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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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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제10대 국왕
선왕 | 宣王
<colbgcolor=#2531a2><colcolor=#fbe673> 출생 770년대 이전[1]
발해
사망 830년 10월 (향년 60대 이상)
발해
능묘 삼릉둔 고분군(추정)
재위기간 발해 제10대 국왕
818년 ~ 830년 10월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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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31a2><colcolor=#fbe673> 성씨 대(大)
인수(仁秀)
왕태자 대신덕(大新德)[2]
묘호 미상
작위 금자광록대부 검교사공 도독 발해국왕(820)[3]
시호 선왕(宣王)
연호 건흥(建興) }}}}}}}}}

1. 소개2. 재위
2.1. 정복 전쟁2.2. 내정
3. 신당서 기록4. 평가5. 가족관계6. 연표7.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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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발해의 제10대 가독부. 연호는 건흥(建興). 발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군주다.

2. 재위

770년대 이전 출생으로 추정되며, 이전 군주인 간왕의 종부(아버지 항렬의 친척)로, 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증손자이다. 간왕이 병사하였을 당시 대인수는 권지국무로 있었다.[4] 장기 집권하며 발해의 기틀을 닦은 문왕 사후에 발해의 정국이 25년간 혼란기에 빠져있던 상황에서 발해의 왕권을 쟁취해냈다.

2.1. 정복 전쟁

初, 黑水西北又有思慕部, 益北行十日得郡利部, 東北行十日得窟說部, 亦號屈設, 稍東南行十日得莫曳皆部, 又有拂涅·虞婁·越喜·鐵利等部. 其地南距渤海, 北·東際於海, 西抵室韋…後渤海盛, 靺鞨皆役屬之, 不復與王會矣.
당초 흑수의 서북쪽에는 사모부(思慕部)가 있고, 북으로 10일을 가면 군리부(郡利部)가 있고, 동북으로 10일로 가면 굴설부(窟設部)가 있다. (굴설은) 굴설(屈設)이라고도 한다. 조금 동남으로 10일을 가면 막예개부(莫曳皆部)가 있고, 또 불열(拂涅)·우루(虞婁)·월희(越喜)·철리(鐵利) 등의 부가 있다.
그 땅은 남쪽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북•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실위에 이른다…후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모두 그들에게 역속(役屬)하여 다시는 왕과 만나지 못하였다.
신당서 북적열전 흑수말갈

818년 즉위하자마자 말갈의 여러 부락들에 대한 정복 사업을 단행하여 2년만인 820년 마무리했다. 신당서의 발해와 흑수말갈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모든 말갈부족을 전부 복속시켰다. 이때 완전히 정복한 말갈 부락은 우루, 월희, 흑수로 추정되는데 우루, 월희, 흑수의 대당 조공이 이 시기에 끝나기 때문이다. 우루, 월희는 완전히 정복하여 군현을 설치했는데 이 세력들 역시 이탈 이후 재확보한 것이다. 이 지역은 무왕 대의 정복 사업 중에 이미 지나갔던 지역이었다. 이 세력은 완전히 발해에 흡수된 다른 부족들과도, 끝까지 버틴 흑수부와도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흑수는 복속이나 통제 정도에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흑수부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땅 전부를 말하기 때문에 전부 통합하고 다스린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이 어려웠다. 때문에 발해의 국력이 약해지면 이탈하는 동시에 일부 부족에서는 중국으로 조공 사신을 보냈다. 이는 당시의 국제 질서에서 발해와는 별개의 세력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당나라 또한 사신들을 모두 받아주어서 발해를 엿먹이는데 이용하였다. 결국 흑수부는 발해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흡수되지 못했다. 일부 사료에 의하면 발해가 흑수부 내의 강역까지도 점거하여 군현을 설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사료 부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정확한 실체 규명이 어려운 실정이다.

한편 《요사》에 의하면 서쪽으로 요동 지역까지 진출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소고구려가 존재했다고 추정한다면 이 때 발해에 흡수되어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요사》에 발해가 이 시기에 요동에 군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실 문왕 시기까지 이미 요동 지역은 발해의 영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혼란기 때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을 다시 확보했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무왕이나 문왕 시기에 이미 정복한 지역에 대해서 다시 정벌하는 기록이 선왕 시기에 자주 보인다. 우루, 월희, 흑수 모두 무왕이나 문왕 시기에 정복한 전력이 있던 지역들이다. 그런데 요동을 정복한 것이 소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고구려가 선왕에 의해 멸망된 것이 거의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다.

《요사》 <지리지> -흥료현조-에서는 선왕 대인수가 당나라 원화(元和) 연간(806~820)에 남쪽 신라를 평정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것은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요사》 자체가 중국의 이십사사(二十四史) 중에서 가장 정확성이 떨어지고 부실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오류가 많은 책이고, 신라 측 기록이 원전일 《삼국사기》나 여타 다른 기록에는 발해가 신라를 침공한 기록이 없다. 고고학적으로도 신라 북변에 발해 남하의 흔적이 미약하기 때문에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다.

그래서 《요사》 <지리지>의 신라 평정 기록을 신뢰하더라도 이는 신라 북변의 대동강 이북까지 진출한 것이 와전되었거나 일부 이탈한 반란 세력들을 다시 귀부시킨 것일 가능성이 높은것으로 추정이 된다. 신라와 발해의 국경 역시 이르면 고왕 시기, 늦어도 무왕 대에는 확정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신라가 헌덕왕 때에 대동강변에 300리에 걸친 패강장성(浿江長城)을 건설하고, 황해도와 평안도 땅에 군현을 대거 설치한 것으로 보아 전쟁이나 큰 분쟁은 아니라도 발해로부터 어떤 위협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북쪽 방면으로는 멸망한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두막루가 이 때 선왕에 의해 발해에 병합된 것이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막루가 발해에 병합되었다는 근거는 이러한 정황적 추측 외에는 딱히 없다. 오히려 물길 때문에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반면에 당나라 방면 외교는 꽤나 유화적인 기조를 띄었고 당헌종번진 토벌이 평로•치청에 이르렀을 때 평로•치청 번진의 구원 요청을 무시하고, 군사를 보내주지 않았다. 제3대 문왕이 평로•치청에 위치한 등주에 솔빈부의 말을 보낼 정도로 교역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조치다. 이에 당나라는 820년에 금자광록대부, 겸 고사공직을 더하여 줌으로써 화답했고 이후 당나라와의 교역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2.2. 내정

대인수는 왕위에 올라 발해의 내분을 정리했다.

2년만에 아무르강 유역에서 요동반도, 대동강에 이르는 지역으로의 정복 활동을 마무리하고, 남은 재위 기간 동안은 내정 안정화에만 집중했다. 이 짧은 정복 기간 또한 맨 땅에 헤딩한 것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셈. 내정 활동으론, 행정구역인 5경 15부 62주를 완전히 정비하고 학문을 권장, 진흥하였으며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정복 활동은 2년만에 끝났으나 내정에 무려 10년을 투자한 것으로 보아 현재 알려진 것들 외에도 꽤 많은 정책을 실시했을 것이며 개중엔 내분으로 인해 악화된 발해 내부의 중앙 정치를 안정화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의 치세는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칭호를 얻어내는 기틀을 마련하는 등, 중흥기였다. 그만큼 국력이 크게 신장된 전성기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3. 신당서 기록

종부(從父)인 대인수(大仁秀)가 즉위하여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쳤으니, 그의 4세조[5] 대야발(大野勃)은 대조영의 아우이다. 대인수가 자못 바다 북쪽의 여러 부족을 토벌하여 크게 영역을 개척하였다. 공적이 있어 검교 사공(檢校 司空)을 제수받고 왕위를 계승하였다. 원화(元和) 연간(806년 ~ 820년)에 모두 16번, 장경(長慶) 연간(821년 ~ 824년)에 4번, 보력(寶曆) 연간(825년 ~ 826년)에 2번씩 각각 조공하였다. 태화(太和) 4년(830년)에 대인수가 죽으니, 시호는 선왕(宣王)이다.
從父仁秀立, 改年建興, 其四世祖野勃, 祚榮弟也. 仁秀頗能討伐海北諸部, 開大境宇, 有功, 詔檢校司空襲王. 元和中, 凡十六朝獻, 長慶四, 寶曆凡再. 大和四年, 仁秀死. 諡宣王.

4. 평가

발해의 전성기를 시작한 대표적인 명군이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수능, 공무원 시험에 등장하는 발해 4명의 군주(고왕, 무왕, 문왕, 선왕) 중 한 명인지라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나 전공자, 수험생들에게는 인지도가 높다. 애초에 발해사가 남은 기록 자체가 거의 없다. 삼국시대처럼 자체 기록이 있는 게 아니라 이나 거란(요나라), 신라, 일본 같은 주변국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선왕은 요동, 아무르강 유역, 한반도 북부 지역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고 말갈족을 통합하여 한국사에 존재하던 국가 중에서 가장 넓은 강역을 확보했다. 그리고 단순히 영토를 확장시킨 데에 그치지 않고 5경 15부 62주로 대표되는 행정구역까지 확립하여 정복한 지역을 완전히 발해의 영토로 편입했다. 당나라와의 외교도 더욱 활발해졌으며 불교 융성 정책을 펼쳤다. 단순히 영토를 확장한 것뿐만 아니라 외치와 내치에서 모두 상당한 업적을 쌓았다는 점에서 선왕은 발해의 최전성기이자 중흥기를 연 군주라 평가할 만하다.

발해의 인지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인데, 선왕의 업적을 평가하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점은 선왕은 대조영계 직계 왕족이 아니라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증손자로, 원래는 왕위 자체에 오를 수 없는 방계 중의 방계 왕족 출신이라는 점이다. 학계에서 선왕은 정상적으로 왕위를 이은 것이 아니라 찬탈 또는 강탈을 했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는데,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 강왕 사후 9년 간 혼란기에 빠진 발해를 수습함과 동시에 상술한 업적을 달성한 것이다.

발해사 대부분의 기록이 부실해서 정확한 과정은 알 수 없으나 왕이 될 수 없던 인물이 문왕 사후 25년의 혼란기 내지 강왕 사후 9년 간의 혼란기를 끝내고 왕권을 쟁취해내며 사실상 발해의 제2왕통을 연 점과,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국력을 신장시켰다는 점에서 선왕의 정치적 역량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선왕이 쌓은 업적을 바탕으로 선왕 사후 대이진, 대건황의 치세까지 발해는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시호가 선왕(宣王)이라 인터넷에 선왕으로 검색하면 선대 군주을 의미하는 선왕(先王)에 밀려 이 사람에 대한 자료를 찾기가 꽤 힘든 편이다. 이름인 대인수로 검색하는 것이 더 좋을 정도. 그런데 대인수로 검색해도 나오는게 별로 없다. 선왕뿐 아니라 발해 왕들 대부분이 시호로 검색하면 휘로 검색하는 것에 비해 자료를 찾기 힘들다. 1대 고왕의 경우도 고왕보단 대조영으로 훨씬 널리 알려져 있고, 2대 무왕백제에도 있어서 혼동되고 3대 문왕중국주나라에도 있다. 그 외 군주들은 검색해도 나오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혼동하고 말고를 따지는 의미도 없다. 그나마 마지막 군주 대인선은 발해의 멸망과 관련하여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워낙 기록이 부족한 발해의 국왕이다 보니 정확한 출생연도는 확인할 수 없지만 선왕은 즉위 당시 나이가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선왕이 죽은 지 2년 후 선왕의 증손자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는 기록이 존재하는데, 사신으로 갈 정도로 장성한 증손자가 존재했다는 점에서 60대에 즉위했을 가능성도 있다. 12년이라는 길지 않은 재위 기간과 선왕 본인보다 일찍 죽은 아들 대신 손자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는 점 역시 선왕의 즉위 시기가 상당히 고령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증거다. 선왕이 대략 760년생 정도라고 한다면[6] 실제로 한참 장성한 나이에 문왕 후기부터의 25년 가까운 발해 궁중의 혼란기를 겪어온 산 증인이자 혼란기 최후의 승자로 볼 수 있는 셈...

5. 가족관계

6. 연표

818년 5월 당에서 선왕에게 권작을 보내주다.
818년 11월 모감덕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818~820년 사이 말갈의 여러 부족들을 정벌하다.
820년 1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820년 12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821년 ?월 조카 대공칙과 신능지를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821년 11월 정당성좌윤 왕문구 등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822년 1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823년 ?월 대다영, 대정순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823년 11월 고정태 등 101명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824년 2월 대총예 등 50명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825년 3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825년 12월 고승조 등 103인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826년 1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826년 3월 지금의 함경북도 명천군개심사를 창건하다.
826년 7월 신라 헌덕왕이 패강에 장성 300리를 축성하였다.
827년 4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827년 12월 정당성좌윤 왕문구를 다시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828년 12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829년 12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830년 7월 15일 순목황후간왕의 릉에 같이 안장하다.
830년 10월 선왕이 죽자 손자 대이진이 즉위하였다.

7. 창작물

상술했듯 대중적인 인지도가 미비한 데다가 발해 자체를 대조영 외에는 사극에서 다룬 적이 없기 때문에 창작물에는 등장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다만 적당히 각색만 해주면 사극에서도 나름대로 통할 만한 요소가 있는데, 대조영 직계 계열이 아닌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후손, 즉 왕위 계승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을 방계 출신으로 왕이 되어 문왕 사후 시작된 25년 간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발해의 중흥기를 이끌었다는 점이 그것. 이와 비슷하게 인생 전반부에 고생하다 군주가 되어 명군이 된 예로는 고구려의 미천왕고려의 현종이 있다. 물론 인생 전반부에 한미하게 살았던 게 비슷하단 거지 이 세 군주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7]

그나마 김대원의 단편 순정만화 《답신》(1998년 서울문화사에서 출간. 2016년부터 레진코믹스에서 서비스 중)에서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한다. 발해 상경성으로 유학온 서경 출신 미소년 고시례[8]와의 만남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 방계 왕족이라는 사실을 반영하듯 작품에서 당시 발해 왕족들이 재능이 뛰어난 대인수를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있다는 묘사가 나온다.


[1] 지식백과에서는 아들인 대신덕이 즉위하지 못 하고 사망해서 손자인 대이진이 즉위한 것을 보면 즉위 당시 40세 이상으로 추정되며 770년대 이전 생일 것으로 추정했다.#사실 770년보다 훨씬 이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훨씬 큰데, 그가 죽은 지 2년 후인 832년에 손자인 대이진의 아들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간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정도 장성한 증손자가 생전에 있었단 이야기인데 전근대 왕가가 결혼과 출산이 빠르긴 했다지만, 꽤 장수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셈이다. 선왕은 대야발의 증손자이고 6대 왕인 강왕과 같은 항렬이기 때문에 750년대에 출생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2] 유득공의 《발해고》 <신고> 기록.[3] 강왕과 더불어 유이하게 금자광록대부 작위를 받음[4] 이것은 전임 왕들의 즉위 과정과 유사하다. 대명충과 대언의 모두 권지국무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당시 발해의 왕위 계승 기준에서 혈통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상황이었을 수 있다. 대명충과 대언의는 왕의 동생 자격이 아닌 권지국무 자격으로 즉위했고, 대원의라는 전례 또한 있기 때문. 혹은 대인수의 추정 나이나 방계 중에서도 엄청난 방계였던 그의 혈통을 생각해 볼 때 왕조의 변화에 준하는 찬탈이나 선양이 있었을 확률도 있다.[5] 증조부다. 자신을 1세로 보기 때문. 단 4세가 아닌 4대면 고조부다. 이 때는 자신을 0대로 본다. "(세수)=(대수)+1"를 떠올리면 쉽다.[6] 상술한 각주의 내용처럼 선왕은 강왕과 같은 항렬이기 때문에(선왕-대야발 4대손, 강왕-대조영 4대손) 강왕과 비슷하게 750년생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7] 미천왕과 현종은 젊은 나이에 신하들에 의해 옹립된 왕이고, 선왕은 고령의 나이인 본인이 직접 왕권을 쟁취해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미천왕과 현종은 젊은 나이에 즉위한 이유 때문인지 각각 재위 기간이 30년과 22년으로 긴 편이지만 선왕은 고령의 나이로 즉위했기 때문에 12년으로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8] 사실 여인으로 본명은 고시리. 고시례는 쌍둥이 오빠의 이름으로 그 이름을 빌려 경성으로 유학을 갔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