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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16:36:38

발해/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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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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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융합된 문화3. 문학4. 언어와 문자5. 음악
5.1. 왕실 음악 기관5.2. 발해금과 발해교방
5.2.1. 발해금5.2.2. 발해교방
5.3. 고고학 자료에 나타난 발해 악기5.4. 발해 사신과 발해악
6. 식문화
6.1. 식재료
6.1.1. 육류6.1.2. 농산물6.1.3. 수산물
6.2. 그릇
7. 도자기8. 복식, 갑옷9. 건축
9.1. 상경용천부9.2. 고분
9.2.1. 정효공주묘
10. 발해 불교11. 발해 도교12. 풍습

1. 개요

발해의 문화를 다루는 문서.

2. 융합된 문화

발해고구려 문화의 토대 위에서 당나라의 문화를 수용했으며, 말갈인의 토착 문화와 융화되어 이를 바탕으로 발해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는 당의 수도 장안성을 본떠 계획도시로 건설하였는데, 외성과 내성, 주작대로를 갖추었다. 그 안에 궁궐과 절을 세웠는데 궁궐터에서 발견된 온돌 장치, 절터에서 나온 벽돌과 기와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하고 있다. 무덤을 보더라도 고구려와 당나라의 영향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가령 정혜공주묘는 굴식 돌방 무덤 양식으로 고구려 고분에서 보이는 모줄임천장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보다 늦게 만들어진 정효공주묘는 벽돌 무덤으로 당과 고구려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데, 내부의 벽화는 당에서 유행하던 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한편 발해 초기의 흙 무덤과 출토 유물을 통해 말갈족 계통의 전통도 알 수 있다.

발해에서도 같은 시대 당ㆍ신라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성행하여 주요 도시에 사찰을 세웠다. 수도 상경에서는 무려 10여 개의 대규모 절터가 발견되었고,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많은 불상이 나왔으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과 석등도 볼 수 있다. 탑은 당의 양식을 따라 벽돌로 만들었으며, 그 중엔 무덤 위에 세운 것도 있어 발해만의 특색을 보여준다. 절에 세운 석등 중에는 높이가 6m가 넘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석등도 있어 발해인의 힘찬 기상을 느낄 수 있다.

3. 문학

발해 관련 사료로 일본과 주고 받은 국서가 일본에 많이 보관되어 있으며, 당나라 유학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중 당나라 문인들이 발해인들에게 준 시 등 문학작품들도 소중한 자료로 연구되고 있다. 발해는 당나라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일컬을 정도로 번영을 누리고 높은 한문학 수준을 자랑했지만, 거란의 침공으로 인해 발해에서 편찬되었을 거의 모든 문헌 자료가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발해 문학 관련 사료는 외국에 전해진 시문과 고고학 발굴의 성과뿐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어젯밤 용과 같은 구름이 솟아오르더니
昨夜竜雲上
오늘 아침 학처럼 흰 눈이 내려 신선하구나.
今朝鶴雪新
나무에 하얀 꽃이 핀 듯 신기해하며 보지만
怪看花発樹
봄이 온 줄 놀라는 새소리는 듣지 못했네.
不聴鳥驚春
나부끼는 눈 그림자는 낙수의 신녀인 듯하고
廻影疑神女
고상한 노래는 영인(郢人)의 백설곡 같네
高歌似郢人
유란백설(幽蘭白雪)을 잇기 어려우니
幽蘭難可継
차라리 그대 흉내라도 내고 싶다오.
更欲效而嚬
오언(五言), 기노아손공의 <눈을 읊다>라는 시에 화운하다(奉和紀朝臣公詠雪詩). 1수. 양태사作
고요한 여름날 밝은 밤이러니
寂寂朱明夜
둥글둥글 하얗게 달이 떠 있네.
團團白月輪.
곳곳 산마다 환한 달그림자 눈부시고
幾山明影徹
온갖 사물들 물에 비친 하늘에 새로워라.
万象水天新.
버려진 여인은 달을 보니 원망이 생기고
棄妾看生悵
길 떠난 나그네는 달을 마주하니 싱숭생숭하네.
羈情對動神.
뉘라서 천 리길 떨어졌다 말하랴
誰言千里隔
고향이든 타향이든 모두 잘 비춰주고 있는 것을.
能照兩鄕人.
판(板) 영객사가 지어 준 <달을 보며 고향을 그리네>에 화운하다. 1수. 왕효렴作
그대 나라 찾아온 나는 부끄럽나니
入朝貴國慙下客
오늘 7일, 은혜 입어 귀빈이 되었구려.
七日承恩作上賓
다시 보니, 아름다운 풍악에 기녀의 자취 없고
更見鳳聲無妓態
풍류가 온 나라에 봄빛을 일렁이게 하도다.
風流變動一國春
정월 7일, 궁중에서 잔치를 모시는 시. 1수. 석인정作

발해의 시 중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지는 경우는 발해 사신들이 일본으로 가서 지은 시들이 일본 문헌에 수록되어 전해지는 것들이며 양태사, 왕효렴, 석인정, 배정(발해), 배구(발해) 등이 지은 시들이 남아 있다. 또 이러한 교류는 당연히 일본의 한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략)…… 공주는 우리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의 둘째 딸이다. 생각하건대 고왕(高王), 무왕(武王)의 조상들과 아버지 문왕(文王)은 왕도(王道)를 일으키고 무공(武功)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고 능히 말할 수 있으니, 만일 이들이 때를 맞추어 정사(政事)를 처리하면 그 밝기가 일월(日月)이 내려 비치는 것과 같고, 기강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면 그 어진 것이 천지(天地)가 만물을 포용하는 것과 같았다. 이들이야말로 우순(虞舜)과 짝할 만하고 하우(夏禹)와 닮았으며, 상(商) 탕왕(湯王)과 같은 지혜를 배양하고 주(周) 문왕(文王)과 같은 도략(韜略)을 갖추었다. 하늘에서 이들을 도와주니, 위엄을 베풀어 길하게 되었도다.

공주는 무산(武山)에서 영기(靈氣)를 이어받고, 낙수(洛水)에서 신선(神仙)에 감응받았다. 그녀는 궁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순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용모는 보기 드물게 뛰어나 옥과 같은 나무에 핀 꽃들처럼 아름다웠고, 품성은 비할 데 없이 정결하여 곤륜산(崑崙山)에서 난 한 조각의 옥처럼 온화하였다. 일찍이 여사(女師)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능히 그와 같아지려고 하였고, 매번 한(漢) 반소(班昭)를 사모하여 시서(詩書)를 좋아하고 예악(禮樂)을 즐겼다. 총명한 지혜는 비할 바 없고, 우아한 품성은 저절로 타고난 것이었다. 공주는 훌륭한 배필로서 군자에게 시집갔다. 그리하여 한 수레에 탄 부부로서 친밀한 모습을 보였고, 한 집안의 사람으로서 영원한 지조를 지켰다. 그녀는 부드럽고 공손하고 또한 우아하였으며, 신중하게 행동하고 겸손하였다. 소루(簫樓) 위에서 한 쌍의 봉황새가 노래 부르는 것 같았고, 경대(鏡臺) 가운데에서 한 쌍의 난조(鸞鳥)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움직일 때면 몸에 단 패옥이 소리를 냈고, 머물 때면 의복의 띠를 조심하였다. 문장력이 뛰어나고 말은 이치에 맞았으며, 갈고 닦아서 순결한 지조를 갖추고자 하였다. 한(漢) 원제(元帝)의 딸 경무(敬武)공주처럼 아름다운 봉지(封地)에서 살았고, 한(漢) 고조(高祖)의 딸 노원(魯元)공주처럼 훌륭한 가문에서 생활하였다. 부부 사이는 거문고와 큰 거문고처럼 잘 어울렸고, 창포와 난초처럼 향기로웠다. 그러나 남편이 먼저 돌아갈 것을 누가 알았으랴, 지모(智謀)를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지 못하게 되었구나. 어린 아들도 역시 일찍 죽어, 미처 소년으로서의 나이를 지나지 못하였다. 공주는 직실(織室)을 나와 눈물을 뿌렸고, 빈 방을 바라보며 수심을 머금었다. 육행(六行)을 크게 갖추고 삼종(三從)을 지켰다. 위(衛) 공백(共伯)의 처 공강(共姜)의 맹세를 배웠고, 제기량(齊杞梁)의 처와 같은 애처로움을 품었다. 부왕(父王)에게 은혜를 받아 스스로 부덕(婦德)을 품고 살았다. 인생길이 절반도 되지 않았는데 세월은 달음질치고, 흐르는 물은 내를 이루어 계곡에 견고하게 감추어진 배를 쉽게 움직이는구나.

아아, 공주는 보력(寶曆) 4년(777) 여름 4월 14일 을미일(乙未日)에 외제(外第)에서 사망하니, 나이는 40세였다. 이에 시호(諡號)를 정혜공주라고 하였다. 보력 7년(780) 11월 24일 갑신일(甲申日)에 진릉(珍陵)의 서쪽 언덕에 배장(陪葬)하였으니, 이것은 예의에 맞는 것이다. ……(중략)…… 보력 7년 11월 24일.
《정혜공주 묘지》

발해 문학 작품 중 당대 발해의 영역 내에서 발견된 2편의 비문(碑文)이 있는데, 바로 <정혜공주묘비>와 <정효공주묘비>이다. 이 비문들은 변려체의 형식을 갖췄으며, 감각과 표현을 최대한 세련되게 갖춘 귀족 문학의 기풍을 아주 잘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두 비문은 고유 명사나 숫자 따위만 다르고, 다른 대목은 거의 같다. 고정된 격식을 마련하고 필요한 대목만 고쳐 썼음을 알 수 있다.
함화(咸和) 4년(대이진 4년, 834년) 윤 5월 8일에 과거 허왕부(許王府)의 참군(參軍) 기도위(騎都尉)였던 조문휴(趙文休)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삼가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음(觀音)⋅대세지(大勢至) 등의 보살존상(菩薩尊像)을 조성하였으니, 불문(佛門)의 권속이 모두 6바라밀(六波羅蜜)을 실천하고, 불가(佛家)의 창생이 함께 8정(正)을 뛰어넘기를 바라노라. 이에 기리는 글을 짓는다.

크도다! 불법의 진리여, 지극하도다! 올바른 깨달음이여. 4생(生)의 장애를 뚫고 지났으며, 5탁(濁)의 세계를 배를 타고 건넜도다. 이는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사라지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는 것이니, 자비로운 구름이 영원히 드리우고, 지혜로운 태양이 항상 밝으리라.
《함화4년명 불상 명문》

발해의 불교문학은 함화4년명 불상에 적힌 명문을 통해 유학처럼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홍라녀 녹라녀 전설은 지금까지도 만주 지방에서 내려오는 얼마 안 되는 발해의 전설이며 영화 무영검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4. 언어와 문자

언어는 역사 문화의 계승관계 확인의 주요 기준이기 때문에 발해인들이 고구려어를 썼는지, 말갈어를 썼는지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나, 현 시점에선 발해어 중에서 유일하게 그들의 왕을 가독부, 성왕, 기하로 불렀다는 신당서의 기록만이 전해진다.
그 나라 사람들은 왕을 일컬어 가독부(可毒夫), 성왕(聖王), 또는 기하(基下)라 한다. 명(命)은 교(敎)라 한다. 왕의 아버지는 노왕(老王), 어머니는 태비(太妃), 아내는 귀비(貴妃), 장자는 부왕(副王), 다른 아들들은 왕자(王子)라 한다.
신당서》 권219 북적열전 발해

여기서 가독부는 최고 통치자를 일컫던 발해의 고유어일 가능성이 높은데 충주 고구려비에서도 문증되는 고구려의 왕족에게 부여된 칭호인 고추가(古雛加)[1]와 가독부(可毒夫)의 가독(可毒)[2]과 음가가 비슷하며 가독부가 성왕(聖王)이라고도 불렸다는 점을 참고해 중세 한국어 '거륵', 현대 한국어 '거룩하다'로 이어지는 어휘일 것이라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또한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 교수는 발해의 엘리트 계층들이 한국어를 사용했으며[3] 이는 거란어, 여진어, 만주어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4]

속일본기 13권 덴표(天平) 12년 기사에서는 덴노가 신년조회를 할 때 신라인 어학연수생(신라학어)이 발해 사신과 동석했다는 서술이 실려 있는데, 이를 근거로 적어도 발해 지배층이 쓰던 언어는 삼한의 언어와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발해 고위층은 중국어 구사능력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발해에서 중국어가 공용어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 발해 고위층이 중국어와는 별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이는데, 고다불(高多仏)이라는 발해 사신이 일행에서 이탈해서 일본에 눌러앉아 발해어를 가르치며 살았다는 기록이 일본 측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를 볼 때 일본 조정에서는 발해어의 존재를 인지하고, 별도의 통역 인력을 양성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발해가 망한 뒤에도 요나라금나라에서는 고려로 사신을 보낼 일이 있을 때 주로 발해인들을 보냈는데 그 이유는 발해어가 한국어족이었기 때문에 고려 말과 통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즉, 이러한 기록들은 결국 발해어가 한국어족에 속하는 언어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반면, 발해가 말갈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한 측으로는 러시아의 발해 및 말갈 전문가인 E.V. 샤프쿠노프가 있다. 그는 '가독부(可毒夫)'가 다스린다는 의미의 만주어 '카달암비(Kadalambi)' 혹은 나나이어 '카도쿠오토(kadokuotto)'와 연관성이 깊다고 추론했다. 또한 발해인 사신의 인명에는 접미사 몽(蒙)자가 자주 붙었다는 기록이 있는데[5] 일부 학자들은 이를 말갈어로 보고, 만주어로 씨족명 뒤에 붙는 접미사 무쿤(ᠮᡠᡴᡡᠨ)과의 연관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요나라가 망하고 금나라가 세워진 뒤, 금나라 희종은 "모든 관원들을 임명하는 고명(誥命)은 여진인에게는 여진자(女眞字)를 사용하고, 거란(契丹)·한인(漢人)들은 각기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를 사용토록 하되, 발해인에게는 한인(漢人)과 똑같이 하라"라고 칙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적어도 발해 출신 유이민 대다수는 한자가 중심이 된 문자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발견되는 발해의 문자 유물들도 대부분이 한자 기록이며, 일부 오자가 섞여 있기도 하다. 다만 발해인들이 자기네 나라에서만 쓰이는 속자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큰데, 발해 말기 일본을 방문한 발해 사신들이 독특한 글자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각각 井 안에 石자(𬑽)[6], 井 안에 木자를 써서(𪱶)[7] 한 글자로 만든 모양새의 글자였다고 한다.[8]

발해 유적들에서 출토된 기와 등에서 발해의 자체 문자로 추정되는 명문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고구려가 음훈표기법을 사용하여 사상과 감정, 문학 및 지명·인명 등의 고유명사를 표현하였기 때문에 아직까지 해독되지 못한 발해 기와 명문도 한자의 음훈을 빌어 발해어를 표현하는 이두와 같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중국 조선족 학자 최희수는 이 발해 기와들에서 발견된 특이한 문자들이 한자속자나 오자가 아니라 발해의 고유 문자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으며[9] E.V. 샤프쿠노프는 이 발해 문자가 여진 문자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고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 교수도 발해 문자가 여진 문자의 모태라는 가설을 제출하였다.

한편, 시인 이백이 발해어로 쓰인 국서를 해독할 수 있었던 덕분에 한림학사의 벼슬을 받아서 궁중에서 일할 수 있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백과 친했다는 유전백(劉全白)이 790년에 쓴 기록에 "(이백이) 번국의 국서에 화답을 하였다[爲和蕃書]"라는 말이 나오고, 이백이 죽은 후 50여 년 후 범전정(范傳正)이 쓴 이백의 비문에 "(이백이) 번국 국서에 답하는 글의 초안을 잡았다[草答蕃書]"는 표현이 있지만 그 번국이 어디인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이 간략한 기록이 원말 명초의 인물인 나관중[10]의 소설 "수당양조사전(隋唐兩朝史傳)"에서 언급되며 본격적으로 살이 붙어, 번국은 거란으로, 번국의 국서는 거란 문자로 쓰여 있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거란 국서가 이국 문자로 쓰여 있어 해석이 어려웠는데 이백이 이를 풀이하고는, 중화를 위협한 거란을 준열히 꾸짖는 내용의 답서를 쓴다는 게 해당 내용.

이후 이 이야기는 다시 명나라 천계(天啓, 1621~1627) 연간에 풍몽룡(馮夢龍)이 쓴"경세통언(警世通言)", 숭정(崇禎, 1628~1644) 연간에 포옹노인(抱甕老人)이 펴낸 "금고기관(今古奇觀)"에 '이적선취초혁만서(李謫仙醉草嚇蠻書)'라는 이름의 글로 실렸는데, 이때 비로소 번국은 발해로, 번국 국서는 발해 문자로 쓰인 것으로 각색되었다. 요약하면 발해가 '대가독(大可毒)이 당나라 관가(官家)에 글을 보내니,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한 이후로 발해와 국경이 맞닿게 되어 분쟁이 심해졌으므로 고구려의 176개 성을 내놓으라'는 패기 넘치는(…) 국서를 보냈기에 이백이 이를 준절히 꾸짖는 답서를 지어 보냈다는 이야기.

물론 실제 역사에서 이백 생존 당시 발해의 군주는 문왕이었으므로 당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즉 이 이야기 자체는 신빙성이 높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가 지어진 것은 시선(詩仙)으로서의 이백 이미지를 활용하여 과거 중국에 큰 굴욕을 안겨 준 고구려에 설욕할 의도가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중국판 "박씨전" 다만 이백의 생존 연대에 맞게 이야기를 만들려다 보니 상대국을 고구려 자체가 아니라 그 후신을 자처한 발해로 설정한 것. 이야기 속에서도 발해가 고구려 성들에 대한 연고권을 내세우고 있다. 이를 보아 중국의 고구려 콤플렉스가 대단히 심각했다는 것과 고구려와 발해의 연속성을 중국 역시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련 논문

사실 발해는 신라와 함께 당나라 빈공과 우수 급제생을 많이 배출할 정도로 한문을 능숙히 다루었으니 만큼, 정말로 대당(對唐) 외교 문서를 썼다면 자국 문자가 있었다 해도 당연히 정격 한문으로 썼을 것이다. 상기하였듯 금나라 칙령에서도 발해인들에게는 한인(漢人)과 같은 고명을 내리라고 한 것을 보면, 구어적 상황을 제외한 발해인들의 문자 생활은 어디까지나 한자, 한문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짐작된다.

5. 음악

5.1. 왕실 음악 기관

『발해국지장편』에 따르면, 발해국의 음악과 무용을 포함한 공연 활동과 관련된 중앙행정기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의부’는 예의와 제사를 관장하는 육부 중 하나로, 의부의 관리로는 경 1명과 소경 1명이 있었다. 발해의 궁중 의식과 제사에는 의식 음악과 의식 무용이 반드시 포함되었는데, 이러한 공연활동은 의부의 산하 기관이었던 ‘태상시’가 관장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태상시의 경 1명이 교묘, 즉 하늘의 제사와 종묘의 제사를 관장했다고 전해지는데, 경 1명 이외의 나머지 태상시 관리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태상시는 신라의 음악서와 같은 발해의 왕립 음악기관으로, 제례악 외 발해의 궁중 의식과 궁중 잔치를 위한 연례악 등의 공연 활동을 교묘와 더불어 관장하였다.

5.2. 발해금과 발해교방

5.2.1. 발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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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발해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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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고고학 자료에 나타난 발해 악기


파일:정혜공주묘 고분벽화의 악기 3종(박판, 공후, 비파).png[11]

1980년 중국 지린 성 화룡현 용수향 룽터우 산에서는 정효공주묘의 고분벽화가 발굴되었다. 정효공주는 발해국의 세 번째 왕인 문왕 대흠무(737~793년)의 넷째 딸이며, 그녀의 고분벽화는 학계에서 발해 악기의 정체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고분벽화에는 3종의 발해 악기가 나온다. 정인갑의 논문에 따르면, 서쪽 벽화에 그려진 그 3종은 ‘박판’, ‘수공후’, ‘비파’이다. 정효공주의 비문을 보면 공주는 792년 사망했으므로, 8세기 후반 발해국에서 연주된 악기는 발해금 이외에도 3종이 더 있는 것이다.

정효공주묘의 벽화에 나오는 ‘박판’은 당나라의 속악기 중의 하나인 박판을 수용한 것으로, 주로 관현악이나 춤의 리듬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으며 『삼국사기』 악지에 나오는 통일신라악의 박판과 동일 계통의 타악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의 박판은 고구려의 악기를 계승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이는 중국 『북사』나 『구당서』[12]에 기록된 고구려 악기 가운데 박판이 없음으로 뒷받침 된다. 즉, 발해의 박판은 당속악의 박판을 발해가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효공주묘의 ‘공후’는 연주자의 몸 쪽으로 안고 연주하는 악기로, 수공후의 일종이다. 다만 벽화상으로는 몇 줄의 수공후인지 알기 어렵다. 벽화의 수공후는 고구려의 수공후를 전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악기 중에 수공후가 있었다는 기록을 가진 『구당서』 29권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효공주묘의 ‘비파’는 벽화 상에서 목이 굽은 것으로 보아 곡경비파, 즉 4현짜리 당비파로 해석된다. 그러나 발해의 비파가 『구당서』의 고구려 비파를 계승한 것인지, 아니면 당나라의 비파를 수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구당서』에 기록된 고구려 비파가 곡경비파가 아닌 5현짜리 직경비파, 향비파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발해의 세 악기를 연주한 음악인들은 머리에 복두를 썼고 도포같은 옷을 입었으며, 허리에는 띠를 둘렀고 검은색 장화를 신고 있다. 발해악인의 이러한 복색은 『구당서』에 기록된 고구려 악공의 복색과 매우 비슷하다. 따라서 발해 음악인들의 복식은 고구려 악공의 화려한 복식을 거의 그대로 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4. 발해 사신과 발해악

삼국시대 이후 일본에서는 일본 조정에 파견된 외국사신을 위해 베풀어진 잔치에서 사신의 모국 음악을 연주해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을 위한 잔치에서도 그러한 관례에 따라 발해의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속일본기』에는 740년 쇼무 천황이 발해사신을 위해 본국악을 연주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쇼무 천황이 당시 발해 사신 이진몽을 위해 연주하도록 한 본국악은 글자대로라면 발해악으로 해석되지만,[13] 사실 그 본국악은 고구려의 멸망 이후 발해에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남았던 고구려 음악인이 연주한 고려악이었다. 이를 볼 때,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을 위한 잔치에서 연주되던 발해악은 발해국에서 온 발해의 악사와 악생들이 연주한 음악이 아닌, 삼국 시대 때 일본에 파견되었던 고구려 악사와 악생들이 일본에 남아 연주한 고려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6. 식문화

발해는 수렵과 목축업을 중심으로 하면서 지리적 조건에 따라 농업, 수산업도 발달하여 다양한 식재료 생산이 가능하였다. 발해의 서부·남부는주로 농업, 동부는 농업·어업·수렵·목축, 북부에서는 주로 어업·수렵·목축에 종사하였고 식재료를 얻기 위한 생산 방법이 이전 삼국시대보다 발전하여 이에 따라 발해의 음식 문화가 발전하였다. 즉 발해의 음식 문화는 삼국시대의 것을 계승하였으되 삼국시대보다 한층 더 향상되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발해가 일본에 보냈던 특산품 중에는 검은담비의 가죽과 다시마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다시마는 곤포(昆布)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에서는 고려의 특산품으로 유명했다.

『발해고(渤海考)』에는 “남해부 다시마, 책성부 된장, 노성 벼, 환도 오얏, 낙유 배, 태백산 토끼, 부여부 사슴, 막힐부 돼지, 솔빈부 말, 미타호 붕어”가 내용으로 농산물, 가축 및 어류 등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또 『신당서』 발해전 에서도 “풍속에 귀하게 여기는 것은 태백산의 새삼, 남해의 다시마, 책성의 메주,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솔빈부의 말, 현주의 베, 육주의 햇솜, 용주의 명주, 입성부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가있다. 과실은 환도의 오얏(자두)과 낙유의 배가 유명하다.“를 통해서도 지역별 발해의 음식 문화를 알 수 있다. 이외에 발해는 활발한 대외 교류속에서 발해의 특산물을 사신 등을 통해 보내기도 했다. 3대 문왕이 일본 쇼무천황(聖武天皇)에게 보낸 국서에 “약홀주도독 서요덕을 통해 가죽과 인삼 30근, 꿀3곡”을 보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인삼 30근은 현재의 단위로 18kg(1근=600g), 끌 3곡은 541.17L(1곡=10말, 1말=18.039L)에 해당된다. 이는 발해가 상당한 분량의 특산물을 매번 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생산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4]

6.1. 식재료

6.1.1. 육류

발해의 육류 획득은 넓은 삼림 지대에서의 수렵에 의한 것으로, 수렵은 고구려 시대부터 즐겼던 생활 방식이었다. 이러한 수렵을 통해 토끼, 매,꿩, 담비(貂), 사슴, 호랑이, 표범, 말곰(羆), 멧돼지(野猪) 등을 획득하였고, 이러한 획득물은 식용, 의료 등으로 사용했으며 그 외에 수출품으로도 당나라와 일본에서 환영받았다. 발해인들은 돼지, 소 등의 가축을 기르기도 했다. 특히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는데, 예전의 부여국 자리였던 발해 막힐부의 돼지는 유명했다. 이지역에서는 예로부터 돼지를 많이 길렀고, 이는 음식이나 의복재료로도 이용되었다. 『발해국지(渤海國志)』 흑수부에는 “그들은 돼지를 잘 길렀는데, 부유한 집에서는 몇 백 마리나 되었다. 그들은 돼지의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지어 입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발해의 소는 식용이나 농사를 지을 때 이용되었고 양은 938년 발해 후신인 동란국이 양 3만 마리를 남당(南唐)에 수출한 일이 있어 발해에서 많은 양을 길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발해 솔빈의 말이 우수하여 역사적으로 유명했다. 또 제5차 한·러 공동 연해주 발해문화유적 발굴조사단이 체르냐찌노2 주거유적 발굴 중에 생활 폐기물 유구에서 개고기의 뼈가 다량으로 발견되어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5] [16]

6.1.2. 농산물

발해의 농업은 서부의 쑹화강, 압록강, 무단강(牡丹江) 유역과 기후가 따뜻하고 땅이 비옥한 남부의 평야 지대에서 발달하였다. 곡식류는 지리적 특징에 따라 달랐다. 기온이 낮고 무상기가 짧은 북쪽 지역은 보리, 밀, 메밀 등이 주로 재배되었고, 이 외에 조, 콩, 피, 수수 등이 생산되었다. 반면 기후가 따뜻하고 땅이 비옥하고 물이 풍부한 남부 지역은 벼를 심었다. 책성은 유명한 된장 생산지로 좋은 된장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콩이 필요하였으므로 이 지역의 콩은 품질이 우수했을 것으로 본다. 또한 이 시기부터 발해의 주식은 쌀이 되었는데, 노성에서 생산된 벼가 이용되었다. 이때 쌀을 이용하여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요사(遼史)』에서 발해인들은 단오 때 쑥떡을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발해 유적에서 시루가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발해인들이 떡을 쪄서 먹었음을 알수 있다.[17]

과일은 발해 낙유의 배와 환도의 오얏이 유명했다.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에서 영고탑(寧古塔) 지방의 배가 작기는 하지만 맛이 아주 좋았다는 것을 통해서 낙유의 배가 유명했고 오얏은 자두의 다른 이름으로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에서는 집 오얏과 산 오얏으로 구분하는데 집 오얏은 붉은색에 맛이 달고 산 오얏은 약간 시고 수분이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채소, 인삼, 잣, 꿀도 생산되어 식생활 재료로 사용되었다. 발해의 채소류 중 유명한 것은 아욱으로, 발해 동북부 지역에서 아욱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책부원구(冊府元龜)』기록에 발해 사신이 925년 후당(後唐)에 인삼과 잣을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고, 꿀은 발해 건국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속일본기(續日本紀)』로 천평(天平) 11년(739) 7월 기록에 발해 사신이 일본으로 가면서 꿀을 선물로 가져갔다고 하였다.[18]

6.1.3. 수산물

발해는 동쪽의 바다와 쑹화강(松花湖), 무단강, 헤이둥 강, 우수리 강 및 징보호, 쑹화호 등 많은 강과 하천, 호수들이 있어 다량의 수산물 채취가 가능하였다. 이 수산물들은 내수용이나 외국과의 무역품으로 수출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고 있는데, 『책부원구(冊府元龜)』 기록에 따르면 발해는 729년에 숭어, 730년에 물개 가죽, 738년에 말린 문어를 당으로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다. 대표적인 수산물은 다시마, 숭어(치어), 낙지(석거), 말린 문어, 방해(대게), 교어, 고래 눈, 대모 등이 있다. 다시마의 생산지는 남해(현 함경남·북도 앞바다)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함경도의 특산물로 미역, 다시마가 기록되어 있다. 숭어는 조수가 미치는 강하천의 하류에 사는 물고기로 발해의 동해, 남해, 서해 연안의 강 하류들에서 생산되었고, 방해는 동해에서 나는 붉은색을 띤 큰 바닷게 일종이었다. 문어는 738년 발해에서 당으로 100구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요 수출품임을 알 수 있다.[19]

그 밖에 수산물을 이용한 저장 음식도 발달하였는데, 포·젓갈이 그것이다. 이 음식들은 오랜 기간 동안 저장이 가능하여 계절에 관계없이 먹을 수있도록 한 것으로, 발해인들의 식생활 지혜를 알 수 있다.[20]

6.2. 그릇

파일:발해의 식기(보시기, 쇠칼, 솥, 단지).png[21]
발해 유적의 집터와 그 주변에서는 발해인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식기가 다량 발견되고 있다. 돈화시(敦化市) 마권자고성(馬圈子古城),화룡현(和龍縣) 하남둔 고성, 청해토성(靑海土城) 터 등에서는 쇠솥과 쇠칼이, 송산리 무덤에서는 놋숟가락 등이, 상경 용천부에서는 보시기, 단지, 접시, 자배기, 버치, 사루 , 독 등의 질그릇이,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 발해 건축터에서도 보시기, 단지, 독, 솥, 쇠칼, 방아확[22]이 출토 되었다. 이를 통해 발해인들의 음식 문화를 알 수 있다.[23]

7.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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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시대에는 자색빛을 띄는 도자기인 "자자분"이 유명했다. 자자분은 발해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다.

8. 복식, 갑옷

파일:발해 복식.png
발해의 전통 복식을 매우 수준 높게 고증한 블로그.@.

9. 건축

9.1. 상경용천부

발해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발해의 도성이다. 제3대 문왕 대흠무가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후 동경용원부로 일시적으로 천도했던 적을 제외하고는 멸망 때까지 계속해서 약 170년 동안 발해의 도성으로 이용되었다.

전체적인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며, 규모는 1965년도 보고서에 의하면 동벽은 3,358.5m, 서벽은 3,406m, 남벽은 4,586m, 북벽은 4,946m로 전체 길이는 16,296.5m로 기록되어 있으나, 기록마다 수치가 조금씩 차이가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성곽 기단부의 너비는 약 14m~18m, 상부의 너비 1m~3m 정도이며, 높이는 약 3.5m 이다.[24]

외성의 밖으로는 해자를 돌렸는데, 동벽과 북벽의 바깥쪽에 흔적이 잘 남아 있으며 외성의 네 모서리에는 각루를 세웠던 흔적이 있다. 외성 내부에는 남북과 동서 방향의 도로가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전체가 바둑판 모양의 방(坊)을 이루고 있다. 중심 도로인 주작대로(朱雀大路)가 성 안을 동서로 양분하게 되며, 이외에 큰 도로가 남북과 동서의 구획으로 나누어 방을 구성하고 있다.

궁성은 북쪽 중앙 부분에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는 4개의 구역으로 나뉘는데, 중심 구역에 궁전 건물들이 있고, 나머지 구역에 부속 시설들이 있으며, 궁전 건물들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황성은 궁성 남쪽에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3개 구역으로 구성된 내부에는 관청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25]

한편, 상경성만의 독특한 기둥 밑 장식기와(주초장식와)가 고려의 궁궐인 개성 만월대 유적에서도 발견되어서 발해에서 고려로 문화 전승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26] 또 최근 고구려사 연구자 기경량 교수가 안학궁을 서경 천도를 위해 고려 정종이 지으려다 중단된 것으로 보이는 궁궐이라고 주장하였는데[27] 안학궁의 궁전 배치가 8세기의 발해 상경성과 기본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안학궁의 창건은 후기 평양성 시대, 즉 7세기 후반 이상으로 올라가기 어렵다는 일본 학계의 시각 역시 있어[28] 만약 이들 주장대로 정말로 안학궁이 고려 시대에 지어졌다면, 만월대의 사례와 유사하게 발해에서 고려로 궁궐 건축 기술이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9.2.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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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고분은 첫 도읍지였던 중국 길림성 돈화 (中國 吉林省 敦化)를 비롯하여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중국에서는 57개 고분군에서 1,700여 기를 확인하고, 600기 정도를 발굴하였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 이후에 함경도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21개 고분군에서 1,600여 기를 확인하고 100여 기를 발굴하였다. 또 연해주에서도 2개 고분군에서 5기를 발굴하였다(이상 1999년 기준). 주요 고분군으로는 돈화 육정산(敦化 六頂山) 고분군, 평안 삼능둔 대주준 홍준어장(寧安 三陵屯·大朱屯·虹鱒魚場), 장용 용두산 북대(和龍 龍頭山·北大 )고분군, 안도 동청(安圖 東淸) 고분군, 해림 산저자 양초구 (海林 山咀子·羊草溝) 고분군, 영길 양둔 대해맹 사리파 (永吉 楊屯 大海猛·査里巴) 고분군, 유수 노하심 (楡樹 老河深) 고분군, 북청 평리(坪里) 고분군, 화대 정문리(旌門里) 창덕 고분군, 청진(淸津) 부거리(富居里) 고분군, 연해주 아브리코스(Abrikos) 고분군 등이 있다.

무덤 양식에는 돌무덤, 벽돌무덤, 흙무덤이 있다. 돌무덤은 다시 돌방무덤(石室墓)·돌덧널무덤(石槨墓)·돌널무덤(石棺墓)으로 나뉜다. 그러나 돌방무덤과 돌덧널무덤의 분류에는 천장시설의 유무, 널길(羨道)의 유무, 4벽과 천장의 축조순서 등으로 연구자마다 기준을 달리하고 있다. 1980년대 초까지는 3가지 돌무덤 전체를 막연히 돌무지무덤(積石墓)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돌을 이용하여 무덤을 쌓는 방식은 원래 고구려적인 전통인데, 특히 주축을 이루는 돌방봉토무덤(石室封土墓)은 고구려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정혜공주 무덤이 있다.

벽돌무덤은 당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8세기 후반 무렵부터 상층부에서 수용하였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다. 대표적인 것으로 정효공주 무덤과 마적달(馬滴達) 무덤이 있다. 흙무덤은 발해 건국 이전부터 유행하던 말갈 전통에 따른 것으로서 발해 변방지역에서 지속되었다. 유수 노하심 고분군이나 영길 대해맹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한편,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이 결합된 양상을 보여주는 것도 있으니, 정효공주 무덤은 벽은 벽돌로 쌓으면서 천장은 돌로 평행고임을 하였다. 상경성 부근의 三陵屯 1호묘도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축조하였다.

매장방식으로는 단인장(單人葬), 2인합장(二人合葬), 다인합장(多人合葬)이 모두 나타난다. 2인합장은 부부합장이 대부분이다. 다인합장은 발해 매장습속의 특색을 이루는데, 많을 경우에 17명까지 매장된 예가 있다. 왕릉급에 해당하는 三陵屯 2호묘에서 15인의 인골이 발굴되었고, 大城子 1호묘에서 1·2차장 인골 16인분이 확인되었으며, 동청 1호묘에서는 2차장 인골 17인분이 상하 양층으로 매장되어 있었다. 大城子 1호묘나 大朱屯 1호묘에서처럼 주종관계가 뚜렷이 드러나는 예도 있다. 배장자에는 주인공에 예속되었던 노비(奴婢)나 부곡(部曲)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므로, 순장(殉葬)의 유풍으로 볼 수 있다.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의 배치상태로 보아 1차장과 2차장이 모두 실행되었으며, 무덤 하나에서 2가지가 혼재된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 2차장 인골은 추가장 된 것이다. 1차장의 경우에 나무널(木棺)을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직접 묻은 예도 보인다.

초기에는 六頂山 고분군에서처럼 화장(火葬)도 유행하였다. 이것은 시신을 관에 넣은 채 무덤 안에서 불에 태우는 방식이다. 이러한 풍습은 중기 이후에 점차 사라진다. 이밖에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에서는 사람뼈와 함께 동물뼈들도 출토되었는데, 확인된 동물로는 말, 소, 개가 있다.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풍습도 있었다. 삼릉둔 (三陵屯) 1호묘와 하남둔(河南屯) 고분에서는 봉토 위에서 주춧돌이 발견되었고, 육정산(六頂山) 고분군과 용두산(龍頭山) 고분군에서는 봉토에서 기와들이 다수 노출되었다. 무덤 건물은 불교가 성행하면서 탑으로 대체되었는데, 정효공주 무덤과 마적달 무덤은 승려의 무덤이 아닌데도 그 위에 벽돌로 만든 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중국학자들이 말갈의 풍속을 계승한 것으로 주장하나, 고구려적인 전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문헌출처[30][31][32][33][34][35]

9.2.1. 정효공주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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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발해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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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발해 도교

발해인 이광현의 저술 도교 4권이 도장에서 발견되어 발해의 도교를 부분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저술에는 각종 도교적 관념이 드러나 있으며, 발해에서 외단술과 내단술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12. 풍습

남자는 지모(智謀)가 뛰어나고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용맹스러워 발해인 3명이면 호랑이 한마리를 당한다.[36]
<송막기문 발해국 中>
부인들은 투기가 심하다. 대체로 다른 성씨들과 서로 10자매라는 (의자매) 관계를 맺어 번갈아 남편들을 감시하며 첩을 두지 못하게 한다. 남편이 밖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독살을 모의하여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인다. 한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그 아내가 깨닫지 못하면 아홉 자매가 떼지어 가서 비난한다. 이처럼 다투어 투기하는 것을 서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므로 거란, 여진 등 여러 나라에는 모두 창기(娼妓)가 있으며 양인 남자들은 첩과 시비를 두지만, 발해에만 없다.
<송막기문 발해국 中>[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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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atoke[2] *katok[3] Vovin, Alexander (2006). "Why Manchu and Jurchen Look so Un-Tungusic ?". p. 262[4] Vovin, Alexander (2017). "Koreanic loanwords in Khitan and their importance in the decipherment of the latter“[5] 예: 발해의 대수령 오차지몽(烏借芝蒙), 발해 사신으로 일본에 온 운휘장군 기진몽(己珎蒙), 무위 기알기몽(己閼棄蒙) 등. 이 중 기진몽은 발해의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6] ⿴井石[7] ⿴井木[8] 당시 발해 사신들과 필담으로 소통했던 일본인들은 이 글자들을 뭐라고 읽는지 몰라서 '이시노자부리마로(石ノザブリ丸)', '키노즈부리마로(木ノヅブリ丸)'라고 대충 훈독했다고 한다.[9] (최희수, 渤海文字에 대하여: 李強선생과 商論함, 한국전통문화연구 6권, 1990)[10] "삼국지연의"를 쓴 그 나관중이다.[11] 사진 출처 : 중국의 발해사 연구, 고구려연구재단 편, 353p[12] 중국의 이십사사 가운데 하나로, 당나라에 관한 역사서이다[13] 이진원, 한국고대음악사의재조명, 33~37p에서 본국악이 발해악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14]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15] 출처 - 연해주 체르냐찌노 2 옥저·발해 주거유적 :제5차 한·러 공동 연해주 발해문화유적 발굴조사(정석배, 부여:문화재청, 2008)[16]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17] 다만 발해의 벼는 논벼가 아닌 밭벼였다.[18]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19]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20] 출처 -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1994a), 『조선의 민속전통1(식생활풍습)』, 29p[21] 사진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22] 방앗공이로 찧을 수 있게 돌절구 모양으로 우묵하게 판 돌[23]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24] 당시의 규모는 높이 6m, 하부 너비 16m~18m, 상부 너비 6~7m 추정[25]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26] 이효형, 2015, <발해 유민사 관련 고고학 자료의 검토>[27] 기경량, 2023, <평양 안학궁 유적의 축조 시기와 성격 문제 재론>,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 68》 267-298. 기경량, 2023, <평양 안학궁 유적의 성벽 및 건축군 분석을 통한 축조 시기 검토 -중국 五代 開封 皇宮 및 高麗 王宮과의 비교->[28] 千田剛道, 1983, 「淸岩里廢寺と安鶴宮」, 『奈良國立文化財硏究所創立30周年記念 文化財論叢』(東朋社出版), 1031~1034쪽.[29]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30] 출처 - 六頂山 古墳群의 성격과 발해 건국집단(宋基豪, 汕耘史學 8, 고려학술문화재단, 1998년)[31] 출처 - 渤海墓葬硏究中的幾個問題(金太順, 考古 2, 1997년)[32] 출처 - 六頂山與渤海鎭-唐代渤海國的貴族墓地與都城遺址-(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編著,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 1997년)[33] 출처 - 발해돌방봉토무덤에 대한 고찰(박윤무, 발해사연구 2, 연변대학출판사, 1991년)[34] 출처 - 발해문화(주영헌, 사회과학출판사, 1971년)[35] 출처 - 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12.31)[36] 다만 이는 여진족 1만이 모이면 당해낼 자가 없다는 기록처럼 현실적으로 과장된 기록이라고 봐야한다.[37] 단 송막기문은 당대 기록이 아닌 1156년에 쓰여진것인데다가 외국(남송)에서 쓴 기록이므로 100%신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38] 조선에 장기간 체류했던 헨드릭 하멜이 쓴 하멜표류기조차 잘못된 내용이 있는 만큼 외국인이 쓴 기록은 곧이 곧대로 믿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