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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30 22:38:25

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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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목록

1. 개요

궁호()는 호의 일종으로 왕족들이 사용하는 별칭 중 하나다.

2. 역사

고려시대~조선 초기 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무품입궐빈의 출연으로 부활하였다. 고려시대~조선 초기 외명부 봉작인 궁주宮主가 사용한 봉호가 궁호였으며[1] 공주도 궁호를 사용하였다. 단 왕후의 딸이 사후에 궁주로 추봉된 사례를 보아 모든 공주가 궁주인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에 정도전과 태종 이방원이 정한 내명부의 품계의 궁주와 옹주가 없었음에도 작위로 사용된 것은 외명부와 내명부 작위를 혼동해 사용하던 고려시대 관습이 그대로 이어진 게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고려 초기에는 궁대군宮大君이라고 하여 궁을 소유한 남자 왕족도 있었기에 고려 초기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왕실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궁주 작위의 폐지로 오랫동안 사라졌으나, 효장세자의 아내 효순왕후 시절 일시적으로 논의되었다. 효순왕후는 효장세자 사후에도 여전히 빈궁이라 불렸으나 사도세자가 태어나자 수빈 한씨粹嬪 韓氏와 덕빈 윤씨德嬪 尹氏의 전례를 따를 것인지 다른 방식을 사용할지 논의되었을 적 왕세자빈은 내명부가 아니기에 빈궁에 궁호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었다. 결국 전례를 따라 현빈 조씨賢嬪 趙氏와 혜빈 홍씨惠嬪 洪氏를 사용했으나 정조가 즉위하자 왕의 생모지만 법적으로 숙모가 되어 왕대비가 아니라 평생 왕세자빈 자리에 머물러야 했던 정조가 자궁慈宮의 존호를 줄 때 지어주었다. 이후 무품입궐빈의 출연으로 이들에게도 궁호가 주어지게 된다.

이와 별개로 조선시대 왕족을 섬기는 사당의 이름이 궁인 경우도 존재했는데, 이는 궁호보다 신궁神宮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3. 목록

궁주(고려)는 고려의 궁원 문서 참조.

궁주(조선)
궁호
왕실 사당
[1]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와 달리 왕실 여인이 외명부와 내명부 작위를 혼동해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