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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의 왕릉에 대해서는 그다지 밝혀진 것이 없다. 발굴자료가 왕묘급에서는 많지 않고 있더라도 발해 주요 왕릉이 소재한 중국 측 정부가 자료공개에 미온적 태도로 일관하며 일부만 공개하는 상태도 원인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중국 길림성 돈화시의 육정산 고분군과 화룡시 용두산 고분군이 있다.현재까지 무덤 주인이 밝혀진 왕릉은 없다. 추정만 있을 뿐, 명확히 밝혀진 건 단 1개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왕은 아니지만, 정혜공주와 정효공주는 무덤 위치가 밝혀져 있다.
2. 상세
2.1. 돈화 육정산 고분군
- 정혜공주묘 - 육정산 M2호. 삼각고임의 천정을 갖는 고구려계통의 석실이다. 국사교과서에 유명한 발해의 석사자상이 이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묘지명(墓誌銘)이 나와 무덤의 주인이 문왕 대흠무의 둘째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737~777년의 생몰년도가 밝혀졌다. 또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의 연호가 확인되었고 3년장을 치른 기록이 있었다.
- 육정산 M6호 - 추정 진릉(珍陵), 무왕의 묘호. 정혜공주묘의 묘지(墓誌)에 진릉의 동쪽에 묻혔다는 기록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정혜공주묘의 동쪽에서 가장 큰 무덤인 M6호가 진릉일 가능성이 있다. 꼭 진릉이 이 고분이라는 것보다는 육정산 고분군이 발해 왕족의 묘지임에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제기된 상태인데, 이 M6호(진릉)이 무왕 대무예 혹은 문왕 대흠무의 무덤으로 보기보다는 정혜공주의 생모이자 문왕 대흠무의 妃가 피장자라는 것이다. M6호를 왕릉으로 보기에는 규모 면에서는 그러한 추론이 가능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으나 출토 유물면에서는 다소 소략한 면이 있으며 입지로 보아도 능원의 동편으로 치우쳐 있어 왕릉으로 보기에는 다소 주저되는 면도 존재한다. 이와 관련하여 <책부원구>, <속일본기> 등에는 776년 발해의 황후가 사망했음을 알려주는 기록들이 확인되고 있어 적어도 정혜공주묘보다 먼저 사망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조손이 사망할 경우 조부의 주변에 배장된다는 근거로 당제국의 영태공주, 의덕태자가 그의 조부 당 고종 이치의 능원에 배장됨을 근거에 두고 있는데, 이는 측천무후대의 역사적 특수성에 기인할 뿐, 이러한 배장패턴으로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M6호로 명칭되는 소위 진릉의 피장자는 무왕 대무예나 문왕 대흠무의 무덤으로 보기보다는 문왕 대흠무의 황후이자 정혜공주 대ㅇㅇ의 생모인 황후의 릉으로 잠정 비정하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육정산 고분군의 서편지역은 왕실성원의 능역으로 기능하였음을 더욱 강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러다가 문왕 대흠무대의 어느 시점 이후 왕실묘역이 길림성 화룡의 용두산고분군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중경현덕부의 경영 등과도 밀접하게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더욱이 용두산고분군에서 문왕 대흠무의 또다른 황후인 효의왕후의 묘비명이 확인되고 있어 이와 같은 묘역의 이동은 어느 시점 이후로 실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2. 화룡 용두산 고분군
- 정효공주묘 - 용두산 M1호. 정혜공주묘와 마찬가지로 묘지명이 확인되어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정효공주는 757~792년에 문왕의 4녀로 태어 나 3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특히 이 묘지석에서 문왕을 황상이라고 표현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지하식의 석실묘로 벽화가 남아 있다. 벽화의 내용은 12명의 인물이 각 벽에 그려져 있으며 당나라풍으로 그려졌다. 특히 무덤의 위 지상에는 전(塼)들이 비교적 가지런하게 놓여있는데 전반적인 형태가 길림성 훈춘시의 마적달탑묘와 닮아 있어 전탑묘(塼塔墓)라고 하는 남북국시대의 불교영향의 묘제일 가능성이 있다.
- 용두산 M3호 - 추정 순목황후릉. 지하식의 석실묘이다. M3호분에서는 "발해국의 순목황후로 간왕의 황후 태씨다.(渤海國顺穆皇后, 即 简王皇后泰氏也)"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묘지가 확인되었다. 무덤에서는 파손된 진묘수 2기와 발해토기가 확인되었다. 전돌이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주변의 M13, 14, M8호 등의 양상으로 미루어보아 전탑묘일 가능성이 있다.
- 전탑 항목 참고: 항목의 여러 전탑의 밑에 무덤이 있는 것을 전탑묘라고 한다. 전탑 자체는 남북국시대에 유행하였다.
- 용두산 M12호 - 추정 효의황후릉.. 인데 아예 공개가 되지 않았다. 한편 문왕 대흠무의 장지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효의황후 뿐만 아니라 다른 황후의 장지가 진릉으로 비정되는 육정산 M6호라면, 그의 최종 장지에 대해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만 M1호가 정효공주묘로 확실시되고, 그 동쪽에 위치한 M12효의황후라면 자연스럽게 M11호가 문왕 대흠무의 무덤으로 비정될 수 밖에 없다. M11호가 효의황후릉에 인접한 것으로 판단되기에 더욱 그러하지만 대흠무의 최종 장지가 M11호인지에 대해서는 추후 면밀한 검토가 요구되기에 작성현재 잠정 가설로 남겨두며, 추후 자료가 보완되는대로 비정하기로 한다. 입지나 장지로 보아 이 외에도 문왕 대흠무의 장지로 의심되는 지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겠나, 자료가 없으니까!! - 용두산 M13,14호 - 왕릉으로 유력하게 비정되는 전탑구조의 합장묘. 이 고분들은 구조상 전탑으로 추정할 수 있는 묘상건축 하부에 조영된 이혈합장묘이다. 특히 M14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식은 일찍이 그 외형의 고구려의 그것과 유사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입증하는 물질자료라는 점에서
뜨겁다 못해 절절끓는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유물이 공반되었는데, 옥으로 제작된 과판과 대단금구(대단장식)에 각각 금을 덧입혀 제작된 대금구[1]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장식구의 재질에 있어 당제국과 신라, 발해를 아루르는 동북아시아 국가에서 대장식구에 옥과 금을 사용함은 왕 혹은 왕족만이 가능한 것이었으며, 그 자체로도 이 고분의 피장자의 위세가 왕에 준함을 웅변한다고 볼 수 있다.결국 금과 옥이 함께 사용된 대장식구와 금동관식, 전탑구조가 유력한 고분의 외형으로 미루어 보건대 왕릉으로 볼 여지가 다분하다. 물론 M3,M12호에서처럼 묘지명이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이에서 반출된 유물들로 보아 왕릉으로 비정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에 대해서는 향후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이와 관련하여 상경용천부로의 최종천도가 이루어진 이후 그곳에서 왕릉이 조영되는 것으로 보아 제9대 간왕 대명충(재위 817~818)보다 후행하는 왕의 고분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는 제10대 선왕 대인수(재위 818~830)로 발해의 왕계가 바뀌면서 상경용천부 인근으로 새로이 왕실묘역이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두산 M13,14호의 피장자는 발해의 국왕이며 간왕 대명충 이전의 어느 국왕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2.3. 화룡 하남둔 고분
2.4. 훈춘 마적달탑 고분
마적달탑 고분은 단독으로 조영된 전실에 상부에 전탑이 조성된 고분이다. 이 고분은 훈춘시 팔련성에서 원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자칫 단독 고분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전실에 상부 전탑이라는 요소는 정혜공주묘나 용두산고분군의 상위 랭크의 고분들과 일정부분 상통하는 면이 있다. 따라서 훈춘시 팔련성에 위치한 동경용원부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피장자가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한 것으로 본다. 더욱이 전실+전탑의 요소는 그동안의 사례로 보아 왕(족)에 준하는 인물이 이 고분의 피장자였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이와 관련하여 그에서 인골이 출토된 바 있는데, 이 인골의 감정 결과 24~35세의 장년기 남성으로 밝혀진 바 있다. 기왕의 발해고분 연구에 따라 이 고분 역시 왕(족)에 준하며, 그 피장자의 연령을 고려해 보건대 제 4대 폐왕 대원의(재위 793~794)로 비정해 볼 수 있다. 발해의 도성변천사로 본다면 훈춘시 팔련성에서 崩하였던 왕(족)은 제3대 문왕 대흠무, 대흠무의 아들이자 제5대 성왕 대화여의 아버지인 대굉림, 제4대 폐왕 대원의인데, 인골의 감정에 의하면 폐왕 대원의의 연령과 근사한 값을 나타낸다. 물론 기록에 따르면 폭정으로 인하여 국인(國人)들에 의해 피살된 폐주로 기록되고 있으나, 당시 발해의 혼란한 정세변동과 왕위계승을 둘러싼 갈등 등의 정치상을 고려한다면 이는 오히려 윤색이 가미된 기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본다. 더욱이 마적달탑 고분에서 묘비명이나 특기할만한 유물이 반출되지 않음을 고려해 보건대 비록 귀족들 간의 정치다툼 속에 폐위되었다고 하더라도 왕실성원으로서 그에 준하는 고분을 조영하고, 이에 매장하였을 가능성은 다분할 것으로 본다. 그동안 많은 발해고분이 발굴조사되었으나 전실에 묘상에 전탑을 조영한 고분은 왕 혹은 왕족에 준한다는 사례로 보아 비록 폐주일지라도 팔련성과의 근접성과 인골감정연대로 미루어 이 고분은 폐왕 대원의의 고분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
2.5. 영안 삼릉둔 고분군
상경용천부의 상경도성에서 북서쪽으로 5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목단강을 경계로 남북으로 구분되어 위치하고 있다. 삼릉둔고분의 위치가 상경도성에서 북쪽으로 목단강을 건넌 지점에 위치하는 면에서도 이미 왕실묘역일 가능성을 한층 배가시켜 준다.
삼릉둔고분군은 동서 112.5m, 남북 235m의 토석 혼축으로 담장을 둘렀고, 그 안의 북쪽에 치우쳐 M1~3호가 위치한다. 그리고 담장의 가운데에 단을 두었고 그 남쪽으로 제사구역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중앙으로 남쪽 방향을 향하여 신도를 마련하여 완성된 능역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M4,5호가 능원 밖에 위치하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M1~3호의 피장자와 연관된 배장묘일 것으로 본다. 아울러 M4,5호 역시 별도의 능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는다.
M1호는 삼릉둔 담장의 북쪽 중앙부에 위치하며, 이에서는 봉토 기단에 초석이 확인되고 명문와 녹유와 등이 확인되었다. 이로 미루어 묘상건축의 존재 가능성도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보고 자료가 소략하여 확정하기에는 주저된다. 현무암을 다듬어 횡평적한 고분으로, 천장은 각을 두어 조정한 후 평천장으로 마감하였다.
M2호는 M1호에서 동북쪽으로 치우쳐 30m 정도 이격된 지점에 위치하는데, 계단식의 경사묘도와 통도를 지나 현무암으로 조성한 묘실로 구성되었으며 천장은 모줄임구조를 보인다. 그리고 회칠을 한 후 벽화를 그려넣었다. 석사자상, 명문와, 토기류 등과 함께 MNI10+의 인골이 출토되었다는 내용만 확인될 뿐, 구체적인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M3호는 M1호에서 서북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위치하며 M4호는 담장 밖으로 M1호묘에서 서쪽으로1.2km 떨어진 지점, M5호는 M4호에서 서쪽으로 1. 2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처럼 직접적인 왕릉능원에 해당되는 고분은 M1~3호에 해당되고, M4,5호는 삼릉둔 능원에 배장된 인물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 청 왕조대에 이미 그 존재가 확인되어 훼손이 심각하게 이루어진 터라 현재로서는 이 능원의 피장자에 대해 특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대형 초석의 존재와 소략하나마 석사자상, 녹유와 등의 존재로 미루어 보건대 상경용천부에 안착한 이후에 조영된 고분으로 보는 데에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본다. 더욱이 M1호와 M2호의 속성[2]은 화룡시 용두산 M10호와 어느정도 상통하는 모습을 보인다. M10호에서는 특히 삼채도용이 출토되고 있고 삼릉둔 묘역의 입지나 도성과의 위치는 중국 당 왕조의 도성과 묘역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발해가 당 왕조와 문물교류가 빈번한 시기에 조영되었을 가능성을 키워주기에 충분한 것으로 본다.
이와 관련하여 추론해 볼 수 있는 점이 제10대 대인수(재위 818~830)때부터 발해왕실의 왕계가 국부 대조영계가 아닌 대야발계로 바뀌었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대당교섭이 활발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발해의 최대 강역이 선왕 대인수 이후에 확정되는 것으로 보아 이미 내부갈등의 극복과 활발한 대외정복, 교섭을 진행했던 정황들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특히 대이진(재위 830~857)대에 들어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3]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대내외적 분위기와 왕통의 확립을 위해서라도 대인수와 대이진대의 어느 시점에 새로운 왕통의 확립과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능원형성에 일정 부분 공을 들였을 것으로 본다. 결국 실질적 상경시대의 부흥군주인 대인수와 그 아들 대신덕(왕위에 오르지는 못함), 그리고 그 아들 대이진(재위 830~857)과 그 동생 대건황(재위 857~871)대에 조영되고 이 국왕들과 그 주변의 왕실인물들이 삼릉둔 묘역의 피장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후 대건황의 아들 대현석이 즉위하였으나 그 후의 발해에 대한 기록이 희미하여 대외적으로 당, 일본과 교섭을 하였다 하더라도 대인수 ~대건황대 만큼 국력을 떨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로 미루어 삼릉둔고분을 조영하고 이에 매장된 인물들은 선왕 대인수와 그 일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며, 소략하나마 출토된 유물들 역시 9세기 전반대에 해당됨은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하여 삼릉둔묘역의 피장자가 선왕 대인수 일족의 묘역의 가능성이 농후할 때, 그 직전 상경시대를 살았던 왕들이 굳이 원거리의 화룡 용두산고분군으로 귀장되었던 이유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