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2인자이자 오늘날의 총리나 수상 격에 해당하는 자리. 나열 순서는 재임순, ()는 재위기간.
260년 고이왕의 관등정비[9] 이후 좌평[10]직이 신설되고 내신좌평[11]이 수석 좌평으로서 좌평들을 통솔했으나 408년 상좌평이 새로이 신설되어 좌평들의 좌장으로서 정사암 회의를 관장하고 나랏일을 총괄하였다.[12] 이후 사비시대 후반부터 언급되는 대좌평직은 일반적으로 상좌평과 동일한 관직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상좌평 문서를 참고하길 바란다.
저근: 충성과 공로를 다하여 국난을 제거해서 사직을 견고하게 지킨 데 대한 논공이 있고 시무를 보좌하는데 무공이 뛰어났다는 공로로 백제로부터 중국 남제에게 관직의 제수가 요청되어 남제로부터 삭녕장군에 임명됐으며 백제의 제후왕으로서 면중왕(面中王),도한왕(都漢王)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웅진 천도 당시 이탈한 지방세력들을 복속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리라 추측된다.
목간나외 3명(사법명,찬수류,해예곤): 모두 490년 북위의 침공에 맞서 공을 세운 장수들이다. 이 중 목간나는 유일하게 과거에도 군공이 있고, 선박과 성문을 때려 부수었다는 구체적인 군공의 설명이 있어 북위와의 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하였고 이전의 다른 전쟁에서도 공을 세웠던 명장으로 추측된다.
[1] 일례를 들자면 삼국사기 인물 열전의 50여 편 중에서도 백제인의 열전은 고작 3편(흑치상지, 계백, 도미)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열전 없이 기록된 인물들도 있지만 백제 기록 자체가 적긴 하다. 사실 고구려도 왕족을 제외하면 열전은 8편(밀우, 유유, 명림답부, 을파소, 창조리, 온달, 을지문덕, 연개소문) 정도 뿐이다. 이는 김부식이 의도했다기보단 그만큼 관련 자료가 당대엔 이미 많이 소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 여담으로 발해, 가야의 인물 기록도 일본 기록이 출처인 경우가 제법 있다.[3] 일본서기에만 전해진다는 말도 있다. 확인 필요.[4] 일본서기에는 누리시치케이(ぬりしちけい)라는 훈이 달려있다.[5]일본서기에서는 백제의 시조를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으로 보며, 근구수왕 이전에 도모왕을 제외하고 1명의 왕이 더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6] 위의 동성자막고와 함께 동성子이름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성씨가 아닌 그냥 동성왕의 자손 누구를 표기한 거란 견해가 있다.[7] 다만 이 인물이 백제인으로 밝혀진 건 묘지명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8]전국시대다이묘 가문 중 하나인 오우치(大内) 가문이 이 사람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9] 허나 이후의 기록이 앞당겨진 것이라 추측되며 근초고왕 시기때 비로소 관등 정비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자세한 내용은고이왕 문서를 참고 바란다.[10] 현대의 장관에 대치되며 중국 6전제의 영향을 받아 6좌평제로 체계화되었다.[11] 왕명 출납을 담당했으며 현대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대치된다.[12]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기존의 6좌평과 별개의 존재로 왕이 측근을 임명했다는 견해도 있고, 기존의 내신좌평 동일하게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13] 내신좌평 부여신과 동일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