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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구려의 추정 강역[1] | ||
<colbgcolor=brown><colcolor=white> 공식 명칭 | 고려?[2] 소고구려는 현대에 구분하기 쉽게 만든 명칭이다. | |
위치 | 요동반도 일대 | |
수도 | 불명 | |
정치 체제 | 군주제 | |
국성 | 고(高) | |
국가 원수 | 조선군왕 | |
언어 | 고구려어 | |
민족 | 고구려 유민[3] | |
존속 기간 | 699년(?) ~ 알수없음 | |
주요 사건 | 699년 건국(?) | |
성립 이전 | 고구려 | |
멸망 이후 | 발해, 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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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멸망 후 요동 지방에 고구려의 잔여 유민세력이 세운 나라가 존재했다는 설이다.아래에 소개하듯 기록이 매우 부족하고 모호하기 때문에 소고구려라는 '독립된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은 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제기된 하나의 설이고, 사실상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다루는 역사지도나 한국사 연표에서도 웬만하면 표시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역사 기록에는 '고려'라고 전하지만. 이전의 고구려[4]나 이후의 고려와의 구분을 위해 소고구려라고 부른다. 고구려는 5세기 이후 고려로 국호를 바꿨는데 현재 고구려라고 부르는 것은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함이다. 북한에서는 고구려후국이라 부르며 발해의 번국 취급하지만 근거는 없다.
2. 상세
다른 몇 가지 보조 자료도 있지만 소고구려가 존재했다는 설은 《신당서》 <동이열전>과 그것을 인용한 위 《삼국사기》의 저 부분을 핵심으로 한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라는 지방통치기구를 옛 고구려 땅에 만들었고, 현지인의 반발을 줄이기 위해 포로로 잡았던 옛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과 그 아들 고덕무를 지방관으로 앉혔는데 이후 당나라의 내부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점차 요동에 대한 당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떨어져 나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고덕무는 소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그러나 독립적인 지위가 아닌 당 관직 체계 내의 안동 도독으로 존재하는 이상 적어도 이 시기의 고덕무 체제를 독립국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소고구려가 독립국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당나라 본국이 안사의 난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면서 통제를 벗어나 독립한 것으로 주장한다. 818년에는 '고려국'이 조공을 보냈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러나 소고구려가 자리했다고 여겨지는 요동 기준으로 좀 더 동북쪽에서 시작한 발해가 선왕이 즉위한 후 영역을 확대해나가면서 결국 소고구려의 요동 지역까지 편입해 발해에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소고구려가 존재했다면 위 기사는 건국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텐데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존속하면서 독립국처럼 이어졌는가?’라는 것이다. 《신당서》 이외에 《구당서》, 《당회요》, 《책부원귀》 등 《신당서》보다 먼저 쓰였고, 당 《실록》을 기초로 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에서는 고덕무 도독 임명 기사 이후 호구가 점차 줄어들고, 돌궐과 말갈에 나뉘어 투항해 고씨 군장의 대가 끊겼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신당서》의 후에 점차 나라를 세웠다는 기술과 배치된다.
직후인 704년에는 고구려 유민과 별 관련없는 본토 중국인 당휴경(唐休璟)이 안동 도호에 임명되는데 앞서 고덕무가 부임한 안동도호부가 소고구려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근거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이 부분은 고덕무의 요동 고구려 유민 집단이 698~704년 사이에 이미 떨어져 나가버렸다고 칠 수는 있다.
《구당서》 <현종본기>의 725년 태산 봉선의식 기사에서는 봉선의식을 축하하러 온 나라들을 '조회하러 온 외국', '당나라의 내신 번국', '추장' 3단계로 나눠 열거하고 있는데 여기서 신라, 말갈(아마도 발해), 일본은 조회하러 온 외국으로 소개한 반면, '고려 조선왕'과 '백제 대방왕'은 내신 번국으로 소개하고 있다. 내신 번국은 당나라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당나라 내지에 사민되었거나 본거지를 잃고 당나라에 투항해 복속한 이들을 말한다. 이 시기 소고구려라는 독립국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당나라 휘하의 명목상 칭호 상태였다는 것이다.
《신당서》 <지리지>에서는 801년 작성된 가탐의 《도리기》를 인용해서 요동성, 건안성, 개모성, 신성 등 요동의 주요 성을 소개하는데 고려라는 국명이 나타나지 않아 바로 뒤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발해국의 영역인가 명확히 밝힌 부분과 대조된다. 또한 환도현성(환도산성)을 옛 고려의 왕도(故高麗王都)라고 썼는데, 고려(고구려)라는 나라가 801년 시점에 존재하지 않는 옛날 이야기처럼 묘사된다.
반면 소고구려가 외부의 국가로 이어졌다는 소고구려론을 뒷받침하는 대표적 기록으로 699년 이후 '고려'가 당나라에 조공한 기사 2건이 《책부원귀》에 실려있는데, 710년과 818년이다. 이 818년 기사 덕분에 소고구려를 100년이 넘는 존속기간을 가진 나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근데 이 두 기사는 소고구려론을 확실히 지지할 수 있는 근거기도 하지만 당나라 영토 코앞의 요동보다 더 거리가 먼 발해나 신라가 같은 기간 몇백번을 당나라에 조공했는데 여기는 100년 넘는 텀으로 고작 2번 조공한다는 건 확실히 부자연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699년 고덕무의 그 '나라'와 710년에 조공한 '고려'와 818년의 '고려'가 쭉 이어진 게 아니라 중간에 끊겨 서로 다른 존재일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1909년의 한국(대한제국)과 2019년의 한국(대한민국)은 줄여서 같은 한국이라 썼지만 실제로는 서로 같은 나라가 아니며, 잘 알다시피 중간에는 나라가 사라진 기간도 있었다.
게다가 중간 텀이 이건 길어도 너무 길어서 중국 측의 오해라고 볼 여지도 있다. 그리고 동쪽 저편의 발해도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어서 '고려'라고 자칭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혼선을 주었을 여지도 있다.
물론 요동~서북한 지역에 고구려 유민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699년부터 818년까지 소고구려라는 독립국이 쭉 있었다고 보기에는 인정할 수 있을 법한 기록도, 부정적으로 보이는 기록도 모두 존재하고 이게 서로 모순되는 부분도 많다. 영원히 떡밥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3. 기타
- 비슷한 예로 신라가 구 백제 지역에 세운 괴뢰국인 보덕국이 있으나, 얼마 못가서 반란이 진압되어 사라졌다. 일본에서도 고구려 왕족을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지배자로 임명하기도 했으나, 왕가의 계승으로서 큰 의미를 갖기는 어려워 보인다.
- 《삼국사기》 827년 3월에 '고려승 구덕'이라는 인물이 신라에 들어온 것을 소고구려 유민의 신라 귀화로 보기도 하지만, 승려의 국경을 넘나드는 이동이라는게 당시 시대상으로는 워낙 숱한 일이라 이걸 본국이 몰락해서 귀순했다는 이런 식으로 끼워맞추기도 너무 상상의 나래를 넓게 펼치는 식이라 난감하다. 국제교류가 경직되고 국가불교가 쇠퇴하는 명-조선 이전까지 동아시아 사회에서 국경을 가장 많이 넘나들었던 게 승려와 사신이다. 더구나 구덕이 당나라에 가서 경전을 구해온 점을 보면 소고구려의 멸망과는 무관하게 이곳 저곳 돌아다니던 승려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엔닌, 신라의 혜초 등과 별 차이가 없다. 따라서 소고구려 출신이라 고구려승이라 부른 게 아니라 그냥 고구려계 유민 출신이라 고구려승이라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5]
- 발해의 국호가 발해가 아닌 고려였다는 주장도 있으므로 그것과 혼동하여 나타난 결과물일 가능성도 있다.
4. 역대 국왕
대수 | 휘 | 재위기간 | 비고 |
01 | 고덕무(高德武) | 699년(?) ~ ? |
5. 참고자로
- '신라의 북방 영토와 김유신' - 강경구 저,학연문화사
- 高句麗 滅亡 後 遼東에 再建된 高句麗 - 서광석, 2018, 푸단대학[6]
6. 외부 링크
- 고구려후국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 카페
7. 같이보기
[1] 빨간 점선은 북한이 주장하는 소고구려의 강역이고 파란 점선은 대한민국이 주장하는 강역이다.[2] 장수왕이 개칭한 고구려의 국호 고려, 그리고 보덕국, 왕건의 고려등이 고려라는 국호를 같이 사용함으로서 소고구려도 고려라는 명칭을 사용했을거라 예상된다.[3] 고구려가 예맥, 삼한, 말갈족 등으로 구성되었기에 거의 같을 것이다.[4] 이 쪽도 중기 이후로 당시 국호는 고려였으나 후대 왕조와의 구분을 위해 고구려로 편의상 칭하는 것이다.[5] 비슷하게 신라구의 출몰 당시를 보여주는 거타지 설화를 보면 백제계가 주류가 된 서해안의 해적들을 그냥 백제 해적놈들이라고 부른다. 후삼국시대가 곧이어 개막했을 정도로 유민의식과 구별의식이 잔존해 있던 때였으니만큼 구분해서 부른 게 이상하진 않다.[6] 다만 해당 논문은 소고구려가 10세기 초까지 존속했으며, 8세기 초 당나라로 투항한 고구려계 돌궐인 고문간을 소고구려의 왕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