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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8 06:03:30

임상옥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28009313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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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colbgcolor=white,#2d2f34>임상옥(林尙沃)
본관 전주 임씨
출생 1779년 (정조 3년)
조선 평안도 의주부
사망 1855년 (철종 6년) (향년 76세)
조선 평안도 의주부
가포(稼圃)
경약(景若)
직업 상인

1. 개요2. 생애3. 평가4. 인삼 불매 동맹 파괴
4.1. 불매 운동 파괴가 가능했던 이유4.2. 이와 관련된 기타 내용
5. 어록6. 여담7. 대중매체에서
7.1. <상도>소설과 드라마, 그리고 현실과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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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중인 출신 거상(巨商). <조선왕조실록>에도 딱 1번이지만 이름이 거론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 생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약(景若), 호는 가포(稼圃). 아버지는 상인 임봉핵(林鳳翮)이다. 평안도 의주부 태생이다.#

어릴 적에 역관이 목표였던 아버지가 거듭된 낙방을 했지만 아버지 아래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하지만 결국 임상옥의 아버지는 역관 시험을 포기하고 당시 만상(灣商)[2]인 대금업자한테 돈을 빌려 금수품을 챙기고 밀무역에 나서서 돈을 벌었으나 비참한 일을 맞이한다.[3] 결국 임상옥의 집은 빚더미에 나앉고 임상옥은 만상의 집에 노비로 갔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만상은 그에게 밀무역을 시키기 시작하면서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영향인지 임상옥은 굉장히 훌륭한 성과를 내며 일을 했고, 만상으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 노비 신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신분이 회복된 이후로 상업에 종사하며 명성을 쌓으며 왕족과도 인맥을 맺으며 사업을 키워나갔다. 1810년 순조 때에는 국경 지방에서 인삼의 무역권을 독점하였고, 1811년에는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의주부가 위험해지자 홍경래군을 제압할 의병 모집 및 군수 물자를 살 자금을 제공했다.

1821년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청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의 인삼 불매 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로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드라마에서는 망한 만상을 이끌고 우여곡절 끝에 따낸 인삼교역권을 활용해 해당 거래로 임상옥이 큰 부를 쌓아 만상이 조선상계의 거두가 되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실제로 이 전부터 의주부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현재도 중국에서 인기 많은 한국 홍삼을 생각해보면 조선 시대는 말할 것도 없었으나 당대의 빈약한 물류, 유통 구조를 이용해 베이징 상인들은 연합하여 임상옥의 인삼을 후려쳐서 사려 했다. 그러나 임상옥은 오히려 협상장에서 가져온 인삼을 아예 태워버리는 방법으로 베이징 상인들의 연합을 깨고 반대로 인삼 가격을 폭리 수준으로 높이고 팔아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그동안 기민 구제 등의 자선 사업으로 천거를 받아 1832년 곽산 군수가 되었고, 1834년 의주부 수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이듬해 구성 부사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물러났다. 이후 빈민 구제와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으며 시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3. 평가

역관 집안 중인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종3품 도호부사까지 출세한 입지전적인 인물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물론 부사를 제수 받은 뒤 얼마 안돼서 논척을 받고 물러났지만, 반상제 체제에서 양인 아래의 계층들이 받던 대우를 생각해보자. 게다가 조선 후기는 돈 많은 사람들이 공명첩을 사서 너도 나도 양반이랍시고 행세하던 시절이다. 이 와중에 정식 천거로 제수된 것이니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신분제 상으로는 중인이었으므로 양반 사회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이는 본인의 정치 인생에서도 큰 컴플렉스였다. 중인이 최고위급으로 출세해도 뒷말이 안나오려면 허준이나 홍순언처럼 잡직으로나마 공무를 수행하다가 종묘사직을 수호한 공로로 면천허통과 책봉을 받은 친위 공신 정도는 되어야 했는데 임상옥은 그냥 민간 상인일 뿐이라 조정 인사행정의 끝판왕인 권도를 통한 관직 제수에도 한계가 있었던 것.

애초부터 중인은 양반 아래의 계급이었고, 결국 양반들 눈에는 중인이 돈 많다고 자신네들처럼 떵떵거리고 사는 꼴이 아니꼬웠던 것이다. 이런 법도 하에서 재산만으로 나라를 뒤흔들 수 있었던 임상옥도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어서 돈을 맘대로 쓸 수도, 사치할 수도 없었다. 야사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벼슬살이를 하던 시절, 선정을 베풀어 인심 좋은 사람으로 유명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암행어사가 들이닥쳐 취조를 받으니 죄목은 다름이 아닌 집을 너무 크게 지어 돈으로 양반(혹은 주상)을 우롱했다라는 요즘 관점에서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죄목이었다. 임상옥이 가족들을 한데 모으고자 집을 그리 지었다고 주장했고, 집 크기도 실제로 법도상에 어긋난다고 하기엔 모호한 수준이었지만 암행어사는 일언반구도 듣지 않고 결국 임상옥은 위리안치(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 죄인의 거처에 높은 울타리를 치고 출입을 금지하는 형벌)되었다. 이렇듯 벼락 출세한 그를 사회가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떠나 그가 후세 경영인들의 귀감이 된 주요한 이유는 역시 단순한 상재를 넘어선 그의 신념과도 같은 사람을 중시하는 장사꾼이라는 것이다. 아래 일화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거상임에도 돈에 크게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철저히 신용 위주의 장사를 행했다. 드라마에서 라이벌로 등장하는 정치수가 매번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임상옥에게 덤탱이를 씌우는데 임상옥은 그걸 알면서도 묵묵히 받아들여 오히려 정치수를 자괴감에 빠지게 만드는 장면이 여러번 나오는데 이것을 비단 극요소라고 보기만도 어려운 것이 얼마되지 않는 그의 기록에 기인하면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설령 사회의 굴레가 아니더라도 그는 돈을 벌었다 하여 자만하거나 자랑하는 일이 일절 없었고, 그의 마지막은 그의 호인 가포(채소밭지기)처럼,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채소밭 하나를 일궈가며 조용히 살다가 숨을 거뒀으니, 공수래 공수거,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상단원 시절 고위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청나라 인삼 무역 독점권을 따냈단 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조선 조정은 1797년 인삼 무역을 공식 승인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자 했는데 임상옥은 다른 만상 5명과 함께 인삼무역을 관장하게 된다. 이때 임상옥은 독점권을 따내기 위해 호조판서 박종경에게 접근했다고 한다. 순조의 외삼촌이자 국가경제를 총괄하는 박종경이 모친상을 당하자 백지어음(일제강점기의 역사가 문일평의 기록에 따르면 4000냥이라고 되어 있다. 오늘날 약 3억원 정도)을 부의금으로 내서 호감을 샀다는 것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엄연한 뇌물공여죄범죄 행위이다. 당시 법에도 뇌물수수는 처벌 대상이었다. 뒷날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였으니 나름대로 본인의 흑역사.[4] 뇌물을 통한 정경유착이니 칭찬할 만한 일은 못되겠지만 통 큰 승부였음은 분명하다.

위에서 언급한 홍경래의 난 당시 흔한 인식과 달리[5] 관군을 도왔다. 임상옥은 그 자신의 배짱과 더불어 마침 당시 아편전쟁 발발 계기가 심어지고 있어서 '조선의 홍삼이 아편 중독을 치유할 수 있는 약이다.'라는 입소문으로 대 중국 인삼 수출의 폭발적 성장기라는 운과 너무 높아진 홍삼가치에 담합하려던 청나라 상인들을 향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 정도의 대범함도 따라주어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엄청난 부를 쌓았다.

임상옥의 집에는 은덩이와 비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밑에서 회계 업무를 보는 서기가 70명이었고 한 번에 손님 700명을 대접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재산 규모는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이렇게 돈이 많아지면 그것을 노리는 사람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어떻게든 임상옥의 재산을 탐내 온갖 트집과 모함이 난무했으며 임상옥의 뒤를 봐주던 박종경도 실각한 상황이었다. 임상옥은 나라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안전을 보장받았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정부군에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의병을 모아 직접 맞선 것이다. 굶주리는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1만냥을 나라에 기부하였고, 몇 년 후에는 물난리 피해 복구를 위해 수천 냥을 내놓았다. 당시 비변사가 임금에게 올린 글에 따르면 평안도에서 재난을 당한 가구의 대부분이 그가 내놓은 의연금에 의지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임금이던 순조는 임상옥의 공을 기릴 방법을 조정에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임상옥에게 곽산군수와 같은 실제 벼슬을 내렸다. 이는 임상옥이 평안도민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그를 통해 민심을 다독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올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후에도 임상옥은 공공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선의에 의한 행동이었는지, 철저히 계산한 행동이었는지는 그만이 알겠지만 그를 지켜준 든든한 보호막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4. 인삼 불매 동맹 파괴

사실상 임상옥이 조선 제일의 거부로 거듭나게 된 동기이자 상인이 천대받던 조선 시대 상인이 남긴 가장 유명한 일화. 소설 및 드라마 상도의 주인공이 바로 임상옥이기도 하며, 후술할 내용을 보면 실화가 아닌 것 처럼 보이겠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실제와 다른 바가 있을 순 있어도 큰 틀에선 확실히 당시 실제로 기록된 실화이다.

당시 조선이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팔 수 있던 물품중 가장 가치가 높은 품목을 뽑으라하면 당연하게도 ''이었다.[6] 현재도 한국의 인삼은 국내나 중국 안가리고 인기있는 약재였으나, 당시엔 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유통 및 물류 운반 구조, 운송 및 보관 기술등으로 인해 조선은 물론이요 청나라에선 보석보다 보기 힘들다 할 정도로 귀한 약재였다. 실제로 인삼 한근의 가격이 평균적으로 은 1근, 비싼 시기엔 금 1근에 달할 정도였으니 말그대로 인삼 하나가 동일한 무게의 은, 금 덩어리나 다름없었던 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조선 조정또한 인삼 교역권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사실상 세수를 벌어들일 목적으로 공식적인 교역권 및 할당량을 통제하였으며, 그 중에서 임상옥은 뒷배 박종경의 지지아래 거의 최대 물량을 받게 된 상인 중에 한 명이었다.

문제는 이들과 주로 거래를 틀던 베이징 상인들이 이런 조선 내부의 교역권 이야기를 듣고선 교역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사실상 담합을 하기로 내부적으로 정해버린 것. 조정에서 교역권과 할당량을 다루는 시점에서 이번 거래부터는 이전까지의 밀무역등과 달리 국가사업과 다를바 없었고, 그런 면에서 보자면 임상옥은 상업의 주체가 아닌 조선과 베이징 상인간의 중개인이란 입지를 취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안그래도 과독점 상태+세금등의 이유로 이전에 비해 오를게 뻔했기에 베이징 상인들이 자신들의 수익을 보존 및 확대하고자 일정금액 이상으론 절대로 안 사겠다며 불매 동맹을 만들었다고 입장표명을 하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들이 제시한 가격은 평소와 비교하면 상당히 헐값이기에 조선 역관들 입장에선 전량을 다 팔아도 본전 건질까 말까한 수준이었음에도 세금이나 사업 유지를 위한 현금 융통을 위해 인삼의 관리 문제로 울며 겨자먹기로 팔 수 밖에 없을 것이며, 베이징 상인들도 이 점을 노린 것.

이런 태도는 제일 많은 물량을 배당받아온 임상옥에게 제일 치명타가 될 일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사신단 일행의 여정에 합류하는 식으로 온 것이라[7] 사신단이 복귀하면 마찬가지로 복귀해야했으므로 제한된 시간 안애 가능한한 많은 상품을 팔아야했던만큼 시간은 기본적으로 베이징 상인들의 편이었다.

그러나 임상옥은 귀국 하루 날까지 이들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며[8] 마지막 날까지 가만히 있다가 귀국 하루 전 인삼과 홍삼을 쌓아놓더니 장작을 준비해 불을 지핀 후, 그 위에 주저 없이 불을 질러버린다. 임상옥이 미쳐서 삼을 태우고 있다는 소식이 베이징에 널리 퍼지자, 이 소식을 들은 베이징 상인들은 당황하여 헐레벌떡 뛰어왔다. 베이징 상인들은 임상옥이 먼저 제시한 금액에 사겠다며 인삼을 끌어내려 했으나, 임상옥은 그들을 나무라고 그들이 끌어낸 인삼을 다시 빼앗아 태워버리려고 했다. 이에 상인들은 값을 얼마든지 쳐주겠다며 애걸복걸했으나, 임상옥은 들은 척도 않고 인삼을 불에 던져넣었다. 이에 베이징 상인들은 애가 탄 나머지 담합도 잊어버린 채 서로 값을 올리기 시작, 결국에는 기존 거래가의 곱절에 이미 타버린 인삼 값까지 치루며 간신히 남은 인삼및 홍삼을 사갈 수 있었다. 이 일로 임상옥의 이름이 국내외에 떨치게 되었다.캡처

드라마에선 선상단들이 책정한 공시가가 근당 105~110냥, 청나라 상인들이 담합하여 주장한 금액이 최소치가 50냥이었으며 최종적으로 (이미 불타 사라진 삼을 포함해)일괄 200냥으로 거래된 것으로, 공시가 기준 2배, 청나라 상인들의 제안 금액의 4배 정도라 상당한 이득이긴 해도, 상업이 아직 홀대받는 조선에서 상업과 관련된 화제로 온 나라가 떠들 정도라 보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는데, 실제 기록에 따르면 중강후시를 통해 기존에 거래되던 액수가 25냥, 청나라 상인들이 귀국일을 명분으로 후려치려던 액수가 10냥이었으나 최종적으로 판매하였던 가격이 250냥이었다. 즉 기존 가격의 10배, 후려친 액수의 25배나 되는 가격으로 막대한 물량을 일괄적으로 팔아치운 셈이라 진짜 나라를 뒤흔들만한 소동이었다.[9]

4.1. 불매 운동 파괴가 가능했던 이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1) 청나라에서 조선 인삼의 인기, (2) 임상옥의 뛰어난 정보력, (3) 임상옥의 대담함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조선 인삼의 희귀성과 인기
    조선의 인삼은 품질이 좋아 청나라에서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다.[10] 청나라에서도 인삼이 양산되고 있었으나, 조선 인삼에 비해 약효와 품질이 천지차이로 떨어져 도라지와 별 다를 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홍삼이 아편 중독을 치유할 수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청나라 상인들 입장에서 조선의 인삼은 단 한 개라도 잃는 것이 아쉬운 수준이었다.

    정조 대부터 인삼 무역은 모두 공무역으로 전환되어 조선과 청나라 간 공식 외교 이벤트때 무역이 이뤄지는 것이라 1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빈도로 거래되었으며, 그 외에 구할 방법은 밀무역뿐이었다. 그러나 밀무역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데다 사기 위험이 매우 컸기에, 정신나간 사람이 아니고서야 얌전히 공무역 시기를 기다려 물량을 배정받고 파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임상옥이 공무역으로 가져왔던 홍삼들은 몇 년치의 물량으로, 임상옥이 이를 모두 태워버리면 임상옥도 참형에 처해지긴 하지만[11], 자신들도 몇 년치 물품을 구할 길이 없어 청나라의 약재 시장이 싸그리 망해버리기 때문이다.

    2. 임상옥의 정보력
    임상옥은 당시 청나라 약재 시장의 사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조선 인삼은 매우 귀한 물건이기 때문에, 인삼을 사러 온 청나라 상인들은 대다수가 빚을 내서 온 사람들이었다. 고객들에게 돈을 먼저 받아 선주문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만일 여기서 필요한 물량을 챙기지 못한다면 청나라 상인들도 빚더미에 나앉는 건 시간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인삼은 단일농지에 반복재배가 어려운 작물로[12], 한번 대량의 홍삼이 의미 없이 소모되면 그 다음까지 몇 년은 걸릴 것이 분명하다. 그 사이 홍삼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청나라 약재상들에게 막대한 손해가 생기는 것은 덤. 임상옥은 이 모든 것을 다분히 계산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정확하게 따져보면 애초에 불매 운동을 한 청나라 상인들의 실책이 컸다. 아무리 본인들이 큰 손이라지만, 쌍방독점 상태에서 유일한 공급처에게 터무니 없는 값에 납품하라며 갑질을 한 것이니, 청나라 상인들 본인들에게도 큰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상옥은 이 점을 토대로 주저없이 목숨을 건 도박수를 던지는 계산이 가능했던 것이고, 그것이 제대로 적중해 잭 팟을 터뜨림과 더불어 상권의 주도권을 확실히 가져올 수 있었다.

    3. 임상옥의 대담함
    눈에 뻔히 보이는 큰 약점이 있으니 별 것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으나, 마지막 날 인삼을 태워버리는 퍼포먼스는 모든 정보를 안다고 해서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담합을 깨기 위해서라지만, 제정신으로 국가 재산인 공무역품을 고의로 불태워버리는 퍼포먼스를 저지를 사람은 얼마 없다.

    물론 저들의 수작대로 싸게 팔면 손해, 그렇다고 안 팔면 더 큰 손해인 상황이긴 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의 선택대로 공무역품을 파손했다가 통하지 않아 빈 손으로 돌아갈 경우에는 사형을 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는 모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 만큼 담대했던 임상옥만이 가능한 행동이었다.

4.2. 이와 관련된 기타 내용

소설 상도에서는 이러한 엄청난 배포를 가지고 인삼을 태울 수 있었던 것은 승려로 지냈던 임상옥이 환속하면서 주지 스님에게 받았던 세 가지 묘책 중 첫 번째 것을 풀어서 死자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사즉생 생즉사의 원리를 생각하며 일을 진행한 것으로 나온다.
민담으로 각색된 버전에서는 이때 사실 인삼이 아니라 청나라 상인들이 값을 후려칠 것을 예상하고 미리 가져간 도라지를 태워 페이크를 쳤다고도 하고, 태운 것이 아니라 바다에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5. 어록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 인중직사형(人中直似衡)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다라는 말은 재화의 바른 사용처를 물의 성질을 빌려 설명한다. 묵자에도 나오듯 비는 고루 내린다. 물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물은 일시적으로 가두어질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소유될 수는 없다. 물을 소유하려고 물을 가두어 두면 그 물은 썩고 만다. 물은 바른 저울과 같이 항상 평평하다.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라는 말은 인간관계에서 정직함과 이에 기반한 신용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상즉인(商卽人)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6. 여담

7. 대중매체에서

7.1. <상도>소설과 드라마, 그리고 현실과의 차이



[1] 2003년에 한국인삼공사가 상상화로 제작한 초상이다.[2] 조선후기 당시 의주부 상인을 만상이라 불렀다. 의주부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을 출입하는 관문이라는 지형적 조건 때문에 중국과 외교적 교류가 전 시기에 걸쳐 이루어져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만상은 의주를 중심으로 공식적인 무역이었던 개시(開市)와 사신이 왕래하는 사이에 이루어졌던 비공식 사무역을 통해 활약한 상인을 말한다. (조선은 개인의 사무역을 금지하였다.) 옛날에는 의주를 용만(龍灣)이라 불렀기 때문에 의주 상인을 만상이라고 불렀다. 만상이 취급한 상품은 중국과 직접 교역을 했던 홍삼과 중국으로부터 구입하여 동래의 왜관(倭館)에 판매했던 생사(生絲) 그리고 금, 은, 소가죽 등 다양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우세한 자본력과 상권을 갖춘 사상 도고(私商都賈)가 성장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한성부의 경강상인(京江商人), 개성부의 송상(松商), 평양부의 유상(柳商), 의주부의 만상, 동래의 내상(萊商)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만상의 중국과의 교역 활동은 일본과의 중계무역으로도 이어졌는데, 만상과 동래를 거점으로 한 내상이 연결되어 국제 교류를 활성화시켰다.[3] 최인호 작가의 '상도'에 따르면, 임상옥이 20세 되던 해에 강물에 빠져 익사했다고도 전해진다.[4] 다만 생각해봐야 할 점은 당시 조선에서의 공무원은 매우 비합리적으로 운영되었는데 실제로 사극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하급 관리인 아전들의 경우, 유교윤리적 청렴함을 강요했지만 나라에서 매달 받아야 할 봉급이 없었다. 다시 말해 월급 한푼 받는 것 없이 직무에 임하라는 식이었다. 때문에 하급 관리들 사이에서는 관례라는 명목의 뇌물이 성행했다. 임상옥에게는 조선 후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뇌물을 쓰지 않고는 인삼교역권과 같은 막대한 이윤이 걸린 사업을 따내기는 불가능 했을 것이며 오히려 국가권력과 결탁하지 않고는 장사를 하기 어려운 시대상황에서 최소한 이러한 상황을 피하려고 노력한 부분을 인정함이 마땅할 것이다.[5] 홍경래의 난에 평안도 주민이 모두 동조한 것은 아니고, 관군측 세력과 홍경래군 사이의 지지를 바꾸는 기회주의적인 사람이나 충의를 중시하는 평안도 출신 '의병'도 있었다. # 임상옥처럼 현 체제 안에서 개혁을 해나갈 수 있다고 믿던 인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6] 생 날것인 인삼만이 아니라 홍삼또한 주력 상품으로 판매했다.[7] 당연하게도 조선 시대 때 혼자서 개인 상단을 운영하여 청나라를 갔다 오는 것은 현재로써는 여행 금지 국가에 개인이 혼자 여행하는 것과 다름 없었기에 무조건 사신사 일행의 뒤를 따라서 출국과 입국을 해야했다.[8]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조정에 내야할 세금, 인삼밭에 들어간 비용, 운반 비용, 홍삼을 만드는데 들어간 비용들을 고려하면 너무나 큰 적자였기에 애가 탄 것으로 나오며 실제로 잘못하면 파산할 위험이니 속내는 마찬가지로 썩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장사치들 사이에서 이를 드러내면 결국 약점을 제 손으로 알려주는 격이니 숨겨왔던 것으로 보인다.[9] 청나라 상인들이 왜 저정도로 역으로 후려쳐지면서도 사갔냐 싶겠지만, 25냥에 사던 시절에 청나라 국내로 운반한 뒤 100냥~200냥으로 판매하며 막대한 시세차익을 누리고 있던만큼 장기적으로 볼때 청나라 상인들 입장에서도 인삼 거래는 놓치면 안되는 황금알 낳는 거위였다. 즉 이들 입장에선 단 한번의 거래에 손해를 감수했다기보단 장기적인 입장까지 고려해서 사과의 의미로 한발 물러서준 셈. 어차피 그 이상으로 후려쳐 자국에 팔았을테니 이들 입장에선 기싸움에서 밀린 것을 빼면 이익이 평소보다 줄었을 뿐 손해는 아니란 점도 있다.[10] 현대 중국에서도 고려삼은 중국산에 비해 훨씬 비싸게 팔리는데, 유통구조가 전근대적이었던 청나라 시대에 조선 인삼은 말할 것도 없이 몹시 귀한 약재였다.[11] 국가의 물건인 공무역품의 훼손이기 때문.[12] 흔히 지력소모가 막심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인삼은 거의 지력(양분)을 소모하지 않는다. 사실은 인삼에 기생하는 특수한 박테리아가 10년 정도 토양에 잔류하기 때문에 반복재배가 불가능할 뿐이다.[13] 의주의 풍속은 사람을 고용하면 품삯은 몇 해가 지나도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다만 5년이나 10년을 겪어보고 싹수가 있어보이면 독립시켜 장사를 해보도록 뒷받침해주었다. 사람이 성실하지 못하면 새경은커녕 맨몸으로 쫓겨나기 십상이어서 주인의 눈에 들기까지는 온갖 고생을 무릅써야 했다. 아무리 궂은 일이라도 싫다 않고 다 해야 하며 걸핏하면 일 잘못한다고 인정사정 없이 꾸짖는 꾸지람도 감수해야 했다. 그 후에야 점주(店主)가 몇 천 냥을 떼주어 이른바 문상(門商)이 되게 해주었다.[14] 드라마 방영인 2002년 기준 돈으로 약 3천 2백 ~ 3백여만원[15] 이 부분은 드라마와 소설이 차이를 보인다. 소설에서는 저 사건 후 공금을 횡령한 죄로 만상에서 쫓겨나 이후 10년간 온갖 고생을 한다. 드라마에서는 그냥 본전으로 들어와 서기로 승직한다.[16] 오늘날의 백지 수표. 적어서 내는 만큼 그 돈을 지불해 주어야 한다.[17] 드라마에서는 순전히 언변만으로 인삼 교역권을 따낸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는 권력가의 뒷받침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하물며 양반이나 일반인도 아니고 일개 상인이니.. 다만 이런 뒷배를 졌지만 사적으로 절대 거래하지는 않았다.[18] MBC 드라마 '상도'에서는 이 장면이 임상옥이 아닌 극중 인물인 채연으로 바뀌어 등장하게 된다.[19] 이 이야기 바로 뒤에 그 허생전이 나온다.[20] 옥로는 사신 파견될 때나 고위 관리임을 표기해야 할 때 달아야 하는 일종의 장신구이다. 대체적으로 관복, 또는 정복 차림으로 갓을 매야 할 때 쓰인다. 사극에서는 대체적으로 문관보다는 무관들이 주로 착용하고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달아야 할 상황에 달지 않으면 당연히 중죄.[21] 사극에서 흔히 보는 국밥 한 상이 아닌 한식 풀세트 한 상이다.[22] 당연한 이야기지만 700인분의 음식을 고작 한 두 사람이 운반했을 리는 없다. 그만큼 부리는 비복 수도 많았다는 이야기.[23] 돼지 먹이로 준 이유는 귀한 홍삼을 먹인 돼지라고 선전해 비싼 값에 팔 수 있기 때문.[24] 물론 국가에 귀속이지 사실상 박종경이 일부 떼먹으려는 수작도 보인다.[25] 헌종 실록 1년에 비변사가 올린 내용을 보면 '임상옥이 얘 저번 심사에서 점수 높게 받은 것도 아닌데 반 년만에 또 승차했어요. 기존 심사 제도 고려해보면 이거 공정하지 못한데 짜르고 딴 사람 보내죠?'하고 대신들이 간하고 이를 헌종이 윤허한다. 본격 줬다 뺏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