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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 제14대 변경백 스폴레토 제48, 50대 공작 이탈리아 부왕 Matilde | 마틸다 | ||
성명 | 한국어 | 마틸다 |
이탈리아어 | Matilde | |
영어 | Matilda | |
출생 | 1046년 | |
사망 | 1115년 7월 24일 (향년 68~69세) | |
재위 기간 | 1055년 ~ 1115년 (토스카나 변경백) 1055년 ~ 1082년, 1086년 ~ 1093년 (스폴레토 공작) 1111년 ~ 1115년 (이탈리아 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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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스카나 변경주의 제14대 변경백, 스폴레토 공국 제48, 50대 공작, 이탈리아 부왕. 어린 시절 황제에게 가문을 말살당했으나 홀로 살아남아 그 아들에게 복수하고 끝내 천수를 누린 뒤 바티칸에 안장된 중세 이탈리아 최고의 여걸로 손꼽히는 인물이다.2. 행적
2.1. 카노사 가문
마틸다가 속한 카노사(Canossa) 가문의 기원은 10세기 초반 루카 백작령 출신의 하급 귀족 시지프레드(Sigifred)였다. 그는 파르마 주변의 일부 토지를 구입한 뒤 아펜니노 산기슭에 영향력을 확대했다. 뒤를 이어 가주가 된 아달베르트 아토(Adalbert Atto)는 로타르 2세의 가신이자 레지오의 주교인 아데랄드의 근위병으로 근무하다가 이탈리아 국왕 베렝가리오 2세가 가르다 성에 가둔 아들라에데를 구출해 카노사 성에 이송시켰다. 그 후 베렝가리오 2세를 물리치고 96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이탈리아 국왕이 된 오토 1세는 아들라에데와 결혼한 뒤 그에게 레지오 에밀리아와 모데나 백작령을 수여했다.그 후 카노사 가문은 레지오 에밀리아의 남서쪽 산기슭에 카노사 성채를 건설한 뒤 영향력을 급격하게 확대했다. 그들은 특정한 영지에 얽매이지 않고 토지 구입이나 상업 활동을 통해 자산을 창출했다. 특히 영주, 교회 등 지역 권력자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데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기에, 여러 영주 및 교회 성직자들의 호의를 사 그들로부터 특혜를 얻어냈다. 여기에 여러 유력 가문과 결혼 동맹을 맺어 권력을 강화했으며, 때로는 무력을 동원해 정적들을 제거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는 식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그 결과 아달베르트 아토의 아들 테달트는 만토바, 브레시아, 모데나, 페라라, 레지오의 백작을 겸임하며 북이탈리아의 핵심 귀족으로 거듭났다.
1007년 테달트의 뒤를 이어 가주가 된 보니파초 4세 대에 카노사 가문의 위상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와 콘라트 2세의 편에 서서 하인리히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든 영주들을 앞장서서 제압했다. 그 결과 1027년 콘라트 2세로부터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토스카나 변경주의 변경백에 선임되었다. 여기에 1043년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백국을 수여받았으며, 파르마와 피아첸차에서 주요 영지를 수여받았다. 그리하여 카노사 가문은 북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대한 귀족가가 되었다.
보니파초 4세는 베르가모 궁전백 기젤베르트 2세의 딸 리칠데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얻지 못했다. 1034년에서 1037년 사이에 리칠데가 사망한 뒤, 그는 상로렌 공작이자 바르 변경백 프리드리히 2세의 딸이며 콘라트 2세의 황후인 슈바벤의 기젤라의 조카 베아트릭스와 재혼했다. 그들은 페데리코, 베아트리체, 마틸다를 낳았는데, 이중 마틸다가 이 문서의 주인공이다.
2.2. 초년기
마틸다는 1046년경에 출생했다. 이탈리아 학자들은 수 세기 동안 그녀의 출생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17세기 루카 시 의사이자 학자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오렌티니는 그녀가 루카 시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했고, 레지오 베네딕토회 수도사 카밀로 아파로시는 카노사가 그녀의 출생지라고 주장했다. 반면 리노 리오넬로 기라르디니와 파올로 골리넬리는 보니파초 4세가 광활한 영지의 중심지로 삼은 만토바에서 출생했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여러 장소가 출생지로 거론되지만, 명확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에 현재까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마틸다의 유년기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북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집안의 막내딸인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다. 그러나 1052년 5월 6일 보니파초 4세가 산 마르티노 또는 스핀다 숲에서 사냥하던 중 암살자들의 습격으로 피살되면서, 카노사 가문의 운명은 위태로워졌다. 일부 학자들은 이 암살자들이 신하로서 지나친 권세를 누리는 보니파초 4세를 경계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의 사주를 받았다고 추정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가 카노사 가문을 껄끄럽게 여긴 것은 분명하다.
보니파초 4세 사후 장남 페데리코가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았고 어머니 베아트릭스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하인리히 3세는 페데리코의 직위 승계 인정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영지를 몰수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황제의 의도를 눈치챈 베아트릭스는 1054년 중반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상 로렌 공국을 빼앗긴 고드프리트 3세와 재혼했다. 하인리히 3세는 베아트릭스와 고드프리트의 결혼은 자신의 허락없이 이뤄졌으니 유효하지 않으며, 황위에 도전하려는 음모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1055년, 하인리히 3세는 친히 피렌체로 진격해 베아트릭스와 페데리코, 그리고 마틸다를 체포하고 독일의 보드펠트로 끌고 갔으며, 카노사 가문이 소유했던 광활한 영지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페데리코는 독일로 끌려가던 중 1055년 7월에 병사했다.
베아트릭스의 남편 고드프리트 3세가 황제를 피해 로렌으로 달아난 뒤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하인리히 3세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집결시키다가 1056년 10월 5일 보드펠트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뒤이어 6살된 아들 하인리히 4세가 새 황제에 등극했고, 아그네스 황후가 섭정을 맡았다. 아그네스는 고드프리트 3세가 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고드프리트와 베아트릭스의 결혼을 승인하고 베아트릭스와 마틸다를 석방했다. 1057년 토스카나에 돌아온 마틸다는 여 변경백에 취임했고 어머니 베아트릭스와 계부 고드프리트 3세가 섭정을 맡았다.
2.3. 첫번째 남편, '꼽추' 고드프리트
베아트릭스와 고드프리트 3세는 자신들의 자식들을 서로 결혼시켜서 로렌 가문과 카노사 가문의 동맹을 강화하기로 했다. 1069년, 마틸다는 계부 고드프리트 3세가 전처 도다[1]와의 사이에서 낳은 '꼽추' 고드프리트와 결혼했다. 그 직후 고드프리트 3세가 사망하면서, 마틸다의 남편 고드프리트가 고드프리트 4세로서 공작에 올랐다. 이후 마틸다는 로렌으로 가서 남편과 함께 살았고, 토스카나 일대는 어머니 손에 맡겨졌다. 마틸다는 1070년에 임신해 1071년 1월 초에 딸을 낳고 어머니의 이름을 따 베아트리체로 지었지만, 아기는 태어난 지 몇 주 만인 1071년 1월 29일에 사망했다.그 후 남편과 심한 불화를 겪은 마틸다는 1072년 1월 19일 로렌에서 탈출하여 만토바에 머물고 있던 어머니에게 달아난 뒤 안드레아스 수도원에 은거했다. 1072년 고드프리트 4세가 알프스를 넘어 토스카나의 여러 곳을 방문하며 마틸다의 남편으로서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당시 루카에 머물고 있던 마틸다가 만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재회에 실패했다. 1073년 여름 고드프리트가 로렌으로 돌아간 뒤, 마틸다는 교황청에 결혼 무효를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친 교황 세력인 로렌 공국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간의 서임권 분쟁이 발발했을 때, 마틸다는 교황을 지지한 반면 고드프리트 4세는 황제 편에 섰다. 그는 하인리히 4세의 작센 원정에 참여해 작센 공작 마그누스와 맞서 싸웠으며, 웨스트 프리슬란트의 백작 디트리히 5세를 추방했다. 그런데 1076년 2월 27일, 고드프리트 4세는 블라르딩겐에서 암살당했다. 암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마틸다에게 적대적인 독일측 연대기에서는 마틸다가 남편의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근거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고드프리트 4세는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기에, 원칙대로라면 마틸다가 로렌 공국을 상속받아야 했다. 그러나 고드프리트는 암살되기 전에 조카 고드프루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영지를 상속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하인리히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어린 아들 콘라트를 로렌 공작에 세우고 나무르 백작 아달베르트 3세를 섭정으로 삼았다. 고드프루아는 108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2.4. 그레고리오 7세의 동지
마틸다는 토스카나로 돌아온 뒤 수녀원에 은거하면서 힐데브란트 추기경과 친분을 맺었다. 힐데브란트 추기경은 1073년 4월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 등극한 뒤 교회 개혁을 밀어붙였고, 베아트릭스와 마틸다 모녀는 교황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075년 12월 하인리히 4세가 로마에 무장 사절을 보내 그레고리오 7세를 체포했지만, 마틸다 모녀를 비롯한 교황 충성파가 교황을 구출했다. 1076년 1월 24일 보름스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하인리히 4세는 마인츠의 지그프리트 대주교, 트리어의 우도 대주교, 그리고 24명의 다른 주교들 앞에서 "교황이 낯선 여성과 탁자를 공유하고 필요 이상으로 친밀하게 수용하고 있다", "교황이 여자를 원로원에 들여보냈다"고 비난했다. 이는 베아트릭스와 마틸다 모녀가 그레고리오 7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겨냥한 공격이었다.그레고리오 7세는 이에 맞서 1076년 2월 15일에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독일 제후들이 황제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를 풀어주고 기독교인들이 하인리히 4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금지했다. 이렇듯 상황이 급격하게 돌아가던 1076년 4월 18일 베아트릭스가 사망하면서, 마틸다는 토스카나 백국의 단독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 해 9월,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뒤 그레고리오 7세에게 다가오는 겨울에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이탈리아를 떠나길 원치 않았지만 마틸다의 적극적인 권유를 따르기로 하고, 그해 12월에 마틸다와 함께 회의가 열릴 예정인 트레부르(Trebur)로 출발했다.
하인리히 4세(가운데 인물)가 클뤼니 수도원장 우고(St. Hugh the Great. 1024-1109)(왼쪽 인물)와 마틸다(오른쪽 인물)에게 간청하는 장면을 묘사한 12세기의 유명한 삽화이다. 하단에 라틴어로 "Rex rogat abbatem / Mathildim supplicat atque"(국왕이 아빠스에게 부탁하다. 또한 마틸다에게 탄원하다)라고 적혀 있다.
1077년 1월 초, 하인리히 4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롬바르디아로 향했다. 그레고리오 7세와 마틸다는 하인리히 4세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틸다의 본거지인 카노사 성채로 경로를 변경했다. 1077년 1월 25일 카노사 성 앞에 나타난 하인리히 4세는 강추위를 무릅쓰고 참회복을 입고 맨발로 선 채 성문이 열릴 때까지 대기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가 자신을 잡으려고 술수를 부리는 것이라 여겨 면담을 거부했지만, 하인리히 4세는 계속 성문 앞에서 무릎꿇은 채 3일을 버텼다. 이에 마틸다는 성직자들과 함께 하인리히 4세를 만나보라고 권고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마침내 황제를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 앞에 십자가 모양으로 누워 복종의 의미를 표현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파문을 철회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다.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오 7세의 면담을 주선한 후, 마틸다는 광활한 영지를 순회하며 통치를 행사하고 여러 교구에 기부했다. 1077년 후반에는 거주지를 로마로 옮기고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 정책을 지원했다. 한편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든 귀족들은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파문 직후엔 루돌프를 지지했지만, 파문을 취소한 후에는 루돌프의 지지를 철회하고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다 1080년 3월 로마 사순절 행사에서 "하인리히 황제가 약속을 어기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파문을 선고했다. 그러나 독일 주교와 제후들은 교황이 언행을 아무렇지 않게 바꾸고 독선적으로 행동한다고 여겨 분개했다.
1080년 6월 25일 브릭센에 모인 7명의 독일 주교, 1명의 부르고뉴 주교, 그리고 20명의 이탈리아 주교들은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고 귀베르토를 교황 클레멘스 3세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이때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가 마틸다와 간통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마틸다는 이에 대항하여 1080년 9월 페라라에서 귀족들을 소집한 뒤 그레고리오 7세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하인리히 4세에 맞서 정의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1080년 10월, 그레고리오 7세와 마틸다의 군대는 볼타 만토바나에서 친 황제파 군대에게 패배했다. 이후 많은 토스카나 귀족들이 하인리히 4세에게 귀순했고, 마틸다는 카노사 성으로 피신했다.
1081년 봄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한 하인리히 4세는 마틸다에 대한 충성을 접고 자신 편에 선 루카 시에게 포괄적인 특권을 부여했고, 마틸다의 모든 영지와 재산을 몰수한다고 선포했다. 이후 제국군은 로마로 내려가 도시를 2년간 포위 공격한 끝에 1084년 함락시켰고, 그레고리오 7세는 로마를 탈출하여 남부 이탈리아로 피신했다. 한편 마틸다 역시 카노사 성채를 압박하는 제국군의 공세에 직면했고, 1082년 스폴레토 귀족 라니에리 2세가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스폴레토 공작으로서 독립하는 등 대다수 가신들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럼에도 마틸다는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고 카노사 성 근처에 지어진 아폴로니우스 수도원과 노난툴라 수도원에 보관된 귀금속들을 모조리 팔아치워서 얻은 수익금을 그레고리오 7세에게 보냈다.
1084년 5월,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백작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군이 그레고리오 7세를 복위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로마로 진군해 하인리히 4세의 군대를 격퇴하고 로마를 공략했다. 이로 인해 제국군의 기세가 꺾이자, 마틸다는 이 때를 틈타 카노사 성채에서 출진해 반격에 착수했다. 그 해 여름, 마틸다는 모데나 북동쪽의 소르바라에서 하인리히 4세의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파르마 주교 에버하르트를 사로잡았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독일로 돌아갔고, 마틸다와 추종자들은 모데나, 레지오, 피스톨라, 스폴레토를 탈환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는 로베르 기스카르에 의해 살레르노에 유폐된 뒤 1085년 5월 25일에 사망했다.
2.5. 두번째 남편, 바이에른의 벨프 5세
1085년 7월,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1세의 아들인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가 마틸다에게 청혼했다.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그녀는 하인리히 4세와 대적할 노르만 병사들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항전하기로 했다. 1087년 교황 빅토르 3세가 사망한 뒤 추기경단이 오스티아 주교 오도를 교황 우르바노 2세로 선출하도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우르바노 2세와 굳건한 동맹을 맺었고, 1089년 우르바노 2세의 제안에 따라 바이에른 공자 벨프 5세와 결혼했다. 프라하 주교 코스마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마틸다는 벨프 5세에게 다음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여성의 가벼움이나 무모함 때문이 아니라, 제 왕국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이 편지를 보냅니다. 이에 동의하면, 당신은 저 자신과 롬바르디아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게 됩니다. 당신이 저에게 사랑을 얻는다면, 당신은 많은 도시와 많은 성들과 고귀한 궁전과 많은 금과 은을 얻을 것이며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것입니다. 제가 여자답게 굴지 않는다고 책망하지 마십시오. 남자와 여자 모두 합법적인 결합을 원하는 법이니, 불가분의 결혼이 추구되는 한 남자와 여자 중 누가 사랑의 첫 번째 줄을 끊을지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곧 뵈기를 바랍니다.
우르바노 2세와 마틸다는 벨프 5세가 군대를 이끌고 오기를 기대했지만, 황제와 대놓고 맞설 생각이 없었던 벨프 5세는 1089년 중반에 수십 명의 수행원들만 이끌고 찾아왔다. 마틸다는 수천 명의 군대를 롬바르디아로 파견해 그를 영예롭게 환영하고 120일간의 결혼 축제를 거행했다. 프라하의 주교 코스마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벨프 5세는 결혼식 후 이틀 밤 동안 주술을 두려워해 침대 공유를 거부했다. 셋째 날 마틸다가 탁자 위에 알몸으로 나타나 "모든 것이 당신 앞에 있으며 숨겨진 악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자가 멍하니 서 있기만 하자, 마틸다는 그를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다음과 같이 조롱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가라, 괴물아! 너는 우리의 왕국을 가질 자격이 없다. 이 비열한 것, 벌레나 썩은 해초보다 더 사악한 것! 내가 너를 다시 보지 못하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마틸다를 "간악한 마녀"로 묘사하려는 독일측 연대기의 왜곡이겠지만, 벨프 5세와 마틸다 부부간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것만은 분명했다. 1095년 봄 부부는 자식을 두지 못한 채 헤어졌다. 두 사람의 결혼이 무효로 선언되는 일은 없었지만, 마틸다 측 기록에서 벨프 5세의 이름은 두 번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2.6. 하인리히 4세와의 대결
1090년, 하인리히 4세는 군대를 소집한 뒤 이탈리아로 진군해 만토바를 포위했다. 이후 11개월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1091년 4월 만토바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황제의 군대는 1091년 여름에 브레시아, 베로나를 포함한 포 강 북쪽의 대다수 영역을 장악했으며, 1092년에 모데나와 레지오 등지를 공략했다. 이에 마틸다는 1092년 늦여름 키르피네티에서 아직까지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과 앞으로 어찌할지를 상의했다. 대다수는 황제와 평화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마롤라의 은둔자 요한네스만이 계속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틸다는 요한네스의 주장에 동의하며 추종자들에게 성전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고했다.1092년 가을 하인리히 4세의 군대가 카노사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마틸다가 굳건히 버텨서 공략이 지지부진한 데다 겨울이 찾아오면서 식량 보급에 애를 먹고 전염병이 나돌자, 병사들이 대거 탈영해버렸다. 결국 카노사 공략을 포기하고 베로나로 철수한 황제는 독일로 돌아가서 군대를 다시 일으키려 했지만, 남부 독일 공작들이 그를 상대로 반기를 들어 알프스 계곡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그러지도 못했다. 1093년 봄 제위 계승자인 콘라트가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크레모나, 로디, 밀라노, 피아첸차의 귀족들이 마틸다의 사주를 받고 반기를 들었다. 이리하여 하인리히 4세는 베로나 일대에서 고립무원의 상태로 전락했다. 다만 아드리아해 연안 지대에서 변경백을 자칭하던 베르너 2세가 하인리히 4세 지지를 천명하며 스폴레토를 장악한 뒤 하인리히 4세로부터 스폴레토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1094년, 하인리히 4세의 두번째 아내인 키예프의 에우프락시아가 산 제노 수도원 감옥에서 탈출했다가 베로나에서 하인리히 4세가 급파한 추격대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마틸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그녀는 카노사 성으로 피신했다. 1095년 3월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마틸다의 보호 아래 피아첸차 공의회를 소집했다. 에우프락시아는 이 공의회에 참석해 하인리히 4세가 자신더러 난교에 참여하도록 강요했으며 악마의 미사를 드리려 했다고 고발했다. 이로 인해 하인리히 4세의 위신은 실추되었다.
그러다가 마틸다가 벨프 5세와 헤어진 뒤 벨프 5세의 아버지인 바이에른 공작 벨프 4세가 하인리히 4세의 편을 들기로 하면서, 하인리히 4세는 마침내 1097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두 번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않았고, 우르바노 2세는 마틸다의 지원에 힘입어 클레멘스 3세를 몰아내고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성 베드로의 여성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았고, Marchio(변경백) 작위를 공공연히 사용했다.
2.7. 이후의 행적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무슬림의 지배로부터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다. 마틸다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도시와 마을들을 순회하며 교황의 뜻에 따라 십자군에 참여해달라고 설득했다. 또한 롬바르디아, 레지오 에밀리아, 토스카나의 교회 및 사회 기관에 대한 기부를 대대적으로 벌임으로써 하인리히 4세와의 전쟁 동안 피폐해진 수도원 및 마을 재건에 힘을 쏟았다. 특히 1083년, 1100년, 1103년에 피사에 대규모 기부금을 보내 피사 대성당이 재건축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을 돌보기 위해 수많은 병원을 설립하고 홍보했다. 그러는 한편, 루카, 파비아, 피사 등지의 독립 열기를 가라앉힐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들이 자신에게 명목상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는 것을 허용했다.마틸다는 40여 년간 통치를 행사하면서 정기적으로 박식한 학자들의 조언을 구했다. 그녀의 치세에 반포된 법령에는 42명의 법관, 29명의 재판관, 8명의 법학 교사, 42명의 변호사의 이름이 실렸다. 피렌체 문서 보관소에는 그녀의 이름으로 반포된 30개의 사법 회의 기록이 보관되고 있다. 이렇듯 박식한 학자들을 중용하고 그들의 조언을 따라 법령을 시행하면서 사법 행정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또한 마틸다는 사계절 내내 자신의 영지를 여행하며 순회 법정을 벌임으로써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자 노력했다.
1111년 로마에 들러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하인리히 5세는 서임권 문제에 대한 논쟁이 또다시 불거지자 교황 파스칼 2세 및 추기경 몇 명을 사로잡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틸다는 자신과 가까운 두 명의 추기경인 파르마의 베르나르도와 레지오의 본시뇨레의 석방을 요청했고 하인리히 5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탈다는 교황과 다른 추기경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 후 로마를 떠나 독일로 돌아가던 하인리히 5세는 1111년 5월 6~11일에 비아넬로 성에서 마틸다와 만나서 리구리아의 통치를 양도하고 이탈리아 부왕으로 선임했다.
마틸다는 황제를 접견한 뒤 프리냐노 술라 세키아(Prignano sulla Secchia) 인근의 몬테바라조네(Montebaranzone)로 은퇴했다. 1114년 여름 만토바에서 그녀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만토바인들은 토스카나 변경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만토바에서 5km 떨어진 성채이자 그녀의 '혐오스러운 권력'으로 간주된 리발타 카스텔( Rivalta Castle)을 불태웠다. 이 소식을 접한 마틸다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관료를 보내 보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안심하라고 알렸고, 1115년 4월 만토바에 있는 산 미켈레 교회에 파센고 법원의 권리와 수입을 넘겼다.
마틸다는 두 차례 결혼했으나 전부 실패로 끝났고, 이로 인해 후계자를 두지 못했다. 이로 인해 누가 카노사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을지를 놓고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주요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구이도 구에라( Guido Guerra)를 양자로 들였다는 설을 제기하지만, 1099년 11월 12일 브레셀로 수도원 문서에 마틸다의 양아들( adoptivus filius domine comitisse Matilde)로 언급된 것을 제외하면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교황청 자료에 따르면, 마틸다는 1102년 11월 17일 성 크리소고노 성당의 베르나르도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자신이 죽으면 모든 재산을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뜻에 따라" 교황청에 기증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담긴 문서가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정말로 그랬는지는 불분명하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측 기록에는 마틸다가 1111년에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5세와 접견한 뒤 황제를 유일한 상속인으로 삼았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렇듯 후계 구도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마틸다는 1115년 7월 24일 밤 69세의 나이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에 걸려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처음에 폴리로네에 있는 산 베네데토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1633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로마로 옮겨져 산탄젤로 성에 이장되었고, 1645년에 바티칸으로 옮겨져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2], 성 페트로닐라, 키프로스의 샤를로트 여왕, 아그네시아 콜로나 카에타니(Agnesina Colonna Caetani) 등 5명의 여인과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녀가 이렇게 숨을 거두면서 10~12세기 북이탈리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카노사 가문은 단절되었고,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은 그녀가 남긴 막대한 영지의 소유권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