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사성(賜姓)이란 ‘성(姓)을 내린다(賜)’는 의미로, 동아시아권에서 공을 크게 세운 장수 등에게 왕이 성씨, 특히 '국성(國姓)'을 하사하는 제도였다.고구려, 조선처럼 국성 외에 별도의 성씨를 하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2. 역사
고구려 때부터 사성이 시작됐고 신라 때도 고구려 왕족 안승에게 신라식 성씨인 김씨 성을 내리는 등 사성이 종종 이뤄졌지만, 한국사에서 본격적으로 팍팍 내렸던 것은 후삼국시대 초창기의 고려였다.사성정책은 태조 왕건이 후삼국 시기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을 고려에 포섭하기 위해 그들에게 자신의 성이었던 개성 왕씨 혹은 아주 새로운 성씨를 내려주었던 정책을 일컫는 말이다.
당연히 허울좋은 왕 씨 성만 내려주고 땡이 아니다... 왕족에 버금가는 관직과 토지가 뒤따랐고 이에 감격한 호족들은 왕건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면서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이후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당연히 왕권이 안정되면서 왕족 혹은 종친이 기득권화 된 고려 중기 이후나 조선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들어진, 어디까지나 혼란의 시기였기에 가능했던 정책이었다. 훗날 고려가 망하고 조선 초기 왕씨 몰살 와중에 사성받았던 왕씨들은 대부분 왕씨를 받기 전 원래 성씨로 복성해서 탄압을 피했다.
고려 초기 이후에도 임진왜란 때의 김충선 등 혼란한 시대 위주로 가끔씩 행해졌다.[1]
이 사성정책과 관련된 야사가 있다. 이덕형이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접대할 때, 이여송은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란 것을 알고 이를 보고 근친상간이라 여겨 짐승만도 못한다고 하였다. 이를 본 이항복이 그 명나라 장수에게 원래 이덕형은 김씨 성이었는데 재주가 뛰어나 임금이 국성인 이씨 성을 하사하여 이덕형이 되었다고 뻥을 쳐서 무마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여송은 국성을 하사받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를 오해하여 박대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후 이덕형에게 더 예를 갖추어 대했다.[2]
3. 일본사의 경우, 차이점
일본의 경우, 사성정책의 본래 의도처럼 의미가 깊은 성씨를 새로 하사받는 형태는 흔하게 있었다.[3] 그러나 중앙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시행하기 보다는 다이묘 등의 개개인이 자의적으로 행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일본의 경우에는 전국시대에 접어들며 다이묘들끼리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다이묘들 간의 가문의 격을 측정하는 척도 중 하나가 조정의 관위가 되다 보니 그걸 얻으려고 했다. 문제는 이 시기쯤 되면 중앙정부는 완전히 무력화되어[4] 있어도 그래도 관위란 것은 이미 헤이안 시대부터 사실상 가문의 격에 따라 받는 자리가 되었다 보니 다이묘들도 자신의 가문을 위로 위로 올라가면 미나모토, 헤이지 등으로 올라간다고 자칭했다. 또 애초에 일본의 첫번째 막부를 연 것이 미나모토였기에 미나모토쯤 되면 격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인지 다시 일본을 통일시키고 안정시킨 에도 막부조차 조선을 상대로는 자신의 성을 미나모토로 칭했다.
4. 성을 하사받은 인물
4.1. 한국사
4.1.1. 고구려 왕조
- 성씨와 이름이 따로 불린 인물:
- 대소왕의 사촌동생 부여왕 → 낙씨(絡氏): 삼국사기 대무신왕 본기에 등장하는 인물.
- ? → 부정씨(負鼎氏): 삼국사기 대무신왕 본기에 등장하는 인물. 대무신왕이 부여정벌에 나섰을 때 마법의 솥과 함께 등장했다.
- 사물(沙勿) → 위씨(位氏): 삼국사기 유리명왕 본기에 등장하는 인물.
- ? → 우씨(羽氏): 삼국사기 유리명왕 본기에 등장하는 인물. 유리명왕의 딸과 결혼했다.
- 추발소 → 대실씨(大室氏): 삼국사기 대무신왕 본기에 등장하는 인물. 원 성씨는 추씨(鄒氏)로 보인다. 추발소의 이름을 부를 때 추 자를 떼서 부르고 있기 때문. 사성 직후 호동왕자의 사망과 모본왕의 태자 책봉이 이뤄진다는 점을 보면 대무신왕의 원비이자 모본왕의 어머니 가문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무골 → 중실씨(仲室氏): 동명성왕의 건국을 도와 사성받았다고 했지만 실제 사성시점은 대무신왕 치세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중실보다 격이 높은 것으로 보이는 대실씨가 대무신왕 시기에 사성되기 때문.
- 묵거 → 소실씨(少室氏): 동명성왕의 건국을 도와 사성받았다고 했지만 실제 사성시점은 대무신왕 치세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소실보다 격이 높은 것으로 보이는 대실씨가 대무신왕 시기에 사성되기 때문.
- 재사 → 극씨(克氏): 동명성왕의 건국을 도와 사성받았다고 했지만 실제 사성시점은 대무신왕 치세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왕족인 재사가 이 시기에 등장하기 때문.
- 성씨와 이름을 합쳐서 불린 인물:
4.1.2. 백제 왕조
4.1.3. 신라 왕조
- 성씨와 이름이 따로 불린 인물:
- 박혁거세를 추대해 신라를 건국한 경주 6촌[7]의 촌장 가문에게 유리 이사금 때에 각각 성씨를 내렸다. 이 6개 성씨는 현대 대한민국에도 주요 성씨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성씨의 대부분이[8] 6부촌장을 시조로 삼고 있다.
- 금산가리촌장 지타 → 배(성씨)
- 명활산고야촌장 호진 → 설(성씨)
- 무산대수촌장 구례마 → 손(성씨)
- 알천양산촌장 알평 → 이(성씨)
- 취산진지촌장 지백호 → 정(성씨)
- 돌산고허촌장 소벌도리 → 최(성씨)
- 안승 → 김씨(金氏)
4.1.4. 고려 왕조
- 성씨와 이름을 합쳐서 불린 인물:
4.1.5. 조선 왕조
4.2. 중국사
4.3. 베트남사
- 오준(Ngô Tuấn, 吳俊) → 이상걸(Lý Thường Kiệt, 李常傑)
[1] 사실 김충선, 박연 등의 사례는 이들의 성과 이름 자체가 조선의 것이 아니다 보니 조선식으로 다시 지어줄 필요가 있어서 행했던 것도 있다. 당장에 김충선은 그래도 한자문화권 국가인 일본 출신이라서 정 뭐하면 그걸로 성과 이름을 만들어 쓸수라도 있지 박연은 네덜란드 출신이었다.[2] 이덕형은 광주 이씨이고,이산해는 한산 이씨이다. 물론 본관이 같아야 근친상간으로 치지만, 중국에선 본관을 따지지 않고 같은 성씨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당연히 국성을 하사 받은 것도 아니다. 그냥 이항복이 조선과 명의 문화 차이까지 들어가는 기나긴 설명은 해주기 귀찮았는지 적당이 뻥쳐서 넘긴 거다. 당초에 상대가 무장이기도 하니 학문적 깊이 같은게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다.[3] 황족이 신적강하하여 미나모토 등의 씨를 받는 일 등[4] 에도 막부 초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고명아들, 우대신 자리에 있는 히데요리를 태정대신에 앉히려고 어머니인 요도도노가 기를 쓰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무리 관위가 유명무실해도 오다 노부나가님도 천하를 안정시키고도 태정대신 사양하고 우대신 자리를 받았는데 태정대신이 뉘집 개 이름인줄 아나" 라고 반응했다. 이에야스 말대로 관위가 아주 허울은 아닌데 유명무실할 정도로 중앙정부가 허수아비가 된 것이다... 실제로 일본 황실도 당시에는 유력 다이묘 가문 등과 혼인을 할 정도로 우대는 받아도 한번도 덴노가 실권을 쥐지는 못했다.[5] 백제의 국성 부여씨(扶餘氏)에서 갈라진 성씨이다. 인물론 귀실복신이 있다.[6] 백제 제후의 봉지였던 흑치 지역을 아예 성씨로 삼음. 인물론 흑치상지가 있다.[7] 이들은 본래 고조선 유민으로 고조선 멸망 후 경주시 지역으로 남하했다.[8] 이씨 등 중국에서 유입된 경로도 있는 경우는 예외.[9] 본인이 다시 국성을 반환했다. 문서 참조.[10] 원래 강릉 김씨였다는 추정이 있지만 정식 사서에는 아예 김씨였다는 기록도 없고 그냥 이름인 순식으로만 나온다.[11]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자 김주원 집안의 후손. 후에 고려가 멸망하자 그의 후손들은 강릉 김씨로 복성하게 된다.[12] 김알지계 신라 왕실의 후손[13] 경순왕계 신라 왕실의 후손[14] 항우의 숙부 항백의 본명.[15] 명의 부흥에 힘써 남명의 융무제에게 황성인 주씨를 하사받았다. 주씨 성을 실제로 쓰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그를 국성야(國姓爺)라고 불렀고, 서양에서는 국성야의 발음이 변한 콕싱가(Coxinga)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