퇴직 이후의 연금도 일반 대기업 직원들보다 매우 많이 받기 때문이었다. 공무원은 그 직업을 갖고 있던 것만으로 대접하는 관 우위 문화의 영향도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특히나 관 우위의 시대를 살던 부모 세대의 권유로 공무원을 했다는 증언이 젊은 세대에서 많았다. 그러나 2016년경 민간보다 처우를 열악하게 하는 연금 개혁이 뒤늦게 알려진 데다 7급도 자살로 순직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인터넷 커뮤니티의 발달로 실제 처우를 비교하게 된 계기가 공무원의 인기를 감소시킨 요인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관에 따라서 아직까지 공무원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19] 당초 이슬람 발흥지는 농경사회도 아니고 유목과 상업이 주업인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