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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13 10:42:13

사백



沙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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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4세기에 활동한 백제의 인물. 《일본서기》에 등장하며, 해석에 따라서 '사백개로(沙白蓋盧)'로 보기도 한다.

2. 기록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카가와케(鹿我別)를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구저(久氐) 등과 함께 군사를 정돈하여 바다를 건너가 탁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때 누군가가 "군사의 수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사백(沙白)과 개로(蓋盧)를 보내 군사를 증원해달라고 요청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곧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跪)[원주1]에게 명령하여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그 후 모두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南蠻)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 또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그때 비리(比利), 벽중(辟中), 포미(布彌), 지반(支半), 고사(古四)의 읍[2]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에 백제왕 부자와 아라타와케, 카가와케 등은 함께 의류촌(意流村)에 모였다.[원주2] 서로 보며 기뻐하며 예를 두텁게 하여 보냈다. 다만 치쿠마노 나가히코(千熊長彦)와 백제왕은 백제국에 가서 벽지산(辟支山)[4]에 올라 맹약하였다. 그리고 다시 고사산(古沙山)[5]에 올라서 함께 반석(磐石) 위에 앉았다. 그때 백제왕이 "만일 풀을 깔아서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한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 갈 것 같아 두렵다. 따라서 반석에 앉아서 맹약하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써 지금부터는 천추만세에 끊임없이 항상 서번(西蕃)이라 칭하며 해마다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는 치쿠마노 나가히코를 데리고 백제의 도읍에 이르러 더욱 두터이 예우하고 구저 등을 딸려서 보냈다.
일본서기》 9권 진구황후 섭정 49년[6] 3월

[원주1] 이 두 사람의 성(姓)은 알 수 없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2]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의 4읍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나, 《삼국지》에서 마한 54국을 열거할 때 '벽비리국 - 불미국 - 지반국 - 구소국'의 순서를 따랐음을 고려한다면 읍이 5개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한편 일각에서는 고사읍(古四邑) 부분을 지명이 아닌 "옛 4개의 읍"으로 풀이하여 비리, 벽중, 포미, 지반의 4읍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삼국사기》에 고사주(古四州)라는 지명이 기록되었음을 고려하면 고사읍 역시 지명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원주2] 지금은 주류수기(州流須祇)라고 한다.[4] 앞서 소개된 벽중읍(辟中邑), 즉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에 위치한 산으로 추정된다.[5] 앞서 소개된 고사읍(古四邑), 즉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에 위치한 산으로 추정된다.[6] 《일본서기》 기년 상으로는 서기 249년이다. 물론 근초고왕과 왕자 귀수가 등장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실제 연대는 이주갑인상을 적용한 서기 369년으로 추정된다.