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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유력 가문이다.2. 역사
왕씨 성을 가진 낙랑군 인물 또는 유민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들 모두가 일가 출신인지는 알 수 없다. 가계가 분명히 확인되는 계통으로는 전한~후한 시기의 염한현(䛁邯縣) 출신 왕씨들과 낙랑군 교치로 교군(僑郡)이 된 이후 오호십육국시대~남북조시대 북조의 귀족 가문인 수성현(遂城縣) 출신 왕씨가 있다.2.1. 시조
남북조시대 수성현 출신 왕씨들의 묘지명에 따르면 낙랑의 왕씨는 상나라(殷으로 표기되어 있다)에서 비롯됐으며 조선후에 봉해진 기자의 후손이라고 한다.한편 염한현 출신 왕씨의 시조는 기원전 2세기 중국 출신이다. 《후한서》 〈왕경 열전〉에 따르면 왕씨는 본래 낭야군 불기현[2] 출신인 왕중(王仲)에서 비롯됐다. 왕중은 제북왕이 반란을 일으키자 화를 피해 해동의 낙랑산으로 달아났고, 비로소 낙랑(염한현)에 왕씨들이 가문을 이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북왕의 반란이란 제북왕 유흥거가 한문제 시기인 기원전 177년 일으킨 반란을 가리키는 것일 테니 시기적으로 위만조선이 건국된 뒤에 이주해온 셈이다.
고고학계에서는 낙랑 왕씨가 중국계가 아니라 고조선계라 추정하고 있는데,[3] 왕씨 성이 한나라 때부터 중국에서 제법 흔한 편이었고[4] 낙랑군의 특성을 감안하면 고조선 토착계와 중국에서 이주했다 현지에 동화된 계통 모두 있었을 수도 있다.
2.2. 1~3세기
왕중의 8대손 왕굉(王閎)은 군삼로를 지냈는데, 경시제가 몰락한 뒤 태수를 살해하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한 토인(土人) 왕조(王調)를 배신하는 공을 세운다. 왕조를 가리키는 토인이라는 용어는 수성현 왕씨와 같은 고조선계 낙랑군 현지인을 뜻할 수도 있고, 염한현 왕씨같이 낙랑군에 정착해 토착화된 한족을 뜻할 수도 있다.왕굉의 아들 왕경은 광무제, 명제를 섬기며 수리 시설을 손봤으며, 그 뒤 1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도 왕씨와 관련된 매장문화재가 한반도 북부에서 다수 발견된다.
2.3. 4~6세기
313년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낙랑군이 정복되었다. 낙랑 사람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해 모용선비족의 모용외에게 귀부하고, 낙랑군은 요서로 옮겨졌다. 낙랑군의 왕씨들도 이 때 유민이 돼 요서로 이주했다. 6세기 북위에서 활동한 낙랑군 수성현 출신 왕씨들은 대부분이 이 시기 전연 사람인 의동삼사 무읍공(武邑公) 왕파(王波)의 후손이었다. 왕파의 손자는 산기상시 평서장군 급사황문시랑 진양후 왕예반(王禮班)이었고, 그 아들 고부급사중 하내태수/병주자사 박평남(慱平男) 왕정국(王定國)부터 북위에서 벼슬을 지냈다.왕정국의 증손자 환주치중 왕정과 그 동생 처사 왕기는 북위 말 사람이었다. 왕도민(王道岷)의 3녀로 원원평(元願平)에게 시집간 왕씨 부인과 그 동생 한씨 부인[5] 역시 왕정, 왕기 형제와 마찬가지로 왕파의 6세손이었다. 왕씨부인이 결혼한 원원평은 경목제 탁발황의 손자였고, 그 동생 한씨는 문성제의 증손자 원빈지(元斌之)와 결혼했으니 북위의 원씨(탁발씨) 황족과 깊은 관계를 맺은 귀족 가문임을 알 수 있다. 왕정 등과의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역시 낙랑군 수성현 출신으로 북위 말의 인물인 왕서(王舒)는 연나라 황족 출신으로 보이는 모용씨 부인과 결혼했다. 문성제의 황후 문명태후 풍씨는 그 출신을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낙랑 왕씨 어머니를 두고 있었다.
낙랑 왕씨는 서위를 세우는 우문씨와도 연을 맺었다. 우문굉의 처이자 서위의 추존 황제 우문태의 모친으로 명덕황후에 추존된 낙랑 왕씨 역시 왕파의 6세손이었다. 《주서》 〈왕맹 열전〉[6]에 따르면 왕씨의 조부는 북위의 황문시랑으로 병주자사 낙랑공에 추증된 왕진(王珍)이었고, 부친 왕비(王羆)[7]는 복파장군을 역임했다. 왕씨의 오빠 왕맹(王盟)은 538년 조청작(趙青雀)의 반란 때 공을 세워 낙랑공에 진봉되고 사성받는데, 척/탁(拓, 《주서》)·척왕/탁왕(拓王, 《원화성찬》[8], 《해동역사》[9])·발(拔, 《북사》) 등 기록마다 다르다.
0 | 파 | ||||||
1 | |||||||
2 | 예반(반) | ||||||
3 | 정국 | ||||||
4 | 당성 | 진 | |||||
5 | 광조 | 비 | 도민 | ||||
6 | 정 | 기 | 男[10] | 맹 | 女 | 女 | 女(한씨) |
한편 낙랑군 교치 당시 요서로 이주하지 않고 한반도 북부에 잔존하여 고구려에 동화된 이들도 있었는데, 거문고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재상 왕산악(王山岳)과 대승상을 지낸 왕고덕(王高德)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 고구려 멸망기에는 문헌상으로 유격장군 왕구루(王求婁)[11]와 삭방장군 왕건위(王虔威)[12]가 등장한다. 이웃나라 백제에도 왕인(王仁), 왕무(王茂), 왕진이(王辰爾), 왕유귀(王柳貴), 왕도량(王道良), 왕보손(王保孫), 왕변나(王辯那), 왕효린(王孝隣) 등 낙랑 왕씨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다수 기록되어 있어 낙랑 왕씨 출신임을 짐작케 한다.
2.4. 남북국시대 이후
고려 왕조인 개성 왕씨 가문이 현대에는 고구려 멸망 이후 송악(개성) 지역에 대대로 거주하던 낙랑 왕씨의 일파로 추측된다. 학계에서는 이를 확정하기에는 다소 조심스러운 경향이 있어도 실질적으로 낙랑 왕씨로 보고 있는 가운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낙랑 왕씨 가문은 패서 일대의 고구려 유민 집단 가운데 두씨(豆氏)[13], 한씨(韓氏)[14]와 더불어 과거 고구려의 지배층 가계로서 상당히 유력했을 것으로 보인다.[1] 논어에서 '은유삼인(殷有三仁)'이라고 한 기자와 미자, 비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2] 현 중국 산둥성 칭다오시에 위치해 있었다.[3]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한반도 토착 씨족이 중국에서 기원했다고 조작하는 사례가 있었다.[4] 현대에도 왕씨는 중국에서 가장 흔 한 성 중 하나이다.[5] 왕도민은 창려군 극성현 사람 한기린의 딸 한씨와 결혼했으니 어머니 성을 따른 것이다.[6] 《주서》 권20, 열전 제12.[7] 비슷한 시기에 한대 하남윤을 지낸 왕준의 후손으로 경조군 출신인 동명이인이 있다.[8] 당 원화 7년(812년)의 저서로 임보가 저술했다.[9] 조선 말의 저서로 실학자 한치윤과 한진서가 저술했다.[10]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왕맹 열전〉에 왕맹의 조카 왕현(王顯)을 소개할 때 '형의 아들'이라고만 했다.[11] 왕모중의 아버지.[12] 왕사례의 아버지.[13] 두은점의 가문.[14] 단주 한씨. 한언공의 가계로, 마찬가지로 낙랑군 시절 이전부터 일대에 세거하고 있었던 고구려계 호족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