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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릉원

능산리 고분군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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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부여 왕릉원
扶餘 王陵園
Buyeo Royal Tombs
소재지 <colbgcolor=#fff,#1f2023>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15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수량/면적 328\,793㎡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시대 백제시대 후기
소유단체 부여군
관리단체 부여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colbgcolor=#000> 백제역사유적지구
Baekje Historic Areas
Aires historiques de Baekje
<colcolor=#fff> 국가·위치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충청남도 부여군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477
등재연도 2015년
등재기준 (ⅱ)[1], (ⅲ)[2] }}}
파일:부여왕릉원.jpg
<colbgcolor=#008080> 부여 왕릉원 중앙 고분군 전경[3]

1. 개요2. 발굴과정3. 조사 내용
3.1. 출토 유물3.2. 능산리형 석실
4. 주요 고분
4.1. 능산리 중앙 고분군
4.1.1. 동하총(1호분)4.1.2. 중하총(2호분)4.1.3. 서하총(3호분)4.1.4. 서상총(4호분)4.1.5. 중상총(5호분)4.1.6. 동상총(6호분)4.1.7. 7호분
4.2. 능산리 동고분군4.3. 능산리 서고분군
4.3.1. 능산리 7~10호분4.3.2. 의자왕과 부여융의 가묘
5. 능산리 사지6. 사적 제14호7. 여담8. 관련 영상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충청남도 부여군에 위치한 백제 시기에 조성된 대형 고분군이다. 예전 명칭은 '능산리 고분군'이었지만 '백제왕릉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4] 2021년 9월 17일 문화재청 고시 제2021-112호로 공식 명칭이 '부여 왕릉원'으로 변경되었다. 바로 옆에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부여 능산리 사지[5]와 사비의 외곽성에 해당하는 부여 나성[6]이 있다. 능산리 고분군의 입장료를 내면 모두 관람이 가능하다.

크게 3개의 무덤군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사비 시대의 백제의 왕릉군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에 7기의 왕릉급 고분과 동서로 다수의 왕족귀족들의 무덤이 함께 위치해 있다. 발굴 조사 이전에 모두 도굴되어 소수의 유물만이 수습되었다. 일반적으로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쌍릉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무왕중국 허난성 뤄양시에 묻힌 의자왕을 제외한 모든 사비 시대 백제왕들은 이곳에 묻혔다고 추정하고 있다.[7] 물론 무령왕릉의 지석처럼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나 무덤의 시대별 양식 변화나 출토품의 양상을 연구한 결과 정황상 그렇게 추정하는 것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8] 또한 2015년 7월 4일 독일 에서 개최된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9]에서 공주·부여·익산 일대에 분포한 백제의 다양한 유적들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발굴과정

파일:능산리 고분군 분포도.jpg
능산리 고분군 고분분포도[출처]
현재 부여 왕릉원은 사적으로 정비된 능산리 중앙 고분군과 서쪽의 의자왕의 가묘 뒤쪽에서 확인된 능산리 서고분군, 능산리 고분군의 동쪽에 우메하라 스에지에 의해서 알려진 능산리 동고분군으로 구분된다.

가운데에 위치한 능산리 중앙 고분군이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알려졌으며 처음에는 6기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6기가 위아래 두줄로 나란히 정돈되어 분포하고 있어서 '서·중·동 + 상·하'로 각각 명칭을 부여하여 부른다.[11] 이 능산리 중앙 고분군은 일제강점기1915년에 구로이타 가쓰미, 세키노 타다시에 의해서 동하총, 중상총, 서하총이 조사되었다. 2년뒤인 1917년에는 야쓰이 세이치, 오바 츠네키치, 오가와 게이키치 등이 동하총, 중상총, 동상총을 조사하였다. 해방 이후인 1971년 사적 정비 과정에서 가장 뒤쪽에 혼자 입지하고 있는 7호분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능산리 동고분군은 이후 1937년에 우메하라 스에지에 의해서 확인되었고 5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이미 완전히 도굴된 상태였기 때문에 유물은 관파편, 관못, 금조각 등 극소량의 유물만이 수습되었다. 현재는 민가가 들어서 있지만 이 역시 정비 복원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서고분군은 비교적 늦게 조사된 편이다. 중앙 고분군의 조사 보고가 이루어진 1917년도의 조선고적도보에서는 서쪽에도 4기의 왕릉급 고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백제 석실의 특성상 봉분이 뚜렷하지 않아서[12] 명확히 찾고 있지 못하다가 2010년대에 접어들어서 대대적인 백제, 신라의 왕도 유적에 대한 국책사업이 정해지면서 일련의 조사들이 실시되었다. 2016년에 서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통해서 4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3. 조사 내용

백제의 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이 축조되는 웅진 시기부터 점차 중국, 특히 남조의 묘제의 영향을 많이 받기 시작한다. 그때의 무덤 형태를 송산리형 석실이라고 하는데, 능산리 고분군이 형성되는 시점부터는 능산리형 석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현실의 길이, 연도의 길이, 전체적인 무덤의 폭, 석재의 가공 방식, 현실의 단면 구조 등이 바로 위의 중상총의 도면처럼 표준화된 규격을 갖는 형태를 능산리형 석실이라고 한다.

고고학적인 정황으로 부여 왕릉원은 사비 시기 백제가 체계화된 도성 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여 왕릉원이 입지하는 고분의 방향 자체도 남북방향이며 실제로 묘의 입구도 남쪽으로 형성되어 있다. 또한 부여 왕릉원 뿐만 아니라 그 동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능안골 고분군, 염창리 고분군 등 왕 및 왕족 아래의 귀족 계층의 무덤들이 위계 순으로 동일한 형식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백제의 도성을 감싼 부여 나성의 동문 밖으로 능사를 비롯하여 부여 왕릉원, 능안골 고분군, 염창리 고분군 등의 대형 무덤들이 가도를 따라 배치된 것은 도성의 동쪽을 의도적으로 묘역으로 조성하려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무덤이 갖는 함의가 망자의 위세를 후대에 표출함이 목적이듯 도성의 동문으로 출입할 때에는 왕을 포함한 상위 계층의 무덤이 산을 따라서 이어져 그 위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일정한 의도와 계획 속에서 부소산성, 부여 나성, 부여 왕릉원 등이 배치된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사비성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형성된 계획도시임을 알 수 있다.

3.1. 출토 유물

공식적인 조사 이전에 이미 도굴되어 출토된 유물은 거의 없다. 중상총(5호분)에서 당시의 옷조각, 목관파편, 금동투조금구, 금동 꽃무늬 모양금구, 중하총(2호분)에선 금동관못 등, 7호분에선 관장식용 금조각, 금박못, 쇠못, 금사, 관파편, 불탄 나무조각 등이 수습되었다. 극히 소량만이 발견되었지만 관못과 금동유물 등을 볼 때 이 곳 무덤에도 공주 무령왕릉 못지않은 많은 유물이 묻혀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3.2. 능산리형 석실

삼국시대 고분의 형태와 변천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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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tablebgcolor=#000000><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width=8%> 파일:고구려 삼족오.png ||<|2><height=10><bgcolor=#000><width=15%> 1~2세기 ||<-2><bgcolor=#000><width=15%> ~3세기 ||<-3><width=15%> 4세기 ||<-3><width=15%> 5세기 ||<|2><width=15%> 6세기 ||<|2> 7세기~ ||
고구려 <colbgcolor=#ffffff,#191919>무기단식/기단식 적석총
계장식 계단식 적석총
석곽 광실/석실 장군총형
석실 봉토분(벽화분) 발해 고분
생활풍속도 사신도
평양지역 낙랑고구려
전실분, 다실벽화분
→고구려/백제로 영향
||<|2><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8080><tablebgcolor=#008080><width=8%> 파일:백제 진묘수.png ||<|2><height=10><width=15%> 1~2세기 ||<-2><height=5><width=15%> 3세기 ||<-3><width=15%> 4세기 ||<-3><width=15%> 5세기 ||<|2> 6세기 ||<|2> 7세기 ||
백제 <colbgcolor=#ffffff,#191919> 즙석분구묘/방형주구묘 한성기 석실
석촌·가락·방이동
웅진기 석실
송산리형 석실
사비기 석실
능산리형 석실
마한*
호남지역
주구토광묘 옹관고분
전방후원분
||<|2><tablebgcolor=#722d5b><tablebordercolor=#722d5b><tablewidth=100%><width=8%>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2><height=10><width=15%> 1~2세기 ||<-2><height=5><width=15%> 3세기 ||<-3><width=15%> 4세기 ||<-3><width=15%> 5세기 ||<|2><width=15%> 6세기 ||<|2> 7~9세기 ||
신라 목관 목곽 <colbgcolor=#ffffff,#191919> 적석목곽묘경주, 일부 지방 석실
석곽묘지방
단독 형성 고분군의 형성 고총/고총군 형성 고총 둔화
||<|2><tablebgcolor=#4374d9><tablebordercolor=#4374d9><tablewidth=100%><width=8%> 파일:가야의상징이라고칩시다심볼할게없네.png ||<|2><height=10><width=15%> 1~2세기 ||<-2><height=5><width=15%> 3세기 ||<-3><width=15%> 4세기 ||<-3><width=15%> 5세기 ||<|2><width=15%> 6세기 ||<|2> 7세기~ ||
금관가야 <colbgcolor=#ffffff,#191919>
아라가야
대가야
소가야
}}} ||
파일:무령왕릉도면.jpg 파일:송산리6호.jpg
무령왕릉 송산리 6호분
파일:능산리2중하총.jpg 파일:능산리동4호.jpg
능산리 중하총 능산리 동 4호분
파일:능산리동5호.jpg 파일:능산리3서하총.jpg
능산리 동 5호분 능산리 서하총
송산리형 석실과 능산리형 석실의 관계 및 능산리형 석실의 변천[13][14]
공주에 있는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무령왕릉송산리 6호분은 대표적인 송산리형 석실로 벽돌로 만들었다는 의미의 전실분이라고도 부른다. 무령왕릉은 묘지명이 출토되어 왕비가 사망할 때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으므로 시간적인 기준이 된다. 석실의 형태 또한 양나라의 양식을 따르는 무덤이기도 하다. 송산리 6호분의 경우 무령왕릉과는 달리 연도(무덤길)가 이중의 형태로 구성된 것으로 무령왕릉에 비해서는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5] 꼭 벽돌로 쌓는 것이 아닐지라도 위와 같은 형태의 양상으로 만들어지는 석실을 송산리형 석실이라고 한다.

송산리형 석실이 웅진 시기의 석실을 대표한다면 능산리형 석실은 사비 시기의 석실을 대표하는데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서 송산리형 석실에서 능산리형 석실로 변화한다는 순서로 파악하였다. 그러한 근거들로는 송산리 6호분에서 확인되는 이중의 연도, 연도의 높이보다 높은 현실의 높이가 있으며, 능산리 1호분인 동하총은 시상대[16]가 벽돌(塼)으로 구성된 점, 송산리 6호분처럼 사신도의 벽화가 장식된 점 등을 통해서 송산리형 석실에서 능산리형 석실로 변화한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능산리형 석실의 송산리형 석실과 구분되는 특징으로는 앞선 송산리형 석실에 비해서 묘실의 크기가 작아지고 대부분 묘실의 단면이 육각형 또는 사각형의 형태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후 완연한 능산리형 석실로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시점부터는 묘실의 벽을 만드는 가공방식이 점차 정교해져서 길다란 돌(장대석)로 묘실을 만들다가 나중에는 거대한 몇 매의 판석으로 벽 전체를 만드는 것으로 변화한다. 연도 또한 위에서 서술한 2중 구조의 연도는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짧아지는 경향을 보이며 나중에는 묘도의 길이가 현실의 길이보다도 훨씬 짧아진다.

이러한 특징을 갖는 능산리형 석실은 사비 시기 백제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6세기를 전후한 이 시점부터는 이전 한성기, 웅진기 시절에 각 지방마다의 다양한 묘제와 장법 등을 사용하던 지역이 모두 이러한 형태의 능산리형 석실로 규격화되고 통일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능산리형 석실 자체가 갖는 계층성 및 출토 유물, 특히 은화관식(銀花冠飾)이라고 불리는 신분을 표징하는 장식품 등이 능산리형 석실에서 출토되면서 고고학자료를 통한 정치사회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였다.

즉, 이러한 묘제의 통일은 백제가 사비로 그 수도를 옮겨오면서 각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고 지방에 대한 지배력이 앞선 시기에 비해서 현격한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옛 마한 지역은 백제의 지배하에서도 고유의 장례법 및 묘제를 사용하는 전통을 유지하였는데, 이러한 능산리형 석실이 옛 마한 지역에서도 등장한다는 뜻은 그러한 전통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백제 중앙의 왕족 및 귀족, 신하 계층이 사용하는 장례 방식을 강제한 것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지방에서는 능산리형 석실을 채용하면서도 각 지역마다의 지역색을 보이기도 하여 사비 시기 백제의 중앙과 지방의 상호관계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할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기도 하다.

능산리형 석실은 이 능산리 고분군 말고도 부여군 염창리, 능안골 등지에서도 넓게 확인이 되며 그 수량도 매우 많고 고분군 전체가 능산리형 석실을 채용하는 경우도 있기도 하다. 이처럼 능산리형 석실은 통일화, 제도화, 규격화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능산리형 석실은 사비 시기의 백제의 행정력 및 정치력의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로 매우 중요하다고 평할 수 있다.

4. 주요 고분

4.1. 능산리 중앙 고분군

파일:능산리중앙고분군.jpg
부여 왕릉원 가장 중심에 위치한 고분군으로 총 7기의 왕릉급 고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사비 시기의 백제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이다.

4.1.1. 동하총(1호분)

파일:부여 능산리 고분군 1호분 문화재청.jpg 파일:능산리1동하총.jpg
동하총 동하총의 도면
부여 왕릉원에서 유일하게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있어 가장 유명한 고분이다. 마찬가지로 백제 고분 중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공주 송산리 6호분과는 달리 굉장히 정교하고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어 백제 그림 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신도는 오랜 기간 밀폐된 무덤에서 보존되어 고분을 개방함과 동시에 빠르게 훼손되어 현재는 많이 손상되었다. 이에 고분을 영구 폐쇄하되 능산리 모형 전시관에서 동하총의 내부를 그대로 재현해두었다.

학자들은 송산리형 석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신도가 동하총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한다. 또한 능산리형 석실의 전개 과정상 석실의 단면이 사각형에서 육각형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상정하는 견해가 많다.[17] 그렇기 때문에 동하총의 상대적인 순서는 능산리 고분군 중에서도 비교적 빠른 시기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사비 시기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성된 무덤이라는 점과 송산리형 석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위덕왕릉으로 추측하고 있다.#
파일:external/www.cha.go.kr/1626468.jpg
동하총 내부

4.1.2. 중하총(2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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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장소 능산리 중하총 | 대통사
관련 문서 웅진회의 | 사비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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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능산리2중하총.jpg
중하총의 도면
송산리 고분군의 천장을 아치형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이 이 무덤에 남아 있기 때문에 부여 왕릉원에서 제일 먼저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재료가 벽돌에서 돌(장대석)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가정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사비로 천도해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성왕으로 추측하고 있다.#

4.1.3. 서하총(3호분)

파일:능산리3서하총.jpg
서하총의 도면
능산리형 석실의 전형적인 형태로 치밀하게 가공된 대형의 판석 1~2매로써 벽을 구성하고 묘도도 매우 짧아진다. 아래의 중상총의 도면과 비교해보면 거의 차이가 없다. 동하총이 만들어진 이후에 만들어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혜왕 혹은 법왕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다.#

4.1.4. 서상총(4호분)

4.1.5. 중상총(5호분)

파일:능산리5중상총.jpg
중상총의 도면
서하총의 도면과 비교해보면 거의 차이가 없다.

4.1.6. 동상총(6호분)

4.1.7. 7호분

파일:도금투금구 일괄-중상총, 소왕릉, 능산리7호.jpg
능산리 중상총, 쌍릉 소왕릉, 능산리 7호에서 각각 출토된 도금 투금구
본래 부여 왕릉원에는 왕릉급 고분이 6기 밖에 없는 줄 알았으나 1971년에 7호분이 추가로 발견되면서 왕릉급 무덤이 7개로 늘어났다. 위치는 이전에 알려진 6기의 고분들보다 북쪽으로 몇 m정도 떨어져서 위치하고 있다. 다른 무덤들과 크기가 같은 것으로 보아 왕 또는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조사 이전 도굴 당해 발굴된 유물은 거의 없었다.

4.2. 능산리 동고분군

파일:능산리동1호.jpg
동고분군 1호분의 도면

파일:능산리동4호.jpg
동고분군 4호분의 도면
능산리 동고분군 4호의 경우 전형적인 능산리형 석실과는 작은 차이점이 있다. 바로 천정부의 형태인데, 전형적인 능산리형 석실들은 판석(板石) 3~4매 정도를 사용하여 평편한 천장의 형태이다. 반면 동고분군 4호분은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서 천장을 마감한 형태다. 사소한 차이이지만 송산리형 석실의 특징을 일부 계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능산리 동고분군 4호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능산리 고분군 가운데서도 비교적 빠른 편에 속한다.

파일:능산리동5호.jpg
동고분군 5호분의 도면

파일:능산리동2호.jpg
동고분군 2호분의 북벽. 동고분군 2호분은 도면이 제작되지 않았다.

4.3. 능산리 서고분군

4.3.1. 능산리 7~10호분

2010년대 중반 들어 의자왕의 가묘 뒤의 구릉에 산지의 경사면을 따라서 4기의 백제 석실이 조사되었다. 이중 2기는 왕릉급으로 추정되며 치밀하게 가공된 석재로 축조된 능산리형 석실이다. 게다가 무령왕릉과 같은 금송목관파편이 발견되어서 분명한 왕족의 무덤일 것이라 생각된다.

능산리 고분군은 지금의 메인 고분군 말고도 일찍이 의자왕의 가묘라는 식으로 서쪽의 고분군에 대해서도 존재가 일찍이 알려져 있었다. 그 밖에도 소위 "동구릉"이라고 부르는 능산리 동 고분군의 존재도 전해져 왔으나 해당 지역에 민가가 있어 조사의 난점이 있어왔다. 이후 2017년 박근혜 정부에 의해서 백제왕도 복원정비사업이 진행되면서 능산리 고분군에 대한 조사도 체계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고 동쪽 고분군에도 능산리 중앙 고분군과 같은 양상의 왕릉급의 무덤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현재 능산리 고분군은 알려진 능산리 고분군만이 아니라 그 양 옆 동서로 배치된 동·서 고분군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참고

4.3.2. 의자왕과 부여융의 가묘

파일:의자왕과 부여융의 가묘.jpg
능산리 고분군 입구에서 북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의 가묘가 나온다. 해당 묘역에 있는 무덤 중 백제 당대가 아닌 현대에 백제 양식을 참조해 새로 만든 둘 뿐인 무덤이다. 북망산에 묻힌 이들을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유해 귀국하려고 시도했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의자왕이 이곳에 돌아와 다시 잠들기 전까지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의자왕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의자왕 참조)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은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뤄양북망산에 묻혔다고 전한다. 1920년 부여융 태자의 묘지석이 먼저 출토되었고 후에 1995년 부여군은 북망산에서 의자왕의 무덤을 찾고자 하였다. 결국 낙양시 맹진현 봉황대촌 부근에서 의자왕의 묘역으로 추정되는 곳을 확인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시신, 목관의 흔적과 지석은 찾을 수 없었다. 의자왕 묘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 북망산은 이미 오랜 중국의 혼란기를 거치며 도굴로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중국은 동릉 도굴 사건 문서에서 볼 수 있듯 당장 관리인력이 상주하고 있던 청나라 황제릉도 군벌이 폭탄을 동원해 도굴할 정도로 극심한 혼란기를 거쳤다. 의자왕 바로 옆에 묻혔다던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손호나, 진나라의 군주 진숙보의 무덤에 도굴갱이 훤히 뚫려 있었으니 진짜 의자왕릉은 어떻게 되었을지 뻔하다.

결국 중국으로부터 부여융 태자의 묘지석 복제품과 의자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의 흙을 퍼서 2000년에 한국으로 가져왔다. 이후 부여 고란사에 봉안하였다가 능산리 고분군에 백제의 굴식돌방무덤 양식으로 묘를 조성하고 백제의 장례 방식으로 묘지신에게 땅을 구입한다는 의미로 매지권과 의자왕의 품성과 일대기를 기록한 자체적으로 만든 지석, 부여융의 묘지석 복제품을 관과 함께 각각 의자왕릉과 부여융묘에 매설하였다. 의자왕이 백제를 떠난 지 1,340년만에 선대 왕들과 나란히 같은 장소에 묻히게 된 것이다. 의자왕의 무덤에는 백제국의자대왕단비(百濟國義慈大王壇碑)라는 비석이, 그 옆에 있는 부여융의 무덤에는 백제국부여융단비(百濟國王扶餘隆壇碑)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두 사람의 간략한 일대기가 써 있다.

5. 능산리 사지

부여 왕릉원의 서편에 위치한 절터로 고구려정릉사처럼 왕족의 혼을 기리기 위한 능사로 지어진 절로 추정된다. 가람은 백제의 전형적인 가람배치인 1탑 1금당을 취하고 있으며, 강당 옆 서쪽 부속건물지에서 백제 금동대향로가, 절터 가운데의 목탑터에서는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이 발굴되었다. 본래 이 위에 절을 복원할 계획이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백제문화단지에 원본 사이즈로 재현을 해놓았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백제문화단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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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적 제14호

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내부구조와 재료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2호 무덤(중하총)은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호 무덤(서하총)·4호 무덤(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졌다. 이 형식은 부여지방에 많으며 최후까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파편·도칠목관편·금동투조식금구·금동화형좌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무덤들 서쪽에서는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지역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7. 여담

8. 관련 영상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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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총 / 서상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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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사진 상에 총 7기의 고분이 존재하는데 각각 가장 오른쪽 아래 입구가 보이는 고분이 1호분(동하총), 중앙 아래에 위치한 것이 2호분(중하총), 가장 왼쪽 아래에 위치한 것이 3호분(서하총), 3호분 뒤에 위치한 것이 4호분(서상총), 2호분 뒤에 위치한 것이 5호분(중상총), 1호분 뒤에 위치한 것이 6호분(동상총),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이 7호분이다.[4] 2024년 11월 기준 구글 맵에는 백제왕릉원으로 표기되어 있다.[5] 능을 보호, 관리하기 위해 조성된 능사의 터로 추정된다.[6] 해당 구간은 동나성 구간에 해당한다. 부여 왕릉원과 마찬가지로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있다.[7] 왕릉원에도 의자왕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현대에 조성된 가묘이며 진짜 무덤은 중국 뤄양시 북망산에 소재하고 있다.[8]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9] 2015년 6월 28일~7월 8일[출처] http://www.m-i.kr/news/articleView.html?idxno=327734[11] 가령 동쪽의 아래 고분인 1호분은 동하총, 서쪽의 윗 고분인 4호분은 서상총 등으로 부른다.[12] 지금의 봉분들은 정비과정에서 약간 크게 만든 것으로 원래의 백제 석실들의 봉분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13] 축척은 완전히 동일하진 않다는 점을 참고하고 도면을 볼 필요가 있다.[14] 山本孝文(야마모토 타카후미)의 논문을 참고하였으며 이 분류안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큰 틀에서는 동의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연구자마다의 다른 견해가 있기도 하다.[15] 무령왕릉도 연도와 묘실 사이에 구분되는 부분이 뚜렷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 부분이 송산리 6호분에서는 더 크게 표현된 것으로 보고 있다. 위의 도면에서는 잘 안보이지만 국립공주박물관에 무령왕릉을 복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16] 屍床臺, 시신이 안치된 관을 올려두는 곳[17] 다만 반대로 육각형에서 사각형으로 변화한다는 견해도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