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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경(신라)

고려 건국설화의 등장인물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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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경
강충의 어머니(전처) | 평나산신(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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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 왕건 왕식렴
아랫첨자는 배우자를 나타낸다.
보라색 바탕은 혈연 관계가 없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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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장군
강호경
康虎景
자칭 성골장군(聖骨將軍)[1]
별호 구룡산천왕(九龍山天王)[2][3]
본관 신천 강씨(信川 康氏)[4][5]
이름 호경(虎景)
아내 좌곡 여인[6], 구룡산 산신[7]
아들 강충(康忠)
손자 강보전(康寶甸)
강보육(康寶育)[8]
후손 강조(康兆)[9], 왕건[10], 왕식렴[11]
출신지 백두산(?)[12]
사당 호경사(虎景寺)
생몰 ? ~ ?

1. 개요2. 고려사 기록3. 고구려 유민4. 태조 왕건과의 관계5. 같이 보기

1. 개요

남북국시대통일신라에서 활동한 고구려 유민 출신의 호족. 두은점과 더불어 훗날 패서 호족의 원형이 되는 일대의 고구려계 토호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정화왕후의 증조부로 훗날 고려왕조를 개창하는 개성 왕씨 왕가의 조상, 신천 강씨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고려사》에 수록된 <고려세계>에 등장하는 설화적 인물이다.

2. 고려사 기록

《고려사》 <고려세계>가 인용한 《편년통록》의 설화에 따르면 호경의 고향은 알려진 바가 없고,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13]을 자처했으며 백두산에서 내려와 유람하다가 부소산(扶蘇山)[14] 좌곡(左谷)에 자리잡아 가정을 꾸렸다. 매우 부자였으나, 자식이 없었다.[15]

활을 잘 쏴 사냥을 자주 다녔는데 10명이서 평나산으로 사냥을 갔을 때, 굴 속에 들어 갔는데 웬 호랑이 한 마리가 동굴 앞에서 버티고 있었다. 관을 던져 호랑이가 무는 관의 주인을 밖으로 내보내 맞서 싸우도록 정한 뒤 관을 던지니 호경의 것을 물었다. 호경이 결국 굴 밖으로 나가니 범은 온데간데 없고 굴은 무너져 다른 아홉 명은 죽고 말았다.

이후 평나산에서 내려와 평나군(平那郡)에서 그들을 위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갑자기 여신이 등장해 난 과부인데 널 대왕으로 봉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그것을 수락, 산군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홉 명이 죽었으니 산 이름을 구룡산으로 바꿨다. 또한 호경사를 지어 호경을 기렸다. 이 호경사는 고려 말 목은 이색이 찾아와 참배할 정도로 인지도를 지녔다고 한다.

이후 여신과 같이 사라졌다. 그러나 본처가 그리워 밤마다 본처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다 인간 시절에 생기지 않던 아이가 생겨 아이 이름을 강충(康忠)이라 했다.
우봉군(牛峯郡)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우잠군(牛岑郡)【우령(牛嶺)이라고도 하고, 수지의(首知衣)라고도 한다.】으로,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1018)에 평주(平州)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문종(文宗) 16년(1062)에 내속(來屬)하였다. 예종(睿宗)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구룡산(九龍山)【국조(國祖) 성골장군(聖骨將軍)의 사당(祠堂)이 있는데 그래서 성거산(聖居山)이라고도 한다.】·박연(朴淵)【윗못[上淵]과 아랫못[下淵]이 있는데, 모두 깊이를 잴 수 없을 정도로 깊으며 가뭄이 들어 〈여기서〉 기우제를 지내면, 즉시 반응이 있는데 윗못의 가운데에는 반반한 바위가 있는데, 올라가서 〈주변을〉 살필 수 있다. 일찍이 문종이 그 위에 올라가자, 갑자기 비바람이 사납게 일어나 바위가 뒤흔들려서, 문종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이영간(李靈幹)이 〈왕을〉 수행[扈從]했는데, 용의 죄를 일일이 꾸짖는 글을 지어 연못에 던졌더니 용이 즉시 그 등을 드러내었고, 이를 곤장으로 때리니 윗못의 물이 모두 붉게 변하였다.】이 있다.
《고려사》 권56 지 권제10 <지리> 왕경 개성부 우봉군
이외에도 고려사 지리지 부분에 의하면 위와 같이 호경의 다른 명칭으로 국조(國祖)가 언급된다.

3. 고구려 유민

《고려사》의 《편년통록》 기록상 호경은 왕건 일가 중 최초로 송악에 자리잡은 인물이었다. 먼 후손인 왕륭, 왕건 대까지 패서 출신 호족들이 고구려계라는 정체성을 유지한 점, 《고려사》에 등장하는 당시 지명들이 고구려 때의 지명과 신라의 지명이 섞여 있는 점, 무엇보다 송악군 자체가 고구려의 옛 땅이라는 점을 보아 고구려계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스스로를 성골장군이라 한 것을 보면 신라에 이민을 시도하여 정착한 듯 하다.[16]

4. 태조 왕건과의 관계

《고려사》 《편년통록》은 왕건의 직계 족보가 당숙종작제건용건왕건 이라고 했다. 그럼 호경과는 무슨 관계인가하면 호경 → 강충 → 보육 → 진의 → 작제건 → 용건 → 왕건이다. 즉 호경은 왕건의 증조할머니 진의의 증조할아버지다. 족보가 이상하게 꼬여있는 이유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난 뒤, 자신의 조상들을 신적인 존재로 올려놓기 위해 조작했기 때문이다. 당장 호경이 평나산의 신이 되었다니, 대제국을 쇠락으로 이끈 미증유의 대란이었던 안사의 난으로 중국 서쪽 지방에서 이민족인 위구르까지 끌어들이며, 악전고투를 벌여야했던 당나라의 숙종이 왕건의 증조할아버지니 하는 것들은 믿기 힘들다.

5. 같이 보기



[1] 같은 고구려 유민이면서 각간을 자처한 두은점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고구려인들은 신라의 관직 혹은 품계를 받는 등 상당 부분 신라 문화의 영향을 받고있었다. 이처럼 고구려 유민사회에서 통용되던 여러 문화적 단층들이 혼재하는 당대의 복잡한 양상을 유추해볼 수 있다.[2] 이승휴의 《제왕운기》 기록.[3] 구룡산은 이전엔 평나산(平那山), 변나산(卞那山)이라 불렸고, 호경 이후에는 구룡산(九龍山), 현재는 성거산(聖居山)으로 불린다.[4] 해당 성본의 시조다.[5]고려사》에는 성이 나오지 않는다.[6] 이름 미상. 부소산 좌곡 출신으로, 인간 시절의 아내이자 강충의 친모.[7] 여신이다.[8] 왕건의 외고조부.[9] 직계 7대손.
시조 강호경(康虎景) → 2세 강충(康忠) → 3세 강보전(康寶甸) → 4세 강순산(康淳山) → 5세 강만루(康萬嶁) → 6세 강연창(康衍昌) → 7세 강태주(康泰周) → 8세 강조(康兆).
[10] 외6대손.
시조 강호경(康虎景) → 2세 강충(康忠) → 3세 강보육(康寶育) → 4세 강진의(康辰義) → 5세 의조 → 6세 왕륭(王隆) → 7세 왕건(王建)
[11] 외6대손.
시조 강호경(康虎景) → 2세 강충(康忠) → 3세 강보육(康寶育) → 4세 강진의(康辰義) → 5세 의조 → 6세 왕평달(王平達) → 7세 왕식렴(王式廉)
[12] 고구려 멸망 이후 백두산 혹은 그 일대에서 살던 고구려인이거나 발해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3] 신라 골품제성골의 영향을 받은 호칭일 가능성이 높다.[14] 개성시의 옛 이름.[15] 특이하게도 《편년통록》엔 호경 일가가 부자였단 서술이 매 인물마다 나온다. 후손 왕륭, 왕건 또한 송악 일대의 거물이었던 것을 보면 설화가 거짓이더라도 호경 일가가 부자였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16] 이 때문에 고구려 시절에도 그리 잘난 집안 후손이 아니었거나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몰락한 집안의 후손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재미있게도 정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고구려계 유민의 근거지였던 패서지역으로 이주한 신라계 호족 박지윤(朴遲胤)의 아버지 박적오(朴赤烏)는 고구려 관직에서 따온 칭호인 대모달읍장(大毛達邑長)을 자칭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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