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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0 01:34:07

람베르토

람베르토 2세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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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비도 왕조 제2대 황제
람베르토
Lamberto
파일:Four_kings_of_Italy.jpg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이름 라틴어: Lambertus Spoletensis
이탈리아어: Lamberto II di Spoleto
스폴레토의 람베르토 2세
출생 880년
사망 898년 10월 15일 (향년 18세)
마렌고
재위기간 신성 로마 황제
891년 2월 21일 ~ 898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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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아버지 귀도 3세]
어머니 아젤트루데
묘지 피아첸차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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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폴레토 공국공작, 중세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 신성 로마 황제.

스폴레토의 공작으로서는 람베르토 2세, 이탈리아의 국왕과 신성 로마 황제로서는 람베르토 1세이다.

2. 생애

귀도 3세의 아들로, 891년 파비아에서 이탈리아 국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나서 892년 귀도 3세가 교황 포르모소를 압박하여 람베르토를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시켰다. 포르모소는 귀도 3세를 적대시했고, 결국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를 끌어들여 귀도 3세를 몰아냈다. 이후 아르눌프가 894년 이탈리아 왕위에 올랐다. 귀도 3세는 후퇴하던 도중 급사하였고, 아르눌프는 전염병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철수하였다.

이 일이 있은 뒤로 람베르토는 교황 포르모소로부터 신성 로마 제위를 인정받기 위해 자기 어머니 아젤트루데와 함께 로마를 방문하였는데, 이미 아르눌프의 편에 선 포르모소는 당연히 그를 부정하였고, 이에 화가 난 람베르토는 포르모소를 감금했다. 그리고 로마를 점거하여 성문을 단단히 막아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르눌프는 다시 이탈리아로 진군해 로마를 공략하고 포르모소를 구출하였다. 람베르토와 아젤트루데는 로마에서 내쫓겼고 896년 교황 포르모소는 아르눌프를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하였다. 아르눌프는 아젤트루데를 쫓으려다 병에 걸렸고, 서자 라톨도를 이탈리아의 부왕(副王)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를 대신 통치하게 한 뒤 동프랑크로 돌아갔다.

아르눌프가 이탈리아에서 떠나고, 교황 포르모소도 죽자 람베르토는 베렝가리오 1세와 함께 다시 이탈리아에서 실권을 잡기 시작했다. 람베르토와 베렝가리오 1세는 아르눌프가 임명한 관리들을 모조리 학살하였고, 부왕 라톨도는 동프랑크로 도망치게 되었다. 새 교황으로 즉위한 스테파노 6세는 처음에 아르눌프를 지지했지만 결국 람베르토를 지원하게 되었다. 베렝가리오 1세는 아다강과 포강 사이 일대를 맡고, 람베르토는 나머지를 맡아 분할하여 통치하기로 하고, 베르가모는 공동으로 통치했다. 람베르토는 또한 베렝가리오 1세의 딸 기셀라와 결혼하기로 하여 정략결혼 동맹을 시도하였다.
파일:Jean_Paul_Laurens_Le_Pape_Formose_et_Etienne_VII_1870.jpg
장 파울 라운렌스 作, 1870년

람베르토는 어머니 아젤트루데와 함께 다시 로마를 방문하였다. 전임 교황 포르모소에게 쌓인 것이 많았던 두 사람은 복수를 준비하였다. 람베르토의 후원으로 교황 자리에 오른 스테파노 6세는 람베르토의 복수극을 실행해줘야 했는데, 포르모소의 시신은 석관에서 꺼내져 피고석에 앉혀졌고, 그가 행한 모든 사제 서품을 무효로 만들었으며, 그가 교황이 되기 이전 치죄받은 모든 죄목이 재차 유죄로 판결되었다. 판결에 따라 포르모소의 시체에서 교황의 법복을 벗겼고, 오른손 손가락 세 개가 베어진 후 테베레강에 버려졌다. 시체 시노드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평민이 스테파노 6세와 람베르토가 교황의 시신을 모욕했다며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스테파노 6세는 이 반란으로 퇴위당하였다.

람베르토는 라벤나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하여 자기를 적법한 신성 로마 황제로 인정하고,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국왕 즉위를 무효로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새로 즉위한 교황 요한 9세는 제국의회에서 람베르토의 뜻을 거스르며 포르모소의 신원을 회복시켰고, 시체 시노드의 판결을 뒤집었다. 또한 제국의회의 성직자들은 스테파노 6세의 재판과 성직자 회의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그 교령들을 파기했으며, 스테파노 6세에게 폐위당한 성직자들을 복권시켰다.

교황을 부관참시하는 괴팍한 성격과는 별개로 람베르토는 정책과 제도 제정에 힘썼다. 람베르토는 아버지 귀도 3세의 새로운 프랑크 왕국(Renovatio Francorum)이라는 정책과 선대 프랑크 국왕들의 법령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람베르토는 로타리우스 1세의 <로마 헌장>(Constitutio Romana)도 부활시켰는데, 교황 요한 9세는 <로마 헌장>을 다시 승인하여 교황 선출 때 황제의 사절을 의무적으로 참석하도록 만듦으로써 황제가 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했다. 람베르토는 아버지 귀도 3세의 정책을 명문화한 <우티넨시스 로마법>(Lex Romana Utinensis)을 제정하였다.

람베르토는 사냥을 즐기던 도중 베렝가리오 1세가 협정을 파기하고 수도 파비아를 점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를 벌여 그를 포로로 붙잡았다. 하지만 길에서 돌아오던 중 람베르토는 누군가에게 암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