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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31a2> 발해 제14대 국왕 大瑋瑎 | 대위해 | |
시호 | 불명 |
성씨 | 대(大) |
이름 | 위해(瑋瑎) / 장해(璋諧)(?)[1] |
출생 | 미상[2] |
사망 | 906년 (향년 불명) |
재위기간 | 882년 / 894년 ~ 906년 (24년 / 12년) |
[clearfix]
1. 개요
발해의 제14대(?)[3] 가독부이자 군주. 전임자로 추정되는 대현석과 후임자로 추정되는 대인선과의 관계는 알 수 없다.[4]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역사서에 기록되지 못한 인물이었으나, 1940년 중국의 역사학자인 진위푸(金毓黻)가 《당회요》(唐會要)[5]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함으로써 발해의 역대 군주 중 하나로 밝혀졌다.
2. 생애
사실 즉위년도가 몇 년인지에 대한 정보가 없는데 발해 말기의 기록은 그만큼 심각하게 부족하다. 고구려는 신라는 물론 당나라와 수백년간 대립했으며 자체 기록도 후대에 전수된 정황이 있기 때문에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지만 발해에 이르러서는 신라와 데면데면하고 당나라와는 조공 외교를 했을 뿐이고 발해를 무너뜨린 내분 및 요나라의 초토화 작전이 어우러지는 바람에 고조선이나 부여처럼 되고 말았다.[6]894년 일본에 배정(裵頲)을 파견한 것이 첫 등장이어서 이것으로 즉위년도를 추정하는게 다수이다. 이 배정이라는 인물이 882년 105인으로 된 대사절단을 일본에 보낼 때 사절단 대표로도 등장하여 실제 즉위는 882년경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882년 즉위설을 따를 경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886년 신라 헌강왕 재위 기간에 신라 북부 북진(北鎭)에서 보고하기를
“적국인(狄國人)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
고 말하면서 그 나무 조각을 가져다 바쳤다. 거기에는 는 15자[7]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보로국과 흑수국은 지금의 북한 안변군 이북 지역에 살던 여진 계통 부락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들이 독립 국가인 것처럼 신라에 통교를 시도하는 것을 볼 때, 발해가 멸망하기 40여 년 전인 9세기 후반, 대위해 재위 기간쯤 되면 발해가 신라와 인접했던 한반도 북부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잃어버린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들은 고려에도 저항하고 살다가 조선에 완전히 흡수당한다.대위해 즉위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 상태인 것이 확인되는 만큼 기존 왕실에 비해 왕위의 정통성이 떨어지는 인사가 아니었는가 추정된다. 이미 대위해 시대에, 신라의 후삼국시대처럼 지방 세력들이 독립해서 찢어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위의 흑수국과 보로국의 귀부 건과 더불어 평양 호족 검용(후삼국시대), 증성의 도적 명귀 등이 대위해 시기(905년)에 궁예에게 귀부한 것이 대표적이며 최소한 남경남해부 인근과 남부 국경지대가 발해의 통제력에서 벗어난 것을 추정할 수 있고[8] 이 지역은 926년 여름에 거란에 완전히 항복한다.
897년 7월, 발해의 왕자 대봉예(大封裔)가 하정사(賀正使)로 당나라에 들어간 사실이 최치원이 쓴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 기록되어 있다. 대봉예는 당나라와 외국 사신이 만나는 자리에서 신라 사신보다 발해 사신이 높은 자리에 서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당나라는 발해보다 신라와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거절했다. <사불허북국거상표>는 이 사건이 신라에도 알려지자 신라 효공왕이 당나라 측에 고맙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대봉예는 시기와 정황상 대위해의 아들로 생각되나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며, 《신당서》에는 발해가 '장자는 부왕(副王)이라 하고, 모든 아들은 왕자(王子)라 일컫는다.'(長子曰「副王」, 諸子曰「王子」.)라는 구절이 있어 대봉예가 장자는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장자였다면 왕자로 기록하지 않고, 부왕이라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불허북국거상표>는 신라 및 당나라의 입장에서 쓰였으므로 일부러 부왕 칭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고 반박할 수 있다.
905년, 당나라에 오소도(烏炤度)를 파견하였으며 그 외에 내치에 관한 기록은 전무하다. 기록이 없기로는 손에 꼽히는 왕이기 때문에 시호도 전해지지 않는다. '철왕'(澈王)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디서 나왔는지 어떻게 기록된 건지 근거가 없다. 재위 기간도 10년이 넘었건만 휘인 위해(瑋瑎)조차도 예전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위계'로 잘못 표기된 경우가 많았다.
언제 사망하였는지도 알 수 없고, 대위해와 대인선 사이에 군주가 더 있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는 후대에 즉위하는 대인선과 함께 배(裵)씨 세력을 중심으로 국정을 이끌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적원 자체는 당나라의 비서성이 발해에 맞게 개정된 것이고, 6부의 상급 기관이자 귀족회의 역할을 한 정당성이 882년을 기점으로 자취를 감추었다는 점은 신권이 소멸에 이를 정도로 몰락하여 전제 왕권이 확립되었고, 이에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발해와 제도가 비슷했던 고려에서도 정상적인 운영 체제가 붕괴됐을 때 도병마사가, 조선에서도 비변사가 득세했던 사례가 있다.
886년 시점에 발해가 신라와의 접경 지역에 대한 통치 능력을 상실한 것과 《신당서》에서 대현석 이후의 국왕이 누락된 것도 이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송막기문》에서 언급된 발해의 우성망족인 고(高)·장(張)·양(楊)·두(竇)[9]·오(烏)·이(李)가 이 시점에서 사라지고, 뜬금없는 배(裵)씨가 외교 사절단의 전면에 등장하며 부자가 50여 년 동안 하정사 지위를 독점하는 등의 정황을 보면 유추가 가능하다. 배씨는 발해에서 오래 터를 잡은 가문이 아닌 신라나 당나라 귀화인 출신 가문일 가능성도 있다. 우선 확실한 신라계 성씨인 박씨 인명이 발해 말기에 확인되므로 9세기 동아시아 국가간 상호 귀화를 상정할 수 있다. 배씨는 그 전까진 발해 기록에서 별로 등장하지 않다가 갑자기 많이 등장하는데 신라에서는 6부 토착성씨 중 하나로 시조는 신라의 건국공신 배지타이며, 중시조인 배현경과 대위해 치세는 거의 같은 시대이다. 또 당나라에서도 배씨는 오래된 문벌귀족 성씨였기 때문.[10] 이에 대해서는 882년에 발해에서 큰 정변이 있던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는 상황. 참고자료
3. 당회요의 기록
乾寧二年十月. 賜渤海王大瑋瑎敕書. 翰林稱加官合是中書撰書意. 諮報中書.
<<唐會要 卷五十七 翰林院>>
건녕 2년(895년) 10월, 발해왕 대위해에게 칙서를 내렸다. 한림(翰林)[11]이 이르기를 관직을 더해주는 것은 중서(中書)가 찬술한 글의 뜻에 따르는 것이 합당하니 중서에 보고하였다.번역 번역2 [12]] 번역3
<<당회요 권 57 한림원>>
<<唐會要 卷五十七 翰林院>>
건녕 2년(895년) 10월, 발해왕 대위해에게 칙서를 내렸다. 한림(翰林)[11]이 이르기를 관직을 더해주는 것은 중서(中書)가 찬술한 글의 뜻에 따르는 것이 합당하니 중서에 보고하였다.번역 번역2 [12]] 번역3
<<당회요 권 57 한림원>>
기존 발해왕들이 받았던 관직인 은청광록대부 홀한주도독 발해국왕이라는 부분이 없고, 대신 한림(원)이 이르기를 (대위해의) 관직을 더하는 것은 중서(성)이 쓴 글의 뜻에 따르는 것이 합당하니 중서성에 보고했다는 내용의 기록만 남아있지만, 본 기록을 통해 대위해가 이전에 어떠한 관직을 받았고(아마도 발해왕들이 받았던 기존의 관직) 최소 895년 3월 이전에 당에 사신을 보냈고 이미 그 이전에 즉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 연표
- 882년 겨울, 문적원소감 배정 등 105명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대현석 시기?)
- 886년, 말갈의 보로국과 흑수국이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였다. (대현석 시기?)
- 894년 5월, 문적원감 배정 등 105명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 895년 10월, 당에서 대위해에게 칙서를 내렸다.
- 897년 7월, 아들 하정사 대봉예가 당 조정에 신라의 사신보다 높은 자리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 906년, 국상 오소도를 당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이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 906년, 대위해가 죽고 대인선이 즉위하였다.
[1] 한원군서(翰苑群書)에서의 표기.[2] 아들 대봉예의 존재로 추정가능한 생년도는 빨라봐야 860년대 생이다.[3] 정확한 대수는 불명.[4] 이들이 전임자, 후임자인지도 불명이다.[5] 송나라 때의 왕부(王溥)가 당나라의 법제와 국정에 대하여 서술한 책.[6] 요나라가 일부러 초토화한 게 아니라 백두산이 분화하여 어쩔 수 없이 발해의 중심지에서 모든 걸 철수시킨 거라는 가설도 있지만 발해 멸망 이후 946년 대분화한 것이 확실시되고 화산재가 동부로 퍼졌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상경용천부로부터 지나치게 가까운 것은 변하지 않으니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다.[7] 寳露國與黒水國人, 共向新羅國和通.[8] 단, 검용의 정체, 귀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존재한다. 검용(후삼국시대) 문서 참고.[9] 이 성씨는 등장한 적이 아예 없기 때문에 하(賀)의 오기라는 설이 강하다.[10] 수백년 전 인물인 배수(삼국지), 배송지 등이 있다.[11] 한원군서에서는 원중(院中)이라고 쓰여 있다.[12] 해당 링크의 자료에서는 한원군서에서의 표현인 대장해로 기록되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