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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황제들의 제사
봉선(封禪)은 중국의 천자(황제)들이 천하를 얻게된 후, 이 사실을 하늘과 땅에 고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로 봉(封)은 하늘에 지내는 제사, 선(禪)은 땅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황제란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존재로서 하늘 아래에 황제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그 땅의 사람 중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었으니, 이러한 자리에 올랐을 때 이 사실을 하늘과 땅에 고하는 것은 당연했다.기록상으로 봉선을 행한 중국 최초의 황제는 시황제이다. 다만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재상 관이오의 저서라고 전해지는 《관자》에 시황제 이전에도 상고시대부터 무려 황제 72명이 봉선을 했다는 기록이 있긴 하다. 하지만 전해진 책 자체에 위서 논란도 있고, 이 책 외에는 이런 내용이나 기록이 없어 신뢰성이 떨어진다.
시황제는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하고 2년이 지난 기원전 219년에 처음으로 봉선을 행했다. 통일 후 많은 방사(方士)들이 시황제에게 봉선을 권해서 시황제도 봉선을 하려고 했으나, 막상 봉선을 하려고하니 누구도 봉선을 하는 방법과 방식을 모르고 있어 화가 난 시황제가 방사들을 다 쫓아냈다는 기록이 《사기》에 있다.
그래서 시황제는 자신의 본국, 진나라에서 행해지던 천신제(天神祭)의 방식을 차용해 태산에 올라 흙을 쌓아 단을 만든 후 봉 제사를, 태산 남쪽 기슭의 양보산(梁父山)이라는 작은 산에서는 땅을 평평하게 다진 후 선 제사를 했다. 이러한 황제의 봉선은 아무나 참여할 수 없는 극소수만의 비밀이었다. 따라서 황제의 신하들은 봉선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었는데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이 한무제의 봉선에 참여하지 못해 실의에 빠져 홧병으로 죽은 것이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아무튼 시황제 이후 봉선은 태산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되어 측천무후를 제외한 역대 황제들은 수도가 어디든간에 모두 태산에거 봉선을 했다.[1]
시황제 이후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에서는 처음엔 봉선을 하지 않다가 한무제에 이르러 다시 봉선을 했다. 한무제는 중독된 것처럼 봉선을 자주 해서 재위기간 동안 8번이나 했는데, 나중으로 갈수록 점점 다양한 연출을 행했다. 황제가 봉선을 하는데 하늘이 상서롭게 느껴지는 '응답'을 보여준다면 효과가 매우 좋을 것이므로, 한무제는 이국 땅에서 특이한 짐승들을 잡아와 봉선을 할 때 풀어놓으며 마치 기린이나 봉황이 나타난 것 같은 일종의 쇼를 했다.
하지만 황제라고 해도 봉선을 하고 싶다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안이나 낙양에서 몇 달에 걸쳐 황제가 직접 태산까지 가야 하고, 그때 수많은 인력과 물자가 따라가야 하다보니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또 황제의 위엄을 보여줘야 하므로 주변국에서 사신단을 파견하도록 해야 했다. 그러려면 나라가 안팎으로 오랜기간 태평성대여야 하는 것은 기본 조건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통일 왕조의 건설, 재위 중에 태평성대가 지속되면서 상서로운 일들이 일어날 때가 봉선의 조건이라고 했다.
시황제, 한무제 이후로도 봉선을 하는 황제들이 종종 나왔는데 한나라에서는 광무제, 한장제, 한안제, 수나라의 수문제, 당나라의 당고종, 측천무후(무주), 당현종, 북송의 송진종이 봉선을 했고 원나라와 명나라의 황제들은 봉선을 하지 않아 한동안 맥이 끊겼다가 청나라에 들어와 강희제와 건륭제가 다시 봉선을 행했다. 건륭제도 한무제처럼 봉선을 자주했는데 6번이나 했다.
666년 정초에 있었던 당고종의 봉선에는 고구려의 태자 고복남과 백제의 태자 부여융, 신라의 왕족 김인문이 모두 참여했는데, 이는 당시 한반도의 험난한 정세와 이에 깊이 관여한 당나라의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봉선은 황후가 된 측천무후가 지속적으로 당고종에게 건의를 한 끝에 성사되었는데, 봉선을 준비하던 중 연개소문이 사망했다. 당나라는 봉선 도중 고구려에 내분이 생겼음을 알아차리고는 바로 그 해 겨울에 군대를 일으켜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