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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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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위례성 도읍기 왕릉3. 웅진 도읍기 왕릉4. 사비 도읍기 왕릉5. 한국사 다른 왕조의 왕릉

1. 개요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 부여, 공주 각지에 소재하는 백제의 왕릉. 고구려신라의 무덤 형식이 비교적 일정한 것에 비해 백제 고분은 도읍을 세 곳으로 옮긴 영향으로 무려 여섯 종류나 발견되었다.

위례성 시대에는 돌무지무덤(積石塚), 돌방무덤(石室墓), 움무덤(土壙墓)이 조성되었고, 웅진시대에는 돌방무덤에 흙무덤과 벽돌무덤(塼築墳)이 등장했으며, 사비시대에 가서는 돌방흙무덤으로 소결되었다.

현재까지 왕릉의 주인이 확실하게 밝혀진 건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쌍릉은 백제 무왕의 무덤일 것으로 거의 확실시 되고 있지만, 도굴이 심해 왕릉의 주인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부족하고, 무령왕릉처럼 묘지석이 나온 건 아닌지라 100% 확증을 못하는 상황이다.

2. 위례성 도읍기 왕릉

고인돌시대가 끝날 무렵 한강유역엔 움무덤,독무덤을 주로 만드는 마한의 소국들이 있었는데, 돌무지무덤의 풍습을 가지고 있던 고구려 유이민들이 내려와 백제를 세우고 토착민들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무덤의 양식이 복잡해진 양상을 띠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초기 지배층들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돌무지무덤을 주로 만들었지만, 후대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돌방무덤이 주로 만들어졌다.

한성백제의 무덤들은 대부분 1970년대 들어와 잠실지구 종합개발로 택지가 정비되면서 많은 고분이 사라졌다. 이에 고분에 대한 보존·복원 운동이 일어났고, 1985년 석촌동 고분군의 일부 고분만이 살아남아 고분 공원으로 탄생했다. 고분 공원에 복원되어 있는 고분은 총 6기로 그중 가장 큰 3호 적석총은 밑변 50m, 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4세기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무덤양식의 특징으로 인해 껴묻거리로 묻혔다가 출토된 유물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1]

3. 웅진 도읍기 왕릉

웅진시대에 들어서 적석총은 사라졌으며, 고분은 석실봉토분(장방형)만 남았다. 석실봉토분에는 배수로를 설치했으며 주로 구릉지대에 위치했다. 이 석실봉토분은 사비시대에 이어졌으며, 현재는 5기만 남았다. 또한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아 벽돌무덤(전축분)이 만들어졌다. 이 전축분은 위례성 시기에도 없었고, 사비 시기에도 보이지 않는 무덤 양식인데, 이 양식을 백제가 수용한 이유는 웅진 천도 이후 추락한 백제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즉, 기존까지 백제 왕실은 고구려적인 인식과 전통을 많이 가졌지만 고구려에 의해 왕이 죽고 수도가 함락되어 공주로 내려온 이상 기존의 인식을 가지고 왕실의 권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무언가 획기적인 방식을 모색해야 했고, 그 방안으로 양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려고 한 것이 전축분이 축조된 배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하게 피장자가 밝혀진 무덤으로 무령왕릉이 있다.

4. 사비 도읍기 왕릉

백제 성왕이 대외교류를 활발히 할 수 있는 사비로 수도를 옮긴 후 벽돌무덤은 사라졌고 석실분만 남았다. 석실분을 대표하는 것으로 능산리 고분군이 있는데,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능산리 1호분에는 고구려처럼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한편으로 고구려의 석실분과 다른 형태로 널길을 따라 배수구가 위치해있는데, 이는 비가 많이 오기때문에 그것에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바닥은 전돌을 구워 깔았으며, 위에 판석을 올리고 천장에 연꽃과 구름을 그렸다. 일단 무왕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비시기 왕들은 여기에 묻힌것으로 추정된다.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쌍릉이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 다만 사비성이 위치했던 부여 지역이 아닌 익산 지역에 위치한다.

5. 한국사 다른 왕조의 왕릉


[1] 백제나 고구려의 적석총은 입구가 있기 때문에 비교적 도굴이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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