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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증조부 흑치문대 · 조부 흑치덕현 · 아버지 흑치사차 아들 흑치준 · 딸 낙랑군부인 흑치씨 사위 물부순 | |
묘소 | 북망산 |
勿部珣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백제와 당나라의 인물. 일본계 백제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북송 대의 문집 《문원영화(文苑英華)》에 수록된 〈명요숭등북벌제(命姚崇等北伐制)〉#1#2라는 조서와 〈대당물부장군공덕기(大唐物部將軍功德記)〉#라는 금석문을 통해 그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이 밝혀지기 전까지 '순장군(珣將軍)'으로 알려져 있었다.2. 생애
물부순은 본래 동해(東海)의 한 가문 출신으로 선조 대대로 벼슬을 지내왔다고 한다. 나라가 망하기 전 고국을 떠나 당으로 망명했다.[1]당에 들어간 그는 흑치상지의 둘째 딸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흑치씨와 결혼해 첫째 물부흔(勿部昕), 둘째 물부간(勿部暕), 넷째 물부중용(勿部仲容) 등 4남 1녀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벼슬은 천병중군부사(天兵中軍副使) 및 우금오위대장군(右金吾衛大將軍)에 이르렀다고 한다.
706년 3월, 아내와 함께 천룡산 석굴로 향하여 친척들과 죽은 선황을 받들기 위해 삼세불상, 백복장엄상 및 여러 현인들의 조각상을 조성했다. 707년 8월에 공사를 마쳤고, 동년 10월 18일 곽겸광(郭謙光)에게 의뢰하여 석굴 조성을 기리는 〈대당물부장군공덕기〉가 새겨진 비석을 건립했다.
이후 714년 2월, 당 현종이 돌궐 묵철가한의 북정 침공에 맞서 병부상서 요숭 등에게 북벌을 명할 때 전봉총관(前鋒總管)에 임명되었다.
3. 일본계 백제인 설
2006년, 비석에서 마멸되어 판독되지 않던 성씨의 첫 글자가 《문원영화》와의 교차 검증을 통해 '勿'로 밝혀지면서 그가 '물부씨(勿部氏)'인 것이 확인되었다. 이에 그가 고대 일본의 성씨인 '모노노베씨(物部氏)' 출신일 가능성이 높아졌다.[2] 고대 일본에서 모노노베씨는 니기하야히노미코토(邇芸速日命)라는 신의 후예로 여겨진 유력한 대호족이었다. 김영관 박사는 이러한 점을 들어 물부순이 백제 유민이 아니라 백제부흥운동에 참전한 일본인으로, 포로가 되어 당으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3]또는 흑치준의 여동생[4]과 결혼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귀화한 일본계 백제인일 가능성도 있다. 물부순 외에도 성왕 시기의 모노노베씨로 관산성 전투에 참전한 시덕(施德) 모노노베노 마가무(物部 麻奇牟), 나솔(奈率) 모노노베노 요가타(物部 用奇多), 나솔(奈率) 모노노베노 가히(物部 奇非), 상부(上部) 나솔(奈率) 모노노베노 카쿠(物部 烏) 등이 백제의 관료로서 등장한다. 즉 모노노베씨는 꽤 오래 전부터 아예 백제에 눌러앉아 대를 이어온 귀화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부순은 이들과 혈연 관계인 것으로 보인다.
[1] 정황상 660년의 백제멸망전 또는 663년 백제부흥군이 몰락한 백강 전투로 인해 입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유는 하단 참조.[2] 만약 일본인이라면 본래 이름은 物部 珣(もののべの しゅん(모노노베노 슌) 혹은 もののべの たま(모노노베노 타마))일 것이다.[3] 참고로 모노노베씨는 소가씨와의 종교 분쟁 및 권력 다툼에서 밀려 일본에서 관직 진출에 어려움을 겪은 경우가 많아, 일부러 한반도의 전쟁에 참여한 뒤로도 복귀하지 않고 그대로 중국으로 귀화했을 가능성도 있다.[4] 흑치준이 676년생이니, 최소 677년 이후, 흑치상치가 사망한 689년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