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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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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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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국
1.1.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동향1.2.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 정세1.3. 대조영 집단의 영주 탈출1.4. 국호
2. 영토 확장3. 혼란과 극복4. 전성기 (해동성국)5. 쇠퇴6. 멸망
6.1. 멸망 원인
6.1.1. 수도 급습설6.1.2. 지배층의 내분설6.1.3. 말갈과의 대립설6.1.4. 백두산 분화설(폐기)
7. 멸망 이후

[clearfix]

1. 건국

1.1.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동향

668년 동북아시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고구려가 당과 신라의 연합 공격으로 멸망한 뒤 고구려 유민들은 당과 신라, 일본, 돌궐 등으로 흩어지게 된다.

당은 먼저 평양성을 깨뜨리고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의 항복을 받은 후 고구려 영토에 대한 지배를 위해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전국을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편제하여 중국인 관리를 파견하고, 고구려인 중에서도 당군에 도움을 준 유공자들을 도독, 자사, 현령 등으로 임명해 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하지만 당의 의도와 달리 초창기부터 안동도호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669년 보장왕의 서자 혹은 외손인 안승(安勝)이 4,000여 호를 이끌며 신라로 넘어가고, 요동(遼東) 지역에 있었던 주요 성들 가운데 신성(新城), 요동성, 안시성(安市城) 등 상당수가 여전히 항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해 668년, 당은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 의지를 꺾고, 부흥 운동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지배층 및 부유하고 건강한 자들을 중심으로 28,000여 호를 뽑아 중국 내지로 옮겼다.

그러나 이런 강압책은 오히려 반발을 불러왔고, 검모잠(劍牟岑)이 안승을 왕으로 옹립한 뒤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부흥 운동은 요동으로 번져 안시성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강제 사민의 여파로 불만에 가득 차 있던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에 강력하게 저항한 것이다.

하지만 부흥 운동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인 후 신라로 달아나고, 671년 안시성이 함락되면서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 무렵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은 신라의 대당 투쟁과 결합되었는데 나당전쟁 초반부에 평안도, 황해도 지방에서 여러 차례 당군에 패하며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잦아들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나당전쟁 후반부에는 전세를 뒤집고 신라 측이 승리해 결국 당이 한반도 침공을 완전히 포기하긴 했지만 그러는 동안 이미 고구려 중심지는 피폐해졌다.

당은 유민들을 안무하기 위해 장안으로 끌고 갔던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왕에 봉하고 요동으로 돌려보냈다. 당인의 직접 통치 대신 고구려인을 전면에 내세워 고구려 유민을 간접통치하는 방식을 취해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가 겨우 안정되는 듯했지만 연남생이 679년 정월 29일 안동부 관사에서 병사하고, 보장왕이 680년 당의 의도와 달리 말갈족과 공모해 복국(濮國)을 도모하는 등 고구려 유민 통치가 다시 불안정하게 되었다.

한편 안동도호부 지역에 남아 있었던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의 지배를 거부하고 신라, 돌궐, 일본, 동만주 일대로 이탈해 갔다. 이 때문에 안동도호부 근처에는 가난한 자만이 남고, 고구려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평양과 요동 일대는 허갈한 지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677년 요동성에서 신성으로 옮겨진 안동도호부 역시 696년 거란족 수장 이진충의 난을 겪으면서 돌밭(石田)으로 변해 버렸다. 안동도호부는 698년 안동도독부로 격하되었고 704년 다시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으나 고구려 옛 땅에 대한 당의 지배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변화를 거듭했으며 시종 온전하고 확고한 통치를 실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구려 멸망 후 3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발해가 변방 지역인 동만주 지역에서 비로소 건국되었다. 이를 보면 고구려 핵심 지배 세력과 중심 지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억압책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의 부흥을 막기 위해 당이 강제 이주 정책을 실시한 덕분이었다. 28,000여 호가 중국 내지로 강제이주당했을 때 이들은 황무지로 옮겨졌는데 고구려인들 특유의 강인한 생활력을 바탕으로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궈 냈다.

훗날 당 조정에서는 가장 훌륭한 복속민 정책으로 이를 거론하기도 했는데 복국 도모를 불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빈 터를 채우고 지역 개발도 하게 되는 등 당으로서는 이중의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민의 강인한 정신력과 우수한 체력 등을 바탕으로 이룩된 일이었지만, 결국 유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이처럼 고구려에서 멀리 떨어진 당나라의 변경 각지로 흩어진 유민들은 고구려 부흥은 꿈도 꾸지 못한채 살아남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었고 이들은 3세대 4세대로 내려가면서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멸망 후 신라로 귀부한 고구려 유민들도 많았다.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익산)에 안치하고 670년 8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했다. 금마저의 고구려국은 671년부터 682년까지 8차례에 거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는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려는 강한 자주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 영토 안에 건국된 고구려이기 때문에 자주권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신라는 고구려국의 사신이 일본으로 갈 때 따라가 고구려국의 외교를 감시&감독했다. 이조차 682년 6월을 끝으로 금마저 고구려국의 대일본 외교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했다.

674년 9월 신라는 안승을 보덕국왕에 봉했다. 이는 고려국왕이란 칭호 자체를 부정하여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을 제거하고 신라에 복속된 소국으로 격하시키려는 조치였다. 뿐만아니라 680년 3월 안승과 신라 왕실의 여인을 혼인시켰으며 안승에게 소판이라는 관등과 왕성(王城)인 김씨 성을 하사하고 수도인 경주로 옮겼다. 안승을 독립국의 왕이 아닌 신라 왕의 신하로 만드는 조치들이었다. 684년 대문의 반란을 계기로 보덕국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대신 통일신라는 고구려계 병사들을 9서당에 배치해 고구려 유민 통합에 대해 나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발해가 건국된 결정적인 원인은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의지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 유민들은 강제로 당으로 옮겨지기도 하고 신라로 가기도 했으며 돌궐, 몽골 고원으로 또는 요동으로, 동만주나 일본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구당서》에 의하면 고구려 멸망 전 인구를 69만 7천호라고 했다.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69만 7천’”명’”으로 축소하는 동시에 당으로 강제로 옮겨진 고구려 유민의 숫자는 ‘“명’”이 아닌 ‘“호’”로 4~5배를 곱하여 계산하는 이중 잣대로 어떻게든 발해국의 고구려 계승성을 부인, 왜곡하고자 용을 쓰고 있다. 트랜드가 바뀌어서 고구려 인구를 69만7천’”호’”를 인정하되 순수 고구려인은 70만명 가량으로 잡고 이들이 모두 끌려갔다는 식으로 왜곡하기도 한다.[1]

결과적으로 패전국이자 멸망하게 된 고구려의 유민들은 여러 지역으로 뿔뿔히 흩어지긴 했으나 당시 고구려인들은 농경 생활을 위주로 하였기에 자신이 살던 지역을 벗어나기에는 힘들었으며 때문에 그 지역에 남아있는 고구려민들이 많았다. 또한 요동 지역의 유민들 특히 영주 성방 고구려로 기록된 고구려의 군사조직과 고구려 계승의지는 발해의 건국에 큰 버팀목이 되었다.

1.2.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 정세

발해 건국 이전 동북아시아 지역의 불안정한 국제 정세도 발해 건국의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라싸 지역 중심으로 성장한 토번, 즉 티베트는 당군과의 대비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당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국가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고, 쿠틀룩과 백초르의 봉기가 성공하여 당으로부터 독립한 돌궐 제2제국도 여러 번 당의 변경을 공격하면서 많은 위협을 가했다. 이러한 요인으로 당은 발해의 건국을 견제하기보다는 토번과 돌궐에 대한 방어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란인 이진충과 손만영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영주에 붙잡혀 있었던 걸걸중상, 대조영, 걸사비우 등이 탈출할 수 있게 되어 발해 건국의 환경을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그 당시 당은 측천무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내치에 전념하여 안정을 도모했으나, 외부 팽창이나 이민족 견제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여러 국제정세적인 요인들과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의지가 있었기에 발해 건국이 가능했던 것이다.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

1.3. 대조영 집단의 영주 탈출

그 후 676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여 옛 고구려 남부는 신라에 편입되었고, 평양에 있었던 안동도호부는 요동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요동 지방의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8,000여 호를 중원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과 걸걸중상(대중상) 부자도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 다만 중원 내지로 끌려간 것이 아닌 요동 인근의 요서로 끌려갔다는 점에서 의외로 초기에는 당에 협조적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문홰(趙文翽)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이진충의 난이라고 한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걸걸중상(대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영주에서 고구려 부흥 운동을 위해 만든 영주 성방 고구려라는 군사 조직의 지원과 함께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온다. 이 때 요동의 고구려 유민까지 규합해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도중 걸걸중상이 죽으면서 그가 이끌던 무리를 대조영이 인수받았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의 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다. 그 뒤에 만주 동부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나라를 세웠다.

이진충의 난이 발해의 건국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국제 정세와 역사적인 흐름 그리고 고구려의 부흥 운동을 봤을 때 언제든지 발해 건국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요인은 있었다.

이처럼 고구려 유민들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요서 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며, 영주의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돌궐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705년 당나라는 사신을 보내 대조영의 건국을 인정했다.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형식상 관직을 수여했고, 돌궐과 일본, 신라 등도 이후 발해를 자주국으로 인정하게 된다.

1.4. 국호

나라 이름은 처음에는 ( 또는 )이었다가 뒤에 대조영이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받은 것을 계기로 발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다만 일본과 외교시 고려(高麗)라는 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진이라는 국호는 걸걸중상측천무후에게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된 것에 근거한 것으로,[2]구당서》와 《신당서》에 따르면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우고 진국왕(振國王 또는 震國王)을 자칭했다고 한다. 진단(震旦)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는데 진단 자체가 산스크리트어로 동방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줄여서 진이라고도 했기 때문에 결국 의미는 같다.[3] 이 국호가 대조영이 단순히 당나라와의 외교에서 사용한 국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사용한 국호인지에 대해서는 의혹이 있으나, 앞서 언급한 진단이란 단어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유민 세력이 먼저 자칭한 후 당이 나중에 공식적으로 이걸 인정한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유민세력이 자신들을 진단으로 자칭→당에서 봉국명으로 진국 책봉→고왕이 공식 건국을 선언하며 국호를 진국으로 사용이라고 봐도 전개가 얼추 맞아떨어지기 때문.

당나라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한 이래 당나라와의 외교에서는 발해를 정식 국호로 사용했다. 발해라는 명칭의 유래는 행정구역명인 유주 발해군으로 지금도 발해(渤海)라고 부르는 바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후 당나라와 외교관계가 개선되면서, 문왕 때인 762년부터 당나라는 발해국왕으로 격을 높였다.

대조영 당시에는 국토가 서해(발해)와 접하지 않았고 그 위치도 유주 발해군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에서 어째서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것인지는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이에 대해 최진열 교수가 저서 『발해 국호 연구』를 통해 그 해석을 시도했는데, 당나라 때는 특정한 성(姓)마다 가장 유력한 가문의 본관을 사칭하는 경우가 빈번하여[4] 옛 고구려 왕족 출신 유민들 마저 고(高)씨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발해 고씨'를 자칭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당나라 입장에서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는 대조영 세력이 고려(고구려)를 부활시킨 것으로 직접 인정하기는 꺼려졌기에, 대조영에게 옛 고구려 왕족들이 자칭하고 있는 '발해 고씨'의 분가격으로 '발해 대씨'를 사성하여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것으로 추정했다.[5]

최진열 교수의 학설대로라면, '발해'라는 국호는 당나라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세력임을 간접적으로 묵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당나라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 세력으로 간접적으로 묵인한 정황은 이 말고도 더 있는데, 발해의 종족기원이나 대조영을 가리켜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라 기록하여 고구려와 연관이 있음을 표현하기도 했고, 옛 고구려의 왕실인 '계루부(桂婁部)'에서 따온 '계루군왕(桂婁郡王)'이라는 작위를 발해의 태자에게 책봉한 사례가 있다.[6]

한편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스스로 '고려(高麗)'를 칭했던 적이 있었음이 《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확인된다.
상주하기를, "고려 국왕 대흠무가 말합니다."
[奏曰: "高麗國王大欽茂言"]
續日本紀 권22 廢帝 淳仁天皇 天平寶字3년 봄 正月(0759년 01월 03일(음))
참고로 고구려광개토대왕 또는 장수왕 무렵부터 공식적으로 국호를 '고려'로 사용했었기에, 이와 같은 행보는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표방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구려와 고려를 구분하는 것은 후일 왕건이 세운 고려에서 고씨의 고려와 왕씨의 고려를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씨의 고려를 그 옛 이름인 고구려로 통칭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궁예태봉 또한 초창기에는 '고려'를 공식 국호로 사용했었고, 이를 '후고구려'라고 통칭하기 시작한 것은 왕씨의 고려인들이다.

발해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復高麗之舊居]
라고 하여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계승자를 자처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밖에도 1910년대에 발견된 돈황문서 가운데 786년~848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에서 "Mug-lig는 중국인들이 Ke'u-li라고 부르는 나라"라고 전하는데, 이는 서역측에서 발해를 '고려'로 파악하고 있던 사례로 여겨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설명을 근거로 당나라에서도 발해를 고려로 불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속일본기》에서 발해가 스스로 '고려'를 자처하고 일본에서 이를 인정하여 '고려'로 부른 것은 759~763년 시기로 국한되며, 그 이후인 778년 12월 17일에 발해 사신을 맞이하는 임시 관직을 '송고려객사(送高麗客使)'로 지칭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고려'로 호칭하는 사례가 없다. 앞서 살펴본 문왕(대흠무)이 스스로 고려국왕을 칭하기 전에는 스스로 '발해왕'을 칭했던 사례도 있다. 그외 발해의 사신은 '발해군왕사(渤海郡王使)'나 '발해사(渤海使)' 등으로 꾸준히 지칭되고 있으며, 일본에서 발해에 보내는 사신 역시 '발해사'로 지칭되고 있다. 정식 사신이 아닌 사람이 내조했을 경우에는 '발해인'으로 표기했다.

이와 같이 몇가지 사례만을 근거로 '발해'가 공식 국호가 아니었다거나, '고려'가 공식 국호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발해가 '고려'로 불린 것은 발해가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하기 위해 자처한 별호(別號)였거나 서구권에서 대한민국을 'Daehan'이 아닌 'Korea'로 부르는 것과 유사한 성격으로 보인다.

2. 영토 확장

1대 고왕(대조영)은 최초 근거지의 주변 지역을 장악해 나갔는데,구체적인 세력 범위는 알 수는 없으나 일단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및 북만주에 대한 영토는 확실히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건국 초기 신라는 대조영에게 대아찬 관등을 수여하며 우호 관계를 다지기도 했다. 이 내용은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만 나오는 말이다. 북국(발해)에게 윗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에 감사하는 표문. 발해와 신라 간 외교 분쟁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발해가 당나라에 자국을 신라보다 외교 의전 상 우위로 대우해 달라고 요구한 것에 대해 당나라가 거절한 것에 관한 내용이다. 때문에 최치원의 해당 발언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 대아찬이라는 직위도 재미있는 것이, 6두품의 승진 상한인 6관등 아찬을 넘어서는 진골의 품계라는 점이다. 고구려 부흥 운동 시의 고구려 왕족에게 진골의 골품을 준 것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하지만 발해가 문왕 때부터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대내외에 표방하면서 신라와 관계가 악화된 것으로 파악되며, 특히 721년에 신라가 강릉 방면에 장성을 쌓은 일은 북쪽의 발해를 경계한 행동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2대 무왕(대무예) 때는 흑수말갈 귀속 문제를 두고 당과 갈등이 심화되고 이로 인해 발해 국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난다. 그래서 온건론자인 발해왕의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긴장이 고조되다가 결국 당나라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무왕은 산동의 제1 교역항 등주(登州)에 장문휴(張文休) 제독을 보내 선제 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또 무왕은 해(奚)족과 연합해 요서 일대를 공격하여 마도산 전투에서 이겼지만 당군의 방비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회군했다.

이에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발해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이 때 신라군은 겨울에 북정(北征)을 감행한 탓에 교전은 하지 못하고 퇴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애초에 발해는 신라 방면으로 본격적인 확장 의지를 보인적이 없기 때문에, 이전까지 당나라와 대립하다 발해의 등장으로 겨우 화해한 신라 입장에서는 공격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발해와 급격히 화해하고 교류하게 된 것이 그 이유다.

발해는 이렇게 당나라와 접전을 벌이는 한편으로 이 시기부터 당나라식 관제(官制) 수입이 본격화되었고, 발해의 지방 통치도 일원적인 주·부·현제로 편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3. 혼란과 극복

3대 문왕(대흠무) 사후 약 30년 동안, 4대 국왕인 폐왕부터 9대 국왕인 간왕까지 왕이 6번 바뀌는 혼란기가 지속되다가 10대 국왕인 선왕(대인수)이 즉위함에 따라 혼란이 진정되었다. 선왕은 고왕 대조영이 아닌 그의 동생 대야발의 후손이었다.

4. 전성기 (해동성국)

종부(從父)인 대인수(大仁秀)가 즉위하여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쳤으니, 그의 4세조[7] 대야발(大野勃)은 대조영의 아우이다. 대인수가 자못 바다 북쪽의 여러 부족을 토벌하여 크게 영역을 개척하였다. 공적이 있어 검교 사공(檢校 司空)을 제수받고 왕위를 계승하였다. 원화(元和) 연간(806년 ~ 820년)에 모두 16번, 장경(長慶) 연간(821년 ~ 824년)에 4번, 보력(寶曆) 연간(825년 ~ 826년)에 2번씩 각각 조공하였다. 태화(太和) 4년(830년)에 대인수가 죽으니, 시호는 선왕(宣王)이다.
從父仁秀立, 改年建興, 其四世祖野勃, 祚榮弟也. 仁秀頗能討伐海北諸部, 開大境宇, 有功, 詔檢校司空襲王. 元和中, 凡十六朝獻, 長慶四, 寶曆凡再. 大和四年, 仁秀死. 諡宣王.
《신당서》 <북적열전> -발해-
훗날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모두 그들에게 역속(役屬)되어 다시는 왕과 만나지 못했다.
後渤海盛, 靺鞨皆役屬之, 不復與王會矣.
《신당서》 <북적열전> -흑수말갈-

선왕은 정복 사업과 내정에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만주와 연해주 방면으로의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또한 당과 화친을 체결해 그의 치세동안 발해는 중원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다. 흑수말갈을 비롯한 모든 말갈족이 발해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으며, 학자에 따라서는 요동 지방을 실효 지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요사》에 "당 원화(806~820) 중에 발해 왕 대인수가 남쪽으로 신라를 정벌했다(唐元和中, 渤海王大仁秀南定新羅.)"는 기록을 보건대, 발해가 신라의 북쪽 경계 바로 위까지의 영역을 확보하여 대동강을 경계로 양국이 대치한 것으로 보인다.(이동휘, 경계로 보는 신라와 발해의 관계, 역사와 경계, 경남사학회, 200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 시기에 발해의 침략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데다가, 《요사》가 워낙 두찬(杜撰)으로 악명이 높은 사서라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어떤 식으로든 발해의 군사적 행동이 있었고, 그 결과가 발해의 영향력이 신라 북변에까지 미치게 된 것일 가능성은 크다. 정확히 발해 선왕의 시기인 신라 헌덕왕 18년(826)에, 대동강변에 장성을 쌓은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파일:external/img.khan.co.kr/20091014000001_r.jpg
주요 교역로

5경 15부 62주의 행정 체제도 선왕 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州) 아래에는 현(縣)이 설치되었는데, 일부만 확인되고 있을 뿐 정확한 규모는 알려지고 있지 않다. 일부 사례로 미루어 보건대 62주 아래에 약 200~250여 현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불리고 5경 15부 62주의 행정체계가 완성된 것은 선왕 때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지만, 앞서 살펴본 《요사》에는 11대 대이진 때에 이르러 15부 62주가 완성되어 '요동성국(遼東盛國)'으로 불렸다고 나와 있으며, 특히 대이진이 '참호개원(僭號改元)'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해는 그 이전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왔으므로 개원은 별 의미가 없는 표현이지만, '참호'란 존호를 참칭했다는 의미이므로 '황제'를 직접 자칭했다는 의미가 된다.

금석문을 통해 살펴보면 발해는 문왕 때 임금을 '황상(皇上)'이라고 존칭한 것과 간왕의 부인을 순목황후라고 표기한 사례가 확인되는데, 이러한 황제격 표현을 사용하는 와중에도 발해의 임금은 동일한 금석문에서 '문왕(文王)'·'간왕(簡王)'으로 명기하고 있기에 공식적으로 황제 칭호를 사용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이진 이후로는 중국측 기록에서 발해왕들의 시호가 전혀 알려지지 않는데, 일반적으로 당나라의 혼란으로 외교가 어려워지면서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 해석하지만, 대이진 이후로 대건황대현석의 즉위를 알리는 사신이 왔음을 기록한 것이 버젓이 남아있기에 대이진과 대건황의 시호만 콕집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요사》의 기록을 신빙할 수 있다면, 이를 대이진 이후로 황제를 직접 칭하면서 이를 부정시한 당나라 사람들이 일부러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나, 무엇을 근거로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긴 것인지 확인할 수 없는 한 이를 적극적으로 채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5. 쇠퇴

870년대부터 국력이 다시금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추측된다. 특히 황소의 난으로 당나라의 통치체계가 붕괴되면서 당나라와의 외교나 그에 관한 기록마저 사실상 단절되었기에, 14대 임금 대위해의 경우 오랜 기간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무려 1000년도 더 지난 1940년에 진위푸(金毓黻)의 발견으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될 정도가 된다.

삼국사기》에서는 886년 신라 헌강왕 재위 기간에, 신라 북부 북진(北鎭)에서 보고하기를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고 말하면서 그 나무 조각을 가져다 바쳤다. 거기에는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는 열다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 보로국과 흑수국은 지금의 북한 안변군 지역에 살던 말갈 계통 부락으로 추정된다. 이는 발해가 멸망하기 40여년 전인 9세기 후반에 발해가 신라와 인접한 한반도 북부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말갈 세력이 거의 독립국처럼 신라와 외교를 시도하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9세기 말에는 신라와 국격을 둔 논쟁이 벌어졌는데 빈공과 합격자 순위(등제서열 사건), 사신의 대우(쟁장사건)에 있어 발해와 신라간 경쟁이 일어났다. 최치원이 897년에 쓴 《사불허북국거상표》는 이 때 당나라가 신라 사신이 발해 사신보다 상석에 서도록 조치한 것을 신라 측에서 사례하기 위해 보낸 표이다. 한편 선왕 때 발해의 국력이 워낙 융성했기 때문이 상기한 사건이 선왕 때 일어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사건들은 선왕 재위기보다 훨씬 뒤인 9세기 말엽에 있었던 일인데 공교롭게도 이 시점은 신라에서도 후삼국시대가 개막된 직후였고 당나라 역시 멸망하기 직전인 때였다. 발해는 신라와 당의 혼란스러운 내부 사정을 알고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910년대에는 한때 궁예의 부하였다가 이탈해 동북방 골암성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호족 윤선이 흑수말갈을 휘하로 끌어들여 태봉의 변방을 초략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경명왕 때인 921년 2월에는 말갈의 일부인 달고의 무리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했고 이를 왕건 휘하의 장수 견권이 물리쳤다고 적혀있다. 아무래도 이 때쯤이면 발해의 남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거의 무너진 듯 하다. 함경도 지역의 이 말갈족들은 이후 여진족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고려시대에도 고려에 저항하고 살다가 고려 공민왕대의 북벌을 시작으로 조선 세종 치세에 완전히 한반도로 편입된다.

6.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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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9세기 들어 당(황소의 난, 874~884년)과 신라(후삼국 분열)와 함께 지방 통제력을 잃어가는 쇠퇴의 징후가 발견되지만, 한편으론 오히려 거란의 중심지 요주를 공략하는데 성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발해는 15대 왕(인선)을 끝으로 갑작스럽게 멸망해 버리고 만다. 순식간에 요(遼)나라 태조 야율아보기 및 2번째 황자 야율요골(耶律堯骨) 등이 이끄는 기병대에 상경(上京)이 함락된 것이다.

국가 존속 기간이 228년으로, 한국사의 주요 국가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존속 기간이 짧은 편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왕조 평균 존속 기간이 대체로 긴 편이었던 한국사의 왕조치고는 짧은 것. 예를 들어 중국사 왕조들과 비교하면(후한 이후) 1위 청나라 296년, 2위 당나라 289년, 3위 명나라 276년 다음으로, 4위 요나라의 218년보다도 긴 최상위권이다. 물론 송나라는 북송+남송 기간 다 합치면 300년을 넘고 한나라도 전한+후한을 합치면 400년을 넘는다.

다음은 《요사》의 발해 멸망 관련 부분이다.
-12월 을해일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이른바 두 일 중에 하나는 마쳤지만, 발해와 대대로 원수 진 것만은 설욕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안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병력을 일으켜서 발해를 대대적으로 친정했다. 황후, 황태자, 대원수 야율요골이 모두 따랐다.

- 윤월 임진일에 목엽산(木葉山)에서 제사를 올렸다.
- 임인일에 오산(烏山)에서 푸른 소와 흰 말을 잡아서 천지에 제사를 올렸다.
- 기유일에 살갈산(撒葛山)에 머물렀는데 귀전(鬼箭)을 쏘았다
- 정사일에 상령(商嶺)에 머물렀는데 부여부를 포위했다.

- 천현(天顯) 원년(926년) 봄 정월 기미일에 흰 기운이 해를 꿰뚫었다.
- 경신일에 부여성을 손에 넣고 그곳의 수비하던 장수를 죽였다.
- 병인일에 석은(惕隱) 안단(安端), 전북부(前北府) 재상 소아고지(蕭阿古只) 등에게 명령을 내려서 1만 기를 선봉으로 삼았는데, 대인선 측 늙은 재상[老相]의 병력을 만나서 깨뜨렸다. 황태자, 대원수 야율요골(耶律堯骨), 남부(南府) 재상 야율소(耶律蕭), 북원(北院) 이리근(夷離蓳) 야율사녈적(耶律斜涅赤), 남원(南院) 이리근(夷離蓳) 야율질리(耶律迭裏)가 그날 밤에 홀한성을 포위했다.
- 기사일인선이 항복을 청했다.
- 경오일에 홀한성(忽汗城) 남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 신미일에 대인선(大諲譔)이 흰 옷을 입은 채 새끼줄로 몸을 묶고 흰 양을 끌며 관리 300여 명을 데리고 나와서 항복했다. 황제는 두터운 예로 대하고 그들을 풀어줬다.
- 갑술일에 발해의 군현에 조유를 내렸다.
- 병자일에 근시(近侍) 강말달(康末怛) 등 13명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서 무기들을 수색하도록 했는데, 수비병에게 해를 입었다.
- 정축일에 대인선이 다시 모반해서 그 성을 공격해서 깨뜨렸다. 성 안에 행차했다. 대인선이 말 앞에서 죄를 청했다. 명령을 내려서 경비병들로 하여금 대인선 및 그 족속이 나가도록 했다. 제사를 올려서 천지에 알렸다. 다시 군중으로 돌아왔다.

- 2월 경인일에 안변(安邊), 막힐(鄚頡), 남해(南海), 정리(定理) 등의 부 및 여러 도의 절도사, 자사들이 내조하자, 노고를 위로하고 돌려 보냈다. 얻은 재물을 장병들에게 내렸다.
- 임진일에 푸른 소와 흰 말을 잡아서 천지에 제사를 올렸다. 대사령을 내리고, 천현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사신을 보내 발해를 평정한 일을 당에 알렸다.
- 갑오일에 홀한성에 행차해서 창고의 물건을 검열하고 따른 신하들에게 차등을 두어 내렸다. 해(奚)의 부장 발로은(勃魯恩), 왕욱(王郁) 및 회홀(回鶻), 신라, 토번(吐蕃), 항(項), 실위(室韋), 사타(沙陀), 오고(烏古) 등이 정벌에 따라서 공이 있었기에, 후한 상을 내렸다.[8]
- 병오일에 발해국을 동단(東丹)으로, 홀한성을 천복(天福)으로 개칭했다.
요사》 권2 본기2 태조
아래는 《발해고》의 발해 멸망 관련 부분이다.
천찬 4년(925) 12월 을해일(16)에 요나라 임금이 국내에 조서를 내려 "이른바 두 가지 일 가운데 한 가지는 이미 마쳤다. 발해는 대대로 원수인데도 아직 갚지 못하였으니 어찌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침략해 왔다. 황후 및 태자 야율배와 대원수 야율요골이 종군하였다. 윤12월 임진일(4)에 요나라 임금이 목엽산에 제사지냈다. 임인일(14)에 푸른 소와 흰 말로 천지에 제사지냈다. 기유일(21)에 살갈산에 머물며 귀전을 쏘는 의식을 치렀다. 정사일(29)에 상령에 머물렀는데, 이날 밤 요나라 군사가 부여부를 포위하였다.

천현 원년(926) 정월 기미일(2)에 흰 기운이 해를 관통하였다. 경신일(3)에 부여성이 함락되니 지키던 장수가 전사하였다. 요나라가 또 별도로 동평부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병인일(9)에 왕이 노상에게 군사 3만을 통솔하게 하여 요나라 군대를 막았으나 패하여 항복하였다. 이날 밤에 요나라 태자 야율배, 대원수 야율요골, 남부 재상 야율소, 북원 이리근 야율사열적, 남원 이리근 야율질리 등이 홀한성을 포위하였다. 기사일(12)에 왕이 항복을 청하였다. 경오일(13)에 요나라 임금이 군대를 홀한성 남쪽에 주둔시켰다. 신미일(14)에 왕이 소복에 새끼줄을 두르고 양을 끈 채로 신하 300여 명을 이끌고 나와 항복하였다. 요나라 임금이 예우하고 돌려보냈다.

병자일(19)에 요나라 임금이 측근 강말달 등 13인을 성에 들여보내 무기를 수색하였는데, 발해의 순찰병에게 살해되었다. 정축일(20)에 왕이 성을 수복하여 지키니 야율사열적 등이 다시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요나라 임금이 성에 들어가자 왕이 말 앞에서 죄를 청하였다. 요나라 임금이 왕 및 왕족을 군사로 에워싸서 나왔다.

2월 경인일(3)에 안변부, 막힐부, 남해부, 정리부 등 4부의 절도사가 모두 요나라에 항복하였다. 병오일(19)에 요나라가 발해국을 동란국으로 바꾸고 홀한성을 천복성으로 바꾸었다.

(중략)

이해 3월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 등 3부가 성을 수복하여 지키니, 요나라 척은 안단이 와서 공격하였다. 정축일(21)에 3부가 모두 패하여 안변부의 장수 2인이 전사하였다. 5월 남해부와 정리부가 성을 수복하여 지키니, 요나라 대원수 야율요골이 와서 공격하였다. 6월 정유일(12)에 2부가 모두 패하였다. 장령부는 홀한성이 격파되었을 때부터 성을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요나라 이리필 깅묵기, 좌복야 한연휘 등이 와서 공격하였다. 7월 신사일(27)에 요나라 임금이 죽으니 술률 황후가 군사와 정무를 처리하였다. 8월 신묘일(7)에 장령부가 함락되었다. 이로부터 발해 땅은 모두 요나라에 귀속되었다.
정본 《발해고

《발해고》와 《요사》에 따르면, 요태조 야율아보기는 925년 12월 16일에 발해를 공격한다는 조서를 내렸고, 12월과 윤12월 사이에 당시 요나라의 수도인 상경임황부를 떠나 출정했다. 기록을 보면 지나가면서 목엽산, 살갈산 같이 요나라가 성스럽게 여겼던 영산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병력을 이동했다. 이는 당시 거란족의 전통 중 하나였다.

이후 윤12월 29일, 발해와 요나라의 국경지대인 상령(현재 지린성 사평 서쪽의 산맥.)에 도착한 요태조는 부여부를 바로 포위한다. 사실상 이 날부터 요나라의 발해 정복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급습에 별다른 준비가 안되었는지 부여부를 관할하던 부여성은 3일만인 926년 1월 3일(기미일)에 함락된다. 부여부를 점령한 요나라 군대는 1월 9일(병인일) 밤에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의 수도성인 '홀한성'을 포위한다.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은 1월 12일(기사일)에 항복을 청하는데, 3일만에 항복을 청한 것을 봐서는 부여성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수비 대책이 전혀 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항복한 그날 발해가 역사에 지워진 것은 아니다.

1월 12일에 항복하겠다고 메세지를 띄운 대인선이 진짜 항복하러 나온 것은 1월 14일인데 야율아보기는 이를 우선 돌려보냈으며 1월 19일에 성 안의 무기를 수색하러 병력을 보냈지만 발해 순찰병에게 죄다 살해당한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딱봐도 이건 거짓 항복이다. 대인선은 항복하는 척 하면서 시간을 늦추려한 것이고 야율아보기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돌려보내고 성 안의 무기부터 압수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발각되자 바로 항복 협상은 결렬되었는데 수비 준비가 정말 안되었는지 하루만인 1월 20일에 홀한성이 함락당한다. 한번 속였기 때문인지 함락당한 뒤에는 예우 같은건 없고 요나라 군대가 왕을 에워싸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까지가 '상경용천부'가 무너진 기록이다. 사실상 수도가 무너지고 왕이 사로잡힌 시점에서 거의 끝난 것이긴 하지만 기록을 보면 적어도 926년 1월에 발해가 갑자기 사라진 정도는 아니고 마지막까지 버틴 장령부는 8월까지 가야 요나라 손에 무너진다. 발해부흥운동과는 별개로 봐야하는 것이 부흥운동은 한번 망한 다음에 벌어진 운동을 말한다. 따라서 요나라의 발해 정복은 8월 즈음에 완료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6.1. 멸망 원인

6.1.1. 수도 급습설

백두산 분화설이 폐기된 이후에는 정설로 취급받고 있다. 요나라가 제1 방어선으로서 발해의 전력이 몰려 있던 요동 전선을 선회하여 발해 중심부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부여부를 급습, 그곳을 무너뜨린 다음 발해의 정규군이 전력을 정비하기 전에 상경용천부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방식으로 수도를 무너뜨렸으며, 국왕 대인선을 사로 잡았기 때문에 수뇌부가 와해된 발해는 별다른 손도 써보지도 못하고 차례차례 멸망에 이르렀다는 이론이다. 사실 개전부터 대인선의 항복까지 소요된 기간을 발해 멸망 기간과 비교해 보면 수도가 순식간에 무너진 것은 단순 가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폐기된 백두산 분화설을 포함한 나머지 가설들도 잘 보면 왜 수도 방비가 이렇게 허술했는가를 보조해주는 가설일 뿐 이 수도 급습설을 부정하는 가설이 아니다. 따라서 그냥 발해의 직접적인 멸망 원인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고대 동북아시아 지역의 유목민족들이 사용한 주된 전쟁방식은 국경에서 곧바로 수도까지 쳐들어가는 속전속결의 형태였기 때문에 방어 측의 병력 집결이 조금만 늦으면 그대로 끝나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애초에 현대전에서도 전격전 등 기동력을 바탕으로 한 우회, 타격 전략 등이 잘 먹히는데 통신과 교통이 열악한 전근대시기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비단 발해 뿐만 아니라 한국사에는 이러한 전략 전술이 상당히 자주 나타난다.

백제 멸망 때의 나당연합군은 수도인 사비성으로 곧바로 진격하여 그곳을 포위, 끝내 항복을 받아냈고 여요전쟁 때에는 아예 발해 멸망의 주체였던 거란이 다시 한 번 고려에게 써먹어서 실제로 2차 침입 때는 수도 개경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만에 완전히 쓸린 발해와는 달리 고려는 이미 2차 침입에서 이러한 전술을 겪었기에 청야 전술을 비롯한 여러가지 방비책을 써서 거란군을 완벽히 막아냈고 역으로 퇴각하려는 거란군을 추격해 귀주대첩으로 궤멸시키기까지 했다. 물론 여기에는 현종이 몽진을 떠나 거란군에게서 벗어났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그대로 밀고 들어와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인조에게 항복을 받아낸다.

발해가 개전 10일만에 수도를 포위 당하고 포위한지 11일만에 함락당한 것이 자뭇 불가사의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을 면밀히 따져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 군대는 660년 7월 9일 기벌포에 상륙하여 신라군과 합류, 3일만인 7월 12일에 백제 수도 사비성을 포위하여 백제군 주력을 아예 무력화시켰고 여요전쟁 때는 고려 측이 방어전선을 구축하여 1018년 12월 10일, 흥화진에서 고려군과 대규모 회전을 벌였음에도 보름 남짓한 이듬해 1월 3일에 개경까지 도달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아예 전쟁 발발 8일 만에 즉 음력 1636년 12월 8일 압록강 도하, 12월 15일 한성 함락으로 수도 한성을 내주기도 하였다. 전쟁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서 좀 더 버틴 것이지 병자호란에서 한성이 함락당한 속도는 오히려 발해 멸망 당시 상경용천부가 함락당한 속도인 21일보다(윤12월 29일 전쟁 개시, 1월 20일 홀한성 함락) 빠른 것이다.

즉, 시대를 막론하고 한반도를 위협하던 중원 세력들의 압도적인 기동성을 통한 속도전 및 수도 공략 전술은 꾸준히 애용되어 왔고, 특히 군사력 자체가 기병 편제 위주였던 유목 민족들은 이를 더 쉽게 쓸 수 있었다. 발해가 여요전쟁 당시의 고려나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과 차이가 있었다면 이 공격을 막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여요전쟁 당시 고려는 심기일전하여 준비한 청야전술이 제대로 적중하여 기동 전술의 최대 약점인 주력을 섬멸하지 않고 왔기에 적국 한가운데 깊숙히 갇힌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귀주대첩으로 거란군을 궤멸시켰다.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결국 항복은 했으나, 청군 역시 명나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이중전선을 막기 위한 목적이 컸기에 항복만 받아내는데 그쳤다. 반면 발해 멸망전 당시 요나라는 위에도 서술된 《요사》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발해라면 이를 갈 정도로 철천지 원수 취급했기 때문에 항복과 함께 나라를 통째로 멸망시킨 것이다.

이 가설을 뒷받침 하는 요소는 또 있다. 이러한 속도전 전략은 중앙 정부에게 이른 시간에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대신 대다수 야전군이나 지방 세력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요사》와 《발해고》 기록을 보면 발해 국왕 대인선이 사로잡힌 이후, 남은 발해의 여러 부들이 항복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투가 벌어지고 최종적으로 발해가 멸망한 것은 7개월 여가 지난 926년 8월이었다. 이후로도 발해의 유민들은 멸망 후 200년에 가까운 장구한 세월 동안 이른바 발해부흥운동을 펼치며 거란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저항을 이어나갔다. 패망 후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고구려와 백제도 이와 비슷하다.

사실 애초에 별다른 준비가 안된 상황에서 수도가 쉽게 무너지는 것은 굳이 유목민족이 아니더라도 전쟁사를 보면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는 6주만에 수도 파리를 내줬고, 6.25 전쟁 당시에도 서울은 3일만에 함락당했다.

6.1.2. 지배층의 내분설

발해 왕들의 기록이 적기 때문에 추정에 그칠 따름이지만 왕실을 포함한 발해 조정의 내분도 멸망 원인으로 충분히 생각해봄 직한 가설이다. 각종 기록을 보면 발해는 멸망 이전부터 뒤숭숭한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요나라 공격 한참 전부터 고위층을 비롯한 망명 행렬이 이어지고 있음이 여러 사서에 나타나는데, 이는 정치 사회적 혼란의 증거이므로 이러한 혼란으로 발해가 약해졌고 쉽게 멸망하지 않았냐는 것.

특히 고려사에 926년 1월 3일, 그러니까 거란에서 발해의 수도 상경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부여부가 함락되기 5일 전인 925년 12월 29일에 발해의 좌수위(左首衛) 소장(小將)인 모두간(冒豆干)과 검교개국남(檢校開國男) 박어(朴漁) 등이 백성 1천호를 거느리고 귀부해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상당한 규모의 발해 유민들과 고위 관료들이 넘어온 사실이 이전부터 지배층끼리의 내홍이 심했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의 유력한 근거이다.

앞서 언급한 수도 급습설과 연계시키면 더 완벽한 설이 완성된다. 지배층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국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지거나 방비가 가장 튼튼할 수도의 방비마저 상당 부분 저하된 와중에 급습을 당해 지나치게 빨리 무너졌다는 식.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의 지배층이 내분하여 사회 혼란기에 빠지면 국가 방비가 부실해지고 적의 침략에 당하기 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사례를 보자면, 중국사의 서진팔왕의 난으로 만신창이가 된 탓에 흉노가 쳐들어와도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다가 지도층이 싸그리 몰살당한 역사가 있다. 특히 흉노와 석륵이 수도 목전에 들이닥쳤을 때 왕족, 귀족, 다수의 수도 방비병까지 탈출을 시도하다 몰살당하면서 수도가 사실상 빈집털이 격으로 털리기도 했는데, 이는 거란의 발해 침공 또한 지배층 내분이 수도 급습 성공 요인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 또한 조선의 병자호란도 그 성공 배경 중 하나에는 이전에 있었던 이괄의 난 때문에 발생한 조선군의 전력 약화가 있었으며 여기서 살아남은 이괄의 휘하 장수들이 청나라에게 주요 군사기밀들을 죄다 불어버려서 쉽게 침공해올 수 있었다.

혼란의 원인에는 장기간 유지된 요동 전역으로 인한 혼란, 지도층 간의 권력 다툼 등 여러 가설들이 있다.

6.1.3. 말갈과의 대립설

발해가 고구려 유민 + 말갈 + 기타 민족들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나온 설. 발해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수도에 아무런 수비 준비가 안될 정도로 막장 상황에 다다른 것은 역사에 기록이 안된 범국가적인 혼란내지는 반란으로 인한 내전이 있지 않았냐는 가설이다. 사실 전근대시기 동아시아 많은 국가들이 멸망 직전에는 많은 민란과 반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으므로 발해도 그랬을 확률은 높다.

발해 말, 이들이 들고 일어나 안 그래도 중앙의 내분으로 인해 뒤숭숭했던 발해 내부의 혼란을 가중시켜 최종적으로 발해 멸망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는 설이다. 말갈이 끝내 발해에 융합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설. 다만 이 말갈을 국가 내의 하부층으로 인식해서 내부 분열로 보느냐, 아니면 사실상 소화 불량에 걸려서 자력으로 이탈한 흑수 말갈로 이해해서 배후의 위협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국가 구성 자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다른 말갈부락들과 달리 흑수말갈은 발해 선왕 시기에 복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발해 말기에는 흑수말갈을 비롯한 말갈족의 이탈 기록이 신라와 고려 측에 나타난다.

886년(발해 대현석 15년, 신라 헌강왕 12년) 적국인(狄國人: 말갈 부락)이 신라 북진(=강원도 삼척) 지역으로 건너가" 보로국과 흑수국 사람이 함께 신라국과 화친해 소통하고자 한다"(“寳露國與黒水國人, 共向新羅國和通.”)는 목판을 남기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최소 발해 - 신라와 인접한 말갈부락들이 신라와 발해 사이에서 어느 쪽에 붙을지 간보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대인선 말기에는 이탈한 말갈족에 대한 기록이 고려를 통해 여럿 보이는데, 921년 달고(達姑) 171명이 고려 국경을 넘어와 신라도를 통해 약탈을 일삼자 견권이 토벌했다. 흑수말갈은 921년 봄에 고자라, 921년 여름에는 아어한이라는 흑수말갈 추장들이 자신들의 측근을 데리고 고려로 귀순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있다. 923년에는 골암진(강원도 안변군)에 북번(북방 야만인)이 자꾸 침입해오자 유금필을 보내 이들을 복속시킨 기록도 있다.

이로 볼 때 13대 대현석 시기부터 말대 대인선 시기의 동안 흑수말갈의 상당수가 발해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으며, 고려와 인접한 말갈 부락들은 발해의 통제에서 벗어나 고려를 약탈하다가 토벌당하거나 고려에 귀순하게 된다.

6.1.4. 백두산 분화설(폐기)

946년 백두산 분화가 발해 멸망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학설은 과거에는 종종 언급되었으나 추가 연구를 통해 10세기 백두산의 분화 시기를 정확히 알아내면서 현재는 완전히 폐기된 학설이다.

이 설은 과거 일본에서 화산학자들이 일본의 지층을 조사하다가 백두산의 화산재를 발견하면서 이에 대해 연구하면서 제기된 학설이었으며, 1990년대 말~2000년대 쯤 KBS에서 이에 대해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면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되기도 하였기에 대중들에게도 꽤 인지도가 있던 학설이었다. 특히 학계보다 고대사에 관심 있는 일반인 수준에서는 직관적으로 멸망의 원인을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에 꽤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가설이었다. 추가로 발해의 멸망 시기와 백두산의 대폭발 시기가 맞물린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힘을 얻기 시작했었다.

실제로 발해의 5경이 모두 백두산에 인접해 있어 백두산 폭발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과 당시의 백두산 대폭발은 비공식적으로 역사 시대 이래 최대의 화산 폭발로 추정된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했다. 당시 분출된 화산재는 한반도 전역을 1m의 두께로 덮을 만큼의 양이었다. (출처 :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소원주)) 백두산 서부에서 대규모의 화산 쇄설류가 이동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의 땅을 통치하지 않고 폐현시킨 것도 파괴의 정도가 심각하여 땅을 버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다만 분화시기가 정확히 밝혀지기 전,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큰 반론은 동아시아 3국 어디의 사서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점이었다. 거란의 역사서인 《요사》는 정복자의 입장에서 쓰인 역사이기 때문에 은폐했을 확률이 높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애초에 이런 범국가적 재난을 은폐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사상적으로도 "발해가 통치를 엉망으로 하여 하늘이 천벌을 내렸고, 따라서 우리의 전쟁은 정당하다." 등과 같이 프로파간다로 써먹을 여지가 충분하다. 결정적으로 나라 하나를 통째로 멸망시켰을 정도의 위력적인 화산 폭발이라면 발해 이민을 받아 준 고려의 역사서인 《고려사》에 분화 당시의 기록이든 유민들을 받아줄 때의 상황이든 기록되었어야 정상인데 전혀 기록이 없다.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 전에 일어났더라도 실제로는 발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도 있었다. 당시 연구에 의하면 백두산 대폭발은 겨울에 발생한 것으로 추측되었는데, 겨울에는 북서풍이 불기 때문에 화산재 대부분이 동해와 일본으로 날아갔고 상경용천부 또한 백두산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를 입기에는 거리가 상당하다는 주장이었다.

이후 연구를 통해 백두산의 화산재와 기록이 존재하는 일본 고대 화산의 화산재와 시간대 비교를 통한 연구에 의하면 발해 멸망이 926년 1월에 발생했는데 백두산 분화는 969년(± 20년)에 일어났다고 추정되어 이 학설은 더욱 힘을 잃었다.

그러나 매우 젊은 암석의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은, 그 정확도에 대해 아직 논쟁 중인 부분이 많아서, 아직 정확한 연대 측정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는 관점도 있었으며, 그 근거로는 고정밀 연대 측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Ar-Ar 연대 측정법도 최근에 일어난 지질학적 시간을 기록하는 데 신뢰도가 비교적 낮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U-Th-Ra 비평형, Cl, He, Be 등의 노출 연대도 젊은 암석에 사용되지만, 각자 암석의 환경에 따라 문제점이 존재한다. 젊은 암석의 연대 측정은 오늘날 지질학의 연대 측정법의 화두 중 하나이다.

다만, 많은 정밀 연대가 926년 이후의 연대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발해의 멸망과 관련이 없을 것 같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2017년 이러한 일말의 의심조차 잠재우는 연구가 공개되었다. 해당 연구에서 공개한 추정 연대는 946년 후반기로 오차를 3개월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고로 발해 멸망 이후 20년 뒤에 화산 분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관련 연구 기사
해당 문건 번역

더군다나 이 연구 결과는 기존 사서들과 비교해서도 교차검증이 되었기 때문에 결정적이었다. 고려사를 보면 946년에 개성에서 천고명이 들렸다 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즉, 개성 하늘에서 어마어마한 천둥 소리가 들렸다는 기록이다. 일본의 나라현에 있는 고후쿠지 사찰에서도 946년 11월에 하늘에서 하얀재가 내렸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를 통해 사실상 백두산 폭발로 인해 발해가 멸망, 혹은 거의 멸망에 가까울 정도로 대타격을 입거나 멸망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거론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후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은 폐기된 대신, 발해 멸망 이후 혼란기가 길었던 이유를 백두산 폭발과 연관짓는 가설로 바뀌었다. 폭발 이후 작은 지진이나 자연 재해, 이변들로 인해 부흥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 실제로도 강제 이주에 의한 것이든 자연 재해를 피한 것이든 발해 멸망 이후에도 옛 발해 영토에는 오랜 기간 동안 유민의 탈출이 있었다.

따라서 발해부흥운동과 거란의 만주 통치 장악력 미흡, 여진족의 침체기 등에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추론하는 것은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나라의 멸망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더라도 향후 발해가 존재했던 지역이 오랜 기간 버려지고, 동만주에서 새 나라가 일어나기까지 200여년이나 걸린 것에는 화산 폭발과 관련 있지 않나 하는 추측.[9]

7. 멸망 이후

7.1. 고려의 반응

고려는 발해 멸망 이후 자신들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수 많은 발해유민들을 받아들였으며, 이는 고려가 공산 전투에서 입은 엄청난 손해를 충분히 메우고도 남을 정도의 어마무시한 규모였다. 그리고 934년에는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수 만 호(戶)에 달하는 발해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대광현은 왕씨 성을 하사받아 고려 최상위 귀족 계층으로 편입되었으며, 발해 왕가의 후손인 대도수 역시 여요전쟁에서 활약하게 된다.

《고려사》 세가의 대광현 내투 기사에는 규모가 무리 수 만[衆數萬]이라고만 적혀 있는데, 이때의 단위는 호(戶)다. 최승로 열전에 수록된 이른바 '시무 28조'에 "渤海旣爲丹兵所破, 其世子大光顯等, 以我國家擧義而興, 領其餘衆數萬戶, 日夜倍道來犇."라고 되어 있다. '수 만'을 2~4만 정도로 비교적 낮게 잡아도, 934년 한 해에만 —범위를 넓혀도 발해가 멸망하는 926년부터 왕건이 사망하는 943년까지라는 길지 않은 기간에— 대략 적게 수십만에서 많게는 이보다도 더 많은 발해 유민이 고려 내부로 유입된 것이다. 《고려도경》에 기록된 12세기 고려의 인구가 210만에 불과했던 걸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다. 물론 《고려도경》의 인구 수는 과소 평가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는 발해 유민 투화 기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유이민에 대한 모든 기록이 남았을 리는 없고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들에 대해서만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신라의 민정문서 기준으로 한 호(戶)당 인원은 많게는 열 명까지 측정되었다. 단순 편호방식으로 계산해서 호당 가구원의 수를 다섯 명으로 낮게 잡아도, 934년에 태자 대광현이 이끈 발해의 무리/호수 수만은 무리한 수준에서 1만으로 낮게 측정하면 적게는 5만, 많게는 10만 명까지 고려에 귀부한 것으로 집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934년에 있었던 발해 유민들의 고려 귀부는 세계사적으로 봐도 보기 드문 엄청난 규모의 대(大) 엑소더스였다.

한편 고려에서는 스스로를 고구려를 이었다고 하여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를 원수처럼 여겼다. 실제 고려 태조 왕건은 그 나라를 '본래 우리와 친척인 나라[本吾親戚之國]'라고 표현할 정도로 발해를 친근하게 여겼다.[10]

발해에 대한 동족 관념에서 비롯된 왕건의 반 거란주의는 거란의 사신이 가져온 낙타들을 다리 밑에 묶어 전부 아사시키고, 사신들은 전부 유배보낸 것(만부교 사건)으로 극명히 표출되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중국에서 우호 사절과 함께 한국으로 보낸 판다청계천에 묶어 두어 전부 다 굶겨죽이고 사신들은 지방의 교도소에 투옥시키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이러한 고려의 대 거란 적대 정책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한 발해에 대한 친근감도 있었겠지만 자국에 투항한 발해유민들을 국가 체제에 통합하기 위한 실리적인 목적도 작용했을 것이다.[11]

왕건은 거란과 같은 북방 민족인 여진족인면수심이라며 경멸한 바 있고, 훈요 10조거란에 대한 경계를 당부한 부분에도 발해 유민들이 대거 자리잡은 한반도 북부[12]는 국방상 요지이기 때문에 이들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다면, 거란의 외침 시에 제대로 항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거나, 최악의 경우 적에게 호응하는 상황까지도 닥칠 수 있었다.

반면 200여 년 간 독립 국가를 영위해 온 이들을 제대로 흡수할 경우 변방 안정은 물론이고 국력 신장에도 도움이 될 만했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태봉-고려 또한 후백제 못지 않게 양면전쟁으로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방의 여진족이 슬슬 강성해져 약탈이 심해져 가고 있었는데 그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경덕왕 때조차 이를 경계해서 신라 북변에 군부대를 창설하고 성곽 축조를 명했을 정도였다. 그러한데 대거 남하한 이 발해유민들 덕택에 고려는 북변을 방어하고도 남는 병력을 후백제와의 쟁투에 투입할 수 있었으니 후삼국 통일에 도움이 되었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직속 병력이 막심한 타격을 입었었는데 그걸 메꾸고도 남는 횡재가 북에서 내려왔던 상황이었다.[13]

발해 멸망 이후, 계속된 발해부흥운동에 대해서도 고려 내부에서는 도와주자는 의견과 무시하자는 의견이 서로 대립하는 등 통일되지 않은 성향을 보였고 결국 서너 차례의 유의미한 발해부흥시도가 있었음에도 고려는 난민을 받는 수준을 넘는 적극적 지원은 주저한 바 있다.[14] 오히려 지원이라기 보다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세를 틈타 이익을 얻는 계기로 역이용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고구려의 정통성 승계 문제에 현실적 국제 역학 질서, 막 통일된지 얼마 안되는 고려의 내부 통제 문제 등의 여러 문제가 얽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려는 심지어 현종 때 까지도 지방 세력의 힘이 상당했으며 왕실에서는 천추태후김치양의 전횡으로 혼란스러운 데다가 거란과의 전쟁이 종료된 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다. 당연히 내부를 통제하는 동시에 행정망을 정비해야 했던 셈. 당시 국왕인 현종 역시 당시 발해 부흥을 자처한 흥료국을 돕는 것을 꺼린 이유가 바로 이 부분 때문이었다.

발해는 북방의 이민족인 거란에게 멸망하였고, 발해 스스로가 편찬한 역사서가 현재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帝王韻記)》 등에 언급된 것을 제하면 한반도 국가의 관찬, 사찬 사서의 서술 범위 밖에 있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실학자 류득공이 《발해고》를 저술 중 고려가 망명해온 발해 유민들의 증언을 통해 발해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발해의 역사를 남기지 않는 것에 안타까워 했다.[15]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ᆢ(생략)ᆢ 김씨가 남쪽을 영유하고 대씨가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ᆢ(생략)ᆢ그러나 끝내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ᆢ(생략)ᆢ 발해는 중국제도를 본받았으니 반드시 사관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 수도인 홀한성이 격파되어 고려로 도망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10여 만명이나 되니, 사관이 없으면 반드시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고 사관과 역사서가 없더라도 세자에게 물어 보았다면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은계종에게 물어 보았다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10여 만 명에게 물어 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ᆢ(생략)ᆢ 아, 문헌이 흩어진 지 수백년이 지난 뒤에 역사서를 지으려 해도 자료를 찾을 수 없구나. ᆢ(생략)ᆢ
-발해고》, 유득공의 서문 중에서-

그외에도 후삼국시대에 고려로 귀부하지 않았지만 함경도 일대에 살던 발해, 말갈계 주민들은 고려와 조선의 북진 과정에서 한민족 원류에 가까스로 합류했다.

7.2. 요나라금나라에 남은 발해유민

고려로 피난하지 않은 발해인들은 대부분 만주 지역에 남았다. 고청명과 같은 발해 유민들은 여요전쟁에서 요나라에 징집되어 발해인 부대를 조직해 고려군과 싸우는 동족상잔을 벌이게 되었다. 고려군 측에서 싸운 발해 유민 출신 장수로는 대도수와 대회덕 등이 있다.

완안아골타금나라를 건국하고 요나라를 공격할 때 천조제는 발해인 부대를 보내 아골타를 막으려 했으며 금나라 역시 송나라를 공격할 때 수만명에 달하는 발해인 부대를 운용한 사례가 있다. 또한 여요전쟁 도중에 요나라가 고려를 침공하여 본국으로 끌고 간 발해유민도 있었다.[16]

그러나 금나라 시기 이후 발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끊기면서, 금나라 중후기에 동화되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고려에 직접 귀순하거나 남경남해부와 같이 역사를 거치며 한민족 국가의 영역에 합류하지 못한 발해인들은 한국인의 원류 집단에서 이탈하는 대신 여진이나 거란에 합류하였다.

7.3. 발해부흥운동

발해부흥운동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동란국
,926년~936년,

,(요나라괴뢰국),
정안국
,938년~986년,
연파국
,975년~995년,
올야국
,995년이전~1114년,
흥료국
,1029년~1030년,
고욕국
,1115년,
대발해
,1116년,
후발해
,926년~????년,
}}}}}}}}}



발해 멸망 후 발해 부흥 운동을 일으킨 지역이 몇군데 있었지만 얼마 안 가 대부분 진압당했다. 한편으로 이 점은 요가 중앙부터 공격해 발해를 무너뜨렸다는 근거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이후 무려 200년간 부흥 운동이 벌어진다는데 의의가 있다.

[1] 물론 고구려 인구도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편 당나라가 고구려 부흥 운동을 진압하면서 평양을 비롯한 고구려 내 주요 영토에서 유민들을 박박 긁어 모았지만 전근대 국가 특성상 한계가 있었다.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들을 모두 끌고가지 못했다는 사실은 패서 호족의 존재로 증명된다.[2] 측천무후가 걸걸중상을 진국공으로 책봉할 당시에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책봉했었는데, 발해의 금석문중에 '허왕부(許王府)'라고 적힌 것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부(府)'란 지금으로 치면 '비서실'에 가까운 개념인데, 아마도 걸사비우의 후손들이 발해에서 왕작(王爵)으로 책봉되어 세습해 나갔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3] 이 진단이란 단어를 궁예태봉이 태봉 이전의 마진이란 국호에서 사용한 적이 있다. 마진은 마하진단의 줄임말이 된다.[4] 사실 영가의 난 이전까지 중국은 거주 이전의 자유 이전에 '거주' 자체가 매우 엄격한 수준으로 제한되는 사회였고, 설사 다른 지역에서 출생하였다 하더라도 출신지를 선조들이 살던 본적지를 기준으로 했을 만큼 '본적지'라는 개념이 매우 확고했기에, 오히려 '본관'이라는 개념자체가 희미했다. 때문에 혈연은 곧 지연을 의미했고, 이를 사칭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영가의 난 이후로 장기간 혼란기를 겪으면서 '본적지' 자체가 소멸해버렸는데, 안정을 되찾은 당나라 사회에서 사라진 본적지를 대신할 것을 찾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5] 최진열 교수는 대조영이 원래 성(姓)이 없던 것으로 추정했다. 일례로 각종 기록에서 아버지가 보통 '대중상'이 아니라 '걸걸중상'으로 지칭되고 있다.[6]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적극적으로 부정한 것은 신라였다. 당시 신라는 삼한일통론을 내세워 자신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했다는 입장을 내세웠고 이를 실제 국내 지방통치에도 활용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는 세력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은 최치원의 글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삼한'은 '마한'·'진한'·'변한'을 지칭한다고 여기지만, 전통적으론 '고구려'·'백제'·'신라'를 지칭하는 개념이었다. 5세기 무렵 중국측에서 '해동 3국'을 '삼한'이라 지칭하기 시작했고, 그 당사국들도 이러한 범칭을 부정하진 않았으며, 오히려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이 자신들을 '삼한' 출신으로 인식했음이 확인된다. 최치원을 비롯한 후대 학자들이 이 '삼한'을 '마한'·'진한'·'변한'과 결부하면서 오늘날엔 '마한'·'진한'·'변한'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바뀐 것이다.[7] 증조부다. 자신을 1세로 보기 때문. 단 4세가 아닌 4대면 고조부다. 이 때는 자신을 0대로 본다. "(세수)=(대수)+1"를 떠올리면 쉽다.[8] 이 기록으로 인해 소수의 책에서는 신라가 거란을 도와 발해를 멸망시켰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의 신라도 발해만큼 혼란스러웠다. 경애왕포석정에서 견훤에게 살해당하기 1년 전으로, 이미 경상도의 서쪽 절반 이상이 후백제 땅인 시기였다. 후삼국시대의 이전의 잦은 반란은 물론, 후삼국시대로 인해 더더욱 분열이 되었기 때문에 심각한 상황을 생각하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더더욱 도왔을 가능성은 없다. (군사는 물론 무기나 자원을 보냈을 가능성은 더욱 없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바다 역시 이미 중국 해적은 물론, 신라의 해적, 왜구, 여진 해적 등으로 인해 바다를 통해 거란이나 중국, 발해 등으로 가는 방법도 어려웠다. 이 기록이 오류이거나 왜곡, 혹은 말로만 돕겠다고 하고 실제로는 돕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사신을 보내었을 가능성이 더 있다.[9] 946년 백두산 분화에 나와있다시피 "그린란드 얼음에서 화산 주요 분출물인 황이 검출되었다"고 할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었던 만큼, 당시 옛 발해 강역의 모든 인간 활동에 실질적인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 발해부흥운동만 해도 화산 분화 당시 '발해의 멸망은 하늘의 뜻이구나'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10] 당연한 것이, 애초에 고려는 평안남도·황해도·경기 북부를 아우르는 패서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이 건국한 나라다.[11] 발해인 부대들을 의도적으로 앞세워 주변국 등과의 전쟁에서 발해 유민들을 소모시킨 거란이나 여진과는 결 자체가 다른 정책들이였다. 더군다나 태조 왕건이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포용한 덕분에 발해인들을 위시로 한 반란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는 신라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신라계나 백제 부흥을 위시로 난을 일으켰던 이연년의 난의 백제계들과는 대조적이다.[12] 발해 유민들은 개경을 아우르는 수도권, 황해도, 영남과 호남 일대 등 남부 지역에도 대거 정착하였다.[13] 반면 과 귀족들이 이끄는 신라의 왕경인들이 고려에 대거 투항한 건 이념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나 적어도 인력 면에서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서라벌의 알짜배기 인력은 견훤이 서라벌을 점령했을 때 거진 다 털어갔었기 때문이다.[14] 흥료국의 난 당시 군사를 파병했으나 거란군에게 격퇴당한 바 있었다. 이외에도 송사 열전에서 기록된 강전 과 같은 고려인들이 의용군의 형태로 발해부흥운동을 지원한 바가 사료상으로 전해지고 있다.[15] 고려에 정착한 발해 유민들은 혈통, 언어, 문화상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고구려계였던 고려인들 사이에서 쉽게 동화되었음을 감안하면 당대의 학문적 수준으로 볼 때 발해의 역사를 따로 편찬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못했을 수도 있다. 탐라인들이 한민족의 원류에 편입되었을 때 고려나 조선이 탐라의 역사서를 따로 편찬하지 않았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과 달리, 편찬 사업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 한 나라의 조정이 직접 주도하면서 했던 사업이였던 만큼, 태조 대부터 광종 대까지의 혼란스러운 정국으로 인해 정책상 우선 순위에서 배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6] 《遼史》 권38 지리2 동경도(東京道) 영주(寧州)와 귀주(歸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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