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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9 10:02:01

지수신

백제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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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5d2,#ccc4a8> 연대 부흥운동
660 ~ 663년
백제부흥운동 ( 도침 / 귀실복신 / 부여풍 / 흑치상지 & 사타상여 / 지수신 )
664년
사비산성 반란
822년
김헌창의 난*
900 ~ 936년
후백제 ( 견훤 )
1237년
이연년 형제의 난
*백제부흥을 표방하진 않았으나 백제 유민들의 분리주의를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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遲受信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3. 기타4. 창작물에서 등장

1. 개요

백제 말기 ~ 백제부흥운동 시기의 인물.

2. 생애

660년 백제멸망 후 백제부흥운동은 한때 당군과 신라군을 위협하고 백제 복국을 이루는듯 했으나 지도층의 내분과 투항, 패전 등으로 인해 663년에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백강구 전투에서 백제-왜국 연합군은 나당 연합군에게 대패하면서 전세 역전의 기회도 잃게 되었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 부흥군의 주요성인 주류성, 두량윤성 등 주요 성들이 함락시켰으나, 임존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지수신은 음력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신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11월 4일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었지만, 신라군이 임존성 외의 백제부흥군 지역을 죄다 점령했기 때문에 임존성은 고립되었다. 결국 임존성은 당군에 투항한 흑치상지, 사타상여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고[1],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한다.

고구려 망명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2][3]

3. 기타

663년 9월 백촌강 전투 패배로 백제의 주요성이 투항하거나 항복한 것을 볼 때, 지수신은 최소 2달 동안 농성한 것으로 보인다. 임존성 함락 이후 백제부흥운동도 끝나버렸으니 마지막까지 저항한 백제부흥군 장수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한국사 교육에서는 왜인지 거의 찬밥 신세다. 흑치상지가 말년의 행보에도 불구하고 백제부흥운동을 다룰 때 반드시 언급되는 것에 반해[4], 지수신은 웬만큼 파고들지 않으면 이름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임존성 함락 이후, 백제부흥운동은 이듬해인 664년 4월 사비성에서 일어난 백제 유민 봉기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임존성 함락으로 맥이 끊겼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당나라부여융을 내세워 웅진도독부를 통해 백제를 당의 괴뢰국으로 부활시켜 신라를 견제하려 했으나 나당전쟁 초반인 672년 이후 당도 백제전역에서 광탈한다(...)

훗날 조선 조의 남효온, 안정복에게 절개를 지킨 충신으로 조명받았지만 크게 알려지지는 못했다. 여담으로 부여풍과 그가 대부분의 백제 유민들과 달리 고구려로 도피한 점, 백제부흥운동 시기에 고구려가 신라 변경을 친 것을 들어 고구려-백제부흥군 간의 연계로 보는 설도 있다.

4. 창작물에서 등장



[1]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의 투항 시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인원 등의 대사로 보아 백강 전투 이후 백제부흥군이 기울자 당으로 투항했던 걸로 보인다.[2] 똑같이 고구려로 투항한 부여풍은 그래도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생포되어서 당으로 압송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수신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유력한 가설은 고구려 멸망 때 싸우다 전사했거나 아니면 자결했다던가, 아니면 그 사이에 죽었거나, 다시 도망쳐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은둔해버리거나 식으로 4가지 중 하나로 추정된다. 고구려도 망했으니 그다지 좋은 결말은 아니었을듯 하나 애초에 고대 인물들 기록이 너무 부족한 관계로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3] 고구려로 도망치는 것도 어려운게, 당시 한강 유역과 아산만 지역을 신라가 장악하고 있었고 웅진도독부도 존속하고 있던 시점이다. 뭐 해로를 통해 일본으로 도피가 성공한 인사들도 있긴 하지만...[4] 심지어, 흑치상지는 부흥운동에 실패했다고만 나오지 자세한 내막은 언급도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 흑치상지라 하면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한 자로만 알고 있지 배신한 사실까지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